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친구
팔십을 살았으니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 모르겠다.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친구를 생각해 본다.
권창은은 내가 68년 복학하자 동국대 불교학과서 고대 철학과로 편입 온 친구다. 그와 나 둘의 공통점은 찢어지게 가난한 점이다. 나는 대학시절 효자동 육군 대령 집 입주 가정교사로 숙식을 해결했다. 점심 굶는 날은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공저 <자본론>을 읽었다. 내용은 분배의 모순을 지적하고,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공산 사회를 예언한 것이다. 창은이는 강원도 횡성 촌놈으로 아들 하나 믿고 올라온 홀어머니는 도봉산 밑 토굴에 살았다. 옆집엔 청계천에서 피복노조 하다가 분신자살한 전태일 집이 있었다. 창은이는 주머니에 달랑 버스 토큰 두 개와 '백양' 담배 열 가치 밖에 없었다. 도시락은 김 열 장, 멸치 볶음 한 숟갈, 병 김치가 전부였다. 둘은 경제적으로는 궁했으나 입신양명 위한 법학이나 상학 같은 학문 배우는 학생은 속물로 여겼다. 칸트와 헤겔, 노자와 장자에만 열 올렸다. 그게 우리의 청춘이었다. 밤늦게 도서관 앞 잔디밭에 서면 건너편에 빤히 청량리 588 불빛이 보였다. 둘은 워낙 주머니가 가벼워 설혹 여학생이 허락해도 데이트할 자금이 없어 말로만 허기를 채웠다. 나는 신세계 백화점 다니던 대령 처제가 안암동 축제가 궁금해서 물어봐도 돈이 없어 초청을 못했다. 창은이는 호랑이 배지 덕택에 만원 버스에서 S대 여학생과 눈 맞췄던 일이 딱 한번 있었는데, 이야기는 맨날 그 이야기만 했다.
이렇게 대학을 마치고 창은이가 나보다 한 학기 먼저 졸업했는데 취직이 문제였다. 4년간 장학금 받았는데, 취직이 되지 않았다. 그래 어느 날 둘은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잔을 앞에 놓고 백양 담배 꽁초가 다 타서 손가락이 뜨거워질 때까지 빨면서 토론을 했다. 결론은 서해 어느 섬 공사판에서 일하는 형님 찾아가서 허드레 일 도와드리는게 좋겠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몇 달 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지 장사한다며 새우젓 한 드럼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장사는 아무나 하나? 그래 그에게 조언을 했다. '아무래도 세상은 우리처럼 칸트 헤겔, 노자 장자만 공부한 사람 필요 없는 모양이다. 우리가 잘하는 건 논리학처럼 따지기 잘하는 것, 공자 맹자 배웠다고 道를 논하는 것, 그리고 자존심 강한 것 밖에 없잖아? 하늘이 우릴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갈 곳은 거기 밖에 없다. 취직 포기하고 대학원 가라! 치사하지만 안면에 철판 깔고 교수 바짓가랑이 물고 늘어져라. 새우젓 판 돈으로 한 학기 등록하면 장학금은 나올 것 아니냐. 날 잡아 잡수쇼 하면 교수들이 어쩌겠나? 죽이겠나 살리겠나?
이렇게 그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두어 학기 끝나자 희랍 유학을 떠났다. 그가 연구실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한 건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떠날 때 경기여고 나온 영문과 미인 대학원생 하나가 동행이었다. 둘은 10년 후 남자는 아테네대학 철학박사, 여자는 문학박사로 귀국했다. 나는 '전화가 있어야지? 그래야 학교에서 연락이라도 취하지?' 큰 마음먹고 백색전화 하나 놓아주었다. 당시 경제신문 기자인 나는 간혹 쌀이 바닥나 아내 눈에 이슬이 맺히게 하던 시절이다. 어쨌든 권이 모교에서 강의 얻자, '이젠 살게 되었구나. 부디 잘 살아라' 하고 나는 축원을 해줬다. 그런데, 어느 날 학보에 이상한 글이 실리기 시작했다. 전에 좌파 교수가 하나 있었는데, 철학박사가 오니 그가 주도권을 권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래 나는 권과 어느 날 도봉산 등산로 입구에서 아침 10시부터 오후 8시까지 장장 10시간 토론을 벌였다. 만리 타향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그의 사상은 거의 빨갱이 수준이었다. 같이 간 영문과 대학원생과 동거할 공간도 없었고, 10년간 식도 올리지 못하고 살다가 귀국 직전에사 겨우 그곳 대사 주선으로 식 올리고 왔다고 했다. 그는 거지로 살았던 것이다. 나는 친구로서 그의 사정을 마음 아파했고, 그는 친구로서 이후 학교신문에 그런 글을 싣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날 두 사람이 토론하며 피운 백양 담배가 몇 갑이었던지 모르겠다.
그런데 '젊어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은 말짱 헛말이다. 젊을 때 지나치게 고생하면 늙어 불치병 오기 쉽다. 그는 98년 봄에 악성 뇌종양 진단이 나왔다. 그렇게 고생해서 박사 된 지 불과 몇 년 만인가. 죽 쒀서 개 준다는 생각이 났다. 죽기 전에 먹고 싶은 거나 먹으라고 친구들에게 추렴해서 30만 원을 봉투에 넣어 가봤다. 집은 상계동 열몇 평 좁은 아파트인데, 겨우 엉덩이 비비고 앉을자리 밖에 없다. 가구도 없고 희랍서 가져온 초라한 기념품 몇 개 책상 위에 놓여있었다. 집에서 상황버섯을 달여먹고 있는데, 부인이 찾아온 손님에게 내놓을 게 없으니, 올리브 열매 몇 알과 시든 과일 몇 쪽 내놓고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진다. 강의하느냐 물어보니, 강의 그만두고 희랍 비극 번역한다고 했다. 당시 희랍어 작품은 대개 영역된 걸 한국어로 번역한 이중 번역이다. 부인은 직역이라 정확할 것이다. 경기여고 동창회에서 '자랑스러운 경기여고인' 표창패를 받은 부인이다. 그러나 살림이 이토록 어려웠다.
그 뒤 권 박사는 병세가 호전되어 다시 학교에 나갔다가 얼마 후 병이 재발했다. 그때 두 번째로 동기들에게 연락해서 봉투 만들어 안암동 병원 찾아갔다. 죽기 직전에 그가 보여준 행동이 인상 깊다. 골수암이 깊어 회복이 어렵자, 그는 철학자답게 죽음을 초월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운명에 비굴하지 않았다. 나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했다. '아니 이 사람아 내가 누구에게 욕 얻어먹으라고 그런 부탁 하나? 그러자, '골수암이 지금 치료한다고 낫는가? 글쎄 하나 줘' 했다. 그 뜻은 우리 둘이 밤늦은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담배 피우지 않았나. 그때 생각하며 마지막 담배를 자네와 한 대 피우고 싶단 것이다. 그래 사람 없는 데 데려가 담배를 주었다. 이런 일도 있다. 술 한 잔 사겠다고 전화를 했다. '이 친구야! 같이 술 먹고 내가 누구한테 욕 뒤집어쓰라고?' 그러자, '아니야! 내가 자네한테 꼭 술 한 잔 사고 싶어' 조용한 목소리였다. 그 뜻은 알만했다. 권은 딱 한 잔 마셨고, 계산은 굳이 자기가 했다. 그게 이승의 마지막 자리였다.
며칠 뒤 부인 연락을 받았다. 상계동 병원에서 그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인이 내게 물었다. 차마 아내가 환자인 남편 호흡기 떼라는 말을 못 했을 것이다. 내가 '알았습니다. 마지막 순간 육체는 정지해도 의식은 뚜렷하다 하니 내가 권박한테 마지막 인사말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권에게 말했다. '권 박사! 지금 자네는 숨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 단말마의 고통을 겪고 있네. 무척 괴로울 걸세. 그러나 이 고통을 견디면 다시 소생할 가능성이 있으면 모를까 이건 무익한 고통이네. 자네도 괴롭고, 지켜보는 부인도 괴롭고, 친구인 나도 괴롭네. 고통의 시간을 줄이는 게 합리적일세. 잘 가게! 다음 세상이 있다면 만나세. 영원히 자네를 잊지 못할 것이네' 그리고 의사 불러 호흡기를 떼었다. 그는 딱 두어 번 숨을 내쉬고 허망하게 갔다. 영정은 철학과 동기 권 회장 차에 싣고 갔고, 장지는 파주 희랍정교회 묘지였다. 자리는 내가 잡아놓았다. 그날 장례미사를 집전한 희랍 정교회 신부님 생각난다. 그분은 <대부>란 영화에서 본 검은 신부옷차림에 가슴까지 내려온 백발이 성성했다. 그 모습은 성스러움 자체였다. 고요하고 장엄하던 미사음악도 그처럼 아름다울 수 없었다.
첫댓글 참으로 대단한 친구중에 한분 이었군요?다 팔자가 있는 모양 입니다.구구절절이 가슴에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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