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다 왕 히스기야
왕하 18:1-12
1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2 그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구 년간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요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3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4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5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7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8 그가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9 히스기야 왕 제사년 곧 이스라엘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제칠년에 앗수르의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10 삼 년 후에 그 성읍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 왕의 제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제구년에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11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고산 강 가에 있는 할라와 하볼과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12 이는 그들이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그의 언약과 여호와의 종 모세가 명령한 모든 것을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더라
왕하 18:1-12 / [히스기야왕의 종교개혁]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유다 왕이 된 것은 이스라엘 왕 호세아 3년의 일이었다. 2)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29년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는 스가리야의 딸로서 그 이름은 아비였다. 3) 그는 자기의 선조 다윗을 본받아 여호와의 마음에 드는 일들만 하였다. 4) 그는 전국에 만연된 산당들을 허물고 바알의 돌기둥 우상들을 깨뜨리고 아세라 여신의 나무 기둥도 잘라내버렸다. 그는 심지어 모세가 만든 것으로 성전에 보관해 오던 구리뱀도 부숴 없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까지도 그 구리뱀 앞에 가서 느후스단이라고 부르면서 분향하였기 때문이다. 5)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 섬겼다. 유다 나라의 모든 왕들 중에서 그와같은 왕이 이제까지 없었다. 6) 히스기야는 일평생 한결같이 여호와를 섬기고 주께서 모세를 통해 보내 주신 계명을 그대로 지켰다. 7) 그래서 주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가 하는 일마다 성공하게 하셨다. 이리하여 히스기야는 마침내 앗수르 왕의 통치권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였다. 8) 히스기야는 블레셋 족속을 쳐서 이겼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장 남쪽 성읍인 가사까지 정복하였다. 그리고 블레셋 국경선에 설치된 것들과 전국에 있는 망대에서 요새 성읍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군사 시설을 부숴 없앴다. 9) [앗수르에 정복된 사마리아] 이스라엘 왕 호세아 7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사마리아 도성을 포위하였다. 이때가 유다 왕 히스기야 4년의 일이었다. 10) 사마리아 도성은 포위 당한지 거의 3년이 지나서야 함락되었다. 이때는 히스기야왕 6년이며, 호세아왕 9년이었다. 11) 살만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잡아 앗수르로 끌어 갔다. 그리고 포로들을 앗수르의 할라 지방과 고산 지방의 하볼 강가와 메대 족속의 여러 성읍에 수용하였다. 12) 이스라엘이 이렇게 망한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주님과 맺은 계약도 어기고 모세가 전해 준 주님의 계명도 따르지 않다가 결국 포로민의 신세가 되었다.
히스기야는 왕위에 올라 이전의 왕들이 하지 못한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유다의 신앙을 회복하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1-3) ‘히스기야’의 뜻은 “여호와는 강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 앞에 정직한 왕으로 ‘다윗 왕’ 같다고 평가될 정도였습니다(3).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4-6)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은 유다에 뿌리내린 잘못된 예배를 정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제일 먼저 여러 산당과 주상을 제거하였습니다(4). ‘산당’은 성전의 역할을 대신하는 장소였지만, 이방 종교와 연합하여 우상숭배가 행해지는 장소로 전락하였습니다. 유다의 왕들 중에 산당을 제거한 왕은 히스기야와 요시야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또한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수었습니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본 자들은 병에서 나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놋 뱀이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 유다의 백성들은 놋뱀을 우상화 하여 숭배하였습니다. 히스기야는 백성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놋뱀을 부수면서 ‘느후스단’이라 일컬었습니다. ‘느후스단’의 뜻은 ‘놋쇠 조각’이라는 뜻 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의 백성들이 숭배하였던 놋뱀은 “단지 놋쇠 조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5-6절을 보면 히스기야에 대하여 평가하고 있는데 그 평가가 대단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7-12) 히스기야의 신앙을 보고 하나님은 복을 주셨습니다. 당시 남 유다는 애굽과 앗수르라는 막강한 세력 사이에 끼여 있었습니다. 두 나라는 유다를 지배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는 앗수르를 의지하고 있었는데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바치던 조공을 거부하며 앗수르를 배척하였습니다. 또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동맹국이었던 블레셋을 쳐서 점령하였습니다(8).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지만(9-12) 히스기야는 앗수르를 대적하며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형통함을 주셨기 때문입니다(7).
적용: 히스기야의 형통함에는 하나님 앞에 바로서기 위한 노력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계십니까?
기도의 응답 속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은 언제나 거룩한 간증이 넘치는 삶입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 주님의 능력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을 보며 살아가는 것은 마치 장엄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감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도다”, “살아계신 여호와” 같은 표현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하면서 자기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느끼는 친밀함으로 인해 가슴이 벅찬 광경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곧 우리들이 풍부한 기도의 응답 속에서 산 사람들이었음을 드러내주는 것입니다.
< 설 교 >
느후스단
(열왕기하 18:1-4)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던 구리뱀을 믿음으로 바라보면 살았습니다. 그 뱀은 죄를 지은 백성들을 불뱀의 독으로부터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었는데 언제부터였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구리뱀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 히스기야 임금이 그 놋뱀을 파괴하고 누후스단이라 하였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모세의 놋뱀을 느후스단이라 부르며 가차없이 깨뜨려버리게 된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오늘 말씀의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뒤를 이어 25세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열왕기하 16장을 보면, 그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예루살렘에서 16년간 통치하는 기간에 역대 유다 임금들 중에 우상숭배를 가장 심하게 했던 왕이었습니다. 금송아지와 바알을 섬겼을 뿐 아니라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길 정도로 타락한 왕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과 아람 왕국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여 궁지에 몰릴 때 아하스는 앗수르에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며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금은 보화를 선물로 보냈습니다. 그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애타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아하스 왕은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큰 나라 앗수르 제국을 의지하였습니다.
아하스의 선물을 받은 앗수르 왕은 구원병을 보내 이스라엘과 아람 연합군을 함락시켰고 유다 왕 아하스는 앗수르 왕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거대한 규모의 우상 제단을 보고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제단에 제사를 드리니 효험이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하고 우리도 이렇게 크고 화려한 제단이 필요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의 구조와 규격 등을 그림으로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것과 똑같은 제단을 만들어놓으라 명령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왕은 새롭게 세워진 제단을 보고 마음이 흡족하여 그 단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놋단을 북쪽으로 옮겨버리고 그날 이후로 모든 제사는 새로 만든 큰 단에 드리게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문들을 닫아 걸었으며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아니했습니다. 예루살렘 곳곳에 새로운 산당을 세워 온갖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졌고 백성들은 고통 속에 시달렸습니다(역대하 28장).
그와 같은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땠을까요? 호세아가 왕으로 다스리고 있을 때 이스라엘 지파들은 여호와를 배반하고 모든 산 위에 산당을 짓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섬겼으며 하늘의 해와 달과 별을 숭배하였고 자녀를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는 몰록을 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여 그들을 앗수르의 손에 붙이셨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패하여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앗수르의 왕은 멸망당한 사마리아 성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신하여 앗수르에 패한 이방 민족들을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식민지 백성들이 앗수르에 대항하지 못하도록 뿔뿔이 흩어놓는 강제이주 정책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때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온 이방 민족들이 각자 자기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왔습니다. 사마리아 성은 물론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마다 산당을 짓고 거기 우상들을 모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때부터 이방인들과 피가 섞인 잡족이 되었으며 이방의 신상들이 득실거리는 종교 시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악행을 보시고 벌하여 이방인들 몇을 죽게 하셨더니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앗수르 왕에게 한 가지 청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주관하는 신을 섬기는 법을 몰라 이런 벌을 받았으니 전에 사마리아에서 여호와를 섬기던 제사장을 보내어 우리에게 그 신을 섬기는 법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을 들은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에서 포로로 잡혀온 제사장 하나를 돌려보내 벧엘에 살면서 여호와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치게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이방 잡족들이 마음을 돌이켜 그때부터 여호와 하나님만 섬겼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 민족이 각각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들이 세운 여러 산당에 두었고, 각 성읍마다 여호와를 섬기는 제사장을 세워 자기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 땅의 수호신에게 잘 보여야 재앙을 만나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 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저 사마리아 지역의 수호신 정도로 여겨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앗수르에게 망한 이스라엘 땅에서 벌어진 혼합주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럴 때 남쪽 유다 왕국에서는 아하스 왕을 이어 히스기야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조상 다윗의 의로운 길을 따랐던 히스기야는 가장 먼저 종교개혁을 실시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처럼 여러 산당들을 무너뜨리고 거기 두었던 모든 우상들을 깨뜨리고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유다 왕국에 일대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 히스기야를 가리켜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런 왕이 없었으니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하였습니다.
역대 어느 왕들보다 모세의 계명을 잘 지킨 히스기야가 모세가 만든 놋뱀을 부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뱀을 가리켜 느후스단이라 불렀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백성들이 그 놋뱀을 향해 향을 피우며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놋뱀이 처음부터 우상으로 섬김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언제인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신으로 섬겨졌던 것입니다. 느후스단이란 말은 그저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주일 말씀드린 내용과 오늘 말씀을 연결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던 놋뱀은 불신앙으로 멸망당하는 죄인들의 치료와 생명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치료방식이었지 숭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뱀의 모양을 한 그 놋조각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바라보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상징적인 도구였습니다. ‘놋뱀을 쳐다본다고 어떻게 죽을 사람이 살아나느냐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마라’ 하고 끝까지 거부하던 사람들은 고통 중에 죽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모세의 놋뱀을 언급하시며 ‘나도 높이 달려야 하리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라’(요3:14, 15) 하셨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십자가의 희생이 나의 죄를 대신한 형벌임을 인정하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영생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높이 든 놋뱀과 예수께서 달리신 십자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전남 보성의 어떤 교회 목사 부부가(엄밀히 말하면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자칭 목사지만) 세 자녀를 굶기고 때려 죽게 했습니다. 처음에 신문기사를 읽었을 때는 정신질환을 앓는 부부가 아이들을 학대한 폭행치사 사건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건 내용이 자세히 밝혀지면서 이 부부의 어리석은 행동이 갈수록 기가 막혔습니다. 감기 든 아이들의 몸 안에 병을 가져다 준 귀신이 들었으니 때려서 내쫓아야 한다고 그렇게 무자비하게 아이들을 때렸습니다. 그냥 때린 것이 아니라 금식기도를 하며 어린 아이들에게도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겨가며 때렸습니다.
이 정도면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이 분명합니다. 알고 보니 이 어리석은 부부를 부추겨 아이들을 죽음에 몰아넣게 하고 돈을 뜯어낸 또 한 여인이 있습니었다. ‘아이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아니하리니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 14) 잠언의 말씀을 귀신 내쫓는 푸닥거리에 적용하였습니다. 같은 성경을 읽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이런 무지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지요?
작년 5월 경북 문경에서 자기가 메시야라고 확신하는 사람이 십자가에 자기 손발을 못 박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나 이번 보성의 사건들 모두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욕되게 한 결과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절이 되면 세계 곳곳에서 십자가 고난을 재현하는 이벤트가 벌어집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실제로 체험한다고 십자가에 손과 발을 못박는 이벤트를 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나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자칭 예수의 엽기적인 자살 사건은 종교적 영웅심으로 자기를 과시하고픈 욕망에서 나온 행동들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찌 이런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였을까요?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재현한다고 무거운 통나무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코메디 같은 행동을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는데 십자가 밑에 바퀴를 달아 끌고 다닙니다. 연극 무대에서 공연 중이었다면 혹시 모르겠지만 기독교계에서 이름 꽤나 알려진 사람들이 날보란 듯이 쇼하는 모습을 볼 때 기가 막히고 부끄러울 뿐입니다. 십자가의 무게도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서 바퀴달린 십자가 이벤트를 벌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이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거나 나무 십자가를 끌고 다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전혀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 경건한 척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자신의 이익과 성공의 도구로 삼는 일입니다.
모세의 놋뱀 느후스단을 깨뜨렸던 히스기야의 종교개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념이나 자기 주관적인 어떤 신을 섬기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따르고 있는 신앙은 여호와 하나님 신앙이 아니라 느후스단을 섬기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신앙 신념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이었습니까?
현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심취되고 있는 왜곡된 신앙 행동은 무엇일까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이기적인 욕심과 소원성취를 위해 종교행위에 몰입하는 일입니다. 예배당과 불당이라는 장소만 다르고 의식이 서로 다를 뿐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비슷하거나 동일하다면 그렇게 예수를 믿는 신앙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느라 다른 사람의 불행에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나의 행복을 위해 금식하며 맹렬하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미신이지 바른 신앙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성공과 번영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러 오신 분이시지 사람들이 부자되고 성공하도록 도와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와 심판을 말하기 꺼려하는 기독교는 세상의 도덕 종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말하지만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들이 말하는 그리스도는 위대한 스승이나 도덕 선생에 불과합니다. 거기에는 구원이나 영생이라는 진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이 있습니다. 뜨거운 신앙 체험,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도와준 사람, 존경스런 신앙의 인물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신비한 체험이나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바라봐야지 예수께서 달리셨던 십자가를 섬길 수도 없습니다. 십자가 형상을 놋뱀 섬기듯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신성한 부적처럼 여기는 믿음도 있으니 이것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지 본질은 외면하고 십자가라는 물질을 바라보거나 이차적인 축복에 더 관심이 있으면 그것이 곧 느후스단이고 불신앙입니다. ‘달을 보라고 손으로 가리켰더니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만 보더라’는 말과 같습니다. 모세의 놋뱀을 통해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찍어 불태우고 깨뜨려야 할 누후스단이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빙자하여 자기 이익의 기회로 삼는 종교인들이나 종교 장사치들의 헛된 영웅심과 세속적인 욕심을 깨뜨리고 불태워야 합니다. 놋뱀을 바라보라 했지 그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고 섬기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라 하셨지 주님이 달리셨던 십자가 형상을 우상처럼 받들고 거기 절하며 기도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높은 종탑에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모두 거룩한 교회는 아니며, 거실과 안방 벽에 십자가를 걸었다고 거룩한 백성의 집은 아닙니다. 금과 은으로 도금한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걸었으니 세상에서 어떻게 살든 그 행실과는 상관없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며 입을 열면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말하고 있다고 모두 좋은 믿음, 좋은 신앙인은 아닙니다.
그 중심에 진짜 주인공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 모든 종교활동은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유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따르고 제사했던 혼합주의 신앙에 불과합니다. 히스기야가 부쉈던 놋조각 느후스단일 뿐입니다. 사마리아에 강제 이주된 앗수르의 식민지 백성들이 섬겼던 다원주의, 혼합주의 종교에 불과합니다.
옥스포드 대학 크라이스트 처지 컬리지의 성당에 가면 옥스포드 수호신을 기념하는 제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제단이 부서져 일부만 전시되었고 주변의 여러 조각상들을 보면 코가 깨지거나 얼굴이 무너진 흔적들이 있습니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성경의 인물들이나 성인들의 조각상, 벽화 등을 너무 성스럽게 여기다 못해 그 앞에 촛불을 켜고 기도하며 거기 절하고 복을 비는 일들이 흔하게 일어났습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이것을 비판하며 교회 안에 어떤 형상이든 세우거나 걸어놓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때 크라이스트 처치 컬리지 성당의 성상들도 대부분 파괴되고 교회 밖으로 내던져졌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고 거기 절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을 경배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계명을 받고 있는 40일을 참고 기다리지 못했던 이스라엘은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이것이 우리를 애굽으로부터 인도한 하나님이라 하며 그 앞에 절하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조차 사람들의 손으로 만든 형상 속에 가두어 두고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 편한 방식으로 섬기려 합니다.
그리고 그 예배와 섬김의 궁극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함입니다. 주문을 외면 불려 나오는 알라딘 등잔의 거인처럼 하나님은 그저 필요할 때 불러내어 도움을 청하는 수호신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섬김의 방식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상숭배요 미신적인 습관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14:6)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아니고는 나에게는 도무지 구원 받을만한 아무 능력도 자격도 지혜도 없음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를 내맡기고 의지하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을 힘입어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사람
열왕기하 18:1-8
국가나 사회나 지도자 한 사람의 영향과 역할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전 931년 르호보암 시대에 남북 이스라엘이 분열된 이후 남 유다 왕국에는 345년 동안 20명의 왕이 짧게는 3개월(여호아하스, 여호야긴) 길게는 55년(므낫세)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 20명의 왕들 가운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윗처럼 정직한 세 왕을 꼽으라면 아사(왕사 15:11), 히스가야(왕하 18:3), 요시야(왕하 22:2) 뿐입니다. 그 외에 여호사밧이나 요아스, 아마샤, 아사랴, 요담 등에 대해서는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하고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이승만(1-3대), 윤보선(4대), 박정희(5-9대), 최규하(10대), 전두환(11-12대), 노태우(13대), 김영삼(14대), 김대중(15대), 노무현(16대), 이명박(17대) 박근혜(18대) 그리고 현재 19대 대통령인 문재인으로 이어집니다. 이 사람들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마다 그 관점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다윗 같이 정직한 대통령이었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 지도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또 앞으로 우리는 어떤 지도자를 세워달라고 기도해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이 인정하신 왕 히스기야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1. 히스기야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한 왕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는 아하스였습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에 대해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왕하 16:2) 이렇게 말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께 악을 행하다가 나라를 큰 곤궁 속에 몰아넣은 왕입니다. 바알 우상을 만들고, 자녀를 불살라 제사를 드리는가 하면 수많은 산당을 만들어 분향하고 제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다 못해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아람, 이스라엘, 에돔 등 주변국가의 침략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는 침략하여 하루에 용사 12만 명을 죽이기도 했고, 백성 20만 명을 사마리아로 잡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전쟁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앗수르 왕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하나님께는 더욱 범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아하스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백성들은 아하스를 이스라엘 왕들의 묘실에 들이기를 꺼려하여 아하스는 그냥 예루살렘 성에 장사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하스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이스라엘 왕들의 묘실에 들이지 아니하고 예루살렘 성에 장사하였더라”(대하 28:27).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보기에 악한 아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히스기야에 대해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왕하 18:3). 역대하 31:20-21에는 히스기야의 통치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그가 행하는 모든 일 곧 하나님의 전에 수종드는 일에나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
이렇게 히스가야는 아버지 아하스와는 대조적으로 그는 하나님에게 인정받고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은 왕입니다.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한 사람이었기에 백성들도 왕을 신뢰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2. 히스기야는 지금까지 백성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과감히 없애버렸습니다.
히스기야가 왕이 되어 맨 처음 착수한 일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고 우상을 깨뜨린 것입니다. 18장 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여러 산당들을 제거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는 처음으로 산당을 없앴습니다. 그리고 구속사의 유물로 우상시되던 놋뱀을 과감히 제거했습니다(4절). 유다 여러 왕 중에 그와 같이 여호와를 의지한 자는 없었습니다(5절). 이 일에는 당대 선지자였던 이사야와 미가의 영향이 큽니다.
우리가 주목할 만한 것은 히스기야 왕이 모세가 놋으로 만든 놋 뱀을 산산조각을 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컬어 ‘느후스단’ 즉 놋 조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놋 뱀의 이야기는 모세 때로 올라가야 합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불뱀에게 물려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때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으로 뱀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뱀에 물린 자마다 놋으로 만든 뱀을 쳐다만 보면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뱀을 쳐다본 사람들은 모두 사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놋뱀을 만든 후 약 800여년의 긴긴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놋뱀에 대한 언급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도 말하지 않던 놋뱀이 히스기아 왕 때 그것도 여기서 거론되고 있습니다. 성경 기록상에는 이때까지 아무런 언급이 없었지만 오늘의 본문의 내용을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때부터 이때까지 계속해서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향하여 분향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옛날에 이 놋뱀이 자기들의 조상을 죽음에서 건져준 것을 기념도 할 겸 또 신령하다고 영험하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섬겨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은 우상들을 제거하면서 놋뱀을 함께 깨뜨려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여 만든 것이 아닙니까? 무려 8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국보급 유물인데, 또 조상들이 오래 오래 섬겨 오던 귀중품인데…. 히스기야 왕은 놋뱀을 가차 없이 산산 조각을 내고선 느후스단이라고 즉 놋 조각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왜 그토록 귀중한 것을 산산조각을 내었습니까? 유대민족들이 이 놋뱀을 저들의 섬김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오래 지켜져 내려 온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보급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경배의 대상이라면 이는 눈 딱 감고 산산조각을 내어야 합니다.
3.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회복시켰습니다.
이 사실은 역대하 29장에 나와 있습니다. 3-4절입니다. “첫째 해 첫째 달에 여호와의 전 문들을 열고 수리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동쪽 광장에 모으고….” 이미 선왕 아하스가 16년 동안 우상숭배에 전념하느라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즉위 원년 정월에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성전에 들어가 보니 16년 동안 누구도 돌본 사람이 없어 성소가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성전을 대청소하기로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낭실 문을 닫고 등불을 끄고 성소에서 분향하지 않았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서 등을 돌리셨고 그 때문에 지금까지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린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성전이 얼마나 더럽혀졌는지 대청소를 하는 데는 16일이나 걸렸습니다. 이렇게 깨끗이 청소하고 정리 정돈하니 마음이 기뻤습니다. 히스기야는 레위 사람 중 악기를 잡게 하고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도 제물을 가져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제사를 드리게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기뻐했습니다. “이 일이 갑자기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하여 예비하셨으므로 히스기야가 백성과 더불어 기뻐하였더라”(역대하 29:36) 하였습니다.
다음에는 유월절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정월 14일에는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2월에 지키기로 하였습니다. 전국에 편지를 보내 유월절을 지키자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조롱하며 비웃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역대하 30:10) 수많은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2월 14일에 유월절 양을 잡음으로 유월절 제사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성결케 한 뒤에 유월절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일부 많은 사람들은 이제까지 우상숭배의 풍속에 젖어 그만 자신들을 정결케 하는 의식을 하지 않고 그냥 유월절 양을 먹은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깜짝 놀라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간구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유월절은 축제 속에서 한 주간 동안 진행되었고 백성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다시 한 주간을 더 지키자고 하였습니다. 비록 제 날짜에 지키지는 못했고 이방 풍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의 실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고 백성들은 즐거워했습니다. “예루살렘에 큰 기쁨이 있었으니 이스라엘 왕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로부터 이러한 기쁨이 예루살렘에 없었더라”(역대하 30:26)고 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일어나 백성을 축복하였습니다.
4. 히스기야는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켰습니다.
5-6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또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거듭말씀하시기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막의 떨기나무 같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살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렘 17:7). 이런 사람은 마치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우리는 범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분도 우리의 길을 지도하십니다(잠 3:6).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구체적인 표시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계명을 꾸준히 지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계명을 지키지 못합니다. 잠깐 동안 지키는 척 하지만 또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또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계명을 더 잘 지키려고 힘쓰고 또한 더 잘 지킵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그 자녀가 그의 말을 잘 듣고 잘 지키면 그와 함께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칭찬을 해주고 싶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고 그 생명까지 연장을 받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고, 여호와를 의지했고, 여호와의 계명들을 지켰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인생,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인생,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말씀을 잘 지키는 인생을 하나님은 기쁘게 도우십니다. 마지막으로 18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하나님의 특별하신 도우심을 잘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조하여 지킬 때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포위하고 협박을 할 때 히스기야는 성전에 나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 바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 하리라”(왕하 19:6-7).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도우심의 손길을 펴는 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해야 하는가?
열왕기하 18: 1-8절
들어가는 글
설 연휴 끝자락이자 2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죄악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설 연휴기간 동안 소방관에 관련된 뉴스가 가슴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생명을 걸고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에게 가짜 방화복이 대량 유통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 병원 측이 고생하는 소방관들에게 제공한 커피가 뇌물로 취급되어서 감사팀에서 무료로 주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가 물질 때문에 양심이 마비되어가고 따뜻한 정마저 메말라 가는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우리들의 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지 깨닫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1.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히스기야가 남유다 왕이 되었을 때 풍전등화와 같은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당시 주변정세는 강대국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를 점령하였습니다(10절). 그리고 남유다까지 점령하려고 하였습니다(13절). 또한 종교적으로도 역대 왕들의 우상숭배가 이어져 왔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 왕은 자기 아들을 산채로 불살라 몰렉에게 받칠 만큼 우상을 열심히 섬겼습니다.
이런 안팎으로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3절). 그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바로세우고자 하였습니다. 믿음을 바로 세우는 것이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런 믿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먼저는 경건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선지자 스가리야의 딸이었습니다(2절). 우상이 만연하던 시대에 선지자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히스기야를 하나님 앞에서 말씀으로 양육하였습니다. 그를 통하여 가장 심하게 우상을 섬겼던 아버지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건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누구에게 영향을 받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가 믿음의 질을 좌우합니다.
나중은 그의 동족 북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10절). 여기서도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납니다. 관점에 따라서 주변의 국가들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의 힘이 크다는 것을 보고 조공을 바치며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관점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강대국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겼던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우상을 제거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반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정직하게 행하였는가?
히스기야는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정직하게 행하였습니까? 그는 산당을 제거하였습니다(4절). 산당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우상을 섬기던 제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로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기 전까지 하나님께 제물을 받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일천번제도 기브온 산당의 제단에서 드렸습니다(왕상3:4).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진 후에는 성전의 놋 제단에서 제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물 받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였습니다. 역대 왕들도 백성들의 눈치를 보면서 산당을 묵인했습니다. 그 결과 산당에서 가나안 신과 여호와가 결합되어 혼합된 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못하는 것은 세상 것을 임시로 빌려 쓰다가 익숙해져서 버리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글씨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벽에 그렸습니다. 나중에는 벽의 그림들에게 기도하면서 우상처럼 섬겼습니다. 그러므로 잠시 빌려 쓰는 방식을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을 섬기는데 잠시 필요했다 하여도 지금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면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예전에 사용했던 방식들에 매여있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 하나는 놋 뱀을 부수었습니다(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800년이 넘도록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만든 놋뱀을 우상처럼 섬기며 분향하였습니다. 놋 뱀에 능력을 주신 하나님은 사라진채 그 껍데기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무슨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이 없이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지만 하나님은 없이 자기 기분으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사라진 종교의식은 우상 숭배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으로 끊임없이 껍데기 신앙을 부수어 갈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3. 여호와를 어떻게 의지하였는가?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역대 왕들 중에는 그러한 자가 없었습니다(5절).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였습니까? 첫째는 하나님과 연합하였습니다(6절). 히스기야는 하나님과 연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연합이 어떤 종교 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의 연합이 교회 안과 밖의 신앙을 일치하게 하여 예수님의 편지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습니다(6절). 히스기야는 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습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받았던 말씀이 원조이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원조의 말씀에 다른 것들이 붙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원조의 말씀보다 주변에 달라붙은 것들에 더 가치를 두게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히스기야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일 처음 모세가 받았던 원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셋째는 세상의 왕을 섬기지 아니하였습니다(7절).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 주변의 모든 나라는 강대국 앗수르를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앗수르를 배반하여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창1:27). 여기서 형상은 무엇을 반영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그분을 반영하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반영하게 됩니다. 이 측면에서 중립적인 입장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반영하든지, 아니면 피조 세계 가운데 있는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까? 이런 근거로 루터는 우리의 마음이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누구에게 매달리고 의지하였습니까? 그는 전무후무하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그분을 반영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누구에게 매달리며 의지하고 있습니까? 만약 하나님보다 더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그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고 의지함으로 그분을 반영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영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향을 받게 하시며, 사람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예전에 하나님을 섬기는데 잠시 필요했어도 지금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방해한다면 제거하게 하시며, 하나님이 없는 껍데기 신앙은 부수게 하소서. 히스기야처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연합되어 떠나지 않게 하시며, 원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시며,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기게 하소서. 부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들이 당신을 반영할 수 있도록 주님께만 매달리며 의지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