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어린이 몇 명이 정원에서 꽃씨를 열심히 심고 그 꽃씨가 잘 자라도록 물을 정성껏 뿌려 주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어린이들은 집 안 창문가로 달려가서 정원에 꽃이 피어있는지 살펴보았지요. 어린이들은 꽃씨를 심으면 꽃씨가 밤사이에 자라서 꽃이 피리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꽃씨를 심으면 곧바로 자라나 꽃을 피울 수가 있을까요? 어린이들의 기대와는 달리 심은 꽃씨는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대단히 실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린이들은 꽃씨를 심고 물을 정성껏 뿌리면서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꽃이 핀다는 사실을 모르고 너무 성급하게 결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대대로 되지 않자 실망해서 심어 놓은 꽃씨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요.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했던 이 꽃씨는 싹도 피워 보지 못하고 시들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급한 기대로 인해 인내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꼬집는 예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내 행동에 대해서 곧바로 좋은 결과가 나오길 우리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꽃이 피지 않는 것처럼 좋은 결과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커다란 욕심이며 착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주님의 능력이라면 하룻밤 사이에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전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섣부른 판단과 욕심을 가지고 서둘러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주님과 멀어지면서,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권능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의 치유라는 효과를 곧바로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기뻤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나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그렇게 노력했습니다. 분명히 손만 대어도 치유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조차도 꺼려합니다. 각종 핑계를 대면서 오히려 주님 곁을 떠나려고 하지요. 바빠서요, 능력이 없어서요,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이 많잖아요……. 등등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각종 핑계를 대며 주님 곁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려는 나의 노력들을 점검해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노력이 있어야 주님의 은총과 사랑도 곧바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 그리고 말없는 행동에 의해 혼과 혼이 마주친다(법정).

함께하는 여정
-정희완 신부-
살면 살수록 세상 일이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고 대부분 다 사람들과
더불어서 해야 하는 일이란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당신의 공적 생활을 시작하시며 첫 번째로 하신 일이
당신과 더불어 하느님의 일을 함께할 동반자로 제자들을 뽑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걸어갈 사람들,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증언해 줄 사람들,
그리고 당신의 뒤를 이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한 일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아 세우신 일은 바로
사람들과 더불어 당신의 일을 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제자들과 함께한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만 특별히 가르침을 주는 내밀한 친밀성을
드러내기도 하셨고, 또 제자들의 오해와 배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그 안에 내밀성을 지니기도 하고 또 배신과
오해의 곡절을 겪기도 합니다. 진정한 관계는 단순히 한순간의 사건을
통해서가 아니라, 즉 첫눈에 반해 즉흥적으로 엮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여정 안에서 여러 과정을 통해 형성됩니다. 좋은 관계, 참다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즉, 서로 몸으로
함께하는 과정과, 관계를 맺은 쌍방 간의 책임과 의무가 요구됩니다.

힘의 법칙
-김찬선신부-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 가운데서 12 사도를 뽑으시고
산 위에서 내려오시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예수님에게서 치유의 힘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치유를 위해 내뿜는 힘도 대단하셨지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도 대단하셨습니다.
내뿜는 힘이 대단하셨기에 끌어들이는 힘도 대단하셨겠지만
아무튼 힘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리 대단한 힘을 지니시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힘을 내려 해도 금방 지치고 힘이 나지 않는데,
우리는 인간이기에 선천적으로 힘이 없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기에 저절로 힘이 대단하신 것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오늘 복음의 앞부분을 보면
산위의 기도에서 그 힘을 얻으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 산은 어떤 곳입니까?
하느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사람들을 만나느라 방전된 전기를 다시 충전하는 곳입니다.
악령들과 씨름하기 위한 힘을 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곳입니다.
하느님을 호흡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과 만나기 위해 심호흡을 하는 곳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고
이렇게 심호흡을 한 다음 이제 세상으로 돌아오십니다.
그러나 내려오시자마자 사람들은 몰려듭니다.
이렇게 몰려들면 이 사람들에 의해 얼마나 시달리시겠습니까?
이들과 씨름하다 곧 기운이 바닥나겠지요?
우리 같으면 그럴 거 같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충전을 받지 않고 씨름을 하면 바닥나겠지만
하느님으로부터 충전을 받으며 씨름을 하면 힘이 더 생깁니다.
이는 마치 영양 섭취를 충분히 하지 않고
과도한 일이나 운동을 하면 지치고 힘이 바닥나지만
적절한 영양 섭취를 하면서 운동을 하면
근육에 힘이 더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주 저에게 힘들어 죽겠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러면 제가 말해 줍니다.
힘들어야 힘이 들어오고 힘이 들어와야 힘을 낼 수 있다고 말입니다.
힘들다는 말은 힘+들어오다, 즉 “힘”과 “들어오다”의 합성어이고
힘이 들어온다는 말의 준말입니다.
힘들다고 턱걸이를 하지 않으면 알통에 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로서 하느님 사랑을 받아 힘을 얻습니다.
이 하느님 사랑은 사람들을 위해 써야지만 그 힘이 커집니다.
마치 물을 받아들여 가두기만 하면 썩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물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듯이,
그래서 흘러가게 해야지 썩지 않고 새로운 물을 받을 수 있듯이
기도로 하느님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이웃과 나눠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고 그래서 힘들지만
하느님 사랑의 물줄기에서 힘을 얻기만 하면
그 힘든 사랑이 우리의 사랑을 성장케 하고
우리 사랑의 힘을 더욱 강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 사랑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둘 중의 하나이거나 둘 다입니다.
기도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힘을 받지 않거나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거나.

전쟁터에서 치열한 격전을 치루고 막사로 돌아온 해병은 허리에 찬 수통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글쎄 수통에 무려 다섯 군데나 탄환에 맞은 흔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빗발치는 총알이 해병의 머리 위로, 옆으로, 겨드랑이 사이로, 가랑이 사이로, 맹렬이 스쳤지만 정작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하고, 대신 수통만이 탄환을 맞은 것입니다.
이렇게 무사한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단순히 운이 좋아서일까요? 바로 주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총알이 날라 오는 것을 볼 수만 있다면, 스스로 탄환을 피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그 누구도 날아오는 총알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주님의 보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준다는 굳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예수님께서는 깜짝 놀랄만한 기적으로 응답해 주셨지요. 바로 이러한 믿음이 지금 우리들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믿음은 한 없이 부족합니다. 아니 엉뚱한 믿음으로 인해서 주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할 때가 참으로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 고장에 폭우가 쏟아져 그 지역이 물바다가 되고 말았답니다. 독실한 신자였던 어떤 형제님께서는 비를 피해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때 마침 보트에 탄 사람이 오더니 이 형제님께 위험하니 빨리 타라고 했습니다. 이에 형제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하느님께서 돌봐주실 것입니다.”
수위가 계속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또 다른 사람이 보트를 타고 지나가다가 이 형제님을 보고는 타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형제님은 하느님께서 돌봐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침내 수위가 너무 높아져서 이 형제님은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천국에 가서 하느님을 만나자 이 형제님이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돌봐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이에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두 번이나 보트를 보내줬잖아. 뭘 더 바랐던 거야?”
맞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형제님을 돌보는데 최선을 다하셨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살피기보다는 내 뜻을 내세워서 하느님의 돌보심을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을 제외한 예수님의 열 한 제자들을 떠올려 봅니다. 그들 모두 한없이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뜻을 내세우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내세우는데 최선을 다했기에, 주님을 끝까지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뜻을 내세우는데 최선을 다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주님께서 마련하신 행복의 길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주님의 돌보심에 감사하는 기도를 바칩시다.

기도하시는 예수님
-서북원 신부-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예를 들어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나
하느님의 일을 하실 때 밤새 기도하십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 왜 기도를 하실까요? 사제로서 가장으로서
아내로서 부모로서 회사 상사로서 지도자로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얼마나 기도하고 결정하는지요?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겠다고
항상 다짐하면서도 결정의 순간에 기도하지 않고 그냥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마는 것은 아닌지요? 많은 경우 기도하지 않고 결정했기에 아픔으로
다가오는 결과들을 맞이한 적은 없었습니까? 밤새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신앙인 역시 기도를 일상화해야 합니다. 사실 아직도 많은 신자들은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로지 주일 미사에 참례하지
않은 것만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죄는 하느님과 갈라지는 모든 상태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분명 하느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인에게 기도는 하느님과 멀어지지
않도록 묶어주는 끈입니다. 온 마음을 기울이고 정성을 다해 기도할 때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을 기다리는 군중
-이종진 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기 전 밤을 새워 기도하셨는데, 그만큼 ‘사도들’의 직무가 중요했음을 말해 준다. 그들의 직무는 왜 중요한가? 바로 그들을 기다리는 ‘군중’, 곧 ‘길 잃은 양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도들의 직무와 권위가 존중받는 것은 이들의 손길과 발걸음이 미치고 있는 이름 없는 군중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군중에게 파견되고 있는 사도들의 수는 넉넉한가?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선정하시고 나서도 여전히 ‘목자 없는 양들처럼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수확할 밭의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달라는 청을 하신 바 있다. 그리고 이런 당부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타당한 것처럼 보인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신학전문대학원에는 연륜도 지긋하고 덕망도 높은 어른들이 수도자나 젊은 학생들과 함께 열심히 신학을 배우고 있다. 이분들의 신앙의 열정과 진지함을 지켜보면서 마음속으로 ‘이런 분들에게 교회가 어떤 방식으로든 사목자의 권위를 부여하고 수확할 밭의 일꾼으로 파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이러한 시도에서 생기는 부작용이나 교회 내적 진통을 미리 염려하면서 ‘평신도 사도’라는 개념에 난색을 표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사실상 평신도 사도들에 의해서 시작되지 않았는가? 충분한 연륜과 경험, 인간적 재능과 신앙의 덕목을 두루 갖춘 분들이 하느님을 갈망하는 군중에게 다가가 예수님의 역할을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이러한 비전은 다른 가상적인 어려움을 이겨낼 만큼 무게 있게 느껴진다. ‘사도들을 기다리는 군중’을 먼저 생각한다면, 밤을 새우고 숙고하신 예수님처럼 우리 교회도 더 많은 사도들을 뽑을 방도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양승국신부-
<깊고 심오한 삶의 이동>
한 평생 살아오시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축복 가운데 가장 큰 축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 가지가 머릿속에 떠오르겠지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좋은 재능들, 건강, 맺어주신 아름다운 인연들, 명예, 부, 사랑...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스승이 아닐까요?
참 인간의 길, 참 삶의 길이 무엇인지 지식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온 몸으로 보여주신 스승, 부족하고 덜떨어진 나를 더 넓은 바다로, 더 광대한 지평으로 친절하게 안내해주신 스승,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대상, 보다 소중한 영역들이 무엇인지 일깨워준 스승...
여러 축복 가운데 그런 스승을 만난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친히 제자로 불림 받은 열두 사도들은 행운아 중의 행운아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은 스승 중의 스승,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났습니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가서 만난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열두 사도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재수좋은 사람들, 가장 복 받은 사람들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의 삶, 한마디로 별 볼 일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무미건조했고 퀴퀴한 냄새가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답답한 새장 안에 갇혀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 인생, 꼬여도 어찌 이리 꼬였나?’ 하며 힘겨워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 기를 쓰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들의 삶을 한바탕 흔들어놓으십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일종의 혼동상태 앞에서 제자들은 어리둥절했겠지요. 그러나 제자들은 스승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시작된 ‘깊고 심오한 삶의 이동’을 통해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의미 있는 인생의 후반부로 나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전반전과는 사뭇 양상이 다른 인생의 오후입니다. 자기 자신과 세상, 하느님의 정렬 상태가 전반전과는 크게 달라진 인생의 후반부입니다.
복음서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굵직굵직한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 앞에 설 때 마다 일상을 탈출하십니다. 산에 오르시거나 광야로 들어가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는 ‘내각 구성’이란 중차대한 과제를 앞에 두고 밤까지 새워가며 하느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본위의 삶을 철저하게도 배척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따랐습니다.
들릴 듯 말 듯 한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 아리송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 기도하시면서 기다리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식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의 식별, 그를 위한 기다림, 그것은 길고도 지루한 작업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참으로 가슴 설레는 묵상작업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거짓 나를 찾아내고 진정한 나의 참모습을 찾아나가는 위대한 작업입니다
<독서> : 참 행복이신 주님
-경규봉 신부-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행복하기 위하여 땀 흘려 일하며 수고한다. 재물, 명예, 지위 등을 구하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작은 기쁨, 즐거움, 편안함, 안락함 등에 매달리는 것도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해야 할 일을 하기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의미와 가치, 보람을 추구하는 것도 행복을 위해서이다. 심지어 주변 사람들과 다투고 서로 속이며 죄를 짓는 것도 행복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러한 것들은 필요하다. 재물, 명예, 지위도 필요하고 편안함과 안락함, 기쁨과 즐거움도 필요하다. 이러한 것들이 없는 삶은 너무나 무미건조하고 우리를 피곤하게 하고 지치게 한다. 의미와 보람, 가치가 없이 일한다는 것은 죽을 맛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할지라도 사람은 꼭 행복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사람이 추구하는 것은 그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욕망은 우주를 다 갖는다 해도 채울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은 제 아무리 많은 것을 갖추어도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이 세상을 넘어선 절대자 하느님을 지향하기 때문에, 하느님이 채워주시지 않는 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는 까닭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감각적인 것을 통해 행복을 구하고, 감각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이교도 법정에서 해결하려는 자세를 꾸짖는다. 이러한 처신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합당하지 않다. 성도들은 종말의 하느님 백성으로서 온 세상을 심판할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교도의 법정에 고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편이 더 낫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하여 깨끗해지고 거룩하게 되었으며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얽매여 교우끼리 속이고 소송하며 세상의 쾌락에 빠지지 말도록 가르친다.
사도 바울로는 행복의 본질이신 주님을 다마스커스로 가는 노상에서 강하게 체험했다. 주님에 대한 체험은 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유대교인에서 그가 박해하던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된 것이다. 주님을 체험한 그는 주님 안에서 참 행복을 찾았다.
그리하여 그는 주님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을 위해서는 이 세상의 온갖 고통이나 시련도 참아 견딜 수 있었다. 이처럼 참 행복을 직접 체험한 사도 바울로는 고린토 교우들에게 세상 것에 얽매이지 말고 진정한 행복인 주님을 추구하도록 가르친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돌아가서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사고, 좋은 진주를 발견한 장사꾼이 돌아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듯이(마태 13,44-45) 하느님 나라를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팔아도 아깝지 않다.
순교자 성월인 9월,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을 얻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순교성인들을 본받아 우리도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세상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를 구하자.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작은 기쁨과 쾌락을 버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자...............◆

복음화와 세속화 사이에서
-김찬선신부-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自負心을 自慢心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부심이 교만하게 강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자부심은 자만심과 다르고
자부심은 강할수록 좋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자만심은 겸손이 결여된 착시적 자기 추켜세움이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우월감이라면
올바른 자부심은 겸손하지만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신분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수도자 신분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면 무엇 하러 수도자가 됩니까?
수도자라는 자부심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먹고살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일과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 일과 직업을 사랑하기에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자기 역할에 대한 자부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기 신앙에 대해 진정한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도 존중하지만 나의 신앙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을 가질 때 우리는 신앙에 충실하고,
우리 신앙에 충실할 때 우리는 세속적인 짓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 몸을 성령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온갖 탐욕과 쾌락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을 것이고
자기를 성령의 깨끗해진 그리스도의 정배로 생각하는 사람이
불륜을 저질 수는 없을 것이며
이웃을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성도로 생각하는 사람이
형제에게 불의한 일을 하지 않을뿐더러
형제끼리 문제가 생겼다 해도 세상 법정에 가지 않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꾸짖는 코린토의 성도들은
이런 면에서 진정한 자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고
그 당시 그리스의 타락한 문화에 풍덩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 문화 안에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신앙을 잘 토착화시키고 있는가?
우리 문화의 잘못된 면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복음으로 심판하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 문화 안에서
나의 세속화와 세상의 복음화 중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이것이 오늘 코린토 교회 신자들을 자문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새벽을 열며
제가 오늘 새벽 ‘단 1초의 말 한 마디’라는 글을 하나 보게 되었는데,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라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인생의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
“고마워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사람의 따뜻함을 알 때가 있다.
“힘내세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용기가 되살아날 때가 있다.
“축하해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이 짧은 말로, 행복이 넘치는 때가 있다.
“용서하세요.” 1초 동안 할 수 있는 짧은 말에서,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안녕.” 1초 동안 할 수 있는 짧은 말이, 일생 동안의 이별을 가져올 때가 있다.
1초라는 시간. ‘똑딱’하면 지나가는 시간이고, 그래서 분명히 짧은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1초라는 시간이 나의 인생을 뒤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가장 긴 시간도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짧은 글에서는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 우리가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지, 또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신중하셨는지를 오늘 복음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써 쉽게 선택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간단하게 선택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우리들은 과연 어떤 선택의 순간에서 얼마나 신중했으며,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하느님께 얼마나 기도했나요? 혹시 자기 자신만의 1초의 짧은 생각으로 내 이웃에게 많은 상처와 아픔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소홀하게 생각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 어떻게 완벽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자신의 그 부족한 부분을 기도를 통해서 채울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결정했으면서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중하게 생각했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한 면으로만 판단한 것이기 때문에 결코 신중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떠한 결정을 위해서는 밤을 새우시면서 까지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쉽게 말하고 쉽게 판단하는 우리들의 못된 행동들을 이제는 버렸으면 합니다. 그때 짧아 보이는 1초라는 시간도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정이나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주님께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조건 없는 부르심
-최혜영 수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뽑으실 때도 산에 가셔서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제자 공동체, 나아가 그리스도 교회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라는 말을 생전의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예수님의 직제자에게만 사용하였습니다.
갈릴래아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세리였던 마태오와 열혈당원인 시몬,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한 제자단에 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누구누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단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나를 불러주신 예수님 안에서 이웃의 약점이나 잘못을 받아줄 수 있는 관대함이 커지기를 기원해봅니다.

열세번째 사도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김경희 수녀-
언젠가 ‘열세번째 사도’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약하고 성격이 급했으며 용기가 없는 충실치 못한 제자였고, 야고보와 요한은 야심이 있었으며, 필립보는 맹목적이었다고 합니다. 필립보는 지성과 통찰력이 부족하여 자신이 직접 빠져보지 않고서는 영적 진리를 알아볼 수 없었고, 유다는 신뢰할 수 없었으며 하느님 나라보다 돈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태오는 사기꾼인데다 과거가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토마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냉소적이고, 열혈당원 시몬은 싸움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었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기는 했지만 감성이 섬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르톨로메오와 작은 야고보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바르톨로메오와 작은 야고보는 재능이 없었고, 세상에 기여할 바가 없었습니다. 수줍고 내성적이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한 동기, 지성과 통찰력, 성실함, 깨끗한 과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성숙함, 섬세한 감성, 옳은 것을 선포하는 용기, 기쁨과 낙천성, 특별한 재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따르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저를 부르신 23년 전을 기억해 봅니다. 수녀원에 입회할 때 제 모습은 너무나 여리고 미숙했으며 아무런 재능도 없었고 세상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주님께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한 발자국씩 걸음마부터 가르치셨으며 섬세한 사랑으로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 참 기쁨은 ‘제가 주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앎이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대한 앎의 밀도가 점점 깊어지면서 이제는 시편 138편으로 주님께 고백합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합니다. 신들 앞에서 당신께 찬미 노래 부릅니다.’ 아멘.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양승국신부-
<이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몇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늘 실패로 끝났습니다. 밤을 꼬박 샌다는 것, 그것도 기도하며 지샌다는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철야기도하시는 분들 정말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기간 동안 가끔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상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녁 무렵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십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아주 자주, 시도 때도 없이 철야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순간들은 당신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절대 절명의 순간, 삶의 분수령이 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당신의 제자들을 뽑기 위해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제자 선발에 큰 중요성을 두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뽑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우시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충만한 감사의 정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저를 위해서도 열렬히 기도해주실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내 성소, 비록 너무나 부족하고 부당해서 정말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철저하게도 부족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소중히 여겨주시니 다시금 힘을 냅니다. 내가 이토록 나약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고 걱정해주시니 모든 것 그분께 맡기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막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후배들과 살아가면서 늘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다 따라가는 그 휘황찬란한 길, ‘때깔 나는’ 길을 뒤로 하고 너무나 가파른 언덕길, 어찌 보면 너무나 팍팍해서 짜증나고 숨 막히는 길을 선택하는 우리 어린 수도자들,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마다 하느님의 현존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어린 수도자들입니다. 저보다 세상의 때가 훨씬 덜 묻은 형제들입니다. 마치 산속 깊숙이 몰래 피어있는 들꽃 한 송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형제들입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마다 우리 가운데 활발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확인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든 수행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에 동행해주시기를, 그들을 축복해주시기를, 그들의 인생길을 환히 밝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창열 신부-
예수님은 바쁘신 일정 중에서도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성부 하느님과 일치하였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이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었다. 특히 예수님은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기도 하셨다. 공생활 시작 전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셨고, 수난 전에 게세마니 동산에서도 밤새 기도하셨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 가운데서 사도들을 선발하실 목적으로 철야기도 하기도 하셨다. 이처럼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중대한 결정을 하거나 큰일에 앞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신 후,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마르코 복음 3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 선발하셨다. 또 사도들을 뽑은 목적은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3,13-15)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 그렇듯이, 사도들을 선발한 목적 또한 그들을 당신 곁에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나는 이제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당신의 친구처럼 대하시고, 그들과 우의를 나누시고자 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인간적인 도움과 협조, 우애를 나누시며 생활하셨다.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셨고, 많은 부인네들이 그분을 도왔다. 그것이 예수님께는 행복이기도 하셨다. 하느님께는 부족함이 없고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지만, 우리와의 친밀한 사귐과 우애를 나누고자 하신다.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가? 이런 사실로 보아, 하느님은 나로 인해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발한 중요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게 하고, 마귀를 쫓는 구마의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일차적인 사명이었고,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세례 받은 신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할 중대한 의무를 갖는다. 또한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는 능력을 주신 것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예수님도 공생활을 통해서 이 은사적인 구마 사목을 통해서 악의 세력에 적극 대처하시고, 그 영향으로 질병에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셨다.
사도들이 받은 이 두 가지 사명은, 오늘 우리 교회가 세상 가운데 건설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계속해야 할 중대한 사명이다. 복음 선포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는 서로 긴밀한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려고 파견하신 것처럼, 매 미사 때마다 파견되는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바로 그러한 사명을 이행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이고, 곧 파견하시는 목적인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다
-이회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당신 곁에 부르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서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과 함께 평지에 서신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당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군중을 이루었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과 띠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이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질병을 고쳐줄 의사로서 만나게 될 희망으로서의 예수님,
더러운 영을 쫒아내 줄 희망으로서의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 손이라 한 번 대어 보면 은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루가 복음 사가에게 있어서 이 희망의 첫 번째 자리는
병의 치유나 악령을 쫒아내는 일 혹은 은총을 얻는 일이 아닌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신앙을 사는 이유를
어떤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성당에 다니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일이 잘 풀려 만사(萬事)가 잘되는 것,
가족이 아무런 탈도 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사는 것,
혹은 은총을 많이 받아 원하는 데로 복을 많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신앙을 사는 이유라고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런데 루가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군중들에게 있어 그들의 “희망사항”을 열거하면서
그 첫 자리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놓고 있습니다.
물론 군중의 희망사항이 말씀을 듣는 것 하나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며 다른 것을 또한 바라고 있었고,
예수님과 루가 복음 사가 역시 그것을 외면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인식하기를 요구합니다.
바로 우리가 신앙을 사는 이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에 있어서
앞뒤가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분이 그들에게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삶의 이유와 힘을 주는 희망의 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신 이유는
그들의 병을 낳게 해 주고, 마귀를 쫒아내 주고, 복을 주어서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갈 이유와 힘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병을 낳게 해 건강하게 만드는 것, 고민을 풀어주고 기도를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는
그분이 우리에게 “삶의 이유”와 “살아나갈 힘”을 말씀을 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루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사는 “희망의 이유”와 “희망의 힘”의 첫 자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한편,
그것은 2000년 전 평지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군중에게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나 마찬가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늘 누군가 제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당신 때문이라 말하겠습니다. 아멘.”

밤 새워 기도하신 예수님의 선택
- 이기양 신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1년 계획을 세우려면 먼저 씨앗을 뿌리고, 100년 계획을 세우려면 지도자를 양성하라는 중국 속담이 있지요. 무엇보다도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라나 기업이 잘 되려면 좋은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회사가 크고 돈이 많아도 경영자가 한번 잘못하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나 회사의 리더들은 좋은 인재를 찾으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이것은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인 축구를 대표하는 레알 마드리드 팀에는 지네딘 지단이라는 프랑스인 축구 선수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 선수의 1년 연봉은 무려 800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11명이 한 팀이 되는 축구단에서 단 한 사람의 연봉이 다른 10명의 선수 몫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 선수 한 사람을 쓰느니 10명의 다른 선수들을 데려오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많은 돈을 주고 그 선수를 기용하고 있는 겁니다.
능력 있는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십만 명 이상의 신도를 자랑하는 개신교 교회가 있는가 하면 단 몇 십 명의 신도만으로 힘에 부쳐서 망해 나가는 개척 교회도 수없이 많습니다. 역시 어떤 목사님이냐에 따라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사람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천주교회입니다. 어느 한 개인의 능력이 드러나기보다는 조직으로 운영이 되는 천주교회는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하나 된 교회라는 천주교회의 특성을 2000년의 역사 안에 증거 해 왔습니다. 신부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2년이나 5년이 지나면 바뀌게 됩니다. 한 사람이 지나치게 오래 능력을 떨치면 이단으로 치우치기가 쉽다는 것을 과거의 역사 안에서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름대로 끊임없이 조직을 움직이지만 우리 교회 안에서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당 신부가 어떤 마음으로 일 하느냐에 따라 복음적으로 잘 성숙되어 가는 본당이 있는가 하면 바람 잘 날 없이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는 본당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목자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본당의 상황과 같은 모습을 반 구역과 단체들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반장이나 구역장 또는 단체장이나 사목위원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모습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사목자의 위치에 있으면 이런 모습이 한 눈에 다 들어옵니다.
얼른 보기에도 활성화가 잘 되고 깊은 친교가 맺어지는 반이 있는가 하면 무엇을 하자고 제안을 해도 시큰둥하고 잘 모여지지 않는 반이 있습니다. 리더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사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두 사람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들을 뽑으시는 예수님의 스타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재를 뽑아 쓰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시지요. 세상 사람들은 인재를 뽑을 때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실력이 있으며 사람을 통솔하는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우선으로 살펴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무렵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루가 6,12-13)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재를 뽑는 평가 기준과 예수님께서 사도를 뽑으신 기준이 전혀 달랐다는 것은 뽑힌 사도들의 명단을 보면 여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는 학벌이 좋은 사람도 없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도 없으며, 성격이 유순한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혈질인 베드로에,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혁명 당원 시몬이 있는가하면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세리 마태오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 중에는 후에 스승을 배반하게 될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예수님의 기준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돈 많은 사람도, 박식한 사람도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만을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즉 복음적으로 열심하고 최선을 다하며 하느님께 그 결과를 맡기는 겸손한 이들을 사도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가을이 되면 본당의 사목위원들의 임기가 만료됩니다. 새로운 사목위원들과 단체장, 또 구역장들을 뽑아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지요. 사목자로서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뽑힌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많은 생각과 고민이 저를 더욱 더 기도하게 만듭니다.
돈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기업을 하거나 세상의 흐름에 맞춰 가는 곳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세상의 지식을 많이 가진 박식한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충실하고 겸손하며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길 줄 아는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뽑힐 때 공동체는 더욱 복음화가 되고 참으로 성숙해 질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나와 가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가며 노력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늘의 한 조각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느님의 일꾼으로 뽑혀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작은 도구가 되어 하느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을 사목자인 저는 경험으로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삼으셨듯이 오늘날 하느님의 일꾼으로 뽑힌다는 것은 역시 보이는 본당 신부를 통해서입니다. 본당 신부의 사목에 협조자로서 불림을 받는다는 것을 본당 신부를 통해서 하느님의 손길이 움직인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좋은 공동체를 만들고 하느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바탕인 것입니다.
한편 신자들은 뽑힌 사람들이 복음적인 열정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숙되지 않은 공동체일수록 뽑힌 일꾼들의 흠을 잡고 입방아를 찧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것을 봅니다.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지요. 자신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면서 어려운 결단을 내려서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일해 보려고 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밤 새워 기도하시고 마침내 열두 사도를 뽑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뽑힌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은총입니다. 뽑힌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예!”하고 응답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는 참된 봉사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제자(弟子)와 사도(使徒)의 의미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장엄한 과정을 거쳐 12제자를 선발하신 사실과 그분의 계속된 치유행적을 보도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12제자를 엄선하신 사실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다. 우선 마르코복음(3,13-19)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당신이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불러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고 하면서, 이는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악령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태오복음은 파견설교(10장)의 범주 안에서 12제자의 선발(10,1-4)을 다루고 있는데, 예수께서 12제자를 따로 선발하신 다음, 그들에게 엄격한 여장규칙과 함께 악령제어와 질병치유의 능력을 주어 파견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루가는 12제자의 선발목적이나, 사도로 선발된 제자들의 능력이나 임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선발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12제자의 선발을 위해 산에 올라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가 보도하는 내용을 모두 종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마치실 즈음,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가) 이는 당신을 따르고 있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열 두 제자를 선발하여 사도로 삼아 당신 곁에 두시기 위함이었다.(마르코)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좇아 열둘을 선발하시어(루가),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악령을 제어하고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과 임무를 주어 세상에 파견하셨다(마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는 장소로 산을 택하셨다. 산은 예로부터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여기서 소명과 결단이 이루어진다.(출애 3,1; 4,27; 18,5; 24,13; 1열왕 19,8; 에제 28,14)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기도하는 장소이며, 하느님의 권위와 계시가 드러나는 장소이다.(마르 9,2; 마태 17,1; 루가 9,28) 예수께서는 여기서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이 대목 외에 어느 곳에서도 예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적은 없으시다. 12제자를 선발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특별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12제자들은 이렇게 산에서 사도로 뽑혔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리고, 병고에 허덕이며,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고쳐 주셨다.
루가는 이렇게 산(山)과 평지(平地)를 구분하고 있다. 산은 기도와 소명의 장소요, 평지는 선포와 활동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가복음사가가 오늘 복음에서 산과 평지, 즉 소명과 활동을 함께 묶어둔 이유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에서 기도하셨고, 평지에서 치유의 활동을 계속하셨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 중에 12제자가 뽑혀 사도가 되었다면 12사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스승이신 예수의 모범을 따를 일이다. 바로 예수님처럼 산에서 기도하고 평지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산과 평지를 분명히 구분되나 서로 뗄 수는 없듯이, 제자와 사도 또한 분명히 구분되나 뗄 수 없는 것이다.
통상 ‘제자(弟子)’란 역사적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요, ‘사도(使徒)’란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복음선포의 지상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산에서는 제자이나 평지에서는 사도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신자란 예수님 앞에서는 제자로 불림을 받았고, 세상 앞에서는 사도로 파견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충실한 제자로, 세상을 향해서는 용감한 사도로 말이다. 예수 없는 제자 없고, 세상없는 사도 없다.......◆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유광수 신부-
어제 젠 베르데와의 만남이 서울시 교육 연수원에서 있었다. 노래를 부르면서 한 사람씩 자신들과 젠 베르데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참 좋은 만남의 시간이었다.
한 사람씨 나와서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기가 만난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콰테말라에서 온 단원과 스코틀렌드 출신의 단원의 체험담이 꽤나 감동적이었다. 특히 콰테말라에서 온 단원의 체험담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자기는 젠베르데에 들어오기 전에 증권회사의 회장님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은행 업무를 담당할 직원이 필요하여 자기 남동생을 소개시켜서 자기와 함께 일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돈이 은행으로는 입금이 되었는데 현금이 없어져서 조사해본 결과 자기 남동생이 바로 그 범인이었다는 것이다. 남 동생이 감옥에 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자기가 일년 반 동안의 월급으로 겨우 갚았다는 것이다.
도저히 그런 남동생을 용서할 수 없었지만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고 용서하라는 복음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동생을 용서해주게 되었고 그녀의 행동을 보고 회사 직원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을 보았다고 사람들이 말하더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말씀만이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라는 말씀이 어제 젠베르데와의 만남을 생각하게 한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복음의 체험담을 들려 주었고 나는 무대 아래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산에 있고 나는 평지에 있는 모습이었다.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고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산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평지에 내려와서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산은 복음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요, 평지는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체험한 것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온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듯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주어야할 사제, 수도자, 신자들의 입에서 복음의 이야기를 듣기가 어렵다.
산에서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가 아니라 평지에서 일어나는 지극히 일반적인 이야기 뿐이다. 왜 그런가? 하느님이 계신 산으로 올라 가지 않고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평지에만 머무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평지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고 또 다시 산에 올라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힘을 얻어 다시 평지에 내려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사람들이다. 산에 오르지 않고 늘 평지에만 머무른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신음(呻吟)하면서 신을 求하는 자" 이것이 가장 옳은 자세라고 빠스칼은 말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 산에 오르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요, 산에서 만난 하느님을 평지(삶의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복음 선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