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20절『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삼개 국가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19장 21-22절『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호 바실류스 톤 유다이온)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바실류스 톤 유다이온)이라 쓰라 하니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빌라도는 관사가 있는 바실류스를 쓰도록 했고, 유대인들은 관사를 빼라는 것이다. 관사가 있는 것은 신적인 왕이라는 것이다. 관사가 없으면 일반적인 왕을 지칭한다. 빌라도는 자기가 쓴 것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러지 못한 것이다.
19장 23절『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여기에도 동사들이 아오리스트 시제이며, 이러한 행동이 항상 같은 모습이 아니라 순간 군인들 자기들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성경 말씀이 응하도록 한 것이다.
19장 24절『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제비뽑기 하는 것도 이사야가 한 말을 응하게 한 것이다.
19장 25-27절『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호 휘오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호 휘오스는 특별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아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육의 어머니를 모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 전에 마지막 유언을 하시는 것이다. 제자는 요한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레마)보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인 로고스가 더 중요함을 나타낸다.
19장 28절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성경에 응하게 하려하는 것이다. 성경에 응하는 것은 앞 부분의 군인들이 제비뽑기를 하는 것과 목마르다 라는 부분이다. 두 내용 사이에 예수님이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성경에 기록된 것은 레마이지만,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은 로고스이다. 로고스가 더 중요한 말씀이다.
19장 29-30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프뉴마)이 떠나가시니라』 프뉴마는 영이다. 이것은 시편 69편 21절인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라는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신 포도주는 식초와 같다. 목이 마를 때 물이나 포도주가 아닌 식초를 마신다는 것은 오히려 더 고통스럽기에 차라리 마시지 않는 것이 낫다. 비록 사람들이 예수님을 놀리기 위해 식초인 신 포도주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성경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식초인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하시며 돌아가셨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계획하신 일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19장 31-37절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시신은 십자가에 달린 두 죄수와는 달리 그 다리가 꺾이지 아니하셨고 창으로 옆구리가 찔리셨는데 이것 역시『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는 말씀처럼 구약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통로가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믿지 않고 희롱했던 유대인들과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이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희롱하던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과 빌라도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경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믿음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통로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과연 어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는 통로로 사용되느냐는 점이다. 예수님을 신 포도주로 희롱하고 창으로 찌르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된 유대인들이나 로마 군인들이 아닌, 아름답고 진실하며 소망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19장 38절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장례를 귀하게 치루는 통로로 사용된 두 사람이 나온다. 그들은 공회 의원이었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였다.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당돌히 빌라도에게 찾아간 것은 요셉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이제는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세상에 드러내는 행동이었다. 이것은 요셉이 공회 의원으로서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에는 자기의 모든 지위를 잃을까봐 유대인들이 두려워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던 요셉이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는, 왜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드러낸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이 때가 하나님께서 요셉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때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요셉은 유대인을 두려워했지만, 누가복음 23장 41절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는 공회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한다. 그런 요셉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요셉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귀하게 장사지내도록 믿음의 결단을 내리게 하시는 것이었다. 요셉이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드러내자, 또 다른 한 사람도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19장 39-40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이 니고데모 역시 요셉과 같이 공회원이었기에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에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밤중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이었다. 요셉이 자신을 드러냄으로 인해 그 영향이 니고데모에게 미쳐서, 니고데모 역시 사람들 앞에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감히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장사지낼 사람이 없었던 때에, 그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지위와 재산을 던진 사람이었다. 비록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가 아니라 돌아가신 후였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과연 누구를 위해 던지는 것이 제대로 던지는 것인지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도구로 사용된 것이었다.
19장 41-42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동산은 에덴동산을 연상하게 한다. 에덴동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예수와 함께 장사하고 하늘로 부터 부활해야만 에덴동산이 회복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에덴동산의 회복은 곧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