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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묵상글 ( 연중 제8주간 목요일, - 그 무엇이든 영적으로 바꾸고 승화케하는 우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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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그 무엇이든 영적으로 바꾸고 승화케하는 우리
“사랑하는 여러분,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라는
베드로 서간의 말을 들으면 즉시 클라라 성녀가 떠오릅니다.
클라라 성녀야말로 바로 그런 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죽고 난 뒤 그녀는 환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계단 밑에 있고 프란치스코는 계단 위에 있는 환시를.
그래서 그녀가 쏜살같이 계단을 올라 프란치스코에게 가니
프란치스코는 그녀에게 자기 젖을 내밀며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그 젖을 먹으니 너무도 달콤하여 거듭해서 먹었고 먹은 다음엔
그 젖이 그녀의 입술에 계속 남아있는 그런 환시였습니다.
여기에서 계단은 천국의 계단으로서 프란치스코는 죽어 천국에 있지만
클라라는 아직 계단 밑 곧 지상에 있었으며
쏜살같이 계단을 오른 것은 프란치스코가 있는 천국에 빨리 가고 싶은
클라라의 열망이랄까 갈망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나타내는 것일 겁니다.
이 환시를 볼 당시 클라라는 영적인 시련이 엄청나게 클 때였습니다.
프란치스코를 통해 받았던 영적인 위안이랄까 힘이 끊긴 상태인데다,
남은 프란치스칸들은 프란치스코의 영적 유산을 놓고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었고 영적 형제들은 클라라가 대신 영적 지도자 되어주길 바라고 있었지요.
그러니 영적인 시련과 고독만큼 영적인 위안과 힘이 그녀에게 필요했던 시기였고,
당연히 오늘 서간이 얘기하는 그 영적인 젖에 대한 갈망도 컸던 시기였지요.
사실 우리는 어려움과 시련을 겪을 바엔 영적인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세상 어려움과 시련을 겪더라도 그것을 영적으로 바꿔야 신앙인입니다.
예를 들어 병이 들어도 그것을 병고가 아니라 영적 시련으로 바꾸고,
갈등이 있어도 인간적 갈등에 머물지 않고 영적 갈등으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병이 있으면 병만 마주하지 않고 클라라처럼 시선을 위로 돌려 하느님과 마주하고,
갈등이 있으면 그 갈등을 그 인간과의 사이에 두지 않고 하느님 앞에 놓는 겁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인자하심 안에서 그 병과 갈등을 녹여버리는 겁니다.
그래서일까 베드로 서간은 이미 맛본 하느님의 인자함을 향해 나아가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여기서 베드로 서간은 주님이 인자하신 분이라고 얘기하고
이어서 주님은 살아 있는 돌이라고 하며 우리도 살아 있는 돌이 되라고 합니다.
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이미지가 있습니다.
소중한 돌과 나뒹구는 돌,
디딤돌과 걸림돌,
산 돌과 죽은 돌.
우리는 병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디딤돌 삼아 하늘로 오르고,
사람들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기며 하느님께 오르며,
나도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줘야 합니다.
우리는 병에 걸려 죽고 넘어져 죽어 죽은 자들,
곧 죽은 돌들이 널브러져 있는 그런 공동체가 아니라
영적으로 승화함으로써 영적으로 살아 있는 자들이 되어
곧 살아 있는 돌들이 되어 주님의 성전을 짓는 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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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류의 역사는 고통의 역사이며 시련의 역사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선사 시대에 인간은 정말로 최약체 동물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고,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빠르게 달려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속에서 살 수도 없었지요. 그러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사용하게 되었고, 그 약함으로 인해 지금 인류 발전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을 형성했던 공룡, 맘모스 등이 멸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고통과 시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인류의 발전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고통이 있기에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고통을 싫어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는가?’ 아마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자기 안의 마음에서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이 생각이 가까운 사람에게도 확장되어서, “내 아이는 고통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 가족은 고통이 없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되지 않을까요? 고통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더 집착하고 따라서 평화를 얻지 못합니다. 고통과 시련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이 건강검진 후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전혀 운동하지 않았지만, 건강을 위해 하루 1시간 만이라도 운동하자고 다짐했습니다. 첫째 날 운동하기가 쉬웠을까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둘째 날, 온몸이 뻐근하고 힘듭니다. 그래도 버텨서 해 봅니다. 셋째 날, 작심삼일을 떠올리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 선생님께서 운동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했으니까요.
힘들어도 목표가 있으면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 처음에는 멀고 힘들어도 점차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고통과 시련도 목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예수님을 향해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그에게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며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라는 목표를 갖게 되면서, 고통과 시련 너머의 구원까지 얻게 됩니다.
우리에게 고통과 시련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내 앞에 나타납니다. 그때 거부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것이 아닌, 우리의 목표인 주님을 떠올리고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더 큰 선물을 들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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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사랑에는 한 가지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스탕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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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거지 장님 바르톨로메오의 치유를 통해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곧 눈먼 이의 치유는 어둠 속에 있는 이가 빛을 보게 되는 것을 표상하며, 이는 예언자들에 따르면 메시아의 표지 가운데 하나입니다(이사 35,5;시 146,8;마태 11,5).
<본문>에서, 눈먼 거지 바르티메오는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가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 10,47)
그분이 지닌 메시아의 권능을 믿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11,1) 예언서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겉옷을 벗어버리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르 10,50). 보이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우리도 오늘 자신을 가리고 있는 “겉옷”은 벗어버려야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내가 걸치고 있는 “겉옷”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하느님의 일을 가리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하는 ‘내 생각’이 바로 ‘겉옷’입니다.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이 바로 던져버려야 할 ‘겉옷’입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거지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를 알고 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환히 아시지만,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이 무엇이며, ‘누구에게’ 그것을 청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당신께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청하기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믿음’으로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원해야 하 바가 무엇인지를 아는 이는 이미 성인입니다.”라는 성 프란치스코는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거지 장님은 예수님께 청했습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 10,51)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어로 ‘보다’(αναβλεπω)라는 말은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항상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님이십니다. 성전 휘장을 찢어놓으신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곧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될 때, 하느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릴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눈이요, 믿음으로 세상과 형제들을 보는 눈이요, 빛으로 모든 것을 새롭게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 10,5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는 까닭입니다.
아니 마음이 완고하여 태양을 보지 않으려 한 까닭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 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 사랑을,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시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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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시력을 잃어 사물을 보지 못하는 요한 형제가 있습니다. 그는 신부의 특별강론이나 강의가 있으면 녹음합니다. 앞이 보이지도 않는데도 방송기기를 잘 다룹니다. 녹음하여 나눠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본당의 자료정리를 위해서 합니다. 아무리 좋은 강연이 있어도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기에 기회가 되는 대로 정리를 합니다. 그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눈을 뜨고 있습니다. 미래를 볼 줄 압니다. 멀쩡한 눈을 가진 사람은 아무 생각이 없는데, 그는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자료를 보물로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눈뜬장님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는 길을 지나가시는 예수님께 간절히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눈이 멀었다는 것은 항상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가 어둠 속에서 불행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 불행을 벗어나는 길은 눈을 뜨고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애간장이 녹아나는 사랑입니다. 죄를 저질러도 잘못을 가리지 않고 먼저 받아들이는 사랑, 부모가 자식을 생각하는 사랑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누구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사랑을 갈망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나를 어떤 모양으로 부르고 계실까? 누구를 통해서 부르실까? 아니 나를 불러 주시기를 갈망하고 있는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자 바르티매오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당시에 겉옷은 중요한 재산입니다. 신분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낮에는 햇빛을 가릴 수 있는 천막이고, 밤에는 추위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이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주님께 갔습니다. 예수님께 가는 데 장애 되는 전 재산, 신분마저 버리고 따른 것입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제자들도 겉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못된 습성, 높은 자리에 앉아 지배하고 대접받으려는 교만함을 버리고 낮은 자리를 차지하고 희생 봉사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자신을 버리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십자가를 지지 않으려 하는 마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부름을 받았으면 지체함 없이 “벌떡” 일어나야 합니다. 노숙자들을 만나보면 구걸하는 삶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창피한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는데 금방 익숙해지더라.” 하고 말합니다. 연민에 갇힌 자신의 신분에서 일어서야 할 때입니다.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시는 예수님의 물음에 눈먼 바르티매오는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영의 눈을 떠야 영이신 분을 볼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을 떠서 주님을 본다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이며 소원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 능력을 드러내시는 분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합니다. 영의 눈이 뜨여 볼 것을 보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저자는 말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아라.’ 하신 당신을 제가 생각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 얼굴을 찾고 있습니다. 당신 얼굴을 제게서 감추지 마시고 분노하여 당신 종을 물리치지 마소서. 당신은 저의 도움입니다”(27,8-9). 보지 않아도 될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길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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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르는 성가 중에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오 크신 사랑/ 하늘 그보다 높고/ 바다 그보다 깊고/ 우주 그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최근 책을 읽으면서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신기하고 놀랍다는 걸 새삼스럽게 체험했습니다. ‘시간에 묻힌 한 사제의 삶’이라는 책에서 책의 저자인 신부님은 1963년 군 제대 후에 이민을 고민하다가 여의치 않자, 성당의 신부님께 면담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젊은이의 고민은 3가지였습니다. 계속 이민 절차를 밟으며 기다리는 것, 직장을 구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는 거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의 이야기를 듣다가 청년의 고향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고향이 평양인데 징집되어 한국 전쟁에 끌려왔고,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석방되고 거처를 정한 곳이 청년의 고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그곳 정 부잣집에서 일을 도와주었는데 그 집 아들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젊은이는 그 아들이 자신의 둘째 형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에게 안수해 주었고, 하느님께서 청년이 가야 할 길을 정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청년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던 젊은이의 갈망을 하느님께서는 신비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젊은이가 신부님께 면담했든 1963년은 제가 태어나든 해입니다. 20년 후에 저는 그 신부님께 면담하였습니다. 저는 젊은이처럼 3가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교사나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사제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영향도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하셨고, 당시 잠시 쉬고 있던 아버지가 성당에 나오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신부님과 면담을 한 후에, 다시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최 씨에, 곱슬머리에, 옥니를 가진 사람은 고집이 세다고 하는데, 신부님이 그 세 가지를 다 갖추었습니다. 신부님은 고집이 세시고, 강직하였지만 속 깊은 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오셨습니다. 임진강 매운탕을 드시면서 본당 사제로 잘 지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본당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아시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기하고 놀라운 것인지, 저는 2007년 신부님께서 분가한 성당의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었고,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는 직접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고, 원로 사목자가 되어 은퇴하실 때는 신부님께서 분가한 성당의 본당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에 계시는 신부님께 전화했습니다. 신부님을 사제의 길로 인도해 준 신부님이 저의 아버지 신부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2009년 신부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이렇게 제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주십니다.
‘인생은 흑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게 살았어도,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삶이라 해도 인생은 흑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대가를 지급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는 주님의 은총으로 치유 받아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르티매오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도 많았을 것이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모든 걸 볼 수 있지만 이제 한 분 예수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인데, 어느 어두운 밤에 한 소경이 초롱불을 밝혀서 다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볼 수도 없는데 왜 그렇게 다니느냐고 하니까, 그 소경은 하는 말이 나는 소경이지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초롱불을 보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간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보려고 하고, 뭔가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이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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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는 눈먼 사람입니다. 그리고 바르티매오를 표현하는 또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복음은 그를 거지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이 멀었는데 돈도 없습니다. 이 바르티매오가 살아온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존중받고 귀하게 대접받았을까요? 아니면 천대받고 무시당했을까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두 번째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눈이 멀고 거지였다는 복음의 표현에서 우리는 그의 마음속 깊은 상처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 상처는 오랜 시간 쌓이고 싸여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자렛 사람 예수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저기서 기적으로 소문이 자자했던 주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바르티매오는 생각했습니다.
나를 살릴 분은 저분밖에 없다.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람들에게 존중까지는 아니지만 멸시에서 벗어나게 해 줄 사람은 저분밖에 없다. 이제 내 모든 것을 걸고 저분을 만나야겠다.
이윽고 그는 소리칩니다. 모든 것을 걸고 죽을힘을 다해 소리칩니다. 목청으로도 마음으로도 그리고 영혼을 끌어모아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이런 처절한 소리에 응답하십니다.
바르티매오의 기도 방법은 단순합니다. 그냥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서, 모든 것을 다해서 주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바르티매오의 기도가 강력한 힘을 지녔다고 믿습니다.
화려한 말들이 없어도 좋습니다. 단순하게 아주 단순하게 그러나 그 안에 모든 정성을 담아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바르티매오의 기도와 닮는다면 우리의 기도에도 주님께서는 응답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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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뱅, 골뱅, 골뱅이
어느 주방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통조림이나 라면을 모아두는 장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이런 장소가 가득 차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아마도 마음이 그 안에 들어 있는 통조림과 라면 등을 비상식량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의 비상식량 칸에는 이런 것이 들어 있습니다.
참치캔, 스팸 캔, 깻잎 캔 그리고 오늘 글의 주인공인 골뱅이 캔.
모든 것들이 유용하지만 골뱅이 캔은 참으로 유용합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술손님이 오게 되면 골뱅이의 빛은 두 배, 세 배가 되어 빛납니다.
아린 맛 뺀 달콤한 양파와 새콤달콤하게 버무린 골뱅이무침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오이와 양배추들을 썰어 추장과 참기름으로 향을 내고 그 가운데 중면을 얹어 골뱅이 중면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에도 이런 만능 아이템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갑자기, 준비되지 않은 상황이 닥쳐 당황했을 때 그 순간을 멋지게 넘어갈 수 있는 믿을 구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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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전 정화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만군의 주님이여,
계시는 곳 그 얼마나 사랑하오신고!
그 안이 그리워,
내 영혼 애태우다 지치나이다
이 마음 이 살이 생명이신 하느님 앞에 뛰노나이다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저희는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84,2-3,5)
오늘 화답송 시편이 그대로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의 주님의 집, 성전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 예수님 사랑, 성령님 사랑, 교회 사랑이 한곳으로 응결되어 미사로 표현되는 곳이 성전입니다. 제집무실은 성전옆에 붙어있어 흡사 주님의 집 셋방을 연상케 하니 이보다 더 좋은 방도 없어 천장암, 지족암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역시 오늘도 집무실의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 만세칠창으로 시작되는 복된 하루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수도원 만세!”
성 요셉수도원에 부임한지 올해로 만36년이요, 왜관수도원을 떠나기 전날 밤 1988년7월10일! 저는 성전 제대앞에서 밤새 3000배 절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이곳에서 정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온돌방으로 시작된 요셉수도원 성전이 제대로 된 성전을 갖게 되어 마침내 2006년 5월30일 봉헌 미사를 드렸고, 오늘 2024년 5월30일 제18주년 성전 봉헌 대축일 미사를 드리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동안의 감사와 감동과 감격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런지요!
참 고마운 인연은 19년전 2005년부터 다음해 까지 성전 및 본원건물과 수도자 숙소를 건축해줬던 이승용 아오스팅, 이현옥 헬레나 부부가 올해 지금도 수련자실과 2개의 개인 피정집을 건축중이니 참으로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거의 20년 동안 건재하셨다가 다시 수도원 건축을 하게 됐으니 말입니다. 며칠전 5월28일 화창한 날 성전미사후 성전앞 정원에서 피정후 기념 사진을 찍은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의 모습이 환경과 잘 어울려 참 아름다웠습니다. 사진과 메시지를 받고 드린 유쾌한 덕담의 말마디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신부님, 피정 마치고 모두 은혜롭고 행복한 모습들입니다.”
“너무 싱그럽고 아름다워 천상 선녀들인줄 착각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정말 손주를 둔 60대 할머니들인데 20대 아가씨들과 같은 청순한 아름다움의 예수성심회 자매들이니 그대로 예수성심의 은총이요 성전 미사의 은총이다 싶었습니다. 제 주특기는 하느님 자랑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하느님 자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이요, 오늘은 제18주년 요셉수도원 성전 대축일을 맞이하여 성전 자랑을 하고 싶습니다. 가톨릭교회의 모든 성전에 해당되겠습니다.
첫째, 주님의 집, 성전은 일치의 중심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이듯 이를 그대로 대변하는 곳이 가시적 성전입니다. 특히 수도원 성전은 수도원의 중심이자 세상의 중심입니다. 수도자들은 물론 참 많은 이들이 세상 광야의 오아시스, 세상의 중심인 수도원 성전을 찾습니다. 삶의 중심을 잃어 방황이요 표류요 혼란입니다.
수도형제들의 일치의 중심이 되는 곳도 바로 성전입니다. 날마다 수도원 성전에서의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주님 안에서 일치를 굳건히 하며 날로 정화되고 성화되는 삶입니다.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마지막 영적 보루 역할을 하는 수도원 성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 역시 늘 삶의 중심은 성전을 찾았음을 봅니다. 일치의 중심인 거룩한 성전의 타락에 열화와 같이 분노하시는 주님입니다.
둘째, 주님의 집, 성전은 생명과 사랑의 집입니다.
하느님 생명이 그리운 이들은, 하느님 사랑이 그리운 이들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아 성전에 옵니다. 주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사람들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마음의 허기는 하느님 생명으로, 하느님 사랑으로만 채울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생명이자 우리의 사랑입니다. 바로 주님의 생명, 주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궁극의 목마름을,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의 주님을, 사랑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성전 전례기도에 참석합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살아 있는 만남의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소개하는 강은 성전에서 세상 곳곳으로 흘러가는 은총의 강, 생명의 강, 사랑의 강을 상징합니다. 우리 역시 은총의 강, 생명의 강, 사랑의 강으로 세상에 파견됩니다. 은총의 강 주님을 만날 때 살아나는 온갖 중생들입니다. 세상을 살리고 치유하는 주님의 구원은총은 성전을 통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강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그대로 세상을 살리는 성전은총,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주님의 집 성전에서 흘러내리는 은총의 강, 생명의 강, 사랑의 강 덕분에 충만한 생명, 충만한 사랑을 누리는 5월의 초목처럼 시드는 일 없이 늘 푸르른 생명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입니다.
셋째, 주님의 집, 성전 정화입니다.
건물성전, 공동체 성전, 개인 성전등 세차원에 걸친 성전정화요 성전성화는 하루하루 날마다 성전이 다하는 날까지 이뤄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성전타락에 열화와 같이 분노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분의 하느님 사랑, 성전 사랑이 얼마나 큰지 짐작이 됩니다. 비둘기를 파는 가난한 이들에게는 조용히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이르십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의미심장합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가 새로 세워진 성전임을 압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의 몸인 공동체 성전은 치유되고 살아나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정화되고 성화됨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큰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건물입니다. 그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은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느님께서도 그자를 파멸시킬 것입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느님의 파멸에 앞서 스스로 자초하는 자기 성전 파괴입니다. 자기를 소홀히 함부로 대하는 것이 얼마나 큰 성전모독의 죄임지 깨닫습니다. 거룩한 성전의 성인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괴물이 되고 폐인이 되는 것보다 하느님 모독의 큰 죄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인 형제들의 공동체와 자신의 전존재를 참으로 잘 돌보고 가꿔야 함을 배웁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삼중신원을 깊이 깨닫게 하며 우리 존재를 아름답고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줍니다. 내 몸담고 살아가는 집 역시 주님의 집입니다. 다음 고백시를 읽으며 주님의 집에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 우리의 삼중신원을 새로이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에서
주님의 전사(戰士)로,
주님의 학인(學人)으로,
주님의 형제(兄弟)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주님의 집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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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는 이가 있었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믿는 이가 있었네
가진 것이 없기에
아무 것도 줄 수 없어도
가진 것이 없으니
감사히 받을 수 있었던
믿는 이가 있었네
볼 수는 없어도
들을 수는 있었던
믿는 이가 있었네
스치듯 지나가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마음에 고이 품고
우연이라도 그분 만날까
애타게 기다리던
믿는 이가 있었네
수없이 흩어지는
담아낼 수 없는
웅성거림과 왁자지껄 소리
그 안에서 또렷하게
그분의 이름 붙잡았던
믿는 이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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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52)
빛의 찬미
주님의 명령은 눈을 밝히며 선명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대가 하느님과 인간을 잘 알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고, 볼 수 있는 힘을 받고, 그대의 빛을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를 비추어 주신 말씀은 달콤합니다.
“금보다, 많은 순금보다 더욱 보배로우며 꿀보다 생청보다 더욱 달다네”(시편 19,11). 어두운 정신에 빛을 주시고 “빛의 전달자”인 영혼의 눈을 열어 주신 분을 어찌 열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그분을 찬미하고 당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십시오. 당신 말씀이 저를 구원하고, 당신 노래가 저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느님을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오류 속을 헤맸지만, 주님, 당신께서 저를 비추시니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찾고, 당신 덕분에 아버지를 모시고, 당신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당신은 저를 형제로 맞아들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히브 2,11 잠조). 그러므로 진리의 망각인 무지를 없애 버립시다. 눈의 안개처럼 시각을 방해하는 어둠을 떨쳐 바리고, “빛이여, 문안드립니다”라고 외치며 참되신 하느님을 관상합시다. 어둠 속에 묻히고 죽음의 그늘 아래 묶여 있는 우리를 하늘의 빛이 비추었으니 (참조‘ 이사 9,1; 마태 4,16; 루카 1,79), 그 빚은 태양보다 더 순수하고 이승의 삶보다 더 달콤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7 사람은위대하다
주님의 성령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다(지혜 1,7)
어떤 학자가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척도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하느님의 선물을 충만히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더 고귀하고, 더 나아질 것이다."
하느님을 다른 것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은 하느님을 훨씬 더 닮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이 될수록, 우리는 더 영적이 될 것입니다. 어느 학자는 말합니다. “영적으로 가장 낮은 것이 끝나는 지점에서 육적으로 가장 높은 것이 시작된다." 이것은 영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육적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것보다 고귀하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육적인 것이 고귀하다고 해도, 영혼은 육적인 모든 것보다 고귀합니다. 영혼은 말하자면 영원과 시간이 갈라지는 순간에 지어졌습니다. 그러하기에 영혼의 촉수는 영원과 시간 양쪽에 닿아 있습니다. 영혼의 가장 높은 기능은 영원을 건드리고,가장 낮은 기능은 시간을 건드립니다. 영혼이 시간 속에서 움직이면서도 시간을 따르지 않고 영원을 따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입니다.(178)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1년 후에는
결과적으로 같은 해 7월 10일 포르투갈과 로마 성청과 외교 관계가 성립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루치아, 히야친타, 프란치스코가 교황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희생으로 바친 것이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또 수개 조목의 반종교적 법률도 완화되었다.
방방곡곡에서 고바 다 이리아에 모여든 사람들은 발현 장소를 표시한 문과 호랑가시나무 주위에 쌓아 올린 잡석담 부근에 모여서 묵주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교회 당국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고, 사제들은 호기심에서 몰래 고바에 가보기는 했어도 드러나게 나타나는 일은 삼갔다.
그런데 마을에서는 아직도 이 발현을 아이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또 그것을 진실한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루치아, 히야친타, 프란치스코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지낼 수 있기를 날이 갈수록 간절히 원했다. 여섯번째 발현 기념일에는 군중이 다 돌아간 뒤 고요해졌을 무렵 고바 다 이리아에 갔었다.
그런데 늦게까지 남아 있던 군중에게 붙잡혔고 여기저기에서 부르며 귀찮게 따라다녔다. 그 사람들은 성모님께 전달해 달라고 무엇을 청하기도 하였고 함께 로사리오 기도를 드리자고 하기도 하였으며 각양 각색의 희망을 말했다.
특히 루치아는 군중들의 관심의 초점이었다. 그녀는 참을성 있게 붙잡히는 대로, 다음다음으로 밀고 밀려지고 하는 대로 사람들의 요구에 응했다. 어떤 때는 지겨울 만큼 싫은 질문을 받았고 어떤 때는 포옹과 찬사의 습격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알쥬스트렐에 돌아오면 아직도 다소의 뼈저린 야유의 소리를 듣기는 했으나 고바 다 이리아에 있는 동안에는 마치 개선 장군 같았다. 그녀는 아직 만 12세가 되지 않은 소녀였는데 침착하고 적절하게 처사하는 그 똑똑한 태도에는 진정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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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신부님.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10, 51. 5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예리코는 마지막 길목입니다. 이곳까지 이르는 여정에서 중요한 일과 가르침이 있었지만, 아직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영적 맹목盲目 상태에 빠져 있었으며, 영적 장님과도 같았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적 거울이 필요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의 예리코의 길목에 앉아 있던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와의 예수님의 만남은 십자가 여정에서 제자들에게나 우리에게 전환의 순간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한 제자들과 보지 못하고도 볼 수 있었던 바르티매오의 차이는 곧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의 아픔과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 곧 시각장애인이자 동냥하는 사람이면서 이름조차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르 티매오’란 티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니, 이 사람은 어엿하게 존재하면서도 그 자신의 정체성의 상징인 이름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예전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민중 역시 이름 없는 존재들이 많았습니다. 사극 <역적>의 주인공 ‘길동’의 아버지 이름이 ‘아모개’였고, 어린 여동생의 이름이 ‘어린이’ 이였듯이 말입니다.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는 눈이 멀어서 볼 수 없었고, 구걸하여 먹고 살았으니 예수님 당대에 가장 비참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매일 매일 어떤 누군가의 적선에 의지하며 살아왔기에, 또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기에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주저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10,47)하고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한 푼만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더욱 큰 소리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언제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르기에, 사실 예수님의 이 예루살렘 여정은 마지막 여정이었으니 말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더니 예수님은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힘을 내라고 격려하듯이 그에게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10,49)라고 말해줍니다. 그를 가까이 부르신 까닭은 단지 돈 몇 푼을 주려고 부른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그에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10,51)
이 질문에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함축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는 질문은 이미 바로 앞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제배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했던 질문입니다. (10,35참조)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10,37)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모른다.” (10,3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바르티매오는 복음에 기록된 대로 구걸로 생계를 꾸려가는 전업 거지(?)였다면, 제베대오의 형제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구걸하는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보다 윗자리를 차지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람보다 더 높은 자리(10,42참조)를 구걸하는 고급 거지, 상거지와 같았습니다. 어쩌면 마르코 사가는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이야기 뒤에 바르티매오의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누가 참 제자인지, 누가 참으로 눈먼 거지인지를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된 제자이고 눈먼 거지였던 바르티매오의 변화 과정을 좀 더 세심하게 살펴봅시다. 우선 먼저 그의 첫 번째 변화의 조짐은 예수라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외친 순간이 바로 시작점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한 순간이 바로 변화의 첫 순간입니다. 그런데 주변의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지만, 더욱 큰 소리로 외치고 예수님이 그에게 관심을 두고 주목하자 사람들 역시 변하기 시작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라,고. 이에 따라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갑니다.” (10,50) 바르티매오가 벗어던진 ‘겉옷’은 그동안 그를 옭아매어 왔던 모든 것, 옛것, 낡은 것을 상징합니다. 그의 장애, 가난, 신분 등으로 덮어씌워진 운명을 말합니다. 이제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그는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벌떡 일어납니다. 즉, 죽음과도 같은 옛 상태에서 부활의 새로운 태어남으로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예수님의 질문에, 당당히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0,51)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화답하듯이 예수님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0,52)라고 그의 간청을 들어 치유해 주십니다. 이로써 그는 ‘다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다시 보다.’는 단어는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제게 먼저 다가오는 뜻 중에서,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보게 된 바르티매오를 통해 제자들은 물론 우리 역시도 바르티매오처럼 다시 눈을 떠, 새로운 시선으로, 땅의 일을 보지 않고 하늘 일을 보고 살아가는 우리로 거듭 태어나길 바랍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고 말씀하신 배경엔 이젠 ‘너의 길’, ‘너의 삶’을 살면서 너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위, 하늘을 보는 삶, 하느님의 뜻을 사는 길을 가도록 촉구하시고 격려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이 순간 마지막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나섰다.”(10,52)하고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일행이 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고 살아갔다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보게 됨’으로 걸어야 하고 살아야 할 삶입니다.
“주님 보고도 보지 못하며 살아가는 저희, 듣고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저희를 질책하지 마시고 오늘 복음의 바르티매오처럼 다시 보고,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낫게 하여 주시길 청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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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님.
바르티매오는 길에 앉아 있던 눈먼 거지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자 곧바로 외칩니다.
사람들이 그를 말리고 비난하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하여 소리칩니다.
이 장면은 신앙의 여정에서 품게 되는 몇 가지 질문에 답을 제시하여 줍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간절히 도움을 청하는 이들을 그냥 지나치시는지, 더욱이 주위의 방해와 비난으로 우리의 갈망을 좌절시키시는지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그 답은 이렇습니다. 단 한 번의 기도나 가르침으로 모든 것이 마술처럼 해결되는 방식은 인간을 진정으로 구원하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난과 시련 속에 인간을 내버려두시는 듯하지만 그 시간은 거꾸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기다리시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갈망과 염원이 더욱 굳어지고 깊어지도록 기다리시는 밀도 높은 집중의 시간인 것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오너라.” 하신 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의 소망은 다시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쓰인 그리스 말 ‘아나블레포’는 ‘시력을 되찾음’을 의미하지만 ‘위를 향하여(´아나´) 보다(´블레포´)’라는 뜻도 있습니다.
인간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 치유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 곧 초월을 향하여 위로 시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운명을 비관하지 않고 구원을 기다려 온 사람들은, 구원이 다가왔을 때 그것을 바로 알아봅니다.
보지 못하던 눈먼 이는 이제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을 알아보고 따라나섭니다.
‘길 위에’ 앉아 구원을 기다리던 눈먼 이는 이제 그분을 따르는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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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꽃거지
수난과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시던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지나가십니다.
예리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습니다.
헤로데는 온난한 기후의 이 도시를 유흥과 환락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예리코에는 부자들의 호화주택들이 즐비했고 그들을 위한 극장과 경마장, 수영장 등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보로 약 30분정도 걸리는 예리코 시내를 거쳐 가셨습니다.
당시 예리코는 과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순례객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었습니다.
거지들 입장에서 볼 때 예리코는 물좋고 목좋은 자리였던 것입니다.
한 눈먼 거지가 예리코 대로변에 앉아서 순례자들을 향해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였습니다.
통상 복음서에 거지의 이름까지 명기하는 법이 없는데 복음사가들이 바르티매오의 이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는 것을 봐서 그는 당시 거지 중의 유명한 거지였습니다.
특별히 잘 나서 돈벌이를 잘해서 유명한 것이 아니라 불쌍하기로 유명했던 거지였습니다.
요즘도 그러하겠지만 당시 거지에도 등급이 있었습니다.
우선 건강해야지 기동력이나 상황판단력을 보유해 ‘고객 확보’도 잘 할 수 있고 수입도 많이 올려 시쳇말로 ‘꽃거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티매오는 우선 시각장애우였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다보니 여러모로 불리했고 다른 건강한 거지에 비해 우선 경쟁력이 떨어졌습니다.
그저 ‘착한 고객’의 동정심과 자비심에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재수 좋으면 한푼 벌어 한끼 때우고 그렇지 않은 날은 쫄쫄 굶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당시 거지 중의 상거지 가장 등급이 낮은 거지였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뒹굴던 바르티매오였습니다.
삶의 가장 막장, 극단적 처지까지 몰린 그는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상황 극복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절대자 하느님, 크신 자비의 하느님 손길만이 자신을 구하실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바르티매오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메시아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기적같이 삶이 환해지는 은총을 체험합니다.
바르티매오의 인생 역전은 그냥 주어진 것이 절대로 아니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르티매오의 마음은 새 삶을 향한 절박함, 간절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런 그였기에 체면도 뒷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자비를 청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비와 능력만을 신뢰하며 주변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뿐만 아닙니다.
“그를 불러오너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바르티매오는 입고 있던 겉옷을 던져버리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다른 사람들 눈으로 보면 꼬질꼬질한 냄새가 풍기는 변변치 않은 겉옷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 입장에서 보면 거의 전재산, 아니 분신같은 겉옷이었습니다.
노숙할 때 때로 추위도 막아주고 때로 이불역할도 하던 소중한 삶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새로운 가치관이자 새 인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과거의 옷을 과감하게 벗어던진 것입니다.
큰 것을 얻기 위해서는 크게 버려야 함을 바르티매오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에게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바르티매오는 평생에 걸쳐 준비해왔던 대답을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바르티매오의 믿음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으로 응답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에게 육체의 빛, 세상의 빛만을 되돌려주신 것이 아니라 더 가치 있는 빛, 초자연적인 빛, 영적인 빛을 부여하십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은총의 놀라운 빛을 선물로 받은 바르티매오는 곧바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길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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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기도 때 분심 없애는 법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에서 바르티매오라는 눈이 먼 사람을 치유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특별히 오늘 마르코 복음에서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바라보는 특징적인 모습은 “수승님!”이라는 칭호에서 잘 나타납니다.
루카나 마태오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보기는 하지만 거기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오직 마르코 복음에서만 예수님을 “스승님!”, 즉 “라뿌니!”라고 부르는데 이는 요한복음에서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부르는 방식과 같습니다.
바르티매오가 나자렛 사람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기게 된 것은 배움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런 믿음에 이르게 하는 배움을 우리는 ‘기도’라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어떠한 기도가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만드는지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바로 예수님을 스승님으로 여기며 배우려 하는 자세입니다.
기도는 무엇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자신의 ‘생각’과의 싸움입니다.
생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이고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하와는 뱀과 대화하면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잊었습니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증가함으로써 결국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만듭니다.
생각을 결코 가벼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에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숲에서 다람쥐가 야생 비둘기에게 말했습니다.
“눈송이 하나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아?”
야생 비둘기가 말했습니다.
“무게가 거의 없어.”
다람쥐가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내가 전나무 둥치 바로 옆 가지에 앉아 있었는데, 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 심한 눈보라도 아니었어. 전혀 격렬하지도 않고 마치 꿈속처럼 내렸어.
나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앉은 가지 위에 내려 앉는 눈송이들의 숫자를 세었어. 정확하게 3,741,952개였어.
네 말대로라면 무게가 거의 없는 그다음 번째 눈송이가 내려앉는 순간 나뭇가지가 부러졌어.
그 순간 나는 재빠르게 다른 가지로 뛸 수 있었지.
만약 내가 하나의 숫자에 집중하여 정신 차리고 있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던 거야.”
기도는 이와 같습니다.
다른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 생각이 아무리 가벼운 생각이라도 결국엔 나를 죄로 떨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 생각들을 보고 있다면 괜찮습니다.
다람쥐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생각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숫자’에 집중한 것입니다.
수많은 명상의 전문가들조차 명상은 기도를 끊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라이프 코치이며 영적 카운슬러인 크리스틴 해슬러는 처음 명상 수련할 때를 기억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해도 생각을 중지시킬 수 없어서 계속 나 자신을 ‘형편없는 수행자’라고 비난했다.”
언플러그 명상 설립자 수지 얄로프 슈와르츠는 말합니다.
“명상하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고, 지루해서 견딜 수 없었다. 시간 낭비라는 생각만 들었다.”
독자적인 요가법을 창시한 브렛 라킨도 고백합니다.
“종아리와 발이 가장 고통스러웠으며, 등은 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런 와중에도 잠에 곯아떨어졌다.”
[참조: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류시화, 더숲]
이 명상의 대가들이 힘겨워했던 내용이 바로 우리가 기도할 때 느끼는 어려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은 생각만 없애려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우리 속의 원숭이들을 보고 있으면서 원숭이 생각을 안 하려 노력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게 잘 될까요?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냥 생각을 멈추려 한다는 것은 “절대 생각하지마. 특별히 원숭이 생각은 하면 안 돼!”라고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는데 “코끼리 생각하지마!”라고 하면 머리에 코끼리가 떠오릅니다.
이렇듯 생각은 멈추려 한다고 멈춰지는 게 아닙니다.
그 멈추려는 생각이 더 나고 그 멈추려는 주제가 더 떠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각할 수 있는 가치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과의 대화를 멈추려 했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등 뒤에 하느님을 바라보았다면 자동적으로 자아와의 대화는 끊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생각을 멈추려 하지 말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바라봐야 할까요? 바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냥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스승님!’으로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스승에게는 무언가 배웁니다.
우리가 교실에서 무언가 배우기 위해 선생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창문을 바라보며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이것이 왜 오늘 바르티매오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바라보며 “라뿌니!”라고 했는지에 대한 이유입니다.
분심을 끊는 일은 그저 내 앞에 예수님께서 스승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 그분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는 노력으로 좌우됩니다.
물론 자아와의 대화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 쉽게 그분에게 집중하고 배움을 얻게 되지는 않습니다.
기도의 어려움 때문에 금방 짜증이 나는 사람은, 망고 씨를 땅에 묻어놓고 한 시간, 두 시간이 지나는 데도 왜 망고나무가 생기지 않고 망고 열매가 맺히지 않느냐고 짜증 내는 원숭이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랜 노력이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잘 안 되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 중요하고 조금씩 성경 말씀을 통해 그분이 나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도할 때 분심을 없애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그리스도를 내 앞에 모시되 그분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바라보고 듣고 배우는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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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경 바르티매오라는 걸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바르티매오는 큰 영화를 누리다가 몰락한 가문의 사람으로, 눈이 먼 채 주저앉아 구걸까지 해야 하는 거지가 되어 버린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눈먼 바르티매오는 타락한 인류의 비참하고 무력한 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바르티매오는 예리고의 북쪽 문 곁에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는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나 군중에게는 그 소리가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렬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 인도되고 치유를 받는다.
군중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놀라운 기적 때문에 자신들도 그러한 광경을 보고 또 기회가 되면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이기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한 자세로 주님께 다가갔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의하지 않았던가?그렇기 때문에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 없다. 그렇기에 소경이 떠드는 것이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고 그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은 달랐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그것은 단순히 막연한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고, 필사적인 결단과 행동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갈 때 발에 걸리는 겉옷까지 벗어버렸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이 소경은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으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렇게 예수님께 믿음을 갖는 사람만이 용감히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분을 따라나서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은총은 우리의 응답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초대와 약속은 인간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신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여하에 따라 생명이냐 죽음이냐가 갈라진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보기로 삼아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우리의 성소를 이루는 것이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주님의 명령은 눈을 밝혀 주었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잘 보지 못했던 우리는 이제 하느님과 인간을 잘 알 수 있도록 볼 수 있는 힘을 받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어두운 정신에 빛을 주시고 영적인 눈을 열어주신 분을 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제 눈의 안개처럼 시각을 방해하는 어둠인 우리의 묵은 나를 떨쳐버리고 빛을 선택하여 빛이신 그분을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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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마르 10,46-47).”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9-52).”
1)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바르티매오의 간청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르티매오가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부르신 ‘부르심’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내적인 부르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그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간청한 ‘자비’는 ‘다시 보는 것’인데, 단순히 시력회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삶’을 뜻합니다.
바르티매오가 원하는 ‘새 삶’은, 자기가 메시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라는 말은, 그가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음을 나타내고,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라는 말은, 그의 소망이 대단히 간절했음을 나타냅니다.
앞을 못 보고, 부축하거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을 향해서 곧바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간절한 심정과 ‘능동적인 응답’을 잘 나타냅니다.>
2) 바르티매오의 경우와는 정반대가 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그들이 온 섬을 가로질러 파포스에 다다랐을 때에 마술사 한 사람을 만났는데, 유다인으로서 바르예수라고 하는 거짓 예언자였다.
그는 슬기로운 사람인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의 수행원 가운데 하나였다.
총독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말로 마술사를 뜻하는 그 엘리마스는 총독이 믿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들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가득 차 그를 유심히 보며 말하였다.
‘온갖 사기와 온갖 기만으로 충만한 자,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당신은 언제까지 주님의 바른길을 왜곡시킬 셈이오? 이제 보시오, 주님의 손이 당신 위에 놓여 있소.
당신은 눈이 멀어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즉시 짙은 어둠이 그를 덮쳐, 그는 사방을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때에 그 광경을 본 총독은 주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다(사도 13,6-12).”
여기서 ‘성령으로 가득 차’ 라는 말은, 거짓 예언자의 눈을 멀게 한 일은 바오로 사도가 개인적으로 한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실제로는 거짓 예언자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거짓 예언자의 눈이 멀었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인데, 자기 자신도 구원의 진리를 보기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도
방해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또 ‘한동안’이라는 말은, 그의 눈을 멀게 한 일은
시력을 완전히 빼앗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 일은 ‘처벌’이 아니라, 그를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거짓 예언자가 회개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회개했다면, 박해자 사울이 앞을 못보고 있다가 회개한 후에 다시 보게 된 것처럼(사도 9,18) 다시 보게 되었을 텐데,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했다면 그냥 그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3) 요한복음 9장에, ‘보는 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여기서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과 심판은 ‘내가’ 선택하는 일이 됩니다.
<장애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볼 수 있는데도, 보아야 할 것을 안 보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보라고 촉구하십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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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30.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10,51)
'영적인 눈!'
오늘 복음(마르10,46ㄴ-52)은 '예수님께서 예리코의 눈먼 이를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이 '치유기적사화'는 이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여정인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곧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앞두고 일어났습니다.
예리코의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7)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르10,48)
예수님께서 그의 간절함을 들으시고 그를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마르10,51ㄱ)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마르10,51ㄴ)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1052ㄱ)
'나의 영적인 눈은 어떠합니까?'
'무엇인가에 가리어져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특히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숨어 계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보지 못하고 있는 나,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구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나는 아닌지요?
다시 볼 수 있는 기적이 내 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우리도 주님께 간절히 청합시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독서가 전하는 말씀 안에 머물러 봅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1베드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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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2024.5.30> 아침을 여는 묵상(행 13:32~52절)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맛보면서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증인의 삶이어야 합니다.
✔ 복음으로 무엇을 결단해야 합니까?
➲ 복음의 핵심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합니다(32~41절).
바울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시 2:7)라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사 55:3절과 시 16:10절을 인용했습니다. ‘썩음을 당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은 다윗의 후손을 가리켜 약속한 것인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32~35절). 바울은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지만 죽어서 그의 몸이 썩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셨기에 썩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첫째는 죄 사함을 얻는 것이며(38절), 둘째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39절). ‘모세의 율법’ 즉, 짐승의 피를 흘리는 것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없으나 예수님을 힘입어 믿는 자는 의롭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설교를 마치면서 그런 불행한 일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40~41절).
다윗은 분명 위대한 왕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자신은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과 예수님은 결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바울이 안디옥에서 행한 설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것만을 충실하게 전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전해야 하는 것 역시 복음의 핵심만을 전해야 합니다. 자칫 많은 말로써 상대를 설득시키려다 보면 복음에서 한참이나 벗어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셔서 의롭다 하셨다는 이 복음의 핵심을 놓치지 말고,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복음의 핍박을 당당하게 이겨내야 합니다(42~48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 반응은 서로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마음이 열려 말씀을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유대인도 있었고, 이방인이지만 경건하게 살기 위해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음 안실에도...그 다음 안식일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43절)고 권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다음 안식일에도 모인 것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였습니다(44~45절).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절)며 복음의 대상을 이방인으로 바꿉니다. 이방인들은 이 구원의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했으며, 영생을 주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었습니다(48절).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반드시 그에 대해 저항하는 세력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반대와 저항에 부딪힌다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한 번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믿음을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지속적으로 은혜 가운데 있어야 믿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인간적인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하려 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맛을 보아야 온전한 구원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 겪는 모든 핍박을 당당하게 이겨내어 어두운 세상의 빛이 되는 증인의 사명을 끝까지 감당해 내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복음의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49~52절).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습니다(49절). 바울과 바나바에 대항한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시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냈습니다(50절). 이에 두 사람은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는...’ 행동은 이미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명하신 것입니다(마 10:14). 또한 이러한 행위는 저주의 행위입니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51~52절).
복음을 거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기쁨과 성령이 충만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여부에 따라 우리의 삶이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복음 안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모든 핍박과 환난을 이겨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행 13:32~52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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