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
추억여행
- 강 문 석 -
바다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고장에서 부산을 찾은 사람들은 말한다. 매일 눈뜨면 아름다운 바다와 만나는 영도 사람들은 참 좋겠다고…. 그래서인지 영도에서 줄곧 살다가 섬을 벗어나 부산 시내로 이사를 했던 사람들이 몇 년을 못살고 결국 섬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가 아닌 명확한 이유가 있어서라니 귀를 기울여도 좋을 것 같다. 탁 트인 조망과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공기를 누구라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나는 영도를 이러한 오늘날의 위상과는 달리 반세기 전 바다 건너 토성동 쪽에 몸담았던 영업소의 예하사업소로만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섬의 인구수나 판매수익은 너무나 초라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처음부터 영도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섬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직접 섬에 근무하는 기회를 갖게 된다. 판매사업장이 아닌 변전소에 몸을 담았던 것이다. 노조 개편대회에서 집행부를 지지하지 않은 것 때문이었지만 난 오히려 심기일전하여 맡은 일에 더욱 열중했다. 그런데 당시 영도지역에 하나뿐이었던 테니스코트가 우리 변전소 안에 있었다. 세계적으로 일기 시작한 테니스 붐을 타고 영도지역의 기업체 대표나 병원장 같은 사람들이 변전소로 몰려들었다.
변전소의 7명 직원 중 소장파에 속했던 나는 우리도 연식정구에서 테니스로 바꾸자며 전 직원에게 라켓을 사다가 강제로 떠안기기도 했다. 산업체의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정부에서 전국 5개 공립전문대에 세운 특별과정부에 입학한 것도 이때였다. 그러면서 10년 넘게 쉬었던 전국웅변대회에도 다시 나서게 되었다. 아마도 나의 야간근무 때는 웅변 연습으로 인해서 배전반이 소음공해에 시달렸을 것 같다. 한창 푸르던 날에 변전소에서 만나 4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선배 동료들과의 추억이 떠오르자 귀소본능이라도 발동되었던지 꼭 한번 영도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당시 오가던 골목을 직접 밟아보며 추억에 젖어보기 위해서였다. 몸담은 사무실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영도지만 평소 미루기를 잘하는 버릇 때문인지 바로 찾아 나서지 못하고 마냥 세월만 흘려보내고만 있었다. 그래서 금년에는 꼭 답사를 끝내기로 하고 햇살 맑게 쏟아지던 5월의 휴일 한낮에 남포동에서 영도대교를 건넜다. 여름이 가까워진 탓에 바다에는 옅은 해무가 드리워져 있었다. 경찰서 뒤에서 시작하여 옛 수산진흥원까지가 나름대로 정한 코스다. 그 당시엔 주로 영세한 수리조선소가 밀집해 있던 골목엔 선박부품이나 어구를 취급하는 상점들이 많았다.
영도에도 나라경제가 발전한 만큼 도로와 가로등을 포함한 공공시설은 업그레이드되었지만 아직도 이곳 주민들의 삶은 곤궁해 보였다. 끝날 줄 모르는 불경기 속 휴일인데도 가내공장들에선 선구를 손질하는 그라인더 소리가 골목으로 새어나왔다. 아마 이렇게 휴일도 없이 일한 사람들의 땀방울이 모여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수리를 목적으로 정박한 배들인지는 몰라도 도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들어차 있었다. 오래전 수산진흥원이 기장으로 옮겨간 자리엔 주변에 위화감을 줄만큼 고급스러워 보이는 3층짜리 빌딩이 큰 덩치로 육중하게 버티고 섰다.
‘국제선용품유통센터’란 이름을 달았다. 모르긴 해도 건물 안에 현금이나 금붙이라도 잔뜩 쌓아놓고 있는지 시대에 맞지 않게 높은 철책울타리를 만든 것도 모자라 그 꼭대기에 날카로운 화살촉까지 촘촘하게 박았다. 센터의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변전소도 시대조류에 밀려 자동화하면서 옥내로 설비를 들이느라 현대식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강산이 네댓 차례나 바뀔 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영도라고 어찌 변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그동안 부산대교를 시작으로 남항대교 그리고 부산항대교까지 연결되어 이제 영도의 교통망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한 것 같다.
개 눈에는 뭣만 보인다더니 천마산에서 공중으로 바다를 건너온 송전선로가 눈에 들어온다. 반세기 전 당시의 모습 그대로라 좀 의아했다. 벌써 20여 년 전 해남에서 제주까지 먼 거리에도 해저케이블을 깔았는데 빤히 바라다 보이는 구간의 낡은 가공선로를 그대로 방치하다니…. 태풍의 위협 말고도 항공기 접촉에도 노출된 선로를 고집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새로운 스포츠로 각광받는 패러글라이딩에 의한 사고도 발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천마산에서 영도로 내려온 송전선로를 지지하는 철탑은 변전소 부지가 아닌 국제선용품유통센터 마당에 서있었다.
철탑 사용료와 선하지 보상도 해가면서 관리하기도 불편한 선로이니 바다 밑으로 옮기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될 것 같다. 이러한 나의 지적을 카톡 글로서 읽은 현직의 공사설계 책임자 Y처장은 현재의 송전계통 운영시스템을 빠르게 알려왔다. 2년 전인 2013년에 토성동에 있는 부산변전소에서 영도변전소까지 지중케이블-바다구간은 해저케이블-로 연결하여 기존의 가공선로와 2계통으로 운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쪽에 고장이나 사고가 발생해도 정전 없이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일반 시민들이 알고 있으면 좋을 정보를 지체하지 않고 보내온 것이 여간 고맙지가 않다.
이곳 남항동 일대에서 가장 큰 산업체인 '부산STX조선해양보세공장'은 입구에 붙은 간판의 글자들이 너무 길어서 읽는데도 힘들었다. 까마득하게 높아 마치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크레인은 듬직한 믿음이 가기도 했는데 조선업 불황이 심화된 때문인지 오늘과 같은 일요일엔 공장 전체가 휴무를 하고 있었다. 개방된 공장의 넓은 마당에서 크레인을 카메라에 담고 나오는데 젊은 경찰관들이 길에서 골목 안을 향해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혹시 이 동네에서 무슨 사건이라도 터졌던 것일까. 아니라면 이 지대가 워낙 으슥한 공장지대라 범죄 예방을 위해 순찰하는 것일까.
난 그들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러고 땀 흘리는 그들에게 음료수라도 전하고 싶어서 두리번거렸지만 골목엔 가게라곤 없었다. 경찰을 가까이에서 대하자 일전에 광화문에서 벌어졌던 불법 폭력시위가 떠올랐다. 공권력이 무너진 나라의 현실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어디에 경찰을 이렇게 무참히 짓밟는 나라가 있던가. 기업이야 망하든 말든 내 밥그릇 더 챙기겠다는 집단들을 지금대로 그냥 놔둔다면 대한민국의 장래는 어떻게 될까. 괜한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져 머리를 돌렸다. 이곳 남항동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자갈치시장과 용두산공원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내가 현직에 근무할 당시엔 영도에 고갈산이 있었다. 그 이름 때문에 산이 메말랐던지 헐벗은 산은 너덜지대처럼 시커먼 자갈들이 흘러내리다 붙어있는 형국이라 바라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훨씬 세월이 지난 뒤 성당 사람들과 산중턱의 청소년수련관을 찾아 일박하면서 봉래산이란 본래의 산 이름을 만났다. 불법으로 나라를 빼앗은 자들이 얼마나 악랄했으면 남의 나라 정기를 영원히 말살하고자 산 이름까지도 이렇게 고약하게 바꾸었더란 말인가. 그런데 그 당시에는 이러한 사실을 누구도 얘길 해주지 않아서 난 까맣게 모른 체 영도를 떠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요즘처럼 기초단체들 간에도 경계지점이나 양쪽에 걸쳐 있는 시설물의 명칭 문제로 분쟁이 많은 걸 지켜보면서 도개식 영도대교가 개통될 때 중구 쪽에서 엉뚱한 소리를 해대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개통과 동시에 그와는 반대현상이 일어나고 말았다. 매일 정오에 15분간 도개하는 영도대교로 인해 남포동과 광복로는 내외국인 관광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반면, 영도는 그야말로 파리를 날리면서 교통 불편만 겪게 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우리가 흔히 듣는 윈-윈 전략으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생방안을 찾아야만 도개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가벼울 것 같다.
첫댓글 영도에도 추억이 많으시네요~
저 송전선로도 이제는 예비개념입니다~ 대교밑에 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어서 올 정전될 일이 없답니다~^^ 도로도 사통팔달이고요~
살기 좋은 곳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그날 간담회에서 만났던 양준철 처장께서 2013년 케이블로 토성동 부산변전소와 연결되어 2계통으로 운전중이란 정보를 알려왔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