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호]
고대, 고대인, 고대정신
고대유사(高大遺史)
글 인권환, 보성전문 이래 민족정신
민족고대, 막걸리 대학 고려대학교를 좀 더 알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고대 교우회가 지령 500호를 기념하여 인권환 교수의 ‘고대유사’(高大遺史)를 발간했다. 고대인, 고대정신 관련 화제와 주목거리를 띄엄띄엄 기술한 고대역사의 일부이다.
항일저항 시인과 지도자의 산실
진달래꽃 천재시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은 보성전문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게이오대로 유학했다가 요절했지만 보성전문의 항일정신으로 시를 쓰다 떠났다. 소월보다 10년 연상인 최승구(崔承九)는 같은 저항시인으로 보성전문이 낳은 ‘최소월’이라 불린다.
소설가 김유정(金裕貞)은 휘문고를 나와 연희전문 다니다 중퇴하고 보성전문에 입학하여 29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했기에 소월과 같은 반열의 보성전문인이다. 어린이날을 제정한 소파 방정환(方定煥)은 보성전문 법학부에 입학한 후 3.1운동 때 독립신문 전파하다 구속됐다. 그는 3.1운동 민족대표 손병희의 사위로 지난 2007년에야 ‘자랑스런 고대인 상’을 수상했다.
소설가 이근영(李根榮)도 보성전문의 저항문인이나 좌익계의 조선문학가 동맹으로 6.25때 월북작가로 우리와는 멀어졌다.
3.1운동 후에 창간된 월간 개벽지는 항일정신의 보성전문 인맥의 산실이다. 보성전문 교수로는 최두선, 현상윤, 송진우, 손진태 등 선각자들이 지성과 야성(野性)을 이끌고 있을 때 월간 개벽은 울분과 저항과 분출구 역할을 맡았다.
꽁초 오상순 시인,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의 이상화 시인, 주선(酒仙) 변영로 선생, ‘술 권하는 사회’, ‘운수 좋은날’의 작가 빙허 현진건,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염상섭 등이 개혁지를 통해 시와 소설을 발표했다.
시인 조지훈의 6.25와 4.18
1950년대 말 고대에 입학했던 고대인이 잊지 못하는 시인 조지훈 교수는 4.19학생혁명의 물꼬를 튼 고대 4.18데모 기념탑에 ‘자유, 너 영원한 활화산(活火山)이여…’라는 시를 새겨두고 일찍 떠났다.
조 시인은 1948년, 새파란 28세 청년으로 고대 교수가 되어 1950년 6.25날에는 성북동 자택에서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있다가 동료 박목월(朴木月) 시인이 전쟁났다고 깨워 일어났다. 전쟁 3일째 날, 조지훈은 전주, 이리, 광주, 목포를 거쳐 대구로 구사일생(九死一生) 피난길에 겨우 살아남았다.
대구에서 종군문인합숙소에서 주먹밥 얻어먹으면서 남긴 ‘풍류병영’이 ‘이기고 돌아오라’이다. 전쟁기간 중 조지훈은 대한민국이 죽다가 살아남은 다부동전투, 죽령고개 사투를 종군하고 서울로 환도했다가 백선엽 장군의 38선 돌파 따라 평양에 입성했다. 그 뒤 1.4후퇴로 다시 피난했다가 공산군이 유린한 서울로 돌아와 고대 국문학과 교수로 4.19세대를 가르쳤다.
청계천이 복원되기 이전 조지훈 교수는 이대, 숙대 여생학생과 고대 초년생들과 함께 청계천변 포장마차에서 온갖 술을 마셨는데 ROTC 장교로 2년 복무하고 돌아오니 벌써 세상을 떠나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

고대, 연대, 서울대 비교 ‘혁명전야’
4.19 이후의 고대 이야기에는 1960년 5월의 한국일보 연재소설 ‘혁명전야’(革命前夜)를 빼놓을 수 없다. ‘고대유사’에는 ‘정비석의 혁명전야와 신명철’로 소개되어 있다.
소설은 재미있게 시작했다. 1960년 5월 21일, 첫 회가 고대와 연대생들을 한껏 자극시킨 내용이다.
“항간에 나도는 말로 돈 50환이 생기면 고대생은 막걸리 마시고 연대생은 구두 닦고 서울대생은 노트사서 고시공부한다. 여대생들이 보면 연대생은 연애의 대상, 고대생은 결혼의 대상이나 서울대생은 동경의 대상이다”라고 썼다. 인기작가 정비석은 나중에 서울신문에 ‘자유부인’을 통해서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낸 최고인기 대중작가이다.
혁명전야의 주인공 고대 법대생 신명철(申明徹)은 신학기 등록금이 없어 “이놈의 썩은 세상 뒤집어엎어야”라고 분노한다. 단짝인 연대 상대 한상준(韓尙俊)은 지방공무원 아들로 곤색 양복입고 양담배 살램(salem)을 피운다. 서울대 정외과 전진호(全鎭浩)는 나이론 잠바 입고 고대 신명철은 골덴바지 차림이다.
이 같은 SKY대(서울대, 고대, 연대) 비교에 분노한 연대생들이 한국일보사 앞 데모와 후암동 정비석 작가 자택 데모로 한국일보사는 결국 연재를 포기하는 사고(社告)를 게재해야만 했다. 당시 고대생들의 한국일보에 대한 항의데모에 참가했던 한 사람으로 그때 정비석 작가의 소설이 계속 연재됐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을 느낀다.
보전과 고대의 막걸리 문화 ‘형제주점’
‘고대유사’에 먹걸리가 빠질 수 없고 형제주점, 곰보추탕, 개성집, 고모집, 감자탕집 등을 잊을 수 없다. 신입생 환영식, 교수님 사은식, 각종행사 뒤풀이 행사 때의 단골집이기 때문이다.
신설동에 위치한 ‘형제주점’이 압권이다. 1926년 개업 이래 보성전문과 고대시절로 대물림해 온 막걸리 고대의 전통 산실이기 때문이다. 1926년 보성전문 상과 졸업생 친목회인 정축회(丁丑會)의 형제주점 기념사진 속에 뒷날 공화당 정권의 4인방인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씨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8.15 후에는 백범 김구, 조병옥 박사, 베를린올림픽 손기정 선수, 작가 조풍연씨 등이 단골이었고, 6.25 이후에도 고대모임으로 막걸리 냄새가 물씬했다.
그러나 1960년대 창업인맥이 정치권에 진출하면서 폐업했다가 1988년 창업 2세가 성북구 하월곡동에 ‘형제추탕’으로 부활시켰으며 1970년대에 창업 3대인 김영식이 고대 상대를 나와 미국에 거주하다가 이를 인수하여 오랜 전통을 되살렸다. 이명박 대통령도 서울시장 시절 동문 김영식씨를 찾아 형제추탕을 방문,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뒤 2007년에는 다시 평창동으로 옮겨 김정배, 어윤대 전 총장 등이 찾아주는 영원한 고대 막걸리집의 전통을 이어간다. 민족고대의 막걸리 역사는 1920년대 보성전문의 운동회나 친목회 뒤에 반드시 항일운동과 민속주의 상징으로 막걸리를 마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