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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구기동196-2번지. 삼각산 금선사에는 이곳에서 수행했던 스님의 도력으로 조선왕조의 대를 잇게 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던 시대라 불법을 폄훼하려는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시대였던 만큼 운신의 폭이 좁았던 스님들을 옭죄는 이야기와 스님의 도력이 드라마틱하기만 하다.
300일 관음기도로 조선왕조 대를 잇다
용파스님 불교 탄압 폭정 막으려
도력 일으켜 정조임금 만나 담판 “장 받아라.” 한 스님이 소리쳤다.
옆에 있던 스님이 “장은 무슨 장을 받으라는 게요?”
“스님, 상(象)장입니다.” 다시 옆에 있던 스님이 말(馬)로 상을 치면서 차(車)의 길을 트면서 큰 소리로 “멍군을 받으시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삽화=김승연 화백
암행길에 오른 박문수는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스님들이 절에서 염불이나 참선같은 수행을 해야지 이 무슨 신선놀음인가. 또 깨침을 얻은 스님들이라면 세간에 나가 널리 부처님 가르침을 펼쳐야지 절에 틀어박혀 장기놀이를 하다니….”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한 박문수는 한양으로 돌아와 이 사실을 임금에게 고했다. “전국을 돌아보니 중들이 사찰에서 장기나 두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장기나 두고 있으니 무엇인가 일을 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가뜩이나 불교를 배척해 왔던 조정은 전국의 사찰에 명하여 스님들이 닥종이로 한지를 만들어 진상하도록 했다. 닥종이가 없는 금강산과 같은 산승들에게는 석청에 잣을 넣어 만든 ‘잣박산’을 진상하도록 명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지방 토호세력들도 스님들에게 족보를 만들 종이를 바치라느니 잔치음식을 만들어 오라느니 하면서 괴롭히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니 진정으로 수행하려 하는 스님들도 정진을 할 수 없게 되고 급기야는 절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러한 세태를 보고 파계사에서 수행하고 있던 용파스님은 크게 걱정하며 시정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관청에서 가서 호소를 해 보기도 하고, 상소문을 써서 올려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거 도저히 안되겠구나. 다른 방도를 써야겠다.”
용파스님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이 일을 해결해야겠다고 작심하고 남해 거제도로 들어가 100일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스님은 아예 들어갈 때 배 삯만 가져가고 나올 때는 물 위로 걸어 나올 각오로 기도에 들어갔다. 식량도 딱 100일치만 가지고 섬으로 들어갔다.
<사진> 농산스님이 300일 관음기도 후 순조임금으로 환생했다고 전해지는 금선사 전경.
“내 이곳에서 신통력을 얻기까지 한발짝도 물러나지 않으리라.”
그러나 정진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식량도 다 떨어졌고, 며칠동안 굶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속에 노인이 나타나 호통을 쳤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무슨 수행을 그리도 열심히 하시는가. 이제 식량이 없으니 큰일이구만. 며칠 뒤에 내가 식량을 해결해 줄 터이니 우선 저 아래에 있는 돌꽃(石花)으로 끼니를 연명하시오.”
꿈에서 깬 용파스님은 노인 말대로 바닷가로 내려가 보니 석화가 있었다. 3일을 이것으로 연명하니 무서운 태풍이 몰아치더니 육지에서 배가 한척이 밀려왔다. 그 안에는 쌀 두가마니와 소금 한 말이 들어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구나. 분명 이것은 부처님이 보내신 게 틀림없을 것이야.” 마음을 다잡은 용파스님은 무섭게 수행에 몰두해 신통력을 얻어 바다위를 걸어서 육지로 나왔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용이 파도를 타고 오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용파(龍波)스님이라고 불렀다.
육지로 나온 스님은 축지법을 써서 한달음으로 한양에 당도했다. 스님이었지만 산발 한 상태로 임금을 만날 날을 기다리며 물지게를 지고 물을 팔았다. 그러나 임금을 만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신통력을 써야겠다.”
스님은 한강물을 청룡과 황룡이 엉키어 올라가는 서기방광(瑞氣放光)의 신비한 모습을 만들었다. 때마침 대궐을 거닐던 정조 임금이 광경을 보고 그 연원을 알아보게 했다. 신하들은 급히 상서로운 기운이 나오는 집을 추적해 보니 다 늙은 노인이 누더기 한 장을 덥고 드러 누워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데 여기에 있는 거요?”
“시골에서 온 중입니다.”
‘왕실 후사’ 청원 받은 농산스님
수빈박씨에 입태 후 열반에 들어 용파스님은 자신이 이곳에 온 사연과 임금을 만나서 하려는 말에 대해 소상하게 설명했다.
“참으로 기한 인연이오. 나는 임금님을 모시는 별감이오. 내 마침 전하의 명을 받들기 위해 이곳에 왔으니 어서 가서 전하를 뵈알하시지요.”
궁궐로 들어간 스님은 임금에게 눈물로 호소를 했다. “사람들 가운데는 게으른 사람도 있고 부지런한 사람도 있는데, 어찌 전하께서는 일부 스님들의 게으른 모습만 보시고 전체인양 처분을 내리시니 조선 팔도의 수행자들이 곤경에 처해 있습니다. 이 처분을 거두어 주소서.” 정조임금은 보통 스님이 아님을 단박에 알고 조건을 걸었다.
“좋소. 그렇다면 그대도 나의 부탁을 들어주시오. 아직 후사가 없어 걱정이니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오.”
이렇게 해서 용파스님은 수락산 내원암에서, 농산스님은 금선사 목정굴에서 300일 관음기도에 들어갔다. 기도가 회향되어 갈 무렵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는 태몽을 꾸었다. “소승은 농산이라는 사람인데 삼각산 금선사에서 관음정진 중입니다. 용파스님의 청으로 이제 제가 수빈마마의 몸 속에 들어가 이 나라 대를 이을 것이니 그리 알 주십시오.”
<사진> 목정굴 안에 모셔진 수월관음보살상.
다음날 왕실에는 발신을 알 수 없는 봉서(封書) 하나가 올라 왔는데 “경술(庚戌) 6월 18일 세자탄강(世子誕降)” 이라 적고 있었다. 수빈 박씨는 급히 금선사에 사람을 보내 자초지정을 알아보니 목정굴에서 정진하던 농산스님이 앉은 채로 열반에 들었고, 굴 안에는 상서로운 기운이 가득했다고 전해왔다.
과연 경술년 6월 18일이 되니 서북쪽으로부터 맑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산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적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 아닌 바로이곳 목정굴이었다. 그 상서로운 기운은 왕실로 이어져 수빈 박씨의 산실(産室)과 연결되어 있었다. 농산스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조선에서 스님을 피팍하던 폐습을 없애고 내수사(內需司)에 명(命)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으니 곧 금선사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는 농산스님이 금강산 만회암에서 평생 천수주력으로 도력을 얻었으며 전라남도 완도에 있는 고금도에서 석화를 양식으로 1000일 기도를 한 뒤 도를 통했다고 적고 있다. 현재 금선사는 일제시대의 강점으로 폐사되었으나 광복 후에는 도공스님이 중건을 했고, 현 주지 법안스님이 1996년 3월에 복원해 수월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전통사찰로 등록했다. 금선사는 요즘도 지금도 음력 6월18일에는 순조의 탄신제(誕辰祭)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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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귀한 자태의 관음상을 보게 해 주시어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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