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741
1월20일[연중 제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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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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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UWKirCJyWoo
[서울대교구 김윤욱 루카 신부님 집전(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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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우리의 신앙은 부단히 건너가고 넘어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풍기는 신성을 확인했습니다. 그분의 말씀과 삶에서 영원한 생명이 흘러나오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마침내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습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군중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명성을 듣고 몰려왔습니다. 그분의 신선한 말씀과 거침없는 행동에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과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깊지 않았습니다. 그저 신기한 얼굴로 호기심과 함께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친척입니다. 그들은 사실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세주 하느님을 친척으로 두었으니 말입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살았으니, 그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친척들은 설마 설마 하며 예수님을 그저 피붙이요, 친척으로만 바라봤지,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메시아의 광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관심과 몰이해로 인해 가장 가까이 다가오신 메시아를 몰라보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놀랍게도 친척들은 메시아를 몰라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출가를 하시고, 제자들을 선발하여 본격적인 복음 선포 활동에 매진하셨는데, 그런 예수님의 모습에 친척들은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기쁘게 수용하고 인정하며 그분께 대한 신앙을 고백해도 모자랄 판인데, 그분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그분을 미쳤다고 여기며, 그분을 붙들려고까지 하는 친척들의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합니까?
신앙인으로서의 연륜이 쌓여갈수록, 더 노력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파스카를 위한 노력입니다. 파스카는? 건너가다, 넘어가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부단히 건너가고 넘어가야 합니다. 유아기적인 신앙에서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기복적인 신앙에서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신앙으로, 어색하고 과도한 신앙에서 상식적이고 적절한 신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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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사목활동에 깊이 매진하셨다는 반증입니다!>
1846년 돈보스코(1815~1888)가 32세의 혈기왕성한 젊은 사제 시절 때 일이었습니다. 당시 돈보스코가 시작한 오라토리오는 큰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 400여 명 가까이 되었지만, 오라토리오는 계속 떠돌고 있었습니다. 묘지에서 방앗간으로, 작은 헛간에서 풀밭으로...
앞날이 창창하고 유능한 돈보스코가 본당이나 병원 등 안정된 사목을 뒤로 하고, 갈곳 없는 아이들 수백명과 토리노 뒷골목을 전전하며 깔깔거리는 모습을 본 토리노 교구 동료 사제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습니다.
1846년 연초에 개최된 토리노 교구 사제 모임 때 몇몇 사제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혹시 돈보스코가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은 아닐까?
교구에서는 돈보스코의 정신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돈보스코와 절친했던 빈첸조 폰자티 신부와 나시 신부를 진상 조사 위원으로 선정해 파견했습니다. 교구는 정확한 진단과 정밀검사를 통한 치료 계획까지 세워놓았던 것입니다.
토리노 시당국의 눈초리도 곱지만은 않았습니다. 안그래도 비상시국인데, 수백 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경찰국장이
돈보스코를 호출해 호통을 쳤습니다.
“대체 이 부랑아들이 신부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들을 자기 집에 내버려 두시오. 아이들에 대한 책임을 지지 마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화가 미칠 것이오!”
돈보스코가 물러서지 않자 경찰국장은 바로 그날부터 경찰관들을 파견하여 오라토리오를 감시하게 했습니다. 후에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이 된 미켈레 루아 신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미사 복사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는 제게 본당 주임 신부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 어디 가니?”
“돈보스코 오라토리오에 가요.”
“너 아직 모르고 있었니? 돈보스코는 심각한 정신질환에 걸렸단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주임 신부님의 말씀은 가시처럼 제 마음 속으로 깊고 아프게 파고 들었으며, 형언할 수 없는 큰 슬픔으로 밀려왔습니다. 저는 오라토리오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돈보스코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돈보스코가 미쳤긴 미쳤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랑에 미친 것입니다. 그분은 미칠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돈보스코가 앓고 계시다는 병은 바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랑병이었습니다.>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가난한 청소년들을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올랐던 돈보스코의 모습을 묵상하다보니, 너무나 안일하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는 제 모습이 교차되어 큰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예수님 역시 돈보스코와 똑같은 오해를 받으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허락해주신 기간을 지극히 제한적이지, 당신 손길이 필요한 백성들은 끝도없이 구름처럼 몰려오지, 아무리 외쳐도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지...
당신 양떼를 향한 사목적 열정으로 활활 불타오르신 예수님께서는 침식마저 잊고 사목에 헌신했습니다. 하루를 백년, 천년처럼 그렇게 강도높게 사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 앞에 감사하고 환호하고 박수갈채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잔뜩 꼬인 시선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친척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코 복음 3장 21절) 예수님께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은 그만큼 그분께서 사목활동에 깊이 매진하셨다는 반증입니다. 마치 오늘 하루가 마지막인 것처럼 여기셨고, 순간순간 지니고 계셨던 에너지를 남김없이 활활 불타오르게 하셨다는 표시가 미쳤다는 소문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그런 열정이 솟아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꼭 필요한 일, 정말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 이웃과 하느님을 위한 일을 향한 강한 열정이 샘솟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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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U7-3xyJWh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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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행복하여지려면 묵상을 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 말씀은 매우 짧습니다. 짧지만 아주 대조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죠. 예수님을 좋아하는 군중들과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쳤다고 여기는 예수님의 친척들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유다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기 때문에 자기들에게도 그 영향을 받을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좋은 일을 하시는 것들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나의 선택일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 사람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좋은 면을 더 많이 보면 됩니다. 어쩌면 이 과정이 묵상 기도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 씩 받기로 약속하고 착한 포도밭 주인에 의해 고용된 일꾼들은 내가 일한 시간보다 한 데나리온의 가치를 더 묵상해야 했습니다. 그러면 일과 주인이 감사하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우리 뇌는 잘 속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아주 신 레몬 반을 잘라서 한 입을 딱 깨물어서 레몬즙이 여러분의 입에 가득히 차는 그런 상상을 해 보십시오. 내가 직접 지금 레몬을 먹은 게 아닌데, 상상만 했는데도 뇌는 진짜 먹는 건 줄 알고 침이 나오게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어떤 상상을 많이 하느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건의 좋은 이미지가 쌓이기도 하고, 나쁜 이미지가 쌓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된 것은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안 좋은 생각으로 자꾸 씌워서 그렇지, 뇌를 속여서 그런 사건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담 프로스트의 비밀 정원’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어요. 아기는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기억과 두 분이 돌아가신 기억으로 말을 못 하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두 이모의 집에서 피아노를 쳐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옆집에 마담 프로스트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이분이 약간은 좀 마술적인 행위를 합니다. 약을 타서 어렸을 때의 음악을 들려주면 그때의 기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처음은 엄마가 아빠에게 폭행당하는 기억이 있었지만, 사실 두 분은 레슬링으로 돈을 버는 분들이었습니다. 집에서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고 실제로 두 분은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은 사고로 한 번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기억은 어쩌면 우리가 조작한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영화 ‘기억의 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잊기 위해 자기 스스로 기억을 지워버리기도 합니다. 인간은 그렇게 자기를 속이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주셨다면 그것을 좋은 목적으로 쓸 수도 있어야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오프라 윈프리입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기의 삶이 너무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기가 싫었는데 감사 일기를 쓰다가 보면 보니까, 삶에 감사한 것들이 더 많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삶을 보는 시각이 바뀐 것이고 하루하루 ‘오늘은 어떤 좋은 일이 생길까?’의 기대감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 위해 담배에 안 좋은 이미지를 덮어씌웠습니다. 담배 때문에 군대에서 고생한 생각, 담배를 피우며 멋지게 보이려다 기침해서 창피당한 기억들. 담배를 굳이 피워서 그런 기억을 되새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담배를 안 피우게 되었습니다.
어떤 것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거나는 우리 선택입니다. 틱 장애 아이 엄마의 감사 일기: “아이의 틱이 시작된 후 늦은 감은 있지만, 지금이라도 뭐가 힘들었는지 어떨 때 행복한지 아이의 마음에 관심을 두고 들어주려고 하게 되니 감사합니다.”
감사 일기를 안 썼으면 아이가 틱이 생긴 순간은 인생에서 아주 짜증 나고 화가 나는 순간이 됩니다. EBS, ‘엄마가 울었다’에서 아이들은 한 달간 부모님을 칭찬하라는 숙제를 받습니다. 그렇게 하니 집이 천국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선택입니다. 그분의 무엇을 더 기억해야 그분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 나를 위해 하신 희생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면 그만큼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됩니다. 기억은 바뀔 수 있습니다. 아니 바꿀 수 있습니다. 좋은 많은 면 중에 안 좋은 것 하나만 가지고 예수님을 미워했던 그분의 친척들처럼 되면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읍시다. 그러면 좋은 면이 많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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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상을 통해서 가슴이 찡한 ‘추도의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이 민주화를 위해서 헌신하다 숨진 젊은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하던 모습이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해서 오열하던 모습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슬픈 영결식에서 바람에 날리던 노란리본을 보았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떠나셨을 때입니다. 추운 겨울임에도 조문행렬이 명동 주변을 가득 매웠습니다. 그분께서 보여주신 삶의 발차취가 컸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슬프지 않은 죽음은 없습니다. 이 생에서의 마지막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안타까운 죽음이 있습니다. 피지 못한 꽃이 바람에 떨어지듯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죽음이 그렇습니다. 이제 막 자리를 잡고 편안하게 삶을 살려고 했는데 세상을 떠난 죽음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전사 통지서를 받아야 하는 부모와 아내의 슬픔이 그렇습니다. 벌써 4년 전입니다. 저는 코로나 팬데믹의 한 가운데서 어머니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장례미사에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창 신부가 제 대신에 문상을 받았고, 장지까지 함께 했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시고 교구장님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머니 장례미사 잘 했으니 너무 힘들어 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작년 10월 저는 아버지와 함께 모셔진 어머니에게 갔습니다. 부모님이 있는 추모관에서 연도를 바쳤습니다.
오늘 다윗은 사랑하는 친구 요나탄과 사울 왕의 죽음을 애도하며 비탄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살해되어 언덕 위에 누워 있구나.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힘이 세었지. 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생각하며 울어라. 그는 너희에게 장식 달린 진홍색 옷을 입혀 주고 너희 예복에 금붙이를 달아 주었다.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 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아직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총입니다.
위령미사의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되고, 죽은 이들에게는 희망을 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신앙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겨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올 영원한 생명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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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3,20-21 : 예수님의 친척들의 몰이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고, 또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바로 나의 가족들이다. 그것 때문에 어떤 때는 아무런 부담 없이 농담을 하고, 또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가족들이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있다. 나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해해 주리라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우리는 많이 체험한다.
예수께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을 통하여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셨고, 이것을 본 군중들은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은 그 행적들을 비하시키며 악령의 힘으로 기적을 행한다는 등 비방을 하였다(22절).
여기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붙잡아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해 몰려온 것이다(21절). 아마도 예수께서 고향, 친척, 직업을 모두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시기 때문에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으셨을 것이다.
사실 그 형제들과(요한 7,5) 고향 사람들은(마르 6,1-6)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 친척들의 모습이 바로 그렇다. 친척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잘 알 것 같았지만 사실은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의 업적을 보고 경탄하기보다는 악의에 찬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모습이 없는가? 한 사람이 완전하게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인간은 서로 부족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채워가며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러기에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가 나름대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완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이러한 중상이나 비방은 훨씬 줄어들 수 있지 않겠는가 생각된다. 그것은 이제 내가 다른 사람을 볼 때에 그에게서 무엇인가 좋은 점, 장점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사랑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할 우리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하는 제2의 그리스도인 우리는 이웃의 명예훼손이나 중상모략보다는 어렵고 곤란한 이들에게는 위로와 도움을, 기쁜 일이 있을 때에는 진정으로 축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고통과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 힘들더라도 옳고 그른 진실과 허위를 가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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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7,5). 아마도 요한 복음의 이 말씀이 오늘 복음 말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가 될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친척들은 그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다 커서 직장도 구하지 않고, 어느 날 집을 나가더니, 어부들과 패거리를 만들어 그들의 스승이라고 말하며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바라보았다면, 사람들의 소문만 듣고 예수님을 평가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한 번만이라도 진심으로 들어 보았다면, 그분의 친척들은 예수님께서 미치셨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사이가 그 누구보다도 멀리 떨어진 사이가 될 수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이 그 사람 안에 담겨 있는 진심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진짜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며, 들으려는 마음까지도 없애 버립니다. 가깝다고 생각되는 관계일수록, 또 소중한 관계일수록, 잘 안다는 선입견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누군가에 대하여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가장 모르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잘 들어주고 진심을 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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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미쳤다고...>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복음말씀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는 구절은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21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의 친척들은 그가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붙잡으러 나섰다."입니다. (원문에는 '생각했다.' 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친척들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란 뒤의 31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는 소문을 듣고 걱정은 하셨겠지만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서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거나 미워하거나 안 믿는 사람,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
요한복음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은 마귀가 들렸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당신은 마귀가 들렸군.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요한 7,20) "우리가 당신을 사마리아인이고 마귀 들린 자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소?"(요한 8,48) "이제 우리는 당신이 마귀 들렸다는 것을 알았소(요한 8,52)." '마귀 들렸다.' 라는 말은 '미쳤다.' 라고 번역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미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바오로, 당신 미쳤구려.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미치고 말았군."(사도 26,24)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웃고 미워하고 놀리고 미쳤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8-19)."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 사람들의 욕망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들과 같은 편이 아닌 다른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다른 편'이 아니라 죽여 없애야 할 해로운 존재로 생각합니다. 추구하는 것이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그곳 사람들의 마지막 범죄는 롯을 해치려고 했던 일입니다(창세 19,9). 온통 다 타락했던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의인이었기 때문에, 자기들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그래서 롯을 싫어하고 미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재판을 받을 때 이런 말로 고소당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흑사병 같은 자로서,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 사이에 소요를 부추기는 자며 나자렛 분파의 괴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24,5)
'흑사병 같은 자' 라는 말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박해를 받은 이유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냥 내버려두어도 상관없는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도 해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것이고, 교회를 박해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박해도 사실 그런 이유였습니다. 서학 때문에 조선이 무슨 피해를 입어서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너무 낯설고 새로웠기 때문에, 그리고 가치관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조선 사회에 해로운 존재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박해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로부터 무슨 피해를 입은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무슨 잘못을 알고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예수' 라는 자가 싫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 싫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과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옳지 않다고 하시니까, 지금 자기는 올바르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시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은 너무 힘들고 싫고 피곤하니까 자기에게 해롭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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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은 ‘흑사병 같은 자’ 취급을 당하는 것을 각오하는 생활입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서 모두 다 한통속이 되어서 양심을 거스르는 어떤 일을 할 때, 집단 따돌림 당할 각오를 하고 양심선언을 하면서 내부 고발자로서 고난의 길을 걸을 것인가, 함께 한통속이 되고 공범이 되어서 편하게 살 것인가? 다른 길을 선택해서 고생할 것인가, 같은 길을 선택해서 편하게 살 것인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은 좁고 험해서 가려고 하는 사람이 적고, 멸망으로 가는 길은 넓고 편해서 그리로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마태 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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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참된 성소를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마르코 3,20)
열두 사도를 뽑으신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십니다. 군중도 뒤를 따르고 소문을 들은 이들도 모여듭니다. 이제는 유형의 성전이 아니라, 주님이 계시는 곳이 곧 성전이고 지성소가 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코 3,21)
그런데 예수님께서 계신 집에는 제자들과 군중만이 아니라, 그분을 붙잡으러 온 친척들까지 모여듭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에 놀라 달려왔을 겁니다. 이 대목 바로 뒤에 베엘제불 논쟁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이미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마귀 두목에게서 나오는 것으로 속단해 퍼뜨린 듯하지요.
친척들이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만큼 적대적이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친척인 예수님의 안위에 대한 염려가 앞섰겠지요. 혹 가문에 수치가 될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도 있을지 모르나 결국은 예수님을 위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지금 예수님 주변에 모여든 이들의 의도와 지향을 관상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메시아와 함께 출세와 영광을 바라는 이가 없지 않았을 것이고, 군중은 치유건 구마건 위로건 무언가 얻어내고자 왔습니다. 친척들도 인간적인 걱정이 앞섰던 것이고요.
이 모든 동태를 살피러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마르코 3장 22절)의 의도야 너무 뻔한 것이겠죠.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온전히 찬미와 영광을 바치며 마음을 다해 섬기는 이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유형의 성전 안에 존재하는 성소, 지성소와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참된 성막을 비교합니다.ㅜ"그분께서는 사람 손으로 만들지 않은, 곧 이 피조물에 속하지 않는 더 훌륭하고 더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히브리서 9,11)
인간 대사제는 지파에 따라 성소와 지성소에 접근할 지위가 주어집니다. 그는 율법이 정한 짐승의 피를 뿌려 사람들을 정화하지요.
예수님은 당신 피로써 온 인류를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분은 사람이 만든 성소가 아니라, 모상이고 그림자에 불과한 성소의 원형,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거처에 들어가셨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공동으로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성전을 짓고 집회와 친교의 장소로 삼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의도와 지향을 가지고 성전에 모여 각자의 바람을 아뢰고 청원을 올립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염원부터 세상 모든 피조물을 위한 기도와 헌신, 그리고 순수히 하느님을 섬기는 사랑까지 주님이 계신 곳에 모여드는 이들의 모습은 참 다양합니다.
당시 종교제도 밖에 계셨던 예수님께서 목숨을 바쳐 아버지께 올리신 제사가 온 인류를 위한 완전한 희생제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장소도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러워하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성문 밖 해골터라 불리는 골고타 언덕이었지요.
우리가 겪고 있는 인류재앙적 감염병 사태가 "진리와 영 안에서 예배하는"(요한 4,23참조) 때를 앞당겨 준 듯합니다. 눈에 보이는 유형의 성전에 갈 수 없어도, 하느님께서 거하시는 우리 각자가 성전이고, 우리가 머무르는 공간이 주님께서 계시는 거룩한 지성소임을 절절히 체험하고 있으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주님과 거룩하고 아름다운 지성소 안에 들어가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 품에 기대어 사랑을 속삭이고, 그분 말씀에 귀 기울이며, 세상의 긴급한 필요를 위해 그분께 아룁시다.
우리 지향의 시작이 무엇이었든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통해 차츰 정화되고 성화되어, 우리도 예수님처럼 진정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영혼이 되어갈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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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코 3장 21절)
'가짜뉴스!'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이유는,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미쳤다는 것은 나쁜 영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데, 누가 그런 소문을 냈을까?
분명 예수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사람들, 예수님을 낙마시키고 싶었던 사람들, 곧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내지 않았을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어서 예수님과 그 일행들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는데도, 예수님에 대해 나쁜 소문을 내고 다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가지도 않으면서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닙니다.
요즘 우리 안에서 자주 회자되고 있는 것이 '가짜뉴스'입니다. 가짜뉴스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라도 너를 무너뜨리거나 특정의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진실(팩트)은 숨겨놓은 채 부정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으로 조작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에 관한 소문(가짜뉴스)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것처럼, 우리도 종종 그런 가짜뉴스에 현혹되어 잘못된 생각과 말과 행위들을 쏟아내곤 합니다.
진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가짜뉴스(소문)에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언제나 진실과 정의를 찾고 그것을 쫓아다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진 공동체와 세상을 바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가짜뉴스에 현혹되거나 소문을 따라다니지 말고, 언제나 진실과 정의를 쫓아다니는 예수님을 닮은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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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3,20~2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여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3,21) 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대의 기본적인 사회구조는 주로 5가지를 주축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그 구조는 바로 ‘명예와 수치’, ‘보호제도’(=후원자), ‘혈연관계’, 개인적 ‘인과관계’ 그리고 ‘정-부정’(깨끗함과 불결함)이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며, 이것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친척들의 행동을 지금의 잣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당대의 문화와 그 맥락에서 바라본다면 충분히 그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혈연관계(=핵가족 중심이 아닌 가문)에서 한 개인의 명예-수치는 한 개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혈연을 맺은 가문의 명예-수치와 직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보호자-피보호자의 관련해서 손아랫사람을 지키고 돌봐야 할 의무와 함께 책임도 있는 것이기에, 더더욱 좋은 영이 아닌 더러운 영으로 말미암아 몸도 마음이 불결한 상태라면 자동적으로 격리와 분리를 통해서 당연히 정화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에 대한 이해와 몰이해는 곧 당대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느냐 그렇지 않냐에 달려 있습니다. 친척들이 예수를 붙잡으려고 한 것은 그런 문화와 종교적인 배경에서 나온 행위로 소위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고 먹칠을 한 일원에 대한 제재와 징계를 위한 조치, 곧 감금이나 격리 그리고 정화 예식을 취하려 했던 것이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가출하신 예수님께서 이런 전통을 알고 계셨는데도, 제 발로 고향 집으로 가셨다기보다는 고향에서 가까운 어느 ‘친지 집’에 가셨으며, 이를 듣고서 친척 어르신들이 예수님을 붙들어 잡을 심산으로 몰려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통상적인 관념에서 보면, 결혼도 하지 않고 집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이처럼 다니면서 살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더욱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삶이 정상 아닌 비정상으로 보였을 것이며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느끼지만 저는 미친 사람입니다. 또 남들도 저를 보면서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를 포함해서 모든 사제와 수도자는 본디 사람에게 붙잡히지 않고, ‘하느님께 미친 사람, 하느님께 붙잡힌 사람’입니다.
사실 삶을 제대로 살려면, 예술이나 스포츠는 물론 경제-과학-문학-의학 분야에 종사하는 분들도 자신들의 분야에서 제대로 살려고 한다면, 자신이 하는 일에 미치지 않고서는 어떤 수준이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친척들이 본 것은 잘못 본 것이나 틀리게 본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보고 있다는 역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제정신이 나간 것, 얼이 빠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에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오직 한 가지 생각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밤이고 낮이고 일하시고 기도하셨으니 친척들 눈에는 미친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그게 당연하다고 보입니다. 그러니까 조금은 저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입니다. 제대로 미쳐야 만이 자신의 분야에서 道人- 藝人-聖人으로 제대로 인정받는 세상이 아니던가요? 의사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醫聖이라, 시인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詩聖이라, 음악으로 일가를 이룬 이를 樂聖이라, 바둑으로 일가를 이룬 이들을 棋聖이라 부르지 않습니까? 자신의 분야에서 제대로 미치지 못하고 어설프게 잘못 미치면 폐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에 미쳐 중독자가 됩니다. 약물, 도박, 알콜 중독자들처럼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친척들의 행위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분은 세상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파견된 존재로서 자신의 소명과 역할에 그만큼 철저하고 처절하게 사셨음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 역시도 그분처럼 자신의 소명과 역할에 미치되 제대로 미쳐야 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도인- 예인-성인 혹 의성-시성-악성-기성과 같은 존재가 되도록 자극하고 호출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우리 한번 제대로 하느님으로 미쳐 볼까요! ‘정민’ 교수가 저술한 「미쳐야 미친다.」는 책 제목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미치지 않고서는 살고 싶은 것을 살 수 없고, 이루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합니다. 암울하고 척박한 조선 시대에 미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었던 몇몇 깨어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어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길을 찾습니다. 『미쳐야(狂) 미친다(及). 미쳐야 이룰 수 있습니다. 不狂不及.』
“주님, 한편으로 당신을 붙잡으려 했던 친척들처럼 때론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더 잘 깨닫게 해주심에 오히려 감사하게 하여 주시고, 그럼에도 주어진 현실에서 당신 은총에 힘입어 늘 최선을 다해 세상에서 저희에게 맡겨진 일과 당신의 뜻을 충실히 이루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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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30년 동안 심리 실험을 통해 공감 정확도를 연구해 온 사회심리학자 윌리엄 이케스에 따르면, 사람들의 평균적인 공감 정확도는 100점 만점에 22점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즉, 잘 모르는 사람의 마음을 단 22%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친한 친구의 마음은 얼마나 알 수 있을까요? 40점을 넘지 못했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50점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갈등과 분쟁이 생깁니다. 어떻게 내 마음을 몰라주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산 부부들도 공감 정확도는 그렇게 높지 않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 읽기가 부정확하다는 인정해야 합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를 보고서는 인상을 씁니다. 이때 ‘내게 기분 나쁜 일이 있음이 분명해.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도 나를 보기 싫어서 피했기 때문일 거야.’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친구는 급하게 화장실을 가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여러 가능성을 보지 않고 부정적인 마음에 갇히면 마음 읽기는 더 불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마음이 쌓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삐딱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이끄심도 이렇습니다. 주님과의 공감 정확도가 낮아질수록, 주님의 사랑보다 불평불만의 이유만 늘어놓게 됩니다. 주님과 더 멀어지고, 주님의 은총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되면서 더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과의 공감 정확도가 높은 사람은 힘든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으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전교 여행 중이었습니다. 군중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글쎄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찾아옵니다. 예수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붙잡으러 나선 것입니다. 아마도 죄인들과 먹고 마신다는 소문,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소문, 마귀 두목 베엘제벨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소문 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평범하지 않은 예수님의 활약상에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예수님을 보는 것이 아닌, 미친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단정 지었던 것입니다.
주님과의 공감 정확도는 얼마나 될까요? 주님의 뜻을 보지 않고,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봤기에 공감 정확도는 낮아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친척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가장 모르는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주님과의 공감 정확도를 높이는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과의 마음에 함께하면 할수록 기쁨과 행복의 마음도 커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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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 님처럼 미치고 싶다>
마르코 3,20-21 (예수님과 베엘제불)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 님처럼 미치고 싶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우리 님처럼
사람의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미치고 싶다
우리 님처럼
움켜쥠이 아니라
사랑에 미치고 싶다
우리 님처럼
내리누름이 아니라
섬김에 미치고 싶다
우리 님처럼
업신여김이 아니라
살림에 미치고 싶다
우리 님처럼
홀로 누림이 아니라
더불어 삶에 미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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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으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어디나 반대자는 있기 마련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 죄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만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중하셨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 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께 미쳐야 합니다. 올바른 일에 미쳐야 합니다. 미친다는 것은 전력투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 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혹 삶이 따분하고 무의미하게 여겨진다면 미쳐야 할 만한 일을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받으시고 모함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소신, 주관이 고집이 되지 않기를 희망하며 ‘줏대’ 있는 삶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다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기도 하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 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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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
“주님,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 80,4ㄴ)
미치지 않고 살 수 없는 희망도 길도 보이지 않는 참 재미없는 어둡고 험한 광야같은 세상입니다. 제대로 미쳐야 하는데 중독등 잘못 미쳐 폐인이 괴물이 되니 문제입니다.
기상하면 맨먼저 열어보는 교황님 홈페이지입니다. 1936년생이니 우리나이로하면 저보다 13세 많은 89세 고령입니다만 정신력으로하면 60세라 합니다. 교황님의 어제 하루 일과도 정말 가득찬 하루였습니다. 개인이든 일행이든 만날 때마다 꼭 메시지나 말씀이 뒤따르는데 어제 하루만도 네 번의 접견이 있었습니다.
1.일치주간을 맞아 핀란드의 교회일치그룹들(개신교, 가톨릭, 정교회)을 만나
“순례자 교회(a pilgrim Church)”로서 더불어 여정중인 이들에게 “성인들은 일치의 원천”임을 역설했습니다.
2.수백명의 가톨릭대학 당국자들을 만나 “계속하여 지혜와 인간성을 함양할 것”을 격려하셨습니다.
3.1963년 댐의 붕괴로 2000명 가량이 죽었던 이태리 북부 교구내 신자들 백여 명의 방문객들에게는 “여러분은 부활을 증거해왔다” 격려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4.카차흐스탄 대통령과 만남.
5.콜롬비아 대통령과 만남.
교황님의 하루 일상이 너무 경이로워 구체적으로 출력하여 열거해 봤고 후에 내용들은 읽을 계획입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란 자주 언급한 말이 생각납니다. 교황님이야말로 불경스럽긴 하지만 제대로 미친 살아 있는 성인임이 분명합니다. 89세 고령의 나이에 미치지 않으면 이렇게 한결같은 열정으로 사시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절로 아마도 매일미사 복음중 가장 짧을 것입니다. 다음 구절에 집중한 강론 주제도 언제나 대동소이합니다. 앞절은 얼마나 분주한 예수님의 일상인지 군중이 계속 모여들어 예수님 일행은 음식을 들 수 조차 없었다 묘사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려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정말 예수님의 행태는 정상인들 시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면이 너무 많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득 떠오른 “불광불급(不狂不及);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 이라는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저역시 한밤중 12시 넘어 기상하여 강론을 쓰는 지금은 01:40분 정상인들의 생각에는 미친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날마다 미쳐서 쓰는 강론이네요. 예전 약 50년 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온 열정을 다 쏟을 때 선배 교사의 충고(?)에 드린 답변도 생각이 납니다.
“이 선생,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좀 쉽게 살수 없어.”
“저에겐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운 생활인데요.”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저의 사랑 전부였다면 20대 후반의 청년교사시절의 저에겐 아이들이 저의 사랑 전부였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에 미친 삶이지요.
이래서 저는 자주 되뇌이곤 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미치면 폐인이나 괴물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칠 가능성이 많습니다. 미칠 광자가 들어가는 말마디들, 광기狂氣, 광증狂症, 광분狂奔, 광신狂信, 광폭狂暴등 많습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기위해선 정말 영적훈련이 필요합니다. 제대로 미쳐사는 것이 정신 건강, 영혼 건강에 필수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달인이나 장인, 대가 역시 제대로 미친 경우일 것입니다.
제대로 미친 경우에는 예수님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성인들이 이에 해당할 것입니다. 여기 사는 수도자들도 역시 제대로 미친 경우에 해당될 것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미쳐야 온전한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참 거칠고 험한 생존경쟁 치열한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보십시오, 광야여정 세상살이에 제대로 미친 사람들보다 잘못 미쳐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저는 자주 강조하는 바 세 유형의 인간 군상들입니다. 제대로 미친 성인들의 온전한 사람들과 희망을 잃고 온갖 중독으로 폐인이나 괴물이 된 사람들 셋으로 분류해보곤 합니다.
요즘 스마트톤중독 환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다들 알게모르게 이런저런 중독으로 미쳐가는 폐인이, 괴물이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이념에, 종교에 중독되어 광신이, 맹신이 되면 백약이 무효입니다.
앞으로 1인가구의 증가로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 아득한 예전 사막교부 성 안토니오 압바의 일화도 생각이 납니다. 그대로 오늘의 현실에 대한 예언같아 섬찟한 느낌도 듭니다.
-안토니오 압바는 말했다. ‘사람들이 미쳐갈 때가 오고 있다. 그때 사람들이 미치지 않은 어떤이를 볼 때 그들은 그를 공격하며 말할 것이다. “너는 미쳤다. 너는 우리와 같지 않다.”’-
문득 “지록위마(指鹿爲馬;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부른다는 뜻으로, 남을 속이려고 옳고 그름을 바꾸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 “벌거벗은 임금님”(사치와 허영에만 들떠 사는 사람들의 허망한 삶을 꼬집는 재밌는 안델센의 동화) 예화도 생각납니다.
모두가 정상적이 아닌 비정상적 미친 인간 현실을 빗대 예화들입니다. 정말 정상인이 비정상인처럼 생각되는 세상이라면 이것은 미쳐가는 세상임이 분명합니다. 새삼 온전한 인간으로 깨어 살기 위한 분투의 노력이 있어야 함을 절감합니다.
어제에 계속 이어지는 오늘 제1독서 다윗의 일화가 감동적입니다. 오늘부터는 사무엘 하권의 시작으로 사울과 요나단의 전사에 슬퍼하는 다윗의 모습이 참 인간적이다 싶습니다. 주님의 전사로 치열히 살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사울과 요나단입니다. 다윗의 애가가, 조가가 심금을 울립니다.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졌는가? 사울과 요나탄은 살아 있을 때에도,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어서도 떨어지지 않았구나, 그들은 독수리보다 날래고, 사자보다 세었지... 어쩌다 용사들이, 싸움터 한복판에서 쓰러졌는가?
요나탄이 네 산 위에서 살해되다니! 나의 형 요나탄, 형 때문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은 나에게 그토록 소중하였고, 나에대한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아름다웠소. 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이런 극한의 슬픔속에서도 다윗이 내적으로 무너지거나 미치지 않을 수 있음은 그의 깊은 하느님 중심의 믿음과 삶 덕분이요 요나탄과의 깊은 우정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사울 아버지에게는 효자였고, 다윗에게는 친구였으니 요나탄은 주님의 훌륭한 전사임은 물론 참된 인간의 전형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늘 되뇌이는 말도 생각이 나네요.
‘본의 아니게 치매나 노환으로 품위를 상실하고 요양원에서 세상 떠나는 노년인생들은 얼마나 많은가! 주님의 전사로서 객사가 사고사가 병사가 아니라 싸우다 죽어야 전사다, 일하다가 기도하다가 공부하다가 즉 영적전투중에 살다가 전사했으면 소원이겠다.’
주님의 전사답게 살다가 은총으로 깨끗한 전사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평상시 영혼 건강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어제의 깨달음에 감사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영적 주식과도 같은 찬미와 감사의 미사와 시편성무 공동전례기도의 규칙적 평생 수행이 영혼의 치유와 건강에 얼마나 고마운지 어제는 수도형제들과 힘차게 시편을 노래하면서 통감했습니다.
공동체 소속 욕구는 본능적이요 참으로 건강한 욕구입니다. 가톨릭교회야 말로 진정 힐링의 종교요 힐링의 센터요, 온갖 중독의 해독에, 영혼 치유와 건강에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 노래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음을 어제 참 깊이 깨달았습니다.
최고의 법이요 희망이자 사랑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를 실현시켜주는 전례은총이 참으로 영혼을 치유하고 건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시간되시면, 176절까지 계속되는 가장 긴 시편 119장(주님의 법)을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풍요롭고 좋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빛이요 정의요 말씀이요 계명이요 하느님의 법으로 계시됩니다.
온전한 치유에 건강의 구원은 그리스도와의 일치뿐입니다. 공동체가 붕괴되어 가는 1인가구 시대에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가톨릭의 공동전례기도를 찾을 거란 예감도 듭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가톨릭교회의 미사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참으로 우리 모두 영적 건강의 온전한 삶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천사들 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시편8,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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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미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집으로 가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집이라!
그런데 바로 이어서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의 집은 고향 집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여기저기 복음을 선포하러 다니셨으니 당신의 집이 따로 있을 리 없고 우리네 집을 당신 집으로 삼으셨을 겁니다.
즉시 프란치스코가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과 형제들의 가난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들은 집이나 거처 그 어떤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와 나그네처럼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해지셨으니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인 것을 프란치스코는 굳이 집과 거처의 가난을 꼭 집어서 얘기하는데 그것은 집과 거처의 가난을 특히 더 강조하기 위함이겠습니다.
집도 없고 정처도 없는 것이 주님과 프란치스코의 공통점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가난을 가난 중에서도 최고의 가난이라고 하고, 이 가난이야말로 물질 면에서도 가난하게 하고, 덕행 면에서도 가난하게 하며, 하늘나라의 왕과 상속자가 되게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난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행복 선언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서 가난할 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소유하기 때문이지요.
가난이 이러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며 저세상 행복을 위해 소유를 포기하기 쉽지 않고, 저세상을 향해 떠나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삶이 안정되면 될수록 더 떠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안정은 우리 인간이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고, 반대로 안정이 깨질까 또는 잃을까 두려워하는 불안은 우리 인간이 두려움과 함께 제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정되면 될수록 안주하게 되고 떠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집과 거처를 포기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집과 거처를 포기할 때 우리는 가장 확실하게 가난할 수 있고, 나만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도 천국에 가자고 초대하는 복음 선포의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하기에 우리도 주님과 프라치스코처럼 집과 거처를 포기하는 복음적 불안정을 일부러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안정된 집과 거처를 포기하고 여기저기 떠도는 주님과 프란치스코를 사람들은 미쳤다고 하고 가족들은 그런 선택에 더더욱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미쳤다는 것은 제정신이 아니거나 정신이 나간 것을 의미하지요. 세속의 눈으로 보면 주님과 프란치스코의 선택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압니다. 정신이 나간 것이 맞는데 그것은 세속의 정신이 나간 것이고, 세속의 정신이 나간 대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린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사실 주님과 프란치스코는 하느님께 미친 분들입니다.
하느님께 미친 분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미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개의치 않으시는 분들이 바로 주님과 프란치스코이고 우리는 그분들의 정신을 따르려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내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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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다."(마르3,21)
<선입견과 틀!>
오늘 복음(마르 3,20-21)은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모습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기 때문에 육신의 태인 어머니 마리아가 필요했고, 그래서 예수님의 형제들도 친척들도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모습, 곧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은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치유 기적 사화를 통해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나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져나갔고, 예수님을 따르는 큰 무리가 생겨났습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친 사람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들 가문의 수치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7,5)
예수님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예수님의 인성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때문에 육신의 모습으로 자신들과 함께 한 예수님의 모습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그런 선입견과 선체험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도 종종 어떤 틀 안에 갇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 틀은 나의 지식과 체험을 통해 만들어졌고, 우리는 그 틀에 맞게 믿고 희망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너와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인간의 보편 모습이기는 하지만, 믿는 이들은 그 틀을 깨트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쉽지는 않지만, 그래야 지금 임마누엘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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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GTV2IgJ_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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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 21)
우리의 마음을
따라 어지러운
소문도
빠르게
퍼져나갑니다.
소문의 풍경들이
실은 우리마음의
현주소입니다.
예수님과
상관없는 것에
무성한
소문만
있을 뿐입니다.
소문을 소문으로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픕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있는
복음을
선포하시는데
어리석은 사람은
소문에 공명합니다.
어리석음에
우리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없는
소문의
시작과 끝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무책임한
농담으로
전락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쳤다는
소문에도
상관없이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소문은 언제나
소문을 퍼뜨린
본인 당사자인
자기자신을
빗대어
전개되는
자기고백과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듯
소문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 마저
모욕하는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중해야 할 것에
집중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구원하십니다.
이와 같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은
사람을
깎아내리는
소문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따뜻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소문의 정글을
지나면
제대로 보게되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소문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리석고
부정적인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무언지를
다시금 묻고
찾는 기도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호기심이 아닌
진정한 사랑을
의심이 아닌
진정한 믿음을
찌라시가 아닌
진정한 희망을
나누는 소중한
사람의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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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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