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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국 문학의 치열함과 높은 품격, 우아함과 섬세함을 전 세계 앞에 드러낸 한강 작가의 한림원 강연 중의 한 표현이 지금 오늘 우리 세월을 너무나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작가의 우리 시대에 대한 탁월한 통찰력과 예지력에 큰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찌 그리 몰상식하고 저급한지요? 동시에 폭력적이고 잔인한지요?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리 뻔뻔한지요? 후안무치하고 적반하장인지요?
자신들이 매일 자행하고 있는 일상적 폭력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반인륜적인 것인지? 자신들이 지금 추종하고 맹신하고 있는 대상들이 그릇되고, 얼마나 무모하고 무가치한 것인지? 제발 빨리 깨닫고, 그 끔찍한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요즘입니다.
오늘 복음에도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고, 오랜 장애로부터 해방된 동료 인간을 향해 축하의 박수를 쳐주고, 함께 기쁨을 나누어도 부족할 텐데...
치유자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오히려 그 잘난 안식일 규정을 들이대며 그분을 고발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름 율법을 오래 전공한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머릿 속에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에 대한 연민의 마음은 단1도 없었습니다.그저 율법 규정을 들이대며 예수님을 죽음의 올가미에 옭아매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비인간적인 모습 앞에 분노하신 예수님께서는 노기 띤 표정, 슬픈 얼굴로 외치셨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 3-4)
세상 구리고 사악한 고발자들의 모습과 요즘 우리 모두의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드높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절묘하게 교차되고 있습니다.
법꾸라지라는 표현이 딱 맞습니다. 법을 공부했다면, 그 법을 정의와 공정한 판결을 위해 사용해야 마땅한데, 어떻게든 자신과 가족의 비리를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합니다. 어떻게든 요리조리 피해가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이 슬프고 사악한 시대지만 일상은 지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한강 작가의 표현대로 동시에 이 세계는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금수만도 못한 존재들이 널려있지만, 동시에 존재 자체로 기쁨과 위로를 선사하는 천사 같은 존재들도 수두룩합니다.
이 소중한 조국 우리 대한민국이 다시는 독재자나 폭도들의 먹잇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그 야심한 밤, 그 강추위를 뚫고 국회로 달려가 온몸으로 맞선 꽃같은 사람들, 그분들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존재들이시며 길이길이 감사드려야 할 분들입니다.
끝끝내 분위기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마음이 오그라 들대로 오그라든 사람들 예수님의 오늘 말씀을 마음에 새겨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손을 뻗어라.”(마르 3,5)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안식일의 의미: "졸지 마! 세상은 호구야!">
복음: 마르코 3,1-6
오늘 복음도 안식일 법의 의미에 대한 연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안식은 평화입니다. 평화를 주는 이는 부모이고 창조자입니다. 불안을 주는 부모는 자녀를 사회에 부적응하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은 그 평화로서 자녀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안식일에 회당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습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자신은 능력이 없어서 세상에 나갈 용기도 낼 수 없다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중앙으로 부르십니다. “네가 주인공이야. 쫄지 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돈 많고 높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을 어기시는지만 살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들이 호구라는 사실을 보여주셔야 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은 이 단순한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용기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손을 뻗어라.” 하시고 그는 당당히 어깨를 펴고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십니다. 당신이 먼저 세상을 이기지 못하면 자녀에게 평화를 줄 수 없음을. 죽음을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하면 자녀에게 안식을 줄 수 있는 부모가 될 수 없습니다.
‘금쪽이’에 은둔형 외톨이가 나옵니다. 엄마가 음주운전 피해자로 사망하자 아들은 잘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말도 안 하고 컴퓨터만 합니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컴퓨터 사용을 제한하자 아들은 울면서 이렇게 소리 지릅니다.
“제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게 훨씬 쉬울 테니까요! 진짜 너무나도 살기 힘든데…. 제 인생에서! 제 가정에서! 진짜 하루빨리 떠나고 싶은 제 가정에서! 인생에서! (컴퓨터가) 유일하게 살길을 만들어주고 있다고요! 유일하게….”
아빠는 왜 아들에게 용기를 줄 수 없었을까요? 아빠조차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엄마 옷장을 열어놓고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애들 좀 지켜줘. 내가 더 열심히 할게. 그리고 조금만 기다려, 내가 갈게…. 당신은 못 와도 내가 갈 수 있으니까 갈게. 가서 또 잔소리해 줘. 너무 그립다. 미안해.”
아빠가 이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인데,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날 수 있을까요? 부모는 자녀를 위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크리스 가드너란 자수성가한 한 인물을 그렸습니다. 그는 1954년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태어나 가난, 가정 폭력, 위탁 양육으로 얼룩진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가드너는 유명 중개 회사에 무급 인턴십을 시작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노숙자가 되어 어린 아들과 함께 보호소와 지하철역 공중화장실에서 살면서 경력을 쌓았습니다.
마침내 가드너의 인내심은 결실을 보았고 결국 Series 7 시험에 합격하여 정규 주식 중개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1987년 자신의 중개 회사인 Gardner Rich & Co.를 설립하여 재정적 독립을 달성했습니다. 수천억을 번 가드너는 자신도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엄마도 없는 아이에게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세상을 이겨야 했습니다. 그는 아직 노숙하면서도 자식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절대로 누군가가 네게 무언가를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두지 마라. 나조차도 마찬가지야. 알겠니? 네게 꿈이 있다면, 그것을 지켜야 해. 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할 수 없으니까 네게도 못한다고 말하고 싶어 해.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가서 그걸 가져. 끝이야. 가자.”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라도 세상이 주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어야 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어깨를 감싸며 손을 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에 대한 믿음은 이런 안식의 참 의미를 살게 합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르 3,1-6: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다시 회당으로 가신다. 회당 한쪽에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고(1절), 사람들은 예수께서 고쳐주시면 고발하려고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2절).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부르시어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3절) 하신다. 그는 손이 오그라들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은 정신이 오그라들었다. 그들은 그분을 바라보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주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4절). 생명을 위해서라면 예외적으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람이 우물에 빠졌을 경우 밖으로 끌어내어도 괜찮았고(마태 12,11), 소나 나귀도 그러하였다. 이처럼 율법은 구원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허용했고, 유대인은 안식일에도 음식을 장만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지신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4절)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의를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탄식하시면서 노기에 가득 차 그들을 둘러보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면서 성하게 해주셨다.(5절). 그리하여 예수님의 처사를 비난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모의하여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6절).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인간의 죽은 행동의 상징이다.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사람들과 손을 잡고 예수님을 처치할 모의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창조하는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그라든 손끼리 서로 잡았다. 오그라든 손끼리 잡았으니 창조의 손을 없애는 결과를, 죽은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어떠한 손을 잡고 살아가는 신앙인인가? 내 손도 오그라들었는데 내가 잡은 다른 손은 나의 손을 펴줄 수 있고 창조하는 생명을 주는 손인가? 아니면 창조하는 손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낡은 이데올로기의 권좌에 있는 손인가? 우리도 많은 경우에 우리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오그라든 손이 된 줄도 모르고 그 손으로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창조하고 생명을 주는 주님의 손을 잡아야 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체코 출신의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라는 책은 아주 인상 깊습니다. 주인공은 체코 공산 정권 시절, 전도유망한 대학생입니다. 그는 방학 중에 여자 친구와의 연애 사업을 진전시켜 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여자 친구는 공산당 교육에 참여해 버립니다. 더군다나 여자 친구가 공산당 교육이 너무 기대되고 신난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에 짜증이 난 주인공 루디빅은 곧바로 농담이 섞인 엽서를 아래와 같이 보내지요.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그러나 이 엽서는 공산당을 비판한 것이 되어 대학교에서 쫓겨나고 강제노동수용소에서 15년을 지내게 됩니다. 사실 가장 믿었던 친구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당에서 쫓겨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요. 친구에 대한 복수와 저주를 계속 하면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됩니다.
15년 뒤, 수용소 출소 후에 곧바로 복수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복수의 대상인 친구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복수하려던 대상은 과거이고 자기 환상으로만 존재함을 깨닫게 되지요. 즉, 현재 시점에서 진정한 복수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말, 행동은 언제나 과거일 뿐입니다. 현재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자유로워지기 위해 현재를 올바로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모두 현재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에 매이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오늘도 안식일 논쟁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만 하고 있지요. 안식일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안식일 법에 매여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 목숨을 구하는 것, 죽이는 것 등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과거에 매여서 예수님을 고발할 생각만 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더 확장되어서 바리사이들은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에 있습니다. 즉, 좋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도 궁극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에 맞춰 있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느님의 뜻은 현재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과거에 매이고, 미래를 걱정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외면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지 마라.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바로 인생이기 때문이다(벤저민 프랭클린).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손을 뻗어라.”(마르 3,5)
우리의 손이
영혼의 병으로
깊이 상심하여
오그라들지 않도록
늘
가난한 이들을 향해
뻗어 있어야 한다네.
완고함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오그라들게 하지만
자비는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아직도 제 자신이
오그라든 손을 내밀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채 아픔과 슬픔,
어두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굳어버린 완고한 마음.
딱딱하게 얼어붙은 마음.
이 마음은 스스로의 비참함을 보지 않으려는
오만함에서 자라났기에
예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없습니다.
자신을 방 안에 가둬두고 있으면
밖의 따뜻한 봄 햇살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따뜻한 봄 햇살에
나를 온전히 맡길 수 있을 때
우리는 얼었던 우리의 마음이 해동이 되고,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이 깨질 것입니다.
내 자신이 비겁하고 교활한 모습으로
군중 속에 숨어 있는 듯합니다.
완고함으로 무장하고
타인을 판단하고 단죄하며
더욱 더 우리 자신을
구원과 먼 삶을 살게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손을 뻗어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7,1-3.15-17
형제 여러분,
1 멜키체덱은 “살렘 임금”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로서,
“여러 임금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에게 축복하였습니다.”
2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3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15 멜키체덱과 닮은 다른 사제께서 나오시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16 그분께서는 육적인 혈통과 관련된 율법 규정이 아니라,
불멸하는 생명의 힘에 따라 사제가 되셨습니다.
17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 하고
성경에서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안식일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2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3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5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6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