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당분간 ●지은이_황명자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2. 2. 25
●전체페이지_128쪽 ●ISBN 979-11-91914-15-3 03810/신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2,000원
생성에서 소멸까지 생명체들의 눈물겨운 더불어 살기
황명자 시인의 신작시집 『당분간』이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황명자 시편들은 대상에 대한 연민과 화해, 에로티시즘, 가족, 불교적 색채가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과거의 시공간이나 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고립되어 있지 않으면서 자유롭다. 따라서 그의 시편들은 시공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금 여기’ 일상의 구체적 경험을 통해 사회적 존재감을 현실화한다.
아침에 요양병원 면회 가서 보니
두 손 발목이 묶여 있다
제발 풀어 달라고 풀어만 주면
천만 원 줄게요, 간절한 목소리가
병실 밖까지 울려온다 장난스레
할매 돈 있나,
묻고는 깔깔대는 간병인 따귀를 갈기고 싶은 걸
겨우 참고 미운 놈 떡 주듯 잘 봐달라
먹을 거 한 보따리 챙겨주곤
묶인 손목 발목 얼른 풀어주고
맘도 풀어주려고
걱정마라 내 왔다, 하니
니 누꼬?
묻는데 차마
엄마 딸!
할 수 없어 펑펑 울었다 딸이 어떻게
엄마 묶는 걸 보고만 있냐고
죽어서도 원망할 거 같았다
맘에 바윗덩이 안고 살 거 같았다
집에 가자, 얼른 집에 가자,
도둑 보쌈하듯 데리고 나왔더랬다
이래 가실 줄 알았으면 안 그랬지
변명만 가득한 못된 딸이라고
원망만큼 봉분도 시퍼렇게 뜬 눈처럼 푸르다
―「산소」 전문
황명자 시인은 생성에서 소멸까지 이어지는 생명체들의 눈물겨운 더불어 살기는 필연적으로 물의 순환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확장한다. 과거의 기억에서 멈춰 있는 엄마를 받아들이게 되고 훗날 부모를 요양병원으로 무덤으로 떠나보내는 황망과 슬픔을 오롯이 견딘다. 시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인식을 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어디 숨었지? 말들의 거처가 궁금하기도 하고 포기와 단절감을 동시에 겪느라 파김치가 된 몸을 탓한다
건강이 문제야, 아프니까 되는 일이 없잖아,
완성하려고 할 때마다 몰려드는 통증 탓에 미완성으로 남는 시편들, 붙들고 있어 봤자 머리만 아파 화분에 물이나 줘야겠다 싶어 물주기를 검색하는데 일조량과 바람 소통량에 따라 물주는 시기가 다르다는 내용이 눈에 띈다 그러고 보니 주기적으로 꼬박꼬박 물을 먹은 화분들은 하나둘 죽어 나가고 무관심에 몸 맡긴 다육이는 빳빳한 몸을 지탱하고 있다
그렇구나, 쓴다고 다 시가 되는 게 아니듯이 고통의 순간들이 흐르고 흘러 블랙 아이스처럼 복병으로 숨었다가 한 편의 시가 완성되는 거라 믿어볼까
그렇게 머리 싸맬 일은 아니지
시도 통증도 내버려 둬 보는 거야
―「블랙 아이스」 전문
몸을 마구 괴롭히는 밤들의 블랙 아이스 같은 것들을 이겨내며 시로 승화시킨다. 진솔하고 담백하다. 진솔해도 담백하기가 쉬운 게 아닌데, 시인은 그 담백에서 오히려 마음의 활달과 깊이를 드러낸다 그건 삶이 이슥해져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고 온몸으로 겪게 된 생활의 목록들이 처연하지만 아름답다.
코로나 팬데믹이 바꿔놓은 사회적 거리두기 풍조로 인해 한껏 위축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접촉과 희미해지고 있는 개인의 존속감 대신, 한층 더 되살아난 ‘사회적 존재감’의 회복을 통해 오히려 각자도생의 길을 벗어나 공생 공존의 ‘사회적인 나날’이 살아 있는 새 지평을 펼쳐보자는, 시인 특유의 힘 있는 역설은 이번 시집에서 더욱 농밀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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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시인의 말·05
제1부
미안했다·13
허물어진 아버지·14
벚꽃 보러 갔는데·15
석양증후군·16
부록처럼·18
사랑은 눈물의 씨앗·19
우물·20
목어·22
불과한 놀이·24
슈퍼문·26
백일홍과 나비·28
첫눈·29
고질병·30
투명 인간이고 싶을 때가 있다·32
제2부
봄 동백·37
벚꽃 장례식·38
두근거리는 연못·40
가문의 역사·42
가남지 입구·44
연못 주변 족속들·46
면상희이(面相喜怡)·47
밤의 연못·48
정오의 연못·50
답신·51
방치된 연못·52
숨은 연못·54
반곡지·56
연못가, 카페·57
고요한 연못·58
제3부
봄바람·61
어떤 꽃·62
같이 가자·64
삼일장(葬)·66
악착보살 이야기·68
이유·70
목각기러기·71
발원지·72
산소·74
이름값·76
해기둥이 강물에 뿌리내리듯·78
늙은 몸·79
저승길이 그래 좋은지·80
나무 벤치·82
원하던 그 시간·84
제4부
명약·89
공생 공존·90
분명·92
거짓말·93
화본역 뒷길·94
참회·95
즐거운 상상·96
식상한 주문·98
희망사항·99
산책 가잔 말·100
가는 봄·102
위로란 그런 것·104
뒷배·105
유효기간·106
블랙 아이스처럼·107
해설│박진희·109
■ 시집 속의 시 한 편
산동네 지나가는데 하심사(下心寺)란
절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무조건 마음을 내려놔야 한다고 누군가
농담 삼아 내뱉는다
꽃들 지천이어도 이름 없이 그냥 꽃이라는
산골 사람 보았다 꽃이 예쁘면 그만이지
이름 알아 뭐하랴
따지고 보니 사람처럼 호적에 올릴 것도 아닌데
이름 안들 머릿속 복잡한 일 하나 더 늘어날 뿐이다
이름 없는 개도 주인만 졸졸 잘 따른다
뒷배가 든든해야 세상살이 편하다고
뉴스에선 오만상 개구신을 떨어쌓는데
무심한 삶 같지만 복장 편한 그들,
습의 잣대로 보면 답답하겠지만
나름대로 뒷배가 든든하다
생면부지 삶들과 공생 공존하는
그들의 뒷배는 바로 하심이다
―「뒷배」 전문
■ 시인의 말
시인으로 산다는 게 처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누구 앞에서든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입 벌리기가 부담스러운 2019년 이후
시란 놈을
붙들고 있으니 그나마 숨통이 트여진다.
그로써 한 권의 시집을 묶을 수 있어
고마운 마음마저 든다.
입이 없이도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도 기쁘다.
2022년 2월
황명자
■ 표4(약평)
황명자 시인의 이번 시집은 종전의 시집들보다 한층 더 진솔하고 담백해졌다. 진솔해도 담백하기가 쉬운 게 아닌데, 시인은 그 담백에서 오히려 마음의 활달과 깊이를 배어나게 하는 일종의 ‘아파테이아’에 다다른 듯 보인다. 그건 삶이 이슥해져서야 비로소 만나게 되고 온몸으로 겪게 된 생활의 목록들, 가령 석양증후군을 맞닥뜨려 받아들이게 되고, 부모를 요양병원으로 무덤으로 떠나보내는 황망과 슬픔을 오롯이 통과해내며, 몹쓸 증후군들이 몸을 마구 괴롭히는 밤들의 블랙 아이스, 같은 것들을 질료와 거름 삼아 연소하고 발효된 것이어서 처연하지만 아름답다. 그 범박하지만 소소한 빛깔을 발하는 존재의 세목들은 거듭된 산책길에서 만나는 방치된 연못, 사람 대신 풀을 앉힌 나무 벤치, 어머니 무덤가 쑥, 악착보살, 동냥젖, 화본역 뒷길의 들꽃, 낡은 도심의 미로 속 월세방, 등을 두루 거치면서, 이즈막엔 생면부지 삶들과 공생 공존하는 무명(無名) 존재들의 하심(下心)에까지 가 닿았다. 코로나 팬데믹이 바꿔놓은 사회적 거리두기 풍조로 인해 한껏 위축되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접촉과 희미해지고 있는 개인의 존속감 대신, 한층 더 되살아난 ‘사회적 존재감’의 회복을 통해 오히려 각자도생의 길을 벗어나 공생 공존의 ‘사회적인 나날’이 살아 있는 새 지평을 펼쳐보자는, 시인 특유의 힘 있는 역설이 돋보인다._엄원태(시인)
황명자 시인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인식을 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나아가 생성에서 소멸까지 이어지는 생명체들의 눈물겨운 더불어 살기는 필연적으로 물의 순환과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지평으로 확장된다.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순수한 물의 맛과 빛깔과 소리와 감촉과 대자연의 투명한 향기가 일렁이는 까닭이다. 물의 마음을 내재한 그의 시는 앎에서 모름을, 완성에서 미완성을, 슬픔에서 사랑을 발견하는 삶의 진정성으로 이어진다. 그의 시는 흐르는 물의 성질을 지녀서 어떤 삶의 깊은 연못으로 흘러든다. 끝내는 눈물 한 방울로 응축된다. 그 안에서 그는 그만의 시적 진경을 펼쳐 보인다. 그의 시가 세상과 공생하는 방식이다._안상학(시인)
■ 황명자
경북 영양에서 태어나 1989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하였다. 시집 『귀단지』, 『절대고수』, 『자줏빛 얼굴 한 쪽』, 『아버지 내 몸 들락거리시네』. 산문집 『마지막 배웅』이 있다. 대구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