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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샨 제5대 국왕 | |
| 아케메네스 제국 초대 샤한샤 키루스 2세 𐎤𐎢𐎽𐎢𐏁 | Cyrus the Great | |
| 출생 | 기원전 600년경 |
| 아케메네스 왕조 안샨 (現 이란 파르스주) | |
| 즉위 | 기원전 550년 |
| 아케메네스 왕조 파사르가다에 (現 이란 파르스주 파사르가다에) | |
| 사망 | 기원전 530년 12월 4일 (향년 70세) |
| 아케메네스 왕조 시르 다르야 | |
| 능묘 | 파사르가다에 키루스 대제 영묘 |
| 재위기간 | 안샨 제후왕 |
| 기원전 559년 ~ 기원전 550년 (9년) | |
| 아케메네스 왕조 샤한샤 | |
| 기원전 550년 ~ 기원전 530년 12월 4일 (20년) | |
고대 페르시아의 군주이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거대 제국을 건설한 정복왕이었다.
일명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혹은 키루스 대제라는 호칭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황제(왕중왕, Emperor)를 칭한 첫 번째 군주로 간주된다.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등을 비롯한 중동 및 소아시아 지역의 강대국들을 차례로 정복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기틀을 다진 업적으로 유명하다.
키루스 2세의 등장을 전후로 메디아의 속국에 불과했던 페르시아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통일한 세계적인 대제국으로 거듭났다.
단순히 영토를 넓혔을 뿐 아니라 피지배 민족에 대한 비교적 관대한 통치를 펼쳐
제국의 다민족 통치기법에 있어 하나의 거대한 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 유대민족을 바빌론 유수에서 해방시키고 성전 재건을 도운 덕분에 크리스토교에도 친숙한 인물이다.
개신교의《개역개정 성경》에서 '고레스'로 표기된다.
현존하는 기록 중 키루스 2세의 생애를 묘사한 가장 상세하고 믿을 만한 것은 헤로도토스의 저술인
《히스토리아》로 여겨지고 있기에 본문의 내용도 대체로 이를 기반으로 한다.
마찬가지로 키루스 2세의 일대기를 상세하게 묘사한
크세노폰의 《키로파에디아》는 내용이 보다 상세하고 극적인 부분도 많지만
《히스토리아》에 비해 민속적, 지적 가치는 크더라도 사료적 가치는 낮다는 것이 정설인지라 참고하기 어렵다.
2. 언어별 표기
| 언어별 표기 | |
| 고대 페르시아어 | 𐎤𐎢𐎽𐎢𐏁 Kūruš [2] |
| 페르시아어 | کوروش بزرگ kurosh bozorg |
| 그리스어 | Κῦρος [3] |
| 히브리어 | כורש [4] |
| 라틴어, 영어 | Cyrus [5] |
| 이탈리아어 | Ciro |
| 중국어 | 居鲁士二世 |
그리스에서는 Κυρος(퀴로스)로 표기했다.
개신교 《성경》에서는 히브리어 표기법으로 כורש(고레스)라고 하며,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Kūruš(쿠루쉬)라고 불렸고,
키루스 대왕은 Kūrošé Bozorg라고 했다.
페르시아어로는 کوروش بزرگ(kuroš bozorg)로 표기된다.
3. 생애
3.1. 유년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보이는 전설에 의하면 키루스의 성장 과정은 아래와 같았다.
이란 고원을 중심지로 발흥한 국가인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어느 날 자신의 딸인 만다네의 소변으로 온 세상이 잠기는 꿈을 꾸었다.
이에 사제들을 불러 해몽해보니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아스티아게스는 이란 남부 파르스(페르시아) 지방 안샨 왕국의 왕자였던
캄비세스에게 시집보냈던 딸을 다시 수도 엑바타나로 불러들여
그녀가 아들을 낳는 즉시 그를 죽이려고 했다.
만다네는 얼마 후 임신했는데, 어느 날 음부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꿈을 꾸었다.
이 또한 일전의 해몽과 같은 해석이었다.
이에 아스티아게스는 결국 하르파고스라는 신하에게 만다네의 아이를 데려가 죽일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당시 아스티아게스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외손자가 차기 왕이 되는 것이 순리였다.
이 때문인지 하르파고스는 키루스를 직접 죽이지 않은채,
소치기 미트리다테스에게 주어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소치기도 차마 아이를 죽이지 못해 아내의 제안으로 사산한 자신의 아들의 시신과 바꿔치기 해서 키루스를 아들처럼 길렀다.
이를 미처 몰랐던 하르파고스는 소치기 아이의 시신을 가져가
아스티아게스에게 임무를 끝냈다고 보고했고 소치기의 죽은 아이는 하르파고스가 보는 앞에서 땅에 묻혔다.
세월이 흘러 소치기의 아들로 자란 키루스는 동네 아이들과 놀던 중 왕으로 뽑혔다.
그런데 어느 고위 관리의 아들이 고집을 부리면서 내가 왜 소치기 자식의 말을 들어야 하냐는 투로
키루스의 말을 듣지 않고 훼방을 놓았다.
이에 화가 난 키루스는 그 아이를 흠씬 두들겨 패줬고,
관리의 아들은 이 사실을 아버지에게 일러 바쳤다.
그렇게 고발당한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 앞으로 불려나갔고, 자신의 행위에 대해 라며 변론했다.
이 말을 들은 아스티아게스는 단번에 키루스가 자신의 외손자임을 알아챘다.
그리고 소치기와 하르파고스를 심문하여 아이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냈고,
변론하는 아이가 자신의 외손자임을 확신했다.
아스티아게스는 이에 대해 사제들에게 해석을 명령하니 사제들은 라는 답을 했다.
아무리 예언이 무섭다고 하지만 자신의 외손자를 죽인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아스티아게스는
그런 사제들의 해석을 수긍했다.
이후 키루스를 자신의 외손자로 인정하고, 파르스에 있는 친부모에게 돌려보냈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아스티아게스는 '일단 액땜한 셈 치자'며 자신의 외손자를 용서했지만
아이를 죽이라는 자신의 명령을 저버린 하르파고스는 용서하지 않았던 것이다.
얼마 뒤 왕은 하르파고스를 연회에 초대하여 맛좋은 고기 요리를 대접했다.
맛있게 요리를 먹은 하르파고스에게 아스티아게스는 남은 고기가 있으니 가져가라며 광주리를 내주었다.
그 광주리 안에는 하르파고스의 13살 된 아들의 머리와 사지가 담겨 있었다.
하르파고스는 왕의 연회에 아들을 먼저 보냈는데,
하필 아들이 왕이 보낸 자객들의 손에 살해당하고,
몸은 요리가 되어 임무에 실패한 대가로 어린 아들의 고기를 먹어야 했던 매우 잔혹한 처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하르파고스는 당황하지 않고, 얼굴색도 바꾸지 않은채 담담하게
라며 아스티아게스의 뜻을 따르겠다고 충성을 다짐했다.
이에 아스티아게스는 크게 만족하며, 하르파고스가 아들의 남은 시신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하지만 아스티아게스에게 있어 소년을 요리한 처벌과 하르파고스를 그대로 돌려보낸 것은 그의 큰 실책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하르파고스는 겉으로는 얼굴 색도 바꾸지 않고 충성을 맹세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얼굴색을 바꾸고 속을 게워낸 후,
아내와 다른 아들들과 함께 죽은 아들의 장례를 치르게 한 후, 아스티아게스를 증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왕의 명령을 어긴 벌이라 할 지라도
소년을 죽여 요리로 만든 후 그 아비에게 먹인 건 너무나도 심한 처사이자 악행이었기에
이 일이 메디아 전역에 알려지자 메디아 백성들도 크게 분노하면서 하르파고스를 동정하고
아스티아게스로부터 마음을 돌리게 되었다.
때마침 남쪽의 파르스 지역에서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서 칼을 갈고 있었던 하르파고스는 겉으로는 아스티아게스에게 충성하는 척하여 왕의 의심을 피하고,
뒤로는 키루스를 계속해서 충동질해 반란을 모의하게 하면서, 여러 조언과 계략을 전수했다.
키루스가 성인이 되자 하르파고스는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뒤,
자신의 부하를 사냥꾼으로 변장시킨 후 죽은 토끼의 뱃속에 그 날의 진실을 쓴 밀약서를 넣어 몰래 키루스에게 전달했다.
이를 받아들인 키루스는 안샨인들을 소집시켜
첫 번째 날에는 미개간지를 개간하게 하고, 다음날이 되자 고기와 술을 푸짐하게 준비해서 사람들을 접대한 후 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표자가 라고 대답하자 라고 외치며 안샨인들과 타민족들을 규합해 군대를 일으켜 엑바타나로 북진했다.
외손자의 배신에 격노한 아스티아게스는 안샨군을 진압하라며 하르파고스에게 메디아군을 맡겼으나
하르파고스는 오히려 휘하의 메디아군을 이끌고 그대로 키루스의 밑으로 들어갔다.
이후 폐위된 아스티아게스는 안샨군의 포로가 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하르파고스는 남은 아들들과 함께 아스티아게스의 가슴을 창자루로 찌르며
라고 준엄하게 꾸짖었다.
하지만 아스티아게스는 이 말에 미친듯이 울고 웃으며 라고 끝까지 반성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 이야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온 것이며, 일본 만화 《히스토리에》에서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렇게 키루스 2세는 광활한 메디아 제국을 정복했다.
사실 이 이야기 자체가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거의 같다.
또한 인도의 전설적인 영웅인 크리슈나도 이와 동일한 내용의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다.
즉 여기저기 퍼져 있었던 설화를 키루스 2세에게 갖다붙였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시골 귀족 자식을 두들겨 팬 것에 불과한 소년이
메디아 정도나 되는 거대 제국의 왕에게 끌려가 직접 심문받는다는 것이 개연성이 없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고전 영웅이나 위인과 같이 묘사하고자 그 행적을 베끼는 행위는 고대에 빈번했다.
단, 오이디푸스 신화는 키루스 2세 사후 약 50년 뒤에 창작되었기 때문에
적어도 이러한 일대기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참조하여 창작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오히려 키루스 2세의 설화가 어떻게든 그리스에 전해져서 오이디푸스 신화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키루스 2세의 활약이 본격화된 건 서쪽에 위치한 리디아 정복전이었다.
메디아 제국의 이웃 나라이자 우호국이었던 리디아의 국왕 크로이소스에게 있어 키루스 2세의 쿠데타는 좋은 침공 구실이었다.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헤로도토스는 저서인《히스토리아》에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이 이야기는 래리 고닉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1권에서도 소개되며,
김광수의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서도 주어의 모호함을 지적하면서 언급되는,
즉 델포이 신탁의 모호함이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Delphic'이라는 단어의 뜻은 '애매모호'가 되었으며,
델파이 기법 역시 여기에서 이름을 따왔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양군은 캅파도키아의 프테리아에서 처음 맞붙었는데,
치열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크로이소스는 자신의 군대가 숫적으로 불리해 승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뒤
수도인 사르데스로의 퇴각을 결정했다.
그리고 리디아의 동맹인 이집트와 스파르타, 신바빌로니아의 지원을 받아
4개월 뒤에 다시 페르시아를 공격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키루스 2세는 리디아군이 물러난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사르데스로 군대를 진격시켰고,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 역시 프테리아 전투에서 유의미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기에
키루스 2세가 자신을 쫓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적이 코앞까지 진격해오자 어쩔 수 없이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키루스 2세는 군대를 모은 후, 고지대에서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군대를 맞이했다.
리디아와 페르시아 양측에는 모두 기병이 있었으며, 그들은 병거 앞에 도열해 있었다.
크로이소스는 밀집 대형으로 유명한 이집트군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키루스 2세도 비밀 병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페르시아군의 사령관을 맡은 하르파고스는 키루스 2세에게 라고 조언했다.
이에 키루스 2세의 허락하에 새로운 낙타 부대가 조직되었다.
낙타 부대가 뛰어 나오고, 리디아군의 보병과 기병이 혼란에 빠진 사이,
키루스 2세의 궁병이 진지와 방어탑에서 쉴새 없이 화살을 쏟아냈다.
페르시아군 사령관 히르파고스의 예측대로 리디아 군대는 큰 혼란에 빠졌다.
어떤 기병은 놀라서 떨어지기도 했고, 말을 버린채 도망가기도 했다.
양군 사이의 치열한 결전은 키루스 2세의 승리였다.
참패한 크로이소스는 수도 사르데스 안에서 농성전을 펼치면서
각국의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으나 도시는 고작 14일 만에 함락당했다.
크로이소스는 리디아 내 최고 귀족 출신의 중신들과 함께 화형대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죽음을 앞두고 그리스의 철학자 솔론의
이라는 명언을 기억하며
이라 되뇌인 후,
라고 외쳤다.
키루스 2세가 이를 듣고
라고 묻자 크로이소스는 그에게 질문의 답을 해주었고,
나중에 이를 알게 된 키루스 2세는 리디아의 귀족들은 전원 화형에 처했지만
크로이소스는 살려주고 자신의 최측근 모사로 임명하는 관대함을 베풀며,
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고 이후 페르시아 제국 최고의 중신으로 삼은 뒤, 아내를 잃은 크로이소스에게 새 아내를 주선해주었다.
이로써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은 지중해 동부와 오리엔트 전역의 신흥 패자로 떠올랐고,
그 적극적인 공세의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으며, 주변 국가들은 벌벌 떨면서 이 무적의 정복자가 펼치는 위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540년까지, 키루스 2세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남부 킬리키아와 이란 남부 엘람의 수도였던 수사를 정복했다.
그러나 아직도 서아시아에는 큰 세력이 남아 있었으니 바로 셈계 칼데아인의 제국 신바빌로니아였다.
바빌론 제10왕조, 즉 신바빌로니아 말기, 수도 바빌론의 성벽에 누군가 기묘한 문구를 적어뒀다.
유대인 예언자였던 다니엘은 이 낙서를 신바빌로니아에 대한 신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메네'는 '수를 셌다', '테켈'은 '저울에 달았다', '파르신'은 '나눠진다'라는 뜻이었다. 다니엘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냈다.
그리고 이 내용과 관련이 있는지는 몰라도 오래지 않아 기원전 539년, 오피스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키루스 2세가
유프라테스 강의 물줄기를 막고, 우회해 바빌론 정복에 나섰다.
《성경》의 내용에 따르면 저녁의 어둠 속에서 페르시아군의 특공대가 그 유명한 이슈타르의 문을 통과했고,
페르시아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것도 모른채 연회를 벌이고 있었던 벨사자르의 만찬이 끝남과 동시에
바빌론은 페르시아군에게 함락당했다고 한다.
바빌론을 정복한 뒤, 키루스 2세는 자신에 누구인지 선포했다.
참고로 자신을 여러 나라의 왕, 위대한 왕 등의 다양한 수식어로 소개하는 것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다른 황제들도 했다.
다리우스 1세 문서에 가보면 거의 비슷한 형식의 자기 소개가 보인다.
수메르와 아카드는 이전 시대 오리엔트를 지배했던 문명들로, 키루스 2세 자신이 오리엔트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이후 키루스 2세는 신하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마사게타이 정복 전쟁에 나섰다.
헤로도토스의《역사》에 따르면 크로이소스가 진수성찬을 미끼로 마사게타이인들을 유인해 한번에 제압하자고 제안하자,
키루스 2세는 자신의 직속 참모였던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무언가 예감이 좋지 않음을 느낀 키루스 2세는 아들 캄비세스 2세에게 크로이소스의 남은 여생을 잘 보필해달라고 당부한 뒤
두 사람을 페르시아로 돌려보냈다.
이후 전쟁이 시작되었고, 초반에는 페르시아군이 선전하여 마사게타이 여왕 토미리스의 아들까지 포로로 잡게 되었다.
이에 분노에 찬 여왕이 절규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는 끝끝내 풀어주지 않았고 결국 마사게타이의 왕자는 자살하고 말았다.
키루스 2세로 인해 아들을 비참하게 잃은 마사게타이의 여왕은 분노했고,
그 다음 전투에서 매복 끝에 키루스 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난세의 영웅이었던 키루스 2세가 전사했다.
이에 토미리스 여왕은 키루스 2세의 시체를 난도질하고, 베어낸 키루스 2세의 머리를 핏물에 담가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헤로도토스 자신도 이 기록에 대해 키루스 2세의 죽음에 관한 세 가지 설 중
'그나마 믿을 만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어 신빙성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만일 키루스 2세가 정말로 헤로도토스의 기록처럼 마사게타이 원정 중에 대패하여
군대는 거의 궤멸당하고 그 자신까지 전사했다면 그 여파가 아케메네스 제국 전체에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들 캄비세스 2세는 부친의 원수를 갚으려 시도한 정황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대군을 동원해 서남쪽의 이집트에 대한 정복전쟁을 개시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키루스 2세의 말년과 죽음에 대해서는 헤로도토스의 기록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크테시아스는 키루스 2세가 데르비케스족과 싸우던 중
코끼리 부대의 급습을 받고 낙마하여 허벅지를 창으로 찔리는 등의 치명상을 입었고,
결국 데르비케스족의 왕을 패사시켰으나 부상이 악화되어 3일 만에 죽었다고 했다.
반면, 크세노폰은 키루스 2세가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에서 노년기를 보내며
아들인 캄비세스 2세에게 통치에 대한 가르침을 전수한 후 평화롭게 자연사했다고 기록했다.
헬레니즘 시대 바빌론 출신의 역사가였던 베로수스의 경우,
키루스 2세가 북동쪽 국경지대에 사는 유목민인 다하이(Dahae)족의 세력에 대해 근심하다가 죽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여러 이설이 제기되는데,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당사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록이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우면서 대부분 소실된 것이 그 이유로 추측된다.
4. 평가
세계 역사상 최초로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군주로서 그 칭호에 걸맞은 대업을 이루었다.
세상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면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이념 아래,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등 페르시아보다 강대한 왕국들을 정복하여 당시 서아시아 세계를 통일했다.
또한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했으며,
군인이 점령지의 백성들을 약탈하는 걸 금지하고,
남자든 여자든 빚 때문에 노예가 되는 것에 반대했으며,
인간들을 억압하지 말고 노동자들에게 적절한 급여를 지불하라고 명령했다
. 그리고 현재 뉴욕 UN 본부 청사에 복사본으로 전시되어 있는 키루스 원통을 만들어 자신의 업적을 과시했다.
전문 한국어 번역 한편 키루스 2세를 전후로 페르시아 제국에서는 전몰자의 장례를 치르고,
상이군인에게 의족을 다는 등 피통치인의 복지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이는 페르시아 이전에 번성했던 대국인 신아시리아 제국이 잔혹한 피정복민 정책 때문에 틈만 나면 반란이 일어나
결국은 피지배 민족들에 의해 멸망해버린 것에 대한 반면교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4.1. 영향력
키루스 2세의 일대기는 전설이 되어 그리스인과 로마인 지배 계층의 모범서가 되었다.
헤로도토스나 크세노폰 등 당대 페르시아 제국과 적대하던 그리스의 기록자들도 키루스 2세를 강력하고 모범적인 영웅으로 묘사했다.
사실 아케메네스 왕조의 영역은 키루스 2세의 후계자인 캄비세스 2세가 정복한
이집트나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한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펀자브, 인더스 강 유역 등을 제외하면 전부 키루스 2세가 정복한 것이었다.
그것도 조그마한 파르스 일대를 기반으로 봉기하여 서아시아의 4대 왕국 중 3개를 잇달아 무너뜨린 것이었다.
물론 정복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제국이 어수선했고,
이는 키루스 2세와 캄비세스 2세가 붕어한 뒤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반란들을 모두 진압하고 본격적인 교통 정리를 시작하며 대제국의 기틀을 다진 것은 다리우스 1세의 공이었다.
다리우스 1세는 캄비세스 2세의 6촌으로 키루스 2세의 5촌 조카였지만
키루스 2세의 딸 아토사가 다리우스 1세와 결혼하여 사위이기도 했고,
이에 따라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1세는 키루스 2세의 외손자가 되었다.
한편 키루스 2세 때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역대 왕중왕들은 관용과 자비를 통치의 으뜸 덕목으로 삼게 되었다.
이전 왕조들에 비하면 통치 이데올로기가 한 단계 발전했다는 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이전의 아카드, 고바빌로니아, 신아시리아, 신바빌로니아의 경우 영토는 거대했으나 얼마 안 가 멸망한 반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이들보다도 더 넓은 영토를 가진채, 기원전임에도 불구하고 몇백 년이나 버텼다.
한편, 키루스 2세의 왕묘는 이란 남부 파르스 지방의 파사르가다에에 남아 있다. 키루스 2세가 왕묘를 검소하게 만들라고 유언해서였는지 당대 여러 왕들의 무덤에 견주면 정말 작다. 오죽하면 키루스 2세가 죽고 약 200년 뒤에 쳐들어온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라며 믿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키루스 2세가 왕묘에 글을 새기게 했는데, 다음과 같았다.
이 글귀를 본 알렉산드로스 3세는 일절 왕묘를 건드리지 않은채 그냥 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왕묘는 작았지만 내부에는 많은 보물들과 사치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고 하며, 알렉산드로스 3세가 멀리 원정을 간 사이에 도굴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21세기 현재에도 키루스 대제를 기리고자 이란 민족주의자들이 키루스 대제의 날을 제정하고
그의 왕묘에서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 젊은 세대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이란의 군주다.
신정에 반대하는 차원에서 '위대하고 관용적인 페르시아'를 상징하는 가장 대표적 인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그의 정의와 관용에 대한 이야기가 SNS에서 퍼지기도 한다.
강경 보수층조차 대놓고 그를 반대하지는 못하고 반정부 움직임과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정도다.
소수민족도 강경 민족주의자가 아닌 이상 그가 다민족의 풍습을 존중한 다원주의자였다며 높게 평가한다.
4.2. 《성경》에서
개신교와 《공동번역 성서》 속 고레스가 바로 키루스 2세다.
<이사야서>는 전통적으로 기원전 8세기경의 저작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 때문에 기원전 6세기경에 태어난 키루스 2세를
이미 기원전 8세기에 이사야가 히브리어로 쿠루쉬, 즉 고레스로 예언한 것은《성경》속 예언의 성취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성서비평학의 발흥 이후 독일의 신학자였던 베른하르트 둠은 이른바 <3구분설>을 제시했는데,
40장에서 55장까지를 <제2 이사야>, 56장 이후를 <제3 이사야>로 구분하여
무명의 다른 저자가 이사야의 이름을 빌려 후대,
즉 키루스 2세의 등극 이후인 기원전 5세기 이후에 저술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둠은 사용된 어휘와, 심판 이후의 회복의 메시지가 <제2 이사야> 및 <제3 이사야>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는 점을 제시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사야 문서 참조.
물론 <이사야서>의 예언이 사후 예언이냐 아니냐는 것과는 별개로, <이사야서>는 전반적으로 키루스 2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다.
유대인에게 있어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바빌론 제10왕조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사르곤 왕조 신아시리아 제국을 계승한 공포의 압제자였다.
유대인들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을 노예로 삼아 자국으로 끌고간 철천치 원수였던 것이다. 하지만 키루스 2세는 그런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즉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민족을 해방시킨 구원자였다. 뿐만 아니라 신바빌로니아에 잡혀 있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돕기까지 했다. 그러한 키루스 2세의 관대한 처우에 유대인들은 감격하여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메시아)라고 칭송했을 정도였다.(이사야 45,1)[34]
이민족의 지도자로서 유대인에게 이 정도로 칭송받은 사람은 키루스 2세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35] 이렇게 실제로 유대민족을 구원한 존재를 목도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이 세상에 나타나 구원해줄 것이라는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확고하게 다지게 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폴리스 간의 첫 번째 접촉이 이루어진 때가 바로 키루스 2세의 치세때였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가 받았던 예언에는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 말고도 "그리스의 가장 강한 폴리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예언도 있었다.
크로이소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아르고스와 스파르타 두 폴리스 중 스파르타를 선택해 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동맹은 체결했으나, 외국으로 원정을 나갈 여력이 안되었기에 키루스 2세에게 사신을 통해 경고장을 보냈다.
이는 세상 그 누구든 간에 '스파르타'라는 이름 하나면 두려워할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에서 나온 경고였다.
물론 스파르타가 오늘날에도 무용으로써 이름이 높지만,
당시 대제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키루스 2세의 입장에선 서쪽 저 멀리 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도시 이름 따위 알 턱이 없었다.
오히려 이오니아 출신의 시종을 불러 스파르타가 대체 무엇이냐?라며 물었다고 한다.
5. 대중매체에서
페르시아의 관대함을 상징하는 군주 중 한명이나, 매체에서는 정복왕이라는 타이틀에 집중하여 무자비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