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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 없는 여자와 도시』는 고닉이 『사나운 애착』을 펴내고 30여 년 만에, 같은 영혼으로 같은 도시에서 써 내려간 회고록이다. 평생 뉴욕이라는 궁극의 메트로폴리스를 누비며 살아온 그가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사랑의 단념과 우정의 예감이다. 친구와 연인들, 어머니와 이웃들, 거리의 사람들, 대도시가 길러낸 작가들과 주고받는 압축적이고 리듬감 있는 대화는 눈을 뗄 수 없는 희곡 같기도 하고 뉴욕에 바쳐진 시 같기도 하다. 관계의 딜레마, 우연한 마주침과 구성된 과거, 자기 발견의 순간들, 로맨틱한 관계만큼이나 내밀하고 치명적인 우정의 네트워크, 도시의 신음과 동요가 이 책의 콜라주를 이룬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라는 제목은 그런 면에서 책의 정신을 간결하게 담아낸다. 중년의 고닉이 유년기-청년기-중년기를 돌아보며 붙들었던 사나운 애착은, 30년 후 짝 없는 여자의 도시에서 사랑의 종말과 우정의 출몰로 굴절된다. 노년의 고닉은 일생을 찾고 헤맨 짝, 그런 짝을 찾겠다는 기대와 열망과 가능성을 전부 뒤로하고 혼자서 가장 완전한 자기를 향해 걸음을 내디딘다. 자기의 장소인 도시에서, 자기의 파편인 군중 사이로.
로맨틱한 사랑의 종말과
끝나지 않는 우정
‘사랑은 답이 아니다.’ 남편의 상실을 인생의 수렁으로 받아들여버린 어머니 곁에서, 로맨틱한 사랑에 삶을 제물로 바쳐버린 여자들의 중력에 짓눌려 고닉은 생각했다. 그러나 로맨스라는 자아의 유예를 한때는 그도 간절히 바랐다. “도무지 찾을 길 없는 진정한 짝이 인생의 화두가 됐고, 그런 사람의 부재는 모든 걸 정의내리는 경험이 됐다”.(70) 삼십대 중반에 이미 두 번의 결혼과 이혼, 몇 번의 강렬한 연애를 경험한 그는 진정한 짝이라고 생각한 사람과 나눈 열렬한 사랑과 그들에 대한 헌신적인 동일시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종말을 맞았고, “소진되고, 비참했고, 고독해졌다”.(이하 Laura Marsh, “Giving Up on Love: Vivian Gornick and the pursuit of an uncoupled life”, The New Republic, April 24, 2015 참조)
『빌리지보이스』에서 활동하며 제2물결 페미니즘에 몸담은 고닉은 이성애 로맨스와 그 안의 권력 관계를 재구성하고 전복하려고 했다. 여성이 지워진 세계에서 사랑이란 기벽이 삶을 빚어가도록 자기를 내팽개친 이웃들을 떠올리며, “수많은 사람이 자기 삶이 빚어지는 과정을 사회적 차원에서 설명해내며 활기를 되찾던, 희열의 순간”을 살았다. 현대 도시 여성이라는 조건의 인식은 언제나 사랑의 불가능성을 예감하게 했다. 이후 당대 페미니스트들의 글을 엮은 『성차별적 사회의 여성Woman in Sexist Society』이나 『알리 마무드를 찾아서In Search of Ali Mahmoud』 『사랑 소설의 종말The End of the Novel of Love』 등 이어지는 작업에서 사상을 가다듬고 발전시켜가며, 고닉은 본격적으로 사랑 이야기의 한계를 말하기 시작했다. 마담 보바리든 안나 카레니나든, 남자를 사랑하는 데 모든 것을 건 여자들은 감동이 아닌 충격을 안길 따름이며, 새로운 세상에서는 자기 발견의 서사가 펼쳐져야만 한다고 말하는 그의 관심사는 이제 사랑이 아니라 사랑 없는 삶이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는 기대든 후회든, 열병이든 단념이든 사랑에는 복무하지 않는 삶을 택한 고닉이 그런 선택을 실천해내며 발견한 것들에 대한 회고록이다. 이 책에 영감을 준 조지 기싱의 소설 『짝 없는 여자들』은 세상 앞에 당당한 지적인 여성이 로맨틱한 감정의 유혹과 긴장을 뿌리치고 자유로운 혼자가 되기를 선택하는 이야기다. 고닉은 그것이 결코 쉽게 완성되는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사랑은 없어도 된다고 말할 때에도 찾아드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위력”(191)은 이론과 실제의 간극을 극명하게 드러내며 그에게 번번이 호된 시련을 안긴다.
“나는 굳어버린 내 심장을 애지중지하지만, 지금껏 애지중지해왔지만, 로맨틱한 사랑의 상실은 여전히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다.”(40)
굳어버린 심장은 1970년대부터 고닉이 문학비평가이자 작가로서 화두로 삼아온 통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작품에서 여성의 혼자 됨을 그리는 방식-불안정함, 불완전함, 위험함, 처량함-과 그가 짝 없는 여자로서 80년을 살아내고 증언하는 갈등은 그다지 긴밀히 연결되지 않는다. 사랑의 부재보다 자기의 존재를 훨씬 더 예민하게 감각하는 이에게는, 누군가에게 어떤 대상이 되는가보다 자기를 발견하고 자아를 발달시키는 게 더 중요한 과업이다. 타인에게도 자기를 맡길 줄 알아서 안정을 찾고 완전해지기보다, 오로지 자기 혼자 자기를 도맡아서 난리를 피우고 지긋지긋해하고 애통해하면서도 끊임없이 자기를 알아내야 하는 숙명에 처한 사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람부터 이 책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20년 지기 레너드까지 고닉은 언급하는 모든 인물에 특정한 존재 양식을 부여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그 정도가 하도 첨예해서 자기 불행의 전문가가 되었을지언정. 자기를 모르는 사람도 왜 그렇게 되었는지가 밝혀지고 만다. 고닉은 자기 자신에게 그러듯 누가 어떤 사람인지, 어쩌다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관점을 형성한 동력은 무엇이고 남은 인생을 뒤흔들 고통은 무엇인지, 어디서 정신이 마비됐고 어떻게 해야 깨어나는지를 타협이 없는 언어로 끊임없이 정의하고 진단한다.
그런 점에서 고닉이 “우리는 하나”라고 말한 레너드와의 우정과 “관능의 열병”이라고까지 느낀 에마와의 우정은 흐리멍덩함을 허락하지 않고도 긴 시간 유지돼온 특별한 관계다.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이 친구들과의 관계는 사랑임을 부정당한 채 사랑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듯하다. 그는 안정적인 가정을 꾸린 에마와 영혼의 모험을 같이하며 서로를 알아가는 희열을 느끼고, 동성애자인 레너드와의 대화에서 나날의 불행과 그것이 구성한 자기 내면을 더 또렷하게 인식하는 인생의 위안을 얻는다. 고닉이 자기의 원본이라고 한 모친, 대문호와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 동료 예술가들, 작품 속 등장인물, 거리에서 만난 상인과 행인, 공연장의 관객들과 이름 없는 군중도 작가의 면면을 비추며 인식의 순간을 제공하고 “서로의 존재 속에서 자기 최선의 자아를 느끼는”(27) 풍성한 관계를 만들어준다. 그들의 총체인 대도시 뉴욕은 고닉이 포착한 우정의 패턴이 무한히 펼쳐지는 장소다.
기질로서의 대도시
-자기표현과 자기발견의 메트로폴리스
뉴욕 브롱크스,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이 복작거리며 살아가던 동네에서 나고 자란 비비언 고닉은 일평생 그 도시를 자기 구성의 장소로 삼아왔다. 노동자계층의 단조로운 일상, 그 노련하고 지친 영혼들의 욕망과 일탈과 애환이 깃든 대도시 한구석이 『사나운 애착』의 그를 길러냈다면, 『짝 없는 여자와 도시』의 고닉은 혈관처럼 그 도시 구석구석에 생명을 공급하고 그 도시에 생애를 부여하는 무수한 거리의 산물이다.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강과 들판, 산과 동굴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거리를 이용했다. 그렇게 우리만의 세계지도에서 우리 위치를 짚어나갔다.”(16) 그렇게 끊임없이 뉴욕의 거리를 걷고 또 걷는 그는 뼛속들이 도시인이고, 거기서 자기와 세계를 발견하는 산보객이다. “달콤했던 여름, 저녁 광장의 아름다움”, “문화와 계급이라는 특권을 약속하는 그곳의 풍경”(214), “길바닥에서 들을 수 있는 산전수전 다 겪은”(120) 이들의 언어-고닉은 대도시의 풍속과 사건을 자연의 경이를 체화하듯 본능적으로 감각하고, 영혼에 각인시킨다. 그것은 무엇보다 도시가 그의 거울이자 무대이기 때문이다.
“뉴욕에 있는 사람은 대부분 인간의 자기표현력에 대한 증거가-그것도 대량으로-필요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다. 가끔씩도 아니고 매일 필요해서. 그들에게 필요한 게 바로 그거라서. 감당할 만한 도시로 떠나버리는 사람들은 뉴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뉴욕에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은 뉴욕 없인 못 사는 사람들이다. 아니면 뉴욕 없이 못 사는 건 나라고 말하는 게 더 맞을지도.”(278-279)
자기 발견을 갈망하는 이는, 자기를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타인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그것은 본받고 싶은 사람, 선망하는 삶 따위와 전혀 무관한 생긴 대로의 자아, 되는 대로의 일상 속에 있다. 그렇게 온갖 인간 군상과 갖은 삶의 방식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는 뉴욕의 거리가 그에게 중요해진다. 거리에는 우리가 찾고 싶은 사람이 있고, 우리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다.
대도시 거리를 정처 없이 거니는 사람, 산보객flaneur이란 개념을 가져와 고닉이 도모하는 것은 창조성이다. “미래의 작가로 변신할 사람은 바로 산보객”(107)이라는 보들레르의 말처럼, 군중은 그 안에서 자기와 세계를 발견하려는 작가의 창조성에 숨은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비비언 고닉이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 목격하는 장면은 작가 자신처럼 미혹을 용납하지 않으며, 사는 게 뭔지를 신랄하게 실증하는 인물과 사건이다. 온갖 수완을 몸으로 익히고 거리에서 살아남은 걸인, 생활과 환경에 갇힌 어린아이들의 왕성한 호기심과 지적 굶주림, 불만과 결핍이 존재의 방식이 된 인생들, 예술로 승화된 실패, 결국엔 자기를 잃어가는 이와 마침내 자기와 하나가 되는 이……. 고닉은 “이곳을 기쁨으로 가득 채우려면 우리 모두가 필요하다”(218)고 말한다. 기대와 실망, 구속과 탈주로 동요하는 도시는 작가에게 그가 “지금까지 몸으로 살아낸 것이 온갖 갈등이지 환상이 아니었”(215)음을 일깨워준다. 뉴욕과 자기는 하나라는 작가의 선언은 도시도 바로 그 방식으로-환상이 아닌 갈등으로-그토록 화려하게 건재해왔음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도시는 안정과 행복의 약속을 가장하는 환상이 아니라, 불안과 분투의 아수라장이라는 진실로 우리를 매혹한다.
뉴욕의 우정은 울적한 이들에게 마음을 내주었다가 자기표현이 풍부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는 분투 속에서 배워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거리는 누군가의 징역에서 벗어나 또 다른 누군가의 약속으로 탈주하려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 도시가 그 여파로 어지럽게 동요하는 듯이 보이는 순간들이 있다. _44쪽
“요전에 말이야,” 내가 말한다. “남을 판단하기 좋아한다는 지적을 받은 적이 있거든. 웃기시네, 속으로 그랬지. 10년 전 나를 봤어야 하는데. 근데 그거 알아? 판단하기 좋아하는 사람인 걸 사과하는 것도 지긋지긋해. 판단하기 좋아하면 왜 안 되는데? 나는 판단하기 좋아하는 게 좋다고. 판단을 하면 안심이 된단 말야. 절대적인 것들. 확실한 것들. 그런 것들이 얼마나 좋았는데! 그런 걸 되찾고 싶어. 되찾을 순 없는 걸까?” _47쪽
물론, 의미 있는 삶에는 진짜 과업-세계에서 실제로 해낸 업적-이 포함되어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제 그 일을 해내려면 ‘이상적인 파트너’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사람만 곁에 있으면 난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없으면……
아니, 그런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차츰 그 과업을 하는 것에서 그 과업을 해내기 위해 내 짝을 찾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그 사람을 찾는 일이 어느새 그 과업이 된 듯했다. _67쪽
우리는 계속 함께 걷는다. 나란히, 묵묵히, 끊임없이 형성 중인 서로의 경험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목격자로서. 대화는 언제까지고 깊어져만 갈 것이다. 설령 우정은 그렇지 않더라도. _216쪽
좋은 대화란 공통된 이해관계나 계급의식이나 공유된 이상 따위보다는 기질에 달린 문제다. "그게 대체 뭔 소린데?"라고 따지기보다는 "뭔 말인지 딱 알지"하며 자기도 모르게 반색하게 되는 기질. 그런 공통의 기질이 있으면 대화는 자유스러우면서 거침없는 흐름을 어지간해선 잃지 않는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힘에 이리저리 질질 끌려다닌 느낌이야. 사람들이 나한테 기대하는 걸 하고 나면 불안해지곤 했지. 오랫동안 불안말고 다른 상태는 모르고 살았어. 어느 날 문득 깨달았지. 나를 빚어놓은 건 불안이더라고. 그 뒤로는 아무것도 놀랄게 없었어.
내가 아는 한 작가 앨리스는 몸이 쇠약해지는 바람에 여든다섯에 쓰러졌다. 그는 노인요양시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훌륭한 수준의 돌봄이 제공되어 처음엔 꿈의 공간처럼 보였다. 2주가 지났을 때 면회를 갔다. 화사한 소파가 놓인 로비에는 얼굴이 축 늘어진 여자들 남자들이 여기저기 힘없이 나른하게 앉아 있었지만 ㅡ불길하네, 순간 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ㅡ앨리스가 배정 방은 근사했다. 하지만 정작 앨리스 본인은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여자처럼 보였다.
"여긴 대화가 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한번은 내가 그렇게 물었다.
"없지 그럼." 그러면서 앨리스는 덧붙였다. "잡담이야 되지. 잡담은 많이 나눠요. 하지만 대화? 없어요, 그런 건.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는 당연 없고말고."
앨리스는 매일같이 귓속을 채우는 잡담 때문에 자기가 죽어간다고 했다. 침묵만도 못해, 훨씬 못해,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