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내산서원 - 2022. 09. 11.
간양록(강항)
강항 선생의 연보
강항선생은 큰 문장가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선생의 5대손으로 자(字)는 태초(太初)이며 호(號)는 수은(睡隱)이시다.
조선 명종 22년 1567년 5월 17일 전남 영광군 불갑면 유봉(현, 금계리)에서 아버지 몽오재공(夢梧齋公) 극검(克儉)과 영산(永山 현재 재명 영동(永同))김씨 사이에서 넷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었다.
공(公)은 이미 일곱 살 때 하룻밤에 맹자(孟子) 한권을 암기해 고을 안팎에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났다. 선생은 선조 22년 1588년 진사(進士)가 되고 그해 겨울 진주김씨(참봉:봉 琫의 따님)와 결혼 선조 27년 1593년 27세에 문과(文科)에 급제, 선조 30년 1596년 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가을에 공조좌랑(工曺佐郞), 그해 겨울 형조좌랑(刑曺佐郞)이 되었다.
증직(贈職)으로 효종(孝宗)9년 1658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通政大夫 承政院 都承旨), 고종(高宗) 19년 1882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
조선 중기 문신(文臣)으로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때 의병 활동중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4년간 억류생활을 하면서 일본에 성리학(性理學)을 전하여 일본 성리학의 개조(開祖)로 추앙받고 있는 수은공 강항(姜沆)선생이 문화관광부로부터 2001년 3월 이달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의병활동중 체포되어 포로가 되시다.
선조 31년 정유(丁酉)봄에 휴가를 얻어 아버님(극검,克儉)을 모셨다.
여름에 명(明)나라 장수 양총병원(楊摠兵元)이 남원(南原)에 주둔하고 있을 때 참판 이광정(李光庭)이 분호조(分戶曹)로 식량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공(公)을 함께 종사(從事)하게 하니 선생이 각처로 격문(檄文)을 띄우고 바닷가 고을을 순방하면서 군량미를 모아 많은 식량이 모아졌는데 왜적의 선봉이 이미 남원을 침범하고 양총병(楊摠兵)이 싸움을 포기하고 돌아가니 선생이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여러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수백명이 모아졌으나 왜적들이 이미 노령(蘆嶺)을 넘었고 해변이 방비책이 없을뿐더러 각처에서 모였던 의병들도 일시에 해산 되었으며 왜병에 의해 길이 이미 막혀 버렸다.
정유년(1597년) 9월에 적들이 영광에 들어와 노략질을 하니 선생은 할 수 없이 가족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갈 계획이었으나 배는 적고 사람은 많아 두척의 배에 나누워 아버지와 숙부들을 한배에 모시고 선생은 두형(준 濬, 환 渙)과 장인(김봉,金琫)과 함께 타고 떠나려 할 때 왜적들의 배 천여척이 이미 우수영에 도착되어 있는 형편속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서해를 지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을 모아 놓고 의논하였는데 결론은 우리배에도 장년 40여명이 되니 이순신장군과 합류하여 싸우기로 하고 항해 하던중 아버지가 탄 배와 헤어져 서로 찾으려고 바다를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적선이 나타나니 선생은 빠져나갈 수 없음을 깨닫고 두형(준,환)과 처자들이 함께 죽기로 결심한 다음 바다로 뛰어 들었으나 수심이 얕아서 적들에게 잡혀 돛대에 몸이 짐승처럼 무자비하게 묶인채 이길로 포로의 몸이 되어 일본으로 압송 되었다.
이렇게 조선조 중엽의 대표적 유학자 강항선생을 비롯한 3형제가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땅 오오즈(대진성, 大津城)에서 10개월간 유폐생활을 강요당하는 등 기약없는 포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본 주자학(朱子學) 개조로 추앙 받아
배가 순천(順天)을 떠난 지 8일만에 오오즈(대진성 大津城)에 도착되어 한집에 가두어 놓고 철저한 감시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었는데 이미 이곳에는 조선에서 잡혀온 백성이 천여명이 되었다.
선서 먼저온 사람들과 의논, 도망갈 계획을 세우고 두형(兄)님과 함께 밤길 80여리를 달려 3일간 도망가다 적들에게 발각되어 거리로 끌려나가 죽이려 할 때 선생은 목을 내밀고 칼을 받으려는 순간 적 한명이 나타나 중지 시키므로 극적으로 죽엄을 면하고 오오즈(대진성 大津城)으로 돌려보내졌다.
이때 일본의 승려 준슈쟈(순수좌 舜首座)가 선생의 학문(學文)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예우하면서 일본은 학문하는 사람이나 학교도 별로 없어 윤리, 도덕이 날로 퇴폐해가고 있으니 선생께서 학문을 전교하여 달라는 부탁이 간곡하므로 허락하고(이때 일본은 유학(儒學)의 책은 있었으나 다만 읽기만 할뿐 주자학적 주석(朱子學的 主釋)은 없었다.) 준슈쟈(舜首座)에게 주자학을 입으로 외우며(책이 없으므로) 가르치니 배우려는 자들이 구름같이 몰려 배우니 유풍(儒風)이 일기 시작하였다.
왜인(倭人)들이 스승으로 존경하는 승려 준슈쟈는 유학의 깊은 묘미를 크게 깨닫고 승복을 벗고 환속하여 후지하라 세이카(등원성와 藤原惺窩, 1516~1619)로 이름을 고쳤다.
이가 곧 오늘날 일본 주자학(朱子學)의 시조(詩祖)로 일본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후지하라 세이카와(등원성와)는 이어 히야시 나산(임라산 林羅山, 1583~1657)에게 주자학을 전수하여 일본 사회에 주자학을 뿌리 내린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일본은 오랜 전란이 끝나고 도꾸가와 이애야스(덕천가강 德川家康)가 일본을 통일하여 평화시의 국가지도 이념(國家指導理念)이 필요한 시기이므로 주자학의 이념으로 국가를 통치할 필요가 있었다. 일본근대사에 결정적 영향을 준 사실에 대하여 그들은 강항선생의 높은 학문을 크게 평가하면서 일본 주자학의 개조(開祖)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역경을 딛고 4년만에 귀국
일본의 승려들과 자주 교류 하였는데 특히, 승장 히로미찌(광통 廣通)역시 경서(經書)를 좋아하고 조선의 예절과 풍속을 본받기 위해 선생의 가르침을 따랐으니 히로미찌에게 육경(六經:역경, 시경, 서경, 춘추, 예기, 악기(또는 주례)의 큰 글을 써준 대가로 은전(銀錢)을 받아 귀국할 자금을 마련 하였다.
선조(宣祖) 33년 1600년 봄 선생을 포로로 잡아간 사와따리(좌도 左渡)에게 글을 써주면서 조선백성을 포로로 계속 억류시키는 것이 부당하다고 설득, 4년동안 갖혀 있다보니 "죽는이만 못하다 차라리 죽이지 않으려면 돌려보내 주던지 보내주지 않으면 살고 싶은 욕심이 없다."고 하니 후지하라 세이카(등원송와)가 승려 게이앙(경안 慶安)을 시켜 사와따리(좌도 左渡)에게 간곡히 전하여 허락을 받았다.
선생은 비용을 모아 배와 지도를 준비해 놓고 떠나려는 계획을 후지하라세이카(등원성와)와 히로미찌(광통 廣通)에게 알리자, 이들은 뱃길에 밝은 사공을 보내어 수로(水路)를 인도해 주도록해 대마도(對馬島)까지 전송토록 하였다.
귀국길에는 두 형님과 가족 10여명을 비롯해 함께 귀국키로 약속한 사람 30여명과 함께 4월에 일본을 떠나 5월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수은공께서는 포로생활에서 4년 만에 귀국하셨으나 충절을 알아주는 이도 없고 스스로 죄인으로 자처하며 고향에 살면서 여러 형제들과 몸소 농사를 지어 늙으신 아버님을 공양 하면서 각지에서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러 구름같이 몰려든 많은 선비들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시였다. 이러한 가운데 하늘도 무심하게 선생의 명(命)을 이땅에서 거두어 가셨으니 때는 광해군 10년 1618년 5월 6일 향년 52세다.
선생을 전남 영광 불갑산 기슭에 모시었다.
공(公)께서 당하신 재난은 전무후무한 역경이었으나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고 자결을 결심, 두 번이나 바다에 뛰어들었고 아흐래 동안이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시었다. 선생은 일본현지에서 눈에 보이는 것, 귀로듣는 것을 모조리 적어 세 번이나(1598년 무술년에 김석복편에, 1599년 기해년에 일본과 평화조약을 위하여 일본에 체류하던 명(明)나라 사신 왕건공(王建功)을 통해 조정에 보내고, 왕건공에게 보낸 것을 사본해 신정남편에 보냄.) 적국에 포로로 있으면서도 신하로서의 변함없는 충절을 보였다. 4년 동안 조금도 변함 없는 절개를 지킨 지조 있는 선비요 대학자 이셨다.
간양록(看羊錄)발간
포로 생활중 일본의 모든 것을 글로적어 기록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이기록을 건차록(巾車錄:본시 죄인이 타는 수례로서 선생께서 겸손한 뜻으로 마치 나라에 죄인이나 다름없이 하신데서 나온 것이다.)이라 하였는데 공(公)의 제자 동토 윤순거(童土 尹舜擧) 공(公)이 간양록(看羊錄:양을 친다는 뜻으로 서역기원 전인 전한(前漢))시대 중랑장 소무(中郞將 蘇武)가 흉노(凶奴)땅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대로 옥에 갖히고 다시 북해(北海)로 보내어 양을 치게 하였다가 19년만에 풀리어 돌아온 일이 있어 그가 갖은 고초와 회유에도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사실이 서로 비슷하다는 데에서 간양록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으로 고쳐 효종 9년 1658년 편찬 발간하였다.
내산서원에 위패 배향
전라남도에서는 95년 선생께서 태어나신 영광 불갑에 지방비 15억원을 들여 1만여평의 땅에(문중에서 기부체납) 내산서원(內山書院)을 중건해 선생의 위패 배향과 문집인 수은집을 비롯해 강감회요(綱鑑會要) 장판(藏板) 664장(목판 木版)등이 보존되여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372년만인 1990년 3월 9일 일본정계(政界)와 진주강씨 재 일본종회 임원들이 수은공을 그리며 피납되여 상륙한 사국애원현 대주시(四國愛媛縣 大州市)공원에 현창비(縣彰碑)를 세웠고 1992년 후손인 진주강씨 중앙종회(회장 강기천 姜起千)강항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이을호 李乙浩) 수은 강항선생 유적 보존회(회장 강대직 姜大直)께서 일가들의 호응과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아 선생이 피납된 장소인 논산포(영광군 영산면)에 섭난사적비를 세웠다.
그밖에 맹자정(孟子亭)기적비등을 건립하는 등 정성이 그치지 않고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 후손들은 수은 선조님의 투철한 선비정신으로 지조를 지키며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근본과 충절을 본 받아야 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수은공에 얽힌 이야기와 유적에 대해서는 2001년 2월호부터 2~3회에 걸쳐 종보 "숨겨진 선조님의 유적지를 찾아서"편에 실을 계획으로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간양록 조용필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 쉬는 새벽달일세 /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피눈물로 한 줄 한 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그린 뜻 바다되어 하늘에 달을 세라/
어 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어야어야어야”
-신봉승 작사 조용필 작 곡, <간양록>
‘한국 대중가요의 명장’ 조용필이 12월 1일부터 9일까지 서울 예 술의전당 오페라 극장에서 ‘조용필 2001콘서트-그리움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있다. 오페라극장의 공연은 대중가수로서 그가 처음이 고 이번이 3번째 무대다. 조용필은 한국 대중음악의 밑그림을 설계 하고, 서구 팝음악에 빼앗겼던 대중음악 주도권을 되찾아준 우리 시대 최고 가객임을 누구나 인정한다. 그런데 조용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간양록>을 공연 때마다 들려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https://www.youtube.com/watch?v=QGOk7DsD10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