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8년 차, 때는 바야흐로 농번기다. 귀촌을 하기 전엔 농번기라는 단어에 어떤 느낌도 관심도 없었거니와 귀촌 후에라도 그 단어가 요즘처럼 절박하게 다가온 적도 없었다. 그런데 작년 난생처음 영농이라는 걸 하며 물고추를 단위농협에 경매로 보내 1백 수십만 원이라는 금액이 입금되고 가을엔 태양초 고춧가루를 만들어 알음알음으로 2백여만 원의 수입(사실 인건비 농약 등을 포함한 손익계산을 따지면 적자이지만...)을 올리며 부쩍 영농에 대한 의욕과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하면 된다! 나도 할 수 있다! 로.....
금년도 기 투입 된 영농자금
로타리 20만(약2,500평 중 1500여 평은 대토 줌)
비닐멀칭25만(약1,000평)
마사토 및 정리 100만(마사도10차 80만+밭 정리 장비 대금 20만)
모종일습 26만(고구마 포함 각종 모종, 고구마 추가 필요함)
고추모종 32만(고추 80판 x 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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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一金 203 만원(향후 추가될 모종 및 농약, 부대비용과 인건비는 미포함)
이미 기왕 투입된 영농자금으로도 적자가 뻔하다. 그럼에도 영농을 시도하는 것은, 모든 영농자금이 마누라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사실과 얼마의 적자가 발생할지 모르지만 내가 느끼는 부담은 별로 없기 때문이고 건강을 위해 별도의 운동을 하지 않는 대신 농사일로 봄여름가을(겨울엔 1만보 걷기운동으로...)건강을 지키자는 취지다.(단, 영농한 모든 수입금은 마누라가 회수해 감.)
본격적인 농사는 지난달 하순부터 시작이 되었다. 주말에만 이곳으로 내려오는 마누라이기에 이런저런 기초적인(텃밭의 여름채소와 일반적인 청과)농사는 혼자 이미 다 끝을 냈고 마누라의 도움을 받은 것은 고구마 1500 포기 심을 때 도움을 받았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고추였다.
금년 고추농사는 적자가 났던 말았던 현금을 쥐게 해 주며 영농의 재미를 듬뿍 느끼게 한 주요한 작물이다. 사실 몸이 힘들어 그렇지 지을 농사는 고추밖에 없다는 8년차 농군의 생각이다. 아무튼 고추에 대한 열정을 품으며 금년 고추모종을 80판 2,800여 포기를 주문했다.(참고 작년엔 35판 1200여 포기)
마을 전임 노인회장님께서 정성껏 가꾸신 고추모종을 두 번에 걸쳐 공수해 온 날 밤잠이 오지를 않았다. 말이 그렇지 근 3천 포기의 고추를 어떻게 심는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다. 어쩐다? 어쩌지?
그러나 궁하면 통하고 지성이면 감천(밤새 고민을 했으니...)이라고 하지 않던가. 5월의 황금연휴 마누라가 이번 주 토요일까지 이곳에 있겠다는 기별은 내겐 천상에서 들려오는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옳지!!!
어제 계란 두 개 커피 한잔의 조반을 먹고 아침 6시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여덟 시를 지나 아홉 시쯤에 벌써 햇볕이 따갑기 시작한다. 나름 열심히 도와주던 마누라가 슬슬 신세타령을 하기 시작한다. ‘이게 뭐냐? 남들은 시골 간다고 하면 편히 쉬러 가는 줄 알고 부러워하는데... 젊어서도 해 보지 않은 농사일을 환갑이 넘어 하는 게 말이 되냐....이곳 생활이 점점 지쳐 가네... 자꾸 이러면 나 이곳에 못 내려오네....’마누라의 불만이 점점 고조되며 내 성질 역시 꼼지락거리며 가슴에서 머리끝으로 점점 올라오지만 인내를 해 가며 말없이 일에만 열중 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면 거의 무념무상 해탈의 경지에서 일을 하는 편인데 열시 쯤 됐던가? 태양은 중천이고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뜨겁다. 그런데 갑자기“에~에~이~씨! 나 못해!”라는 마누라의 고성이 튀어 나오고, 그 고성에 나는 정말 깜짝 놀라“당장 그만둬! 그리고 바로 올라가!”라며 맞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마누라 진짜 발딱 일어나더니“나 다신 여기 안 올 테니 혼자 알아서 해! 올라가라면 못 갈 줄 알고?”그리곤 휑하니 가 버리고 만다.
게으른 농부가 밭고랑 먼저 센다는데...마누라 가고 밭고랑과 고추모판을 헤아려 보니 반의 반도 못했다. 별의 별 생각이 다 든다. 고추모판을 모조리 엎어버려? 고추농사고 GR이고 다 때려치우고 이곳을 떠나? 저 여편네 진짜 가는 건 아닐까? 아무튼 무엇보다 마누라의 배신(?)이 제일 화가 났지만 그런 순간에도‘오냐! 이놈의 여편네! 너 없으면 내가 못할 거 같으냐?’라는 오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나도 자존심이 있지.....한 번 간 마누라는 돌아오지 않고, 점심은커녕 생수 한 병 달랑 가져왔는데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오고 팔다리가 후들거리며 거의 탈진 상태가 될 즈음 돌아보니 두 고랑이 남았다. 정말 열심히 했던 것이다. 남은 두 고랑을 마저 하기 위해 다시 무념무상 모드로 들어가려는데 “그만하고 내일 해요!”소리 나는 쪽을 보니 마누라다. 마누라 얼굴을 보는 순간 화가 더 치밀어 오른다.“왜 왔어!? 당장 없어져!”라는 나의 고함에도 마누라는 아랑곳 않고 고랑에 다소곳이 앉아 고추를 심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니 보따리 싸서 집나갔던 엄마가 돌아온 듯 반갑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한다. 그래도 남아 있는 울화는 참을 수 없다. 두 고랑이면 대충 200여 포기다. 왈칵 눈물이 나려는 감정과 아직도 남아 있는 울화가 교차한다. ‘너도 엿 한 번 먹어 봐라!’ 그리고 농사용 화물차를 타고 먼저 내려와 버렸다. 그 시각이 오후 4시 반쯤.(남은 걸 마누라가 다 심은 모양이다)
그 후로 아직 마누라와 말 한 번 섞지 않았다. 저녁이라고 차려 주는 것도 마다하고 일부러 컵라면으로 때우고... 마누라와 시청하는 유일한 연속극‘빛나라 은수’도 따로따로 보고...무슨 말인가 붙였지만 대꾸도 않고...그러나 마누라와 그렇게 싸우지 않았다면 오기도 자존심도 부리지 않았을 터, 아마 오늘도 고추밭으로 달려 갈 텐데 부부싸움 덕분에 큰 짐 하나 내려놓았다.
아! 지금 마누라가 거실 커튼 젖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잠시 후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야 겠지? “자기 어제 정말 수고 했어!”라고.
아이고! 아요! 아이! 죽겠네!!!그나저나 지금 허리도 다리도 특히 무릎이 쓰라리다. 무릎을 꿇어가며 고추를 심었더니 양쪽 무릎이 까졌다.‘망할 놈의 마누라... 같이 했으면 될 걸....’
덧붙임,
울 건너 이 반장은 금년 60판을 심으며 자신을 포함한 다섯 명의 놉을 얻어 한 나절 만에 해 치웠단다. 사실 마누라는 두 사람 정도 놉을 얻자고 했으나(영농자금 때문에..)마누라에게 너무 미안해 인건비라도 아끼자며 우긴 것은 나였고 너무 힘이든 마누라의 반란으로 부부싸움이 난 것이니....내년부턴 그냥 먹을거리로만,,, 절대 영농으로 돈을 탐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 주어야겠다.

집앞 문전옥답에 심은 모종 리스트. 이외에 2차로 또 추가 했다. 고구마 싹은 별도....

두릅이 지천으로 달려 있으나 따 먹을 시간이 없다. 얼핏 두릅을 전문으로 키우고 싶기도 하고.....


아이고! 허리야! 아무튼 마누라와 다툰 덕분에 고추는 다 심었다. 그래도 한 고랑 반 정도 빈 공간이 남았다.
뭘 심긴 심어야 하는데...마누라 한테 안 알리고....
첫댓글 고추 2,800포기를
두분이 심으셨다니 정말 대단하신 열정입니다.
"孤軍奮鬪"라는 말이 딱 맞겠습니다.
수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두집 4명이 약1,300 여주를 오전 10시경에 다 끝냈거든요,
어젠 고추 말뚝도 추가 구입하여 모두 박고
스프링쿨러도 구입해 급수 하기 시작 했습니다.
고군분투가 아니라 거의 초주검이었습니다.
집 사람이 도운 건 4-5백 포기 될래나요?
아이고! 지금 운신을 제대로 못 하겠습니다. ㅋㅋㅋ...
그래도 그걸 해 놨으니...이젠 한시름 놨습니다.
문제는 고추 딸 때 또 싸울 것 같은 예감이...ㅋㅋㅋ...
ㅎㅎㅎ
우리 부부도 말 다툼은 합니다만
우린 작업하는 방법을 갖고 다툽니다^^
정말로 고추를 수확할때의
크나큰 업보가 또 남아있습니다.
하이고, 대단하십니다.
근데 슬슬 하세요.
돈도 안 되고,
몸만 고달프고,
더구나 사모님과 사랑싸움까지 해야하는 그 노무 농사, 와 합니까?
에고오~ 몬 말리것네! ㅋㅋ
나라 꼬라지가 이러니
제 육체를 학대해 가며 잊어 볼라고 이럽니다.
선배님!
아이고 너무 무리 했네요.
오기가 사람 잡아요.
쉬엄 쉬엄 하세요.
마누라 때문이라도 내년부턴 이짓 못하겠습니다.
어제 마누라가 한 얘기 지나가는 얘기가 아니었답니다.
편히 쉬러 왔는데 일만 시키니
약도 오르고 힘도 들었을 겝니다.
그동안 아뭇소리 않고 잘 하기에....
지금은 회해 했습니다.
내년부턴 텃밭만 하겠다고....
조블때부터 오선생님의 글들을 항상 애독한 독자입니다.
너무 부지런하셔서 그큰농사일을 하실수 있으시겠지만,
오선생님 내외분건강도 생각하셨으면 하는 염려에 감히,
외람되지만 갑자기엉뚱한 생각이들어 글을
올림을 용서해 주십시요.
어버이날도 다가오고 겸사, 시골 어머님뵈러 함께사시는 아즈버님댁에 갔는데,
어느 산에 태양광설치 하신걸 구경시켜주시니. 갑자기 오선생님이 떠 올랐습니다.
저는 태양광에 대해 잘모르고 아무관련도 없지만, 생각외에 있었다면 한번쯤 고려해볼만하지않을까 싶어 감히 글을 올립니다.
글재주가없어. 잘쓰지는 못하지만
매일들러 여러선생님들의 글에서 많이 배우기를 희망합니다.
ㅎㅎㅎ...
감사드립니다.
욕심을 냈습니다.
정말 후회가 많았습니다.
마누라에겐 진심으로 사과하고 달래 주었습니다.
내년 부턴 정말 문전옥답의 채마밭만 건사하려고 다짐합니다.
아! 저흰 약3년 전에 태양광을 설치 했답니다.
전기요금을 매월 10여 만원 이상 save하고 있답니다.
이런저런 조언 감사하며 깊이 받아 들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