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01호. 높이 395㎝, 너비 140㎝. 이수(螭首)와 귀부를 갖춘 커다란 비이다. 비문에 새겨져 있는 원래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고립되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직접 청태종에게 항복한 사실을 담아 세우고 이것을 대청황제공덕비라고 했다.
당시 청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서울에 침입하여 삼전도에서 진을 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포위 공격하여 마침내 항복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이러한 사실을 영원히 기념하려는 청태종의 강요에 의해서 세워졌다. 당시 비문은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竣)이 해서로 썼으며, 여이징(呂爾徵)이 새겼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사방 7품의 해서로 씌어진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다음 사전에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1963년1월 21일에 사적 101호로 규정되었다.
평..
그렇다면 남한산성은 서울의 남동이 아니라 서쪽에 있었다는 사실인데,, 어찌하여 방향이 정반대일 수가 있나? 따라서, 삼전도비의 위치도 강동이 아니라, 강서에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삼전도의 현 위치를 규정한 것도, 남한산의 위치도 서울경기에서 볼때 반대라면,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잘못설치되었다 하더라도, 남한산의 위치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남한산의 위치가 서울의 서쪽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