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9일(월) 욥기 20:1-11 찬송 400장
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3.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8.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9.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
10. 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
11. 그의 기골이 청년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개역 개정)
20장은 소발의 2차 변론이면서 동시에 본서에 나오는 그의 마지막 변론이다.
왜냐하면 엘리바스나 빌닷과는 달리 세 번째 주기의 논쟁에서는
그의 변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1차 변론시 전통적인 교리주의자로서 욥을 정죄했던 소발은(11장)
오늘 말씀에서도 역시 악인은 모두 징벌받으며
고로 고난받는 모든 자는 하나님의 징벌에 처해진 악인이며
현재 고난당하고 있는 욥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악인이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악인의 일시적인 번영을 기록한 1-11절과
악인의 운명은 필연적인 파멸로 끝남을 기록한 12-19절
그리고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 기록된 20-29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변론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지극히 인본주의적이고 도식적으로 판단하는 주관적인 견해이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유한한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려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2-4절)
그럼에도 그는 이러한 편협하고 도식적인 잘못된
인과 응보의 원리를 기계적으로 욥에게 그대로 적용하여
자기의 독단적이며 편협한 지식을 따를 것을 강요하고 있다.
이는 소발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는 종말론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현실 속에서 간혹 고난을 통해 사랑하는 자들을 연단시키기도 하고
또다른 섭리 속에서 악인의 멸망을 잠시 유보하시기도 한다는
중요한 진리의 한 단면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7절)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소발은 악인이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멸망할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악인이란 물론 욥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여기서 소발의 감정이 얼마나 격하여져 있는지 보게 된다.
2절에서 그 스스로가 언급하고 있듯이 소발은 매우 흥분 되어 있었다.
그가 보기에 욥은 자기의 잘못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있는데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회개를 촉구하는 친구들을
책망하고 모욕하려는 것처럼 보였고
그것이 그로 하여금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욥을 향해 악인, 불경건한 자라고 정죄하는 것은 물론
친구로서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를 쏟아 붓고 있다.
이 정도 되면 ‘어쩌다가 이들이 이렇게까지 되었나’하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비뚤어지고 어긋난 관계는 대단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서로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편견과 논쟁으로 인한 분노 때문이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의 분노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위로자로서의 자신들의 본분을 잊고 도리어 욥을 정죄하는 일에 몰두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은 분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인지 알게 된다.
분노는 나의 본분을 잊고 악에 빠지게 하는 그릇된 감정이다.
민수기 20장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므리바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목이 마른 고로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하며 따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들이 이런 불평과 불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출애굽하는 순간부터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애굽에서 고된 종살이를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만 배운 듯하다.
하지만 모세와 아론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언제나 인내와 온유함으로 대하였다.
특히 모세는 얼마나 온유하였던지 성경은 그 온유함이
온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증거하고 있다.(민12:3)
그는 본래 감정이 격한 자로 동족이 애굽인에게 학대받는 것을 보고
그를 쳐죽였다가 처벌이 두려워 광야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광야에서 40년 간 목자로 지내면서 그는 인내와 온유의 법을 배웠다.
그 결과 그는 온유의 대명사처럼 되었고
그러한 온유함으로 패역한 백성들을 잘 이끌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므리바에서는 참지 못하고 크게 분노하였다.
백성들이 해도해도 너무 한다고 여긴 것 같다.
그리하여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이나 내리치면서
무리를 향해 독설을 퍼붓고 말았다.
이러한 모세의 분노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정작 그 분노의 발단이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은 해는 없다.
해를 입은 것은 모세와 아론이다.
하나님은 백성들 앞에서 분노하며 혈기를 부린 모세로 하여금
그가 그토록 염원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
그렇게 온유하였던 모세는 한 순간 분을 이기지 못함으로 치명적인 해를 입었다.
이렇게 분노는 자기 자신을 해하는 일이다.
그것도 치명적인 해를 입힌다.
그렇기에 성경은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잠14:17)
또한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말씀한다.
이는 분노가 우리들이 절대적으로 피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릇된 감정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거하여 준다.
그러므로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림으로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37: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