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이스북의 가장 대표적인 기능은 ‘좋아요’라고 할 수 있다.
대학생 설문 조사 결과, 72%의 응답자가 페이스북을 이용할 때 ‘좋아요’를 의식한다고 답했고, 76%의 응답자가 ‘좋아요’가 많을 때 기분이 좋다고 했다.
게시물에 따라, ‘좋아요’는 1,2개에서 많게는 수만 개에 이르고,
‘좋아요’가 많으면 인기 게시물로서 위상이 달라진다.
서로 ‘좋아요’ 개수를 비교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 ‘좋아요’ 개수를 그 사람의 인간관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뿐 만 아니라, ‘좋아요’를 몇 십개 이상 받은 사람이 인기 많은 사람이라는 사고방식도 생길 수 있다.
*
실제로 응답자 가운데 ‘좋아요’ 개수를 의식한 적이 있는 사람은 70%가 넘었다.
이 때문에, ‘좋아요’ 받을 만한 게시물만을 올리는 풍토가 생겨났다.
이제는 ‘좋아요’덕분에 페이스북은 자랑하기용, 과시용으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
‘좋아요’는 간단하지만 깊이가 없고 피상적이다. 단순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그칠 수 있다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좋아요’를 받아내기 위해 진심이 없는 공허한 글을 찍어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좋아요’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고 볼 수는 없다.
‘좋아요’가 몇 천개, 몇 만 개 달린 게시물에 대해 응답자의 58%는 ‘그럴 만큼 가치가 없다.’고
답했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응답한 경우는 22%에 불과했다.
*
페이스북 이용자라면 한 번 정도는 ‘I like = 1 dollar’ 같은 포스트를 봤을 것이다. 희귀병을 앓는 아이의 사진을 올려놓고, ‘좋아요’가 많으면 치료비가 지원된다는 식의 게시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로 이렇게 해서 아이들에게 치료비가 되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더욱 문제인 것은, 이런 식의 게시물이 싸구려 윤리를 확산한다는 점이다.
‘좋아요’ 한번으로 난치병 아이의 치료에 도움을 주는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클릭 한 번으로 대출된다는 어떤 대부업체의 광고가 떠오른다.
‘좋아요’ 한번 누르고 ‘착한 일 했다’고 간단하게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설문조사 응답자들도 이런 게시물이 ‘쓸데없고 허황된 게시물’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거의 70%에 이르렀다.
*
응답자의 61%는 댓글보다는 ‘좋아요’를 더 많이 사용한다고 말했다. 클릭 한 번으로 ‘말’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편리하거나 딱히 댓글을 달기 어려워서’가 90%가 넘었다.
*
사방에 ‘좋아요’가 넘쳐흐른다. 거기에는 어떤 격려도, 위로도, 비판도 없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의사 표면만이 존재한다. 어쩌면 클릭 한 번으로 뭔가를 좇지만, 점자 소통이 단절되고, 진정한 공감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응답자의 64%가 페이스북을 탈퇴하거나 비활성화하고 싶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이유로는 ‘페이스북상의 인간관계가 허탈해서’,‘ 실속이 없어서’가 절반이 넘었다.
*‘
페이스북에서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축하, 위로도 ‘좋아요’ 하나로 끝낼 수 있다. 좋아요’는 이렇게 편리하지만, 감정의 알맹이는 흐리멍텅하며, 편리함으로 인해 공감하고 소통하는 과정이 너무 단순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통이 깊이는 편리함과 다르다. 사랑을 전하고 따뜻한 한마디를 건네고 싶으면,
이를 위해 수고로운 노력을 하고 기다릴 줄 알아야만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다.
*
누구나 한번쯤은 페이스북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보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나 빼고 모두 잘 사는 것 같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들이 여행사진, 연애 사진, 취업 성공 소식을 페이스북에서 봤을 때,
공감하기보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고 한다.
이런 것을 올리는 사람은 자신의 행복한 모습이나 뭔가를 자랑하는 반면, 그것을 읽는 사람은 주로 혼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사람을 부러워하고 자신을 비관하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좋아요’보다는 누군가의 진심 어린 관심과 호의를 필요로 한다.
과연 이런 사람을 몇이나 만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중한 사람들을 찾아내고 공감하는 것이지, ‘좋아요’를 멸치잡이처럼 수집하는 것이 아니며,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은 고작 엄지 세우기 따위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췌: 부산대학교 교지편집위원회 ‘효원’ 2013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