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들목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샛길로 빠지고 싶은 유혹은 너무 크다
대전행을 잊고 그만 일죽 나들목으로 휭! 빨려들어가
홀린 듯 칠장사로 가고 있었다
칠장사 거의 다 가서 길 오른편
단지 빨간 함석 지붕으로 오르는 능소화 넝쿨 때문에
남의 집을 훔쳐보았다
주인도 없이 외양간에서
암소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목에 걸린 종소리 땡그랑 울리며
암소의 엉덩이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났다
콧등에는 왕방울 땀송이가 소복소복
잠시 후 쿵!
송아지가 지상에 첫도장을 찍었다
돼지머리
동네 어른이 돌아가셨다
가마솥이 마당에서 끓고
돼지를 잡아 삶았는데
이놈 삶은 돼지는 키득키득 웃고 있다
아버지는 돼지의 웃음을 다치지 않게 썰고 있다
소주 한 잔 벌컥 들이켜며 웃음 한 조각을 먹는다
캬! 죽을 때는 요런 표정으로 죽을 수 있을까
접시마다 귀도 웃고 코도 웃고 눈도 웃고 있다
동네분들과 문상객들이
껄껄껄 돼지 웃음을 먹고 있다
포도를 임신한 여자
가게에서 아내가 포도를 산다
포도를 집어드는 순간 포도알이
엄마― 하고 부른다
너무 놀라 두리번거리는데 다시 포도알이
엄마― 하고 부른다
포도알은 아내의 손가락에 매달리고
어느새 넝쿨손을 뻗어
아내의 몸을 덮는다
아내의 봉긋한 가슴은 시큼한 포도가 된다
자궁 속에는 아직 덜 익은
청포도가 자라고 있다
탄 천
신도시 분당 사람들이 나와서 뛰고 걷는다
건강을 위해 분주하게 뛰거나 걷는다
애완견들도 열심히 뛴다
불야성을 이루며 자정이 넘도록 분주하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 보기 힘들다
자갈밭에 서 있는 해오라기만
골똘히 강을 잊고 사색에 잠긴 표정이다
세상을 뜬 듯 부동자세인
해오라기 너만이
마음과 영혼에 군살이 없으리라
공 범
순찰차가 아파트를 순회하고 있다
응급차가 조용히 머물다가
시신을 거두어 갔다
주민들은 동요하지도 않았다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수사관은
주민 몇 명 경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민등록증이 여섯 조각 나 있었죠
자기 목숨은 자기가 수사해야죠
세상 모든 곳이 범죄 현장입니다
흉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낙엽 떨어지듯 그렇게 추락한 걸까요
아닙니다 누군가 밀었습니다
주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기자 왔나요? 보도 안 되죠?
반장 아줌마는 냉정하게 물었다
모두들 소문을 막기로 했다
꽃게를 손질하며 외 4편
한 미 영
톱밥을 밀치고
산 꽃게 두 마리 찬물 속에 담근다
대보름날 불 깡통 돌리는 아이처럼
후두두 거칠게 팔다리를 휘둘러댄다
하릴없이 그동안 남의 살을 먹고 산
내 몸 속이 덩달아 크게 흔들거린다
수갑 같은 집게발이 철컥 하고 엄지손가락을
문다 고무장갑 속까지 무섭게 파고든다
누구나 목숨 앞에선 이렇게 악착을 떠는가
들고 있던 묵직한 부엌 가위로 이마를 힘껏
내리친다 그놈은 그제서야 집게발을
스르르 풀더니 얼른 몸을 둥그렇게 만다
툭툭 건드려봐도 웅크린 몸뚱이에 움직임이 없다
단단한 등껍질로 그가 가슴에
감싸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휘둥그레진 까만 눈알 두 개와
딱 마주친 내 눈
죽음을 예감한 그의 눈이 나를 먹는다
그가 완강하게 감싸안았던
으깨져 튀어나온
너무도 투명한 속살
네 속이 오늘 내 무덤 속이다
사는 게 쉬운 일인가
냉장실 귀퉁이 밀가루 반죽 한 덩이
저놈처럼 우리들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동그란 스텐그릇에 밀가루와 초면의 물을 섞고
내외하듯 등 돌린 두 놈의 살을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른다
우툴두툴하던 사지의 관절들이 점차 쫀득쫀득해진다
처음 역하게 나던 생내와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도
하염없는 시간에 팍팍 치대다보면
우리 삶도 나름대로 찰져 가겠지마는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꾸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서울, 새봄
새로 살 아파트 외벽은 지어진 년수보다 더 낡았다
빈집에 들어서자말자 제일 먼저
거실 네 구석에 사기접시를 놓고 약쑥을 피운다
타들어가는 약쑥은 벌건 제 눈물처럼
독한 연기들을 퍽퍽 게워 낸다
어디에 숨어 있을까
독한 쑥내는 구석구석 숨죽인
불길한 운세를 몰아내 준다는데
늙으신 어머니 더 낮게 숨죽인 채
무병장수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열심히 비비신다
연기 한 입 베어 문 채 풀기 남은 벽을 기대고 앉아
한평생 저 약쑥처럼 타들어갔을 생을
그 검고 환한 속을 바라본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함부로 저 속내를 가로지르진 못하리라
서른아홉, 불혹의 문 밖에서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생의 빈집을 열어본다
후미진 구석이 많을 내 몸 속에
쑥을 피우면 자욱히 잦아들 고통들
매운내 피울 어린 쑥풀 몇이
집 밖 낡은 담벼락 아래
채 뜨지도 못한 눈을 하고서 앉아 있다
빨래를 말리며
아파트 구석과 구석들을
죄다 뒤져서 벗어던진 고단함이나
때 낀 외로움 몇 가지를 모아서
빨래를 하네
언젠가 당신이 슬쩍
벗어 주고 떠난 물빛 꿈 하나
장롱 속에서 한 해 한 해 힘들게 버티던
빛 바랜 그 꿈도 꺼내어
선명하고 더욱 희게 옥시크린
한 컵 탄 물에 얼른 담그네
아득하기만 한 당신의 곰삭은 입 냄새가
가루비누 속에 부글거리고 풀리면
생활의 틈새마다 가뭇가뭇 낀 때까지
싹싹 비벼서 빠네
찬물에 설렁설렁 헹구어
걷어붙인 팔목이 시큰거려도
더는 비틀어 쥐어짤 수 없을 때까지
몇 번이고 쥐어짜네
살껍질 같은 아픔 몇 벌
살 속 같은 외로움 몇 벌
종일 짜랑짜랑한 햇살 한 줄에
널어두었지
눅눅했던 하루가
하루의 피곤과 우울이
감기몸살이 사지를 늘어뜨린 채
뽀송뽀송하게 마르네
말라 가는 빨래 사이로
땟국물 빠진 원래의 마음들이
다시 희게 펴져 빛나네
명태덕장에서
진부령 고갯마루에서 명태덕장을 만났다
중심을 비운 건조대에는
“아빠, 오늘도 무사히”
경구 속 소녀의 모습을 한 명태들이
말라비틀어진 모가지를 허공에 매달고 있다
몸피를 잃어가면서도
고단한 낮은 목숨 쪽으로 몸을 바짝 틀고 있다
나는 그들의 마른 몸 가까이 고개를 숙인다
다른 이름으로 제 몸을 수줍게 하늘 가득
널어 말리고 있는 이 죽음들에게서
차라리 삶의 진한 비린내를 맡는다
내 안의 많은 상념들을 한 두름씩 그곳에 걸어본다
진부령 길은 한없이 아래로 뻗어 있고
다시 내려가는 저 아래 세상에
몇 궤씩 걸린 등짝들을 무심히 지켜보는
저 마른 명태들
불임 외 4편
김 금 숙
나는 이제 익어가기로 했네
익어가서 달을 낳아버리기로 했네
비바람 휘몰아치는 어둠
그 자궁 속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꿈을 수천 번 넘게 꾸었네
너무 오래 싸늘히 식은
무른 밥그릇을 품고 있었네
노을 위에다 끓이는 밥의 허망함을 놓아주기로 했네
두 번 다시는 추락하지 않을
피눈물로 범벅된 탯줄을 부여잡고
있는 힘 다해 한 잎 한 잎 익어가네
제문처럼 빳빳하기만 한
내 눈물덩이들도 씨방 속으로 들어가
단단한 한 톨 씨앗으로 여물 준비를 하네
어둠의 탯줄은
거미줄만 어지러운 내 자궁을
한 잎 꽃처럼 세상 밖으로 밀어내네
그래, 고통은 잘 익은 다음에 밀어내는 것이지
꽃잎처럼 밀어내는 것이지
한 여자가 잘 익은 달을 낳고 있네
자갈치시장
새벽 자갈치는 납작하다
납작한 바다
납작한 배
납작한 욕지거리
납작해진 사람들이
납작해져서 부피가 사라진
수평선을 쓰윽 뽑아내어
밤새 잡은
순교자들을 줄줄이 엮어 올린다
꼼짝없이 갇힌
바다들이 수상한 몸짓과 손짓에 의해
소문도 없이
하나 둘 납작해져서 사라진다
얇게 저며진 비린내까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나면
텅 빈 바다는 몸을 뒤척여
잘 익은 태양을 자궁 안으로 밀어 넣고
다시 부풀어오르는 세상 때로
변신이 우리를 견디게 한다
그 숲에 가면
하주배기 어귀 솟대 밑을 지나 그 숲에 가면
십일월의 설핏한 저녁 어스름이 보인다
건장한 사내 혼자서 구덩이를 파고 있는 게 보인다
내일은 마른 잎 하나 꼭 그 자리에 비어 있는 그 자리에 떨어지리라
집달리처럼 불어대는 바람
비듬처럼 떨어지는 백양나무 이파리
허옇게 입술이 부르튼 채 입적한 들풀
사람들이 한바탕 색종이처럼 몰려왔다가 가는 게 보인다
흰색의 국화를 볼모로 묶고 있는 까만 리본
새까만 도둑고양이 한 마리 유유히 지나가고
문득 등을 구부린 비가 꼬르륵 꼬르륵 내리기 시작하는 게 보인다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며
무덤들이 물을 마시기 시작하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분주하게 눈을 뜨는 게 보인다
오오, 그 오랜 내 정체불명의 목마름이
무장해제를 당한 군인처럼 힘없이 돌아서는 게 보인다
순리대로 살거라 하던 어매도 아배도
한 장의 단풍으로 날아갔음이 이제사 보인다
새 봉분 하나 봉선화 꽃망울처럼 봉긋이 열린 게 보인다
저 순한 젖무덤 속에서
몇백 년 뒤에는 발 고운 한줌의 흙이 나오리라
유두빛깔의
오오 나도 유두빛깔의 흙으로 다시 돌아오리라
겨울 판화
보름달이 홀로 가슴을 드러내며 목이 메일 때
나도 헐벗은 몸을 드러내고 술을 마신다
마실수록 헐벗은 몸은 부풀어올라 동그랗게
보름달이 되어 하늘로 승천을 하고
수억의 보름달이 떠도는 하늘은 너무도
조용하여 아무도 내가 자꾸자꾸 보름달을 만들어
하늘로 쏘아 올리는지 알지 못하고
내 속의 물기란 물기는 모두 하늘에 띄워 놓고
마른풀로 누워 그 떠도는 영혼들을 보누나
십자수
나는 지금 골고다로 간다
한발 한발 징검다리를 딛고 간다
말이 징검다리지
그 절망의 네모칸을 헛디디면
곧바로 상어밥이 되고 말지
그 짓을 왜 하냐고?
재미있으니까 사는 한 방법일 수도 있으니까
느닷없이 누가 입속으로 손을 집어넣는다
내장을 훑어내서 순식간에 곳간이 텅 빈다
이까짓 절망쯤이야 홱 잡아채서
바늘귀에다 꿴다 하얀 네모칸들이
눈을 뜨고 올려다본다
착하기만 한 것은 죄지 분명 죄지
바늘을 희망의 정수리에다 푹 꽂는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젖은 몸 어느 구석인가가 또 한번 더 젖는다
흐린 눈으로 십자수의 길을 내려다본다
길은 십자가로 채워지기 시작한다
바늘은 내 가슴팍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
눈 위에 쓴 가족 외 4편
한 우 진
전근대적으로 눈을 기다린다
눈을 재촉한다
회색 양철지붕이 칼을 물고 나뭇가지를 친다
겨울이냐, 겨울이다
눈이 쌓인다
눈이 그친다
거기에 이름을 쓴다 여편네 이름을 쓴다
여편네도 쓴다 자식 이름을 쓴다
아들도 쓰고 딸도 쓴다 미래의 이름을 쓴다
눈을 밟는다 눈이 녹는다
내가 쓴 여편네의 이름이 사라진다
딸이, 아들이 쓴 먼데 있는 이름도 사라진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편네가 쓴 자식 이름이 사라지지 않는다
눈이 녹은 뒤 나는
여편네가 이름 쓴 자리를 한참 들여다본다
땅이 깊게 패여 있다
겨울의 유서遺書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북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 보지 않았
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
지는 북을 따뜻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보세요, 이쪽이 따듯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
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
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
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
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
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
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
등이 벗겨진 나무는 엎드려 울지 않는다
―― 《부록》
1
군데군데 어둠에 손을 데인 어머니
늦게 오시고, 숙제는 하지 못했다
다른 집들이 오순도순 숟가락을 부딪칠 때 나는
우물에 가서 감자를 씻었다
교복을 벗지 않고 입은 채로 잤다
꿈이지만, 지겨운 지게야 더러운 지게야, 구덩이를 팠다
2
알록달록 연애가 끝나고
아내는 반지하 단칸방에 도배를 했다
사진을 걸면서 새가 되세요
와이셔츠 흰색은 빛났다
나는 돌멩이가 핀 구두를 신고
어둠을 내려놓고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3
도란도란 사월이 꽃을 낳고
화병에 꽂힌 딸은 두각을 나타냈다
내 등에 꽃잎을 파스처럼 붙이면서 회춘回春하세요
작업복은 회청回靑을 쏟은 듯 좋구나
나는 철공소에서 늦도록 못을 만들고
못대가리처럼 쓰러져 막차로 돌아왔다
4
이리저리 밥상 겸 책상은 삐거덕거렸다
부푼 꽃, 무거운 꽃, 화병을 놓을 데가 없구나
내 시는 혁명이 지나간 뒤의 깃발처럼 구겨졌다
기울어진 가계家系에 찬바람 드는 창문만 늘어났다
아내는 처녀적 옷으로 커튼을 만들고
덜컹덜컹 나는 낯선 어둠을 묻힌 채 문 앞에서 서성댔다
5
삐걱빼각 아침이 되자
내가 가지고 온 못은 모조리 녹슬었다
가구를 바꾸며
가구를 버리려고 수북한 먼지덩이를 턴다.
가구에 들러붙어 있는 기름때를 닦는다.
가구하고 내통해 본 지도 오래다.
처음에 새것이었을 때, 아내와 번갈아 쳐다보며
예쁘다, 좋구나 하며 말 걸고 쓰다듬었는데
가구도 늙어 상대하지 않으니 먼지만 모아 쓸쓸함을 견뎠구나
처진 가슴 휘어진 다리 외면당한 분풀이로 때만 찌웠구나.
아내하고 간지러운 귓속말 더듬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욕망은 트고 꿈은 자주 삐걱거린다.
아내의 일상에 두텁게 때 낀 지 오래다.
아내는 추억의 연애봉지에 든 세제로 권태를 닦는 모양인데
빛나지 않는 삶은 잘 열리지 않는 서랍이다.
아내의 문 열어본 지 오래다.
아내의 갈망은 굽은 빨래판처럼 뒤뚱거린다
일요일마다 나는 빨래판 위에 빨래처럼 누워도 보는 것인데
아내는 오자誤字투성이 내 몸을 끌어당기기도 하는 것인데,
새 가구가 놓인다. 반듯하게 놓인다.
나무냄새와 시너냄새 섞여 방안을 덥힌다.
새것은 무슨 티를 내도 꼭 내네요,
더 닦을 것도 없는데 아내는 자꾸 걸레질을 하면서
어지간히 다 새것인데 사람만 헌것이네요.
양철굴뚝과 나팔꽃 외 4편
유 창 성
뜨거운 양철굴뚝으로
나팔꽃 줄기가 타고 오른다.
나팔꽃 줄기는 타고 오르면서,
뜨거움도 모른 채
양철굴뚝을 겁도 없이 부둥켜안을 뿐,
도무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양철굴뚝은 이미 뜨거울 만큼 뜨거워져 있다.
나팔꽃 줄기가 양철굴뚝을 부둥켜안는다
부둥켜안고는 겁도 모른 채,
뜨거움도 모른 채, 꽃을 피운다
뚜뚜뚜뚜… 나팔을 불어댄다
놀라워라,
서로 다르다는 것, 서로 사랑한다는 것,
저런 것 아니겠느냐 뜨거운 그대
망설이면서도 어떻게든 닿고 싶은 날,
내 몸 태워가면서도
그대에게 오를 수밖에 없는 마음,
타 버려도 내 몸이 다 타 버려도
성난 그대 놓치지 않겠다는 것,
사랑이란, 저런 것 아니겠느냐
꽃 피워 물고 성난 그대를 향해
나팔 빼어 불며 다가서는 것,
성난 양철굴뚝 하나를 온몸으로 품어 버리는 것
저런 것 아니겠느냐
낙 지
낙지가 집을 다 가져가 버렸다
낙지가 집을 다 삼키어 버렸다
그물 깁다가 아버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수협 돈 대출금까지 다 가지고 가 버렸다
자꾸만 목에 낙지발이 걸린 것 같았다
자꾸만 목에서 낙지가 꿈틀대는 것 같았다
형은 울지 않았다
어머니도 울지 않았다 다들,
목구멍을 뭔가가 틀어막고 있는 듯했다
그날부터였다,
흐물대는 낙지발 같은 어둠들이
집안 곳곳으로 흘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끊어도, 끊어도, 죽지 않는
불사不死의 나날은 시작되었다
꿈틀대는 지독한 저주의 말들이 시작되었다
아버진,
애초부터 쓰러지지 않았다 전했다
아버진,
작은 각시네 집으로 살러 간 것이라 전했다
집도, 돈도 다 가지고 가 버린 것이라 했다
집안 곳곳에선 구경도 한 적 없는 낙지가,
어머니와 형을,
먹여 살려 주고 있었다
어린 나는 매일,
바다로 나가 아버질 기다렸다
당연하게도 아버진 올 리 없었다…
그해 겨울, 불어온 바람은
낙지가 대大 풍월이라 전했다
신생의 바다
바다를 보다 말고 소설 쓰는 김씨가 문득 묻는다
저그 건너가 김 아무개 꺼고 저그는 이모 선생이 써묵어부렀다는디
저 나란히 떠 있는 두 개의 섬은 임자가 있을라나?
가만히 보니 말은 안 하지만 김씨도 욕심나는 눈치다
자신의 이름 석자 걸린 땅 하나 갖고 싶은 거다
그 표정이 사뭇 진지함을 넘어 너무나 비장하기까지 하여
나는 문득 농을 치고 싶어진다
왜 임자 없으면 가서 해적질이라도 할라요?
글고 저그는 뭐 저 멀리 낙도다요 다 임자가 있제라
그의 표정이 더욱 물살처럼 구겨지다 말고.
그믄? 누가 먼저 침 발라 브렀는가? 잉? 말을 혀봐
해적은 아니라도 내 저그다 이름 석자 걸어보고 싶은디…
그는 어찌 안 될까 하는 표정이다 너무 진지하여
이러다 의 상할까 싶어 그만 풀어주기로 한다
암이라, 저그 이름 석자 이미 걸어분 놈 있재라
몰것소, 그놈한티 말을 잘 하믄은 될 것도 같고.
금세 반기는 뱅어눈으로 변해서는 나를 보면서
그려? 그게 누구단가, 아 이 사람 질질 끌지 말고 말해보소
우선 내가 저 섬을 우째 해 볼라믄 그 사람을 알아야재
근께, 그 사람이라, 근디 그 사람보다 잘 적을 자신은 있고?
몇 번이나 확신을 받고 나서야, 나도 그만 풀어준다,
그 사람이라… 바로 앞에 떡하니 앉아 있소!
그때까지도 무슨 말인가 한참이나 생각하던 김씨가
그제서야 자신이 당했단 걸 깨달았는지
잔뜩 억울한 표정으로 소리 내어 호탕하게 웃는다
아마, 오늘 밤에는
저 앞 수많은 섬들 중 몇은 임자가 생길 것 같다
새로운 신화 하나 씌어질 것 같다
누군가 이름 불러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 바다,
자꾸만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깊어가는 밤이다
명태국은 시원하다
명태국을 먹다보면
섬뜩해질 때가 많지요,
가끔이지만 목구멍에 날카로운
낚싯바늘을 달고 있는 생태들
보곤 하는데요, 궁금하여 전화해 본
수산청 산하 명태연구소 직원은 농담처럼
그들의 죽음 일러줍니다
직접적인 사인을 알 수 없으나
물 밖으로 나오기 때문에
죽는 것 아니겠냐는
너무나 간단한 이치,
그러면 며칠 만에 뭍으로 올라오냐 했더니
이삼 일 정도라고
친절히 일러줍니다
무엇이 걸린지도 모른 채
생존해 있었을 그 시간,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기에도
너무나 짧았을 그 시간,
눈도 못 감고 여기까지 온 명태를 보다보니
문득,
명태국을 먹다 말고,
괜스레
내장 안쪽부터
서늘합니다.
새떼들 날아간 저쪽
63빌딩 천문관측소,
창밖을 보던 노인 하나
그대로 돌진하려다 사람들에게 제지당한 저녁,
멀리 내려다보이는
지상으로 발악하듯 끌려 내려가던 그 저녁,
몇 미터 상공 밖에선
새떼들 날고 있었습니다.
창문 밖 바로 앞에서
어딘지 모를 곳으로
한없이 날아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한 칸 한 칸 조심스럽게
밟고 올라왔을
지상에서의 높이,
노인은 그것마저 굴욕이라 여겼던 걸까요
때 낀 손으로 차가운 핫도그를 씹어 삼키다
사레 걸린 것처럼 뱉지도
삼키지도 못할 그런 때,
삶이 문득 굴욕으로 여겨질 때,
매번 아무 일 없다는 듯
떠나온 지상으로 애써 발길 돌려야 할 때,
흘러간 옛 노래 속 가사처럼 되짚어 보게 되는
저 새떼들의 행렬,
어쩌면 마지막 망명길에 오른
노인의 고함소리에,
나도 그만 훌쩍 투신해 버리고 싶은 이 저녁.
유혹하듯
날고 있는
저 새떼, 새떼들. 날아간 저쪽으로 훌쩍 가고픈 이 저녁
예수를 리메이크하다 외 4편 외 4편
문 세 정
그는 늘 트로트 찬송가를 부르며 나타난다
목에 걸린 소형 녹음기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지하철 4호선 구간을 뱅뱅 돈다
칸칸마다 음표처럼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하루 종일 연속 재생되는 그의 노래
언젠가, 눈앞이 온통 암흑으로 변하고
자기도 모르게 목울대가 약해지고부터
그의 찬송가는 트로트 버전이 되었다
<샤론의 꽃 예수>를 4분의 4박자로 꺾었고
흥겨운 대목에선 바이브레이션을 넣기도 했다
한 소절 한 소절 깜깜한 세상을 귀로 읽으며
새 음표를 붙이고 장조를 바꾸다 보면
아주 가끔씩 바구니 속으로 떨어지는
동전소리도 그의 귀엔 취타악기음으로 들렸다
퇴근길 풀죽은 몸들을 싣고
지루한 음보로 달리고 있는 객차 안
아주 느린 몸동작으로 악보를 넘기듯
다음 칸을 향해 그가 나를 지나쳐 가고
중간 중간 박자를 놓친
지하철이 황급히 허리를 틀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다
불심검문을 받다
그를 면회하고 돌아 나오는 밤길
안양교도소 담장은 한층 높고 튼튼해져 있었다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라포르스 성벽처럼
높이 솟아오른 공중탑과 지상 곳곳에서
완전무장을 한 눈들이 바람의 움직임까지 감시한다
감시의 눈길은 어느새 내 걸음걸이를 고치게 만들고
공연히 주위를 살피게 하고 폭풍 전야처럼
제 스스로 내부 단속에 들게 한다 교도소 안에서만큼은
바람조차도 말수를 줄이고 차분해져야 한다는 걸
순순히 몸을 낮춰야 한다는 걸 이미 터득한 것일까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을 가두어 나가는 담장 아래
지금까지 용케도 법망을 피해가며 살아온 나를,
매순간 알게 모르게 불안했던
내 행적을 담장 가로등이 또박또박 조명한다
거리를 좁히며 더욱 끈질기게 따라붙는
불빛레이더, 습관처럼 외투깃을 세우며 위장해보지만
오늘따라 분명하고도 마땅한 알리바이가 떠오르지 않아
자꾸만 시선이 흔들리는 저녁
정작 감시와 단속이 필요한 곳은
적막에 든 교도소 안쪽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서 있는 이곳,
시끌시끌한 담장 바깥쪽이다
내 마음의 연약지반구역
서해포구 월곶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처럼 내 마음에도 무르고 약한 땅
이 있습니다 심장을 중심으로 반경 5cm 지점은 언제나 진흙입자들로 덮
여 있어 무게를 버티는 힘이 매우 약하답니다 가끔 생각지도 못한 슬픔
이 그 지점을 통과할 때엔 강도 3.0 이상의 지진이 일어 정신을 잃을 만
큼 전신이 흔들리기도 하고요, 한 번 내려앉은 지반을 복구하는 데는 상
당한 시간이 걸린답니다 네, 그럼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죠 자칫
하면 당신이나 나나 대책 없이 무너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당신, 나
를 통과하려거든 먼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마음속도계를 조절해가
며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해요 물이 흐르는 대로 순순히 몸을 내맡
기는 나뭇잎처럼 당신과 나의 숨결이 맞닿아야 해요 그 순간만큼은 지
나간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은 채 한 호흡으로 지나가야 하는 내 마음의
습지, 그대가 무심히 던진 말 한 마디에도 쉽게 무너져 내리는
빵만으로도 살 수 있다
정오의 갯벌이 태양오븐에 구워지고 있어요
호밀반죽처럼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진흙구릉 표면마다 기포를 일으키며
속까지 노릇노릇 익어 가는데, 저런
눈치 빠른 방게들 벌써 냄새를 맡았나
한 놈 두 놈 어느새 친구의 친구까지
귀엣말을 나누며 꾸역꾸역 몰려드네요
몇날 며칠 숨 안 쉬고 먹는다 해도
도무지 채워질 것 같지 않던 허기였건만
오랜 그리움 앞에서 덜컥 말문이 막히듯
빵 냄새 진동하는 마을,
어느 골목으로 들어서야 하나
어딜 파고들어야 이 지독한 허기를 채울 수 있을까
발소리를 죽이며 다가가자 미리 점찍어 둔
구멍으로 붉은 집게발들이 속속 들어가네요
각자 점찍어 둔 빵집으로 부리나케 들어가
말랑말랑한 머드빵의 속살을 뜯어먹다
웅크린 채로 등을 눕히는
햇볕에 잘 구워진
포구갯벌은 그리움이 깊어져
갑각류가 된 것들의 밥이자 집이랍니다
상자 이미지
각각 크기가 다른
알록달록한 종이상자에 시간을 정리해 둔다
잘 익은 앵둣빛 상자를 열면
스무 살적 그와 함께 훔쳐 두었던
붉은 태양이 아직도 생생하게 꿈틀거리고
얼굴이 투명하게 비치는 코발트색 상자엔
내가 건너다 만 바다가 출렁출렁 담겨 있다
바다와 함께 줄줄이 딸려 온 자갈과 모래알들
그 중 거반은 시간 물살에 쓸려가 버렸고
더러는 바닥으로 가라앉아 별이 되기를 꿈꾼다
밤이 되면 내 방은 오케스트라 무대가 된다
어느덧 각양각색의 상자에서 새어나온
파도소리 바람소리가 백 뮤직으로 깔리고
어둠이 깊어질수록 초침박자에 맞춰
모래알과 조개껍질이 내는 경쾌한 마라카스
담아두고 싶은 것이 많은 만큼 상자는 늘어나고
점점 내 방은 좁아진다 문득 한밤중에 일어나보면
상자 틈에 간신히 누워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고
뒤척이며 돌아눕는 순간 빈 상자가 입을 벌린 채
나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상자는 늘 부족하고
차곡차곡 쌓여가는 상자들
그 틈에 끼어 나도 별이 되길 꿈꾼다
벚꽃과 비닐봉지 외 4편
진 동 영
벚나무 가지에 비닐봉지가 걸려 있다
비닐봉지는 제 몸을 찢어
속을 열어 보이고 있다
저 아닌 것을 담아온 한 生이
반짝이고 있다
파닥이는 가로등 불빛을
불러 놓고 있다
비 그치고
점점이 흰 발자국으로 길 떠난 벚꽃
가지 위에 비닐봉지가 피어 있다
파 꽃
파꽃이 피어 있다
잎의 끝을 열고
둥그렇게 떠오른 잔 꽃들
어디서 왔을까
탱탱한 잎 속이 궁금하다
손을 내밀자
파꽃을 세고 있던 등에*
날아오른다
*등에 ― 곤충강 파리목[雙翅目] 등에과에 딸린 곤충을 통틀어 이르는 말.
폐 업
유리관 너머 고무 호스가
제 속의 어둠을 똬리 틀고 있다.
숨통이 죄이는 어둠
뜰채의 잔 구멍이 옆으로
뭍에 던져진 아가미처럼 반짝이고 있다.
제 속을 모두 쏟아낸 소주병도
모로 눕고 대신
다금바리, 우럭, 아나고
앞에 메뉴판을 세웠다.
人자로 금이 가는 수족관
길 위를 서성이던 비닐봉지도
뚱한 헛배를 눌러보는 것이다.
모 기
고무 물통 속에 모기가 떠 있다.
날개와 다리로 지탱하던 몸이
모로 누워 있다.
죽어서도 곧게 펴지지 않는 다리
잔물결을 붙잡고 있다.
바가지로 물을 퍼낸다.
모기는 잘 담기지 않는다.
오 월
논바닥에 찍힌 발자국이
개구리 알을 품고 있다.
몽실한 개구리 알 흔들리고 있다.
물 위에 잔물결이 일고 있다.
축령산* 그림자 수면 위에 초점을 잡는다.
산허리에 손을 넣는 구름
산그림자 속으로 올챙이가 드나든다.
물 위에 지은 집 외 4편
이 갑 노
찻잔을 앞에 두고 녹차를 우려내듯 앉아있다
오래된 기와집엔 글씨가 살고 있지
물거울에 잠긴 소나무 물구나무선 그림자
지상의 높은 우듬지가 밑바닥에서 새를 키우고 있어
시원한 물소리는 맨살을 뚫고 흐르는데
연못에 고인 물은 목이 말라 낙수에 입을 여네
담장 안 늙은 배롱나무 줄기로 쓴 저 글씨가 우암체?
기가 돌아 꿈틀거리며 살아나고
격자문 열어두고 산빛마저 속속들이 우려내면
심연 속 푸른 숲이 푸시시 깨어난다
우암이 옛날 조선 적 사람인 줄 알았더니
퇴색한 정원에서 이웃들과 살고 있다
다음에 고택을 방문할 때는 빈집이라도 반드시
헛기침이라도 해야 한다
물 위에 지은 집은 길 위에 몸 같은 거
앉았다 일어서는데 발목에서 문 여는 소리, 뼛속까지 열어 보이던
나무기둥이 뚜드득 화답한다
만약에 불이라도 난다면 사리 몇 개쯤 남고
맺은 인연 탁해진 심정에 흰 수련꽃으로 피겠다
멀리 배웅하는 인기척…
귀가길, 걸립乞粒한 차茶 한 잔이 온몸을 데운다.
떨 켜
은행나무 물고기 산란하듯 잎 털어낸다
떨어지는 잎들 울고불고하지만
나무 몸 부르르 떨어 노란 잎들 뭉텅 털어낸다
집 알아보러 간 아내를 기다리며
나무와 함께 서 있다
겨울 도시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
나무는 아직 닫지 않은 문틈을 통해 나를 불러들인다
몸속은 등화 관제하는 집처럼 캄캄하다
완벽한 성이며 요새다
불씨 하나 없는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구멍 막는 일
곰처럼 겨울잠 채비를 한다
방금 전 추워서 샤크존에 들렀다
그곳은 아직 가을이 살고 있다
나무들도 몹시 추울 때는 인근에 있는 빌딩으로 피한 간다고 한다
은행나무를 초대한다
화려하진 않지만 심장이 있어 좋다고
따뜻한 난로가 있어 행복하다고 말한다
겨울은 나무에게도 추운 계절이다
산골에서 문풍지 하나로 겨울 나던 우리 식구들
생나무가 우리를 지켜준 은인
아궁이에서 타닥 소리 내거나 입에 거품 물기도 했다
아내가 밝은 얼굴로 어둠을 건너온다.
내 가지마다 숱하게 매달린 나뭇잎들
이제 힘겨워 털어낼 때가 된 것 같다
겨울이 다가왔다
나도 나무처럼 몸 부르르 떨어본다
아내와 나 나무의 도움 받아 밤새 구멍 막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이주해온 나무들은 떨켜를 만들지 못해
각별히 신경 써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거라고
은행나무 내 어깨 감싼다.
눈길, 늪
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늪으로 태어나 산다고
처마 밑 풍경은 속삭여 주었지
밤새 입에서 시작된 강은 꾸룩 소리를 내며 흘러갔어
새벽에 일어나 보니 첫눈이 내렸어
나는 아파트 옆길을 걸어가네
나보다 앞서간 발자국 희미하게 찍혀 있네
야구르트 리어커처럼 작은 수레를 끌고 간 발자국
일렬로 길게 난 자전거와 사람의 발자국
나는 새 길을 가다가도
위험한 길에서는 그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있네
눈이 녹고
길에는 그들의 발자국만 얼음조각으로 박혀 있어
나는 신발 무늬를 보고
그들이 누구인가를 짐작하네
밤사이 하늘이 내게 내려와서 늪으로 변한 길을 덮고
내가 가야 할 길을 갈켜 주었어
새들이 날아가며 한번 입력된 길은
유전자처럼 절대 지워지지 않아
늪 속에도 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어
여행길이 죄다 입력되어 나중에 갈 수 있게
바람의 발자국은 눈 위에 무늬처럼 남아
눈길을 지워버렸어
눈길은 밖으로 이어졌어, 늪으로
골다공증
사람이 죽으면 하늘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너무 뚱뚱해서 하늘로 날아갈 수 있을지
어리석은 마음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새들은 뼛속에 공기주머니가 있어 몸을 가볍게 하거나 척박한
공기 중에서는 공기주머니에 있는 공기로 숨을 쉰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중풍에다 골다공증을 앓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넘어져도 뼈가 부러지고 새가 우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소리를 자주 하시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새가 되려는지 등은 활처럼 굽어지고
다리는 북어처럼 마르셨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나는 새처럼 뼛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려고 뛰어다녔습니다.
노력해도 생기지 않던 공기 주머니가 이제 생기려는지
뼛속에서 바람이 일고 소낙비가 거칠게 내리기도 합니다.
돌 속에 갇혀 있던 백로들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갑니다.
누구나 때가 되면 한 마리 새가 되어 날아가나 봅니다.
몸속에 공기주머니를 만들어…
팔월 한낮 선풍기에서 나오는 바람을 맛나게 먹고 있습니다.
아, 하늘에 있는 새들은 지상에서 숨겨온 동전 한 닢도 너무
무거울 거야.
이사移徙
내가 제일 먼저 할 일은 하늘정원 대문에
풍경을 거는 일이다
이사할 새 집에는 먼저 이사 온 자작나무들이
마루를 깔고 있다
방문은 조막손을 내밀어 잘 지내보자며
악수를 청해온다
시베리아 추위를 녹이며 모여 있던 벌목꾼들이 보드카 냄새에 취한다
의사들은 말한다
암도 애인이나 부인처럼 껴안고 살아야 한다고
토굴 같은 수납장과 붙박이장을 열어 본다
집은 부엌 안방 건넌방 화장실 등을 갖추고 있다
아내는 구석구석 앉은 먼지의 궁뎅이를 떠민다
여럿의 영혼이 드나들 것이다
주인 영혼은 안방에 못을 박고
세든 영혼은 건넌방에 액자를 건다
청파동 적산가옥부터 몇 번째인가 벗어놓은 집들이
아내는 솥단지 속에 요강을 넣어 안방에 들여놓고
오늘부터 이사를 왔노라고
성주신과 조왕신, 측신에게 고한다.
밖으로 나오자 딸랑거리며 닫히는 문
꺼내 놓았던 가구들이 하나 둘 제자리로 들어가
나의 내장이 된다.
첫댓글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꾸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