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국전쟁 중 함안전투 회고
8월을 맞이하여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작년에 올렸던 내용을 다시 올려봅니다.
필자 이병숙
목 차
Ⅰ. 함안인으로서 함안전투를 회고해 본다.
Ⅱ. 적 6사단이 함안까지 침투해 왔다.
Ⅲ. 미 25사단이 함안전투에 투입되었다.
Ⅳ. 함안전투는 뺏고 뺏기는 전투였다.
1. 미군 “T/F Kean”이 적군을 대파했다.
2. 서북산 정상 주인은 19차례 바뀌었다.
3. 통영에서 귀신 잡는 해병이 탄생했다.
4. 9월 총진격으로 적군을 격퇴했다.
5. 미 25사단은 하와이로 돌아갔다.
6. 함안전투에서 생긴 일화를 소개한다.
Ⅴ. 함안전투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1. 민간인 희생이 많았다.
2. 어린 나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3. 정든 고향 땅을 밟으니 참담했다.
Ⅵ. 참전용사들 은공을 잊어서는 안 된다.
1. 함안전투 참전용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2. 함안전투에서 산화한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전적비를 건립했다.
Ⅰ. 함안인으로서 함안전투를 회고해 본다.
일전에 함안중 절친 학우 박무사로부터 마산 배대균 신경정신과 원장 저서 “마산방어전투 속의 함안전투”를 선물로 받게 되었다.
6.25 한국전쟁에서 경남 함안전투는 경북 다부동전투에 버금가는 전투였다. 그러함에도 함안전투는 덜 알려져 있거나 잘 모르고 있어 아쉽다.
6.25 한국전쟁 중 함안, 진동 전투(이하 “함안전투”)는 1950년 8월 1일부터 9월 14일까지 45일 동안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유례없는 전투였다.
미 8군(워크 사령관)에서는 적 6사단(방호산 사단장)이 서해안을 따라 목포와 여수를 거쳐 함안까지 파죽지세로 침투해 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진주와 통영은 이미 함락되었다.
함안을 사수하지 못하면 마산이 무너지고 임시수도 부산이 함락되어 대한민국이 사라질 풍전등화의 위기는 시간문제로 몰려 있었다.
실제로 부산은 다부동에서보다 함안에서 더 가깝다. 마산에서 부산까지 1시간 정도 거리라면 얼마나 가까운지 이해가 될 것이다.
미 8군은 25사단을 투입하여 죽느냐? 사느냐? 혈투를 벌인 결과, 적 6사단을 격퇴하여 부산함락을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구해주었다.
매년 6.25 날이 돌아오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 날을!”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다부동 전투는 잘 조명되고 있다. 그러나 함안전투는 조명되지 않고 기억에서 잊히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올해는 함안전투가 있은 지 74주년이 된다. 그 당시 적 6사단은 어떻게 함안까지 침투해 왔을까? 미 25사단은 어떻게 적 6사단을 격퇴하였을까? 함안인으로서 함안전투를 회고해 본다.
Ⅱ. 적 6사단이 함안까지 침투해 왔다.
적 6사단은 어떤 사단이었을까? 중국 공산군 8로군 예하 동북의용군이었다.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전쟁경험이 풍부하고 산악전에 뛰어난 조선족으로 구성된 사단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김일성 집단이 적화야욕을 품고 기습남침했다. 적 6사단은 “마산을 점령하면 대한민국의 목을 조르는 격이다.” 하면서 부산점령을 자신하고 있었다.
적 6사단은 방어가 약한 낙동강 서부 전선으로 침투하였다. 적 6사단 13연대는 1950년 7월 24일에 목포항을 침투하였고, 적 1연대는 다음날인 25일에 여수항을 침투하였다.
적 6사단은 두 연대에서 각각 1개 대대 병력을 목포와 여수 두 항구에 주둔시키고 주력부대는 7월 28일 순천과 하동에 집결하여 7월 29일부터 마산 방면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적 15연대는 7월 31일 진주를 먼저 침투했었다.
그 당시 마산에는 미 24사단 예하 19연대, 29연대, 25사단 예하 27연대 등 3개 연대의 미군 병력과 국군 민기식 대령, 김성은 중령이 이끄는 부대가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적 6사단은 수적으로 압도하고 훈련이 잘되어 있는 반면 진주를 방어하던 미 27연대는 수적 열세로 함안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쨌든 미 25사단이 마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마산 방어를 맡아야 했다.
Ⅲ. 미 25사단이 함안전투에 투입되었다.
미 25사단은 미 1군단의 보병사단으로 아시아-태평양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위하여 하와이에서
창설되었다. 6.25 한국전쟁 전까지는 일본 오사까에 주둔하고 있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18일 부산항에 상륙한 후 대구 북방 상주에 주둔하며 전투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미 8군은 7월부터 후퇴하는 도중, 적 4사단과 6사단의 행방을 놓친 상태였다. 특히 적 6사단이 목포와 여수를 공격한 후 함안으로 우회 침투할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다행히 미 8군은 7월 31일 포로 심문과 감청을 통해 적 6사단의 마산 점령 기도를 포착했다. 부산이 점령당할 위태로울 상황이 시간문제였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적 6사단은 곧바로 진주로 침투하지 않고 목포와 여수를 침투하느라 2일 동안 지체하였다. 그래서 함안전투 대비에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적 6사단이 왜 목포를 먼저 점령하였는지는 알 수는 없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만일 적 6사단이 목포로 우회 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 말했다.
사실 그 당시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당장 함안전투에 투입할 예비대가 없었다. 부득이 대구 북방 상주에 주둔하던 미 25사단을 빼내어 마산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950년 8월 1일 낙동강 방어 전투가 한창일 때 미 25사단은 상주를 출발하여 8월 2일 미 27연대는 창원군 진동면, 미 24연대는 함안군 함안읍, 미 28연대는 함안군 군북면에 투입되었다.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미 25사단을 함안전투에 투입하는 한편 “Stand or Die“ 죽음을 각오하고 마산을 지켜라. 특명을 내렸다. -62-
그리고 8월 3일부터 윌리엄 B. 킨(William B. Kean) 미 25사단장에게 마산 방면의 모든 부대를 통합하여 지휘할 권한을 부여했다.
Ⅳ. 함안전투는 뺏고 뺏기는 전투였다.
1. 미군 “T/F Kean”이 적군을 대파했다.
미 25사단으로 서부 전선의 전력이 강화되자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마산-진주 축선에서의 사단급 반격 작전을 계획했다.
이 반격에는 진주 일대 적군을 격파함은 물론, 적군 예비대를 진주 일대로 전개하도록 압박함으로써 대구 다부동 방면의 적군의 압력을 완화한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리하여 8월 6일, 킨 미 25사단장의 이름을 딴 ”Task Force Kean“을 편성하였다. 목표는 마산에서 진주로 향하는 3개 도로를 타고 진격하여 진주를 탈환하는 것이었다.
미 35연대는 북쪽 도로를 타고 공격하고, 미 5연대 전투단은 진주 고개, 1해병여단은 진주 남동쪽, 미 24연대는 함안 도로를 타고 공격하는 계획이었다.
8월 7일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전폭기 기총사격을 서북산 일대에 집중할 것을 요청했다. 미 35연대는 전폭기 기총사격 지원을 등에 업고 괘방산 일대의 적군을 대파했다.
미 5연대 전투단은 진동에서 고성 방향으로 진출했지만, 야반산에서 예하의 미 2대대가 적에게 포위 공격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8월 8일 해병 2대대가 전폭기 기총사격 지원으로 공격을 개시하여 적군을 밀어냈다.
8월 9일 해병 3대대와 미 24연대 2대대는 진동리 일대를 계속 공격하여 적군의 위협을 제거하였다. 다시 적군의 저항은 점차 거세지고 있었다.
8월 10일 중앙도로를 따라 전진하던 미 5연대 전투단은 야간에 적군의 기습을 받았으나 8월 11일 새벽 전폭기 기총사격 지원으로 적군을 격퇴했다.
2. 서북산 정상 주인은 19차례 바뀌었다.
함안전투에서 서북산(西北山, 738.5m) 정상은 최대의 격전지였다. 미 24연대는 적 15연대의 집중공격으로 서북산 정상을 점령당했다.
적 15연대는 서북산 정상을 장악하고 둔덕탄광을 요새화하여 전폭기 기총사격 지원에 의한 피해를 줄이는 한편 미군의 보급로를 감시하고 후방지역을 관측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