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과부의 동전 두 닢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 2장 1~4절은 가난한 과부가 자신이 가진 전부를 헌금하는 내용입니다. 과부의 정성에 감동한 예수님을 통해 모든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임은 묵상해 봅니다. 장소는 성전입니다. 성전에 계신 예수님을 상상해 보세요. 루카 복음 21장 내용을 떠올리면서 예수님의 심경을 헤아리는 것도 좋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한 예수님은 도시를 내려다보며 탄식합니다. 상인들로 북새통을 이룬 성전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며 상인들을 쫓아냅니다. 또한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은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하느냐고 따집니다. 그들은 무엇이든지 트집을 잡아 예수님을 총독에게 넘길 생각밖에 없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 역시 부활 논쟁으로 예수님께 엉뚱한 질문을 해댑니다. 계속되는 논쟁과 모함, 공격에 예수님은 지혜롭게 대처하셨지만, 마음만은 무척 지치셨을 것입니다. 지친 마음을 추수르기 위해 성전 한 모퉁이에서 쉬고 계시는 예수님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의 마음과 달리 화려하기 그지없는 성전도 바라보십시오. 이제 예수님이 계신 성전을 그려보세요.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어느 왕궁 못지않게 화려하고 아름답게 지었습니다. 흰 대리석 기둥과 커다란 돔으로 지은 성전에는 온갖 화려한 장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번영을 상징하는 포도나무덩굴의 순금 장식은 유난히 반짝거립니다. 당시의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다음과 같이 성전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멀리서 보면 마치 흰눈에 뒤덮인 산과 같이 아침 햇살에 눈부시게 빛난다.”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 안을 지성소를 중심으로 여러 구역의 안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전 외곽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어 그들이 성전 구역으로 들어오는 것은 허용했지만 담을 세워 그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 전례에 쓰일 짐승들을 파는 시장이 열렸습니다.
안뜰로 접어들어 처음 만나는 홀이 여인들의 뜰입니다. 더 안으로 들어가면 남성들의 뜰이 있고 더 안쪽에는 사제들의 뜰, 그리고 가장 안쪽에 지성소가 있는데 여기에 휘장이 쳐져 있습니다. 헌금함이 놓여 있던 곳은 여인들의 뜰로 불리는 장소입니다.
그곳에 나팔이라고 불리는 13개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습니다. 헌금함의 모양은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나팔처럼 생겨 헌금함을 나팔이라고 불렀지요. 그 당시 여인들은 계율의 억압에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소외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늘 여인들의 처지를 이해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성전에서도 특히 여인들의 뜰에서 주로 기도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헌금함에 돈을 넣는 부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얼마나 넣는지 관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보셨던 것이지요. 그때 마침 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는 장면을 보신 것입니다. 이 여인을 지켜보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예수님은 깊이 기도하고 계십니다.
문득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부자들이 저마다 헌금함에 돈을 넣는 것과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때의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새 번역 성경은 원문 그대로 렙톤 두 닢이라고 했는데 이는 가장 작은 단위의 그리스 화폐였습니다.
부자들은 당당한 모습으로 보란 듯이 돈을 넣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전 두 닢을 헌금하는 여인은 부끄러움 때문에 멈칫거리며 돈을 넣었을 것입니다. 더욱 많이 헌금할 수 없는 미안한 마음에 더욱 간절히 헌금을 바쳤을 것입니다. 사실 과부가 넣은 동전 두 닢은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것을 알아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지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
액수는 보잘것없지만, 마음과 정성이 담긴 과부의 헌금을 예수님은 알아보신 것입니다. 그녀의 정성어린 봉헌을 대한 예수님은 지쳐 있던 울적한 마음에 위로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화려한 성전에 비해 너무나 초라한 과부의 동전 두 닢이 예수님의 슬픔을 위로해 준 것입니다.
잠시 예수님이 느끼셨을 위로 안에 머물러 보십시오. 그리고 정성을 다하는 과부의 마음에도 머물러 보십시오.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선물이나 많은 돈이 아닙니다. 정성어린 마음입니다. 우리의 삶이 그분의 성전에 향기 어린 봉헌이 될 때 예수님은 위로를 받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칠 수 있는 진정한 선물입니다.
위령 성월을 맞아 몇 말씀 나누겠습니다. 푸르던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흙에 묻히듯 우리네 인생도 때가 되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우리의 본향인 그분의 나라에 이르게 됩니다. 낙엽의 계절에 우리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위령 성월을 맞습니다. 위령 성월을 맞으면서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이 맞는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죽음에 대한 바른 시각을 지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끝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 참삶, 하느님 안에서의 영원한 삶으로의 건너감이요 그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그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으며, 또한 그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인간이기에 누구나 이승의 삶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지니게 마련입니다.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현세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기는 마찬가지로 우리의 시야를 넘어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헤아릴 수 없기에 죽음이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특별히 서로 나눌 수 있었던 사랑에 대해 감사드려야 합니다. 어찌 한 사람과 인연을 맺으면서 거기 사랑, 기쁨, 행복만 있었겠습니까? 때로는 미움도 있었을 것이고, 섭섭함, 원망, 야속함 등도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서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시인 천 상병은 노래했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시인의 표현대로 우리는 모두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끝내고 본래의 고향, 본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왔으며 그분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노라고 말하리라.”
위령 성월을 맞으며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를 드리는 모든 분을 기억하면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위령 성월의 첫날인 모든 성인의 대축일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며, 다시 한번 어머니를 하느님께 맡겨드리면서 기도드리게 됩니다. 또한, 어머니의 전구를 믿으며 힘을 얻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것을 다짐하게 됩니다.
첫댓글 신부님의 강론은 늘 제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예수님의 연민을 제마음속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저도 잘 살아서 소풍이 끝나는 날
아름다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미사 가기 전
신부님의 오늘 강론말씀을 듣습니다.
유익하게 가슴에 새기면서 오늘 미사에 임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주님, 가난한 과부의 마음으로 모든것을 모든것에 귀히 여기며
생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세상 떠난 영혼들에게 영원한 안식과 빛을 비추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