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Ⅲ-56]아름다운 사람(42)-짚풀과 평생을 사신 분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성균관대 가는 골목에 우리에게 소싯적엔 너무 익숙했으나 지금은 생경하기 이를데 없는 ‘짚풀생활사박물관’이란 곳이 있다. 짚풀과 관련한 생활용구, 농기구, 민속자료 등 유물 9천여점을 소장하고 1993년에 문을 연 개인박물관. 인병선(90) 이사장하면 모르는 분이 태반이겠지만, <껍데기는 가라>라는 명시를 남기고 39세의 나이로 요절한 신동엽 시인의 부인이라고 하면 ‘아아’할 분들이 많을 터. 그 박물관을 분기마다 한번씩 진찰을 받고 처방전을 받는 의원을 가는 길에 어제 모처럼 들렀다.
이사장님을 10여년 전에 잠깐 뵙고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그분을 뵐 것은 기대하지 않았고, 그냥 그때의 향훈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지난 3월쯤 하늘이 무너지는 참척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사이자 시인인 큰 아드님(신좌섭)이 돌아가신 것이다. 신 시인의 장남은 알지 못하나 어머니인 이사장님의 고통이 얼마나 자심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의사로서 좋은 일을 많이 했다고 오래 전부터 듣고 있었는데, 요절을 한 셈이다. 본인도 10대의 아들을 잃은 후 그 슬픔을 극복하고자 자연스레 아버지의 유지인양 시인이 되었다는데, 그 할머니는 어쨌을까?
박물관 근처 <동양서점>이라는 오랜 책방이 있는데, 이사장이 이화여고 3학년때 단국대학생으로 휴학중 서점에서 일하던 신동엽 시인과 연애를 한 후 서울대 철학과를 중퇴하고 시인의 고향 부여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했다(사실은 돈암동의 어느 책방이라고도 한다). 현재 부여에는 시인의 생가터에 <신동엽문학관>이 잘 꾸며져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소설가 김형수씨가 관장.
이사장은 남편이 숨진 이후 시인의 아내라는 ‘멍에’에 허덕이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산업화 정책에 따라 우리 곁에서 급속히 사라져가는, 우리 조상들의 문화유산인 짚풀문화 보전에 나섰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를 최초로 연구한 학자가 되었고, 관련 책도 여러 권 펴냈다. 우리 조상들이 의식주에 필요한 도구부터 일생 의례, 신앙, 생업, 놀이에 이르기까지 넓게 짚풀을 활용해온 것쯤은 모두 잘 알리라. 농경지역에서는 알곡을 털어낸 볏짚을 주로 사용하고, 도서 산간지역에서는 그 지역 고유의 풀을 채취하여 가공하고 쓰임에 맞는 도구를 제작해 왔다. 이 문화유산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정말로 어불성설이 아닌가. 이사장이 아니었다면 그 ‘문화의 맥’이 끊겼을 것이 뻔한 일이니, 대단한 애국자라 할 것이다. 박물관에서는 제작방법에 대한 체험학습도 하고, 일본 등 외국의 학생들이 수시로 견학을 오기도 한다. 귀하고 자랑스러운 업적을 쌓으신 것이다.
대학 3학년때인가, 막역한 친구들과 부여를 일부러 방문, 금강변에 있는 신동엽시비를 물어물어 찾아가 묵념을 한 기억이 뚜렷하다. 창비에서 나온 당시 비매품이었던 <신동엽시전집>을 인사동 통문관에서 구입하여 독파한 뒤끝이었다. <산에 언덕에>라는 시가 새겨진 시비를 어루만지며, 나는 그때 왜 눈물을 흘렸을까. 민족시인의 짧은 삶이 안타까워였을 것이다. 참 오래된 일이다. 그 얘기를 들려드리니 ‘고맙다’며 희미하게 웃던 이사장님이 사는 게 아닐 것같다. 남편의 일이야 오래된 일이라 슬픔이 엷어졌겠지만, 손자에 이어 큰아들까지 앞을 세웠으니 이 노릇을 어찌할꼬? 어찌 하늘이 원망스럽지 않겠는가. 농업경제학자로 유명한 아버지 인정식 교수의 납북은 개인사를 또 얼마나 힘들게 하였던가. 지난해 <신동엽문학관> 생가에 걸려있는 이사장님의 시 <신동엽생가>를 침묵으로 읽으며 눈물이 난 까닭이다. 전문을 싣는다.
<우리의 만남을/헛되이/흘려버리고 싶지 않다//있었던 일을/늘 있는 일로/하고 싶은 마음이/당신과 내가/처음 맺어진/이 자리를/새삼 꾸미는 뜻이다//우리는/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언제까지나/살며 있는 것이다> 글씨는 쇠귀 신영복 선생이 흔쾌히 써주셨다고 한다. 그렇다. 시인부부뿐만 아니라, 장삼이사 우리의 삶도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 가야 되지 않겠는가.
시인남편과 사랑이 이리 끈끈하듯, 아들과 손자사랑도 지극했을 터. 단장斷腸의 슬픔은 이를 말하리라. 수년 전 <하늘이여>라는 TV드라마가 있었지만‘하늘이여’라는 신음어가 절로 나오지 않는가. 우리의 귀중한 짚풀문화를 계승 발전한 공로만도 이리 크거늘, 참으로 야속한 일이다. 아름다운 할머니 인병선 이사장님이 심지를 더욱 강건하게 가지시길 빌 뿐이다.
끝으로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와 <산에 언덕에>라는 시의 전문을 전재하지 않을 수 없음을 혜량하시라.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가라/동학년 곰나루의/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그리하여, 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껍데기는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그리운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맑은 그 숨결/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 지네/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 지네/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울고 간 그의 영혼/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