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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사랑이신 주님, 제게 오소서
†찬미예수님
여러분들, 제 이름 석자를 아시지요?
성은 김이요, 이름은 웅열
제가 세상 태어나면서부터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신자들은 저를 보고 ‘토마스신부님’
친가에 가면 동생들이 나를 보고 ‘형’ 아니면 ‘오빠’하고 불러요.
神父라고 하는 말은 영어로 ‘Father’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신자들은 사제인 저를 보고 ‘아버지’라고 불러요.
우리 어머니에게는 제가 사제이기 전에 아들입니다.
사람이 없을 때 우리 어머니는 ‘토마스’ 이렇게 부르십니다.
그전에는 ‘신부님’ 꼭 그러셨는데 내가 싫다고 그랬어요.
엄마가 자식한테 무슨 ‘신부님, 신부님’ 합니까?
그냥 ‘토마스’ 하고 부르세요.
그러니까 김웅열이 사제도 되고, 동생들한테는 오빠나 형님도 되고,
부모님한테는 자식도 되는 거예요.
아버지라고 하는 존재가 있어요.
그 양반은 직장에 가면 사장도 되고, 부사장도 되고, 과장님도 되요.
또 자식한테는 아버지라고 불려요.
부인한테는 남편이 되요.
하느님이 몇 분이시죠?
세 분?
말 잘하세요.
하느님은 한분이시지만 위격은 3위예요.
내가 사제요, 오빠요, 아들이듯이...
하느님은 한분이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삼위일체적인 사랑입니다.
성부의 창조적인 사랑/ 성자의 구원의 사랑/ 성령의 성화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은 창조와 구원과 성화라고 하는
삼위일체적인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나죠?
하느님이 삼위일체적인 삶을 살았듯이 우리들의 삶도 세례 받는 그 순간부터
삼위일체적인 삶을 살아야 됩니다.
성부는 무슨 사랑을 보여주셨다고 그랬어요?
성부가 사랑으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셨듯이
크리스천 역시 성부의 재창조사업에 어떤 방법으로든지 참여해야 됩니다.
성부의 재창조 사업 첫 번째, 자녀 출산입니다.
요즘 결혼은 하는데 아이들을 갖지 않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것은 할 수 없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는데도 철저하게 산아 제한을 합니다.
“신부님 요즘 세상에 옛날처럼 넷, 다섯... 낳아 보세요. 키우지도 못해요.”
며칠 전에 중국에서 대지진이 일어났는데 학교에서 아이들이 가장 많이 죽었어요.
학교가 800개 정도가 무너졌다고 하죠.
어제 인터뷰하는 거 보니까 새파랗게 젊은 엄마가 ‘엉엉’ 울면서
중국정부가 애를 하나 이상 낳으면 벌을 줬기 때문에 애를 하나 밖에 못 낳았는데
그 애가 땅속에 파묻혀 있는 거예요.
공장은 다 폐쇄했고... 애도 더 못 낳는대요.
애를 하나만 낳으라... 해서 하나만 낳았는데 학교건물이 무너진 걸 보니까
부실 건물로 철근이 하나도 안 들어있더래요....다 떼어먹고 부실공사래요.
학교란 학교는 다 무너지고 그 안에 독자 아이들이 깔려죽은 거예요....
요즘은 애들이 가정에 하나 아니면 둘, 이러다보니 앞으로 신학교 지망하는 사람도
줄어들겠죠?
저희 가족은 3남 2녀예요.
저는 클 때도 우리들이 많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고, 지금도 많다고 느껴지질 않아요.
근데 지금은 뭐 둘, 셋만 되도 무슨 야만인 취급을 하고
‘셋이나 낳았어?’
여러 해 전에 미국 피정을 가서 보니 거기 성령기도회 회장이 의사였는데
미국에서는 드물게 아이가 여섯이야.
부인은 본당에 총무를 보고 있었어요.
외국은 피정이 금, 토, 일인데 피정센터를 빌려서 신자들이 다 가서 피정을 해요.
그럴 때는 아이들 여섯 모두를 여러 집에 나누어 맡겼어요.
당시 여섯 살부터 중학교 1학년까지 여섯 명이 있었는데
피정 끝나면 각 집마다 맡긴 아이들.....데리고 와야 돼.
어떤 때는 몇 째를 어떤 집에 맡겼는지.... 수첩에 안 적어 놓으면 헷갈리는 거야.
그러면 나중에 그 집에서 전화가 와요.
왜 애 안 찾아 가냐고....그 여섯 명의 아이들이 다 천재예요.
초등학교 때부터 전국 미술대회에서 우승하고...
그 집 부모들이 어느 날 제가 진천에 있는데 전화가 왔어요.
“신부님, 아이들 데리고 진천에 가겠습니다.”
“진천에 왜 오냐? 그 좋은 의사직 버리고....”
청주 성모병원에 취직을 시켜서 진천으로 이사를 왔어요.
그분 하시는 얘기가 아이들 성당의 종소리 듣는 쪽으로 키우고 싶다.
삼십 평짜리 아파트 하나 얻어줬더니 거기서 여덟 식구가 사는데
엄마 아빠 자는 방에 4, 5, 6째는 거기 삼층 침대에 같이 잤어요.
1번은 그래도 제일 큰 애니까 문간방에 있고
2, 3번 남자아이들이 방 하나 쓰고
여덟 식구가 북적북적대면서 살아요.
사제관에서 요렇게 내려다보면 진천초등학교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하나씩 다 있었어.
이 아이들이 한국에 올 때는 한국말을 한마디도 못했는데
시험을 보면 빵점 아니면 백 점이예요.
워낙 머리가 좋으니까 아예 통째로 외워버려.
외운 것이 나오면 백점이고 안 나오면 빵점 맞아요.
그런데 1년 만에 전교에서 모두 일등을 합디다.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얼마나 신앙교육을 철저히 시켰냐~~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학교가 파하고 나면 반드시 성당에 들러서
그 조그마한 애들이 감실 앞에 와서 기도를 해요.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왔다 가면 2학년짜리가 또 기도하고 가고........
초등학교 1학년짜리가 성당에 기도하러 왔길래 쫓아내려가서 봤더니
정말 바리셀리노의 기적에 나오는 그 소년처럼 예수님 쳐다보면서
“예수님! 나 왔다.
근데 나 한국말 못한다고 애들이 놀렸어. 걔네들 혼내 줘.”
이렇게 대화를 막 해요.
“나 갈게. 내일 또 봐.”
아이들 여섯에 여덟 식구가 살지만 그 부모들은 기가 막힌 신앙교육을 시켰어요.
그 형제가 얘기하기를 자기는 형제가 열 둘이였대,
열 둘 중에 막내였기 때문에 자기네 식구에 비하면 반도 안 된대요.
제가 그 형제를 보고 놀랐는데, 지난 3월 달에 호주를 갔더니
‘세상에 ~~아홉 명을 낳았습디다.’
피정 끝나는 날, 그 아홉 명을 봉고차에 다 태워가지고 성서 책에 모두 싸인을 해달라고 해서...
내 성서 아홉 권에 싸인을 다 해줬어.
그 집도 역시 아이들이 기도생활 철저하게 하고 살아요.
그리고 아픈 아이 하나도 없이.....
‘지금처럼 각박한 세상에 그렇게 아이를 낳는다면 하나도 제대로 못 키웁니다.’
라는 말 다 거짓말이에요.
아홉을 낳고... 여섯을 낳고도... 하나를 개판으로 키우는 집보다 훨씬 더
신앙생활을 시키면서 잘 키우는 집 주변에 많아요
자녀출산은 재창조사업입니다.
성부의 재창조 사업 두 번째는 합성세제 덜 쓰기
자연이 죽어가고 있지요?
여러분들 샴푸 쓰시지요?
저는 샴푸 안 써요...저는 옛날부터 비누로 머리 감아요.
제 머리결이 빤짝빤짝하고 얼마나 때깔이 좋은지....
샴푸 쓰면 머리가 빠져요...원형탈모 되고...비누를 써 보세요,
빨래 통에 세제를 집어넣지만 평소에 쓰는 것 반으로 줄이자.....이거지요.
여러분들은 공장에서 나오는 시커먼 물만 가지고
‘아이고, 세상에~저 못된 것들 왜 폐수를 흘려보내?’
천만에~~ 공장폐수는 문제가 아닙니다.
각 가정에서 버리는 생활폐수가 강을 오염시키고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는 거예요.
지가 버리는 것은 생각 안하고 공장에서 몰래 버리는 것만 폐수라고 생각하지요.
신앙인들은 자연을 지켜야 됩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 지키는 것도 재창조사업입니다.
따라서 합성세제라든가...삼푸라든지...안 쓰고 살 수는 없지만, 부득이
써야 할 때에는 평소에 쓰던 것 반으로 줄여야 합니다.
옛날에는 양잿물로 다 만들어 썼지요?
요즘은 폐유로 만듭니다.....
지금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재창조 사업 세 번째.
나로 인해 남을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나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한테 지가 상처 받은 것만 끌어안았지
자기가 상처 준 것에 대해서는 늘 변호사처럼 관대합니다.
남이 상처 준 것에 대해서는 검사처럼 준엄하지요
그러나 영적인 재충전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죄짓지 않게 노력하는 겁니다.
네 번째, 성부의 재창조 사업에 참여한다고 하는 뜻은
전교해서 많은 사람을 영세시키고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성부의 창조사업에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길
첫 번째, 자녀출산
두 번째, 합성세제라든지...샴푸라든지...이런 것 덜 쓰기
세 번째,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 죄짓지 않게 하기
네 번째, 전교하여 하느님 앞에 새로 나게 하는 것
이것이 성부의 재창조사업에 우리들이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길입니다.
두 번째가 성자의 구원사업입니다.
성자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인데
첫 번째,
본인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먼저 강하게 가져야 됩니다.
우리 신자들은 대부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내 자신도 확실히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모르는 판에
남편을 어떻게 전교하고, 부하직원을 어떻게 구원하고 내 후배를 어떻게 전교하여
하느님께로 이끕니까?
그러나 개신교 신자들은 어떻습니까?
부흥회 며칠만 갔다 와도.... 개신교에서 세례 받지 않아도...
나 같은 죄인, 예배당에 불러주신 것, 하느님이 나 구원해 주셨다고.... 확신합니다.
천주교신자들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까
전교하는데도 소극적이요.
용서하는데도 소극적이요,
봉헌하는데도 늘 찌끄러기만 봉헌하고
전교하는데도 늘 소극적일 수밖에 없어요.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성자의 구원사업에 첫 번째로 참여하는 길입니다.
두 번째는 용서의 삶입니다.
주님 앞에 우리들은 늘 용서받기를 원합니다.
내 죄는 아무리 커도 하느님께 용서받겠다고 하면서...
늘 다른 이를 용서해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를 쑤셔대는 인간들에게
당신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들에게
그 분 말씀 한 마디면 하늘에서 수천의 천사를 내려 보내서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예수님의 구원사업은 용서가 없었다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습니다.
칼로 찌르면 나도 칼로 찌르는 것이 세상을 정복하는 방법이었지만
성자가 이룩하신 구원사업은 뺨을 때리면 다른 뺨도 내어주는 것이
그 분이 세상을 정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세 번째 성자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순종은 기적을 낳습니다.
순종은 기쁨을 가져옵니다.
여러분의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에 순종하십시오.
때로는 사제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에 순종하십시오.
성서를 읽다가 강하게 나에게 메시지를 전하시는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불순종은 두려움과 분열을 가져오지만
순종은 기쁨과 평화와 일치와 기적을 낳고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신 하느님의 축복은
자손들에게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참여하려면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되고
용서의 삶을 끊임없이 하려고 애써야 되고 순종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성자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 <죽기까지 성부께 순종하신 예수그리스도>라고 외쳐야 합니다.
저 십자가 안에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빠지면 아무 의미도 아닙니다.
순종도 뭐하기 까지?
죽기까지 순종해야 됩니다.
손가락 하나 잘라 내는 것까지의 순종이 아니라
다리 하나 잘라내는 순종이 아니라
목숨을 바쳐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가 바로 십자가의 100점짜리 답입니다.
세 번째로 성자의 성화사업이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성부의 재창조사업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성자의 구원사업에 동참한다 하더라도 성자께서 성화시켜 주시지 않으면
앞엣 것은 다 형식적이고 ‘눈 가리고 아옹’ 할 뿐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성화되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피정 한 번 해서 성화된다고 해서 그 성화가 죽을 때까지 가지 않습니다.
사탄이라고 하는 놈은 우리를 얼마나 비참하게 유혹을 합니까?
시궁창에 쓰레기통에 쳐집어 넣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을 칩니까?
성화는 가만히 앉아서 빛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시련을 통해서 성화가 됨을 명심합시다.
그것도 예상치 못했던 고통을 통해서 성화가 됩니다.
우리를 성화시키는 하느님의 채찍이 있는데 첫 번째가 십자가입니다.
다윗왕이 남의 아내를 탐냈던 뼈아픈 사건을 통해서 거룩한 성화가 되었듯이
모세가 꽃밭속이 아니라 가시덤불속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 광야에서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이 유일신이라는 사상을 얻게 되었듯이
베드로가 세 번의 배반을 통해서 으뜸 사도가 되었듯이
우리는 죽을 때까지 고통이라고 하는 이 십자가를 통해서 성화가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 다른 것은 다른 사람에게 다 양보한다 하더라도
절대로 양보하지 않아야 될 것,
여러분에게 희생의 기회가 오면 절대 양보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성화시키는 두 번째는 고독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고독해집니다.
그 고독가운데 하느님을 쉽게 만날 수가 있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이면서 세 위라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그 분들은 우리가 믿든 안 믿든 그렇게 존재해 왔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의 관계였듯이
우리들도 그런 한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느 본당에 가면 삼위일체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삽니다.
어느 성당에 가면 삼위일체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어느 반에 가면 삼위일체적인 모습을 표현하는 구역반이 있습니다.
같은 쁘레시디움이 수십개라 하더라도 어느 쁘레시디움에 들어가면
삼위일체적인 그리스도 향기가 풍기는 레지오, 쁘레시디움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 되는 관계는
돈으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고 인맥으로 이루어진 관계도 아니고
사랑이라는 접착제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어느 가정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그 자식들이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을 표현합니다.
어느 집에 가면 다 따로따로입니다.
부부는 매일같이 싸우고 아이는 아이대로 그 꼴이 보기 싫으니까 밖에서 빙빙 돌고....
그곳은 하느님이 머무시는 장소가 아닐 겁니다.
우리들은 삼위일체 대축일을 봉헌하면서 내 가정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가정인지....
내가 몸담고 있는 레지오가 삼위일체적인 모습이 깨지는 그 분열의 요인이 혹시 나는 아닌지....
내가 몸담고 있는 본당이 삼위일체적인 모습이 드러나게끔
내가 자그마한 도구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분열의 요인을 조장하고 있는 그런 존재인지....
반성하는 날이 삼위일체대축일입니다.
오늘 이곳에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성부께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 드리고
늘 유혹 당하기 쉽고 걸려 넘어지기 쉬운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성화시켜 주시기를
성령께 청하면서 삼위일체의 삶을 살기 위해서 천상의 약인 성체를 자주 영할 것을
결심하면서 이 미사를 거룩하게 봉헌합시다. 아멘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 (베티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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