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여름. 전북 익산시 낭산면 내산마을 뒷산에 있는 매국노 이완용(1858~1926)의 묘가 그의 증손자에 의해 파헤쳐졌다. 매국노의 유골은 장암천 냇가에서 불태워져 물고기 밥이 되고 말았다. 살아서는 친일 앞잡이로 나라를 팔아 호강하고, 죽어서는 고종황제 장례보다 더 성대했던 일제 주구(走狗)의 최후였다. 이완용 증손자는 ‘오래 둘수록 치욕만 남는다’며 증조할아버지 흔적을 말살시켜 버렸다.
이런 이완용과 견줘 조금도 뒤지지 않는 민족 반역자 수괴가 여간첩 배정자(裵貞子·1870~1951·사진)다.
인간 배정자는 82세를 살았다. 어찌 이 땅에 태어나 적국을 위해 좋은 일만 골라하며 호의호식하다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죽어갈 수 있는가. 6·25전쟁 당시 죽어 행방이 묘연한 그의 무덤 소재가 밝혀지면 결코 무사치 못할 것이다.
역사의 교훈이란 반드시 입신양명하여 출세한 사람에게서만 얻어지는 게 아니다. 온갖 패악질로 민생을 그르친 인간에게서도 그 행위를 본받지 않으면 오히려 역설적 교훈이 될 수도 있다. 배정자가 저지른 조국에 대한 배신행각은 그 열거만으로도 분노한다. 그녀의 추악한 과거는 해방된 조국의 친일 인명사전에 굵은 선으로 그어져 더욱 큰 저주를 당하고 있다.
배정자의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대구 감영에서 역모죄로 처형되자 어머니와 함께 죄적(罪籍)에 올라 관노가 됐다. 충격으로 눈 먼 어머니를 따라 전국을 유랑걸식하다 관기가 됐고 13세 때는 여승으로 입산해 3년 동안 절간에 몸을 의탁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수양딸 돼
고종 22년(1885) 그에게도 인생역전의 기회가 왔다. 아버지 친구였던 밀양부사 정병하가 일본인 무역상 마츠오를 통해 일본 밀항 길을 주선해 준 것이다. 이때 배정자의 조선에 대한 감정은 좌절·설움·배신·원망뿐이었다. 백척간두의 절해고도에 혈혈단신으로 팽개쳐진 그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 궁하면 통하게 되고 재수 좋으면 두엄자리에서도 꿩을 잡는다 했다. 배정자가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일본에 도망쳐 온 안경수와 김옥균을 만나게 된 것이다. 셋의 조국에 대한 악감정은 여지없이 일치했다. 2년 후 김옥균이 배정자를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1841~1909)에게 소개해 그의 수양딸이 되게 했다.
47세의 일본 정계 거물 이토는 18세의 조선 여인 배정자에게 함몰됐다. 수양딸로 맞이한 그녀에게 조선 이름 ‘배정자’를 버리게 하고 일본 이름 ‘다야마사다코(田山貞子)’로 개명해 주었다. 타고 난 절세미모와 현란한 화술로 이토를 녹여 낸 그녀는 곧바로 일본 사교계의 여걸로 떠올랐다. 상전벽해(桑田碧海)로 처지가 바뀌어 일본에 망명 온 조선의 친일파들이 사다코 도움 없이 큰일을 도모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토의 속셈은 딴 데 있었다. 수양딸 겸 정부 배정자에게 상류사회의 고급 일본어를 가르치면서 여간첩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승마·수영·사격은 물론 변장술에 이르기까지 완벽에 가까운 국제 신여성으로 개조시킨 것이다. 그리고는 ‘대일본제국’의 명령에 목숨 바쳐 충성할 것을 서약 받았다. 가난이 한이었고 권력이 원수였던 배정자도 마다할게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밀약을 조선에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고종 31년(1894) 배정자가 이토의 통역관이 돼 금의환국했다. 이 해는 일본에 의한 갑오개혁 강행으로 단발령이 내려지는 등 일본군의 한민족 탄압이 본격 가동된 시기다. 이런 줄도 모르고 43세의 조선임금 고종은 25세의 젊은 배정자에게 반했다. 어느 새 그녀는 고종의 큰 신임을 얻어 궁궐을 무상출입하게 됐고 국내 친일파는 사다코의 신세를 지게 됐다.
이후 배정자가 일제 밀정의 앞잡이로 국가와 민족 앞에 저지른 범죄는 필설로 운위하기가 부끄럽다. 이토를 도와 일본의 한국 병탄에 결정적 공을 세웠고 국권피탈 뒤에는 일본·만주·중국과 국내에서 독립투사 체포와 우국지사 밀고에 신명을 바쳤다.
그녀의 정보탈취 능력은 놀라웠다. 러일전쟁(1904~1905) 직전 러시아는 조선에서의 우위권 확보를 위해 고종의 평양 피신과 블라디보스토크의 천거(遷居)까지 계획한 적이 있다. 이 역시 배정자가 정보를 미리 빼내 일본 공사관에 전달, 시행을 무산시켰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는 봉천총사령관 촉탁이 돼 군사스파이로 암약, 마적단 포섭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동북의 호랑이’로 일컫던 중국의 장작림까지도 한때 그녀의 수중에서 놀아났다.
막강권력 행사한 `흑치마'
이런 배정자에게도 시련이 있었다. 광무 9년(1905) 이토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정사건으로 절영도에 유배됐으나 그해 을사늑약 체결로 이토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부임하며 곧 풀려났다. 이후 배정자는 ‘흑치마’라는 별명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세했고 그녀가 거친 관직만도 헤아릴 수가 없다. ▲조선 주둔 일본군 헌병대 조선인 촉탁 ▲일본제국 외무부 공무원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직원 ▲총독부 경무국 촉탁 외에도 수없이 많다.
일본 총독부는 1927년 그녀가 은퇴한 후에도 은급을 지급하며 노후를 보살폈다. 일제 말기에는 일본 민간업자와 결탁해 한국 여성을 일본군 위안부로 송출,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조선 여성 100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남양군도에 억지로 끌고 가 성 노리개를 강요한 것이다.
배정자는 신념이 아닌 본능으로 평생을 산 조선의 ‘마타하리’다. 그녀는 연령·국적을 불문한 남성 편력으로 조국의 명예를 더럽혔다. ▲친일 군인 전제식 ▲조선어교사 현영훈 ▲현영훈 후배 박영철 ▲일본인 은행원 오하시 ▲최모 전라도 갑부, 조모 대구 부호 2세 ▲중국 마적 두목 등이 그녀와 결혼했다. 57세 때는 25세의 일본 순사와 간통해 세간을 경악시켰다.
친일 스파이 광복 후 성북동 기거
배정자는 일본의 조선 통치가 영원할 줄 알았다. 이래서 그녀에게는 1945년 조국 해방이 저주였다. 그녀는 일찍이 간첩교육을 받을 때 습득한 변장술로 재빨리 변신해 서울 성북동에 숨어 살았다. 성북동이 어떤 곳인가. 경복궁의 좌청룡에 해당하며 북악산의 정기가 활기차게 내리뻗는 명당혈지다.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를 가르는 정점의 서울도성(사적 제10호)에 올라서면 배정자가 살았을 성북동이 한눈에 조망된다. 현재도 강북 부호들이 모여 사는 부자 동네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등지고 북향(오좌자향)해 살았다는 심우장(서울시기념물 제7호)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배정자, 그녀는 조국을 위해 잘한 일이 단 하나도 없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그녀는 구속됐으나 정치적 이유로 위원회가 해산되면서 곧 석방됐다.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인명사전 등에 친일분자로 등재돼 있으나 정작 그녀는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했다. 그러나 천년이 간들 배정자란 이름이 민족의 마음자리에서 지워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