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이틀이 지났다. 내가 그 황당한 얘기를 들은지도..일단은 재영이 살
아있다는 억지만 믿고서는 서권을 따라 왔다. 어디로 가는 지는 모르겠지
만 일단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그는 이것저것을 챙기고는 버스에 올랐다.
그가 한 얘기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일반적인 사고를 가진 자라면
믿을 수 없는..가끔씩 친구가 빌려주는 판타지 소설책들을 읽어보아 그의
말이 대충은 이해가 가곤 했지만 내가 그런 것을 실제 격는다니 얼떨떨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로 그를 따라왔다.
그리고, 지금 도착한 곳은..내가 그를 버린 곳.그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곳과 일치했다. 그의 어머니의 육체가 머무르시는 곳.다시는 이곳을
오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생각이 날 테니..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는데..오고 만 것이다. 알게 모르게 내 머리는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가 이곳을 떠난 지 2달이 조금 안 되지요. 어딘가에 공간의 문을 연
흔적과 기운이 남아있어요. 이곳에서 문을 여는 것이 더욱 수월해서 이
리로 왔어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척척 말해주는 그였다. 내가 이런 소년을 믿고 오
는 것이 잘한 짓인지는 몰라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꾸없이 끌
려왔다.
굳이 내가 동행해야 하는 이유를 물으니 그의 얼굴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다. 뭐, 나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를 위한 일이라면..
벌써 세시간째일 것이다. 서권이 기운을 찾는다며 돌아다닌지도.뭘 그리 넣었는지 가방까지 싸들고서는 다녔다. 내가 무겁다고 놓으라고 했지만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앗!잠시만요!"
한참을 돌아다니던 그가 강 저 건너편에서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얼른 달
려가 보았다.
"여기에요!문이 열릴 가능성이 제일 높은 곳!"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얼른 내 손을 잡은 그는 이상한(?)언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루시퍼이시여, 당신의 부름은 받은자가 그대의 능력을 필요로 하나
이다. 공간의 문을 열어 타계로 가는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워프!"
♤♠♤♠
"으~고마워, 레인..심장 멎는 줄 알았네."
"이 바보야~꼭 그렇게 사고를 친다~응?"
"그러길래 절 속이고 나가신 것에 벌 받으신 겁니다~"
그들이 돌아온 성에서는 한참을 실랑이가 벌어졌다. 각자 한 마디씩 하며
데이미스를 탓하고 있었다. 그를 구해준 것을 낯선 이방인이었다.
똑똑-.
"...들어와요."
레인이 허겁지겁 날아가는 사이 데이미스는 주변정리를 한 후 말했다.들
어온 이는 뜻밖에도 한 소녀였다. 자세히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이 성으로 온 첫날 밤 보았던 소녀였다.데이미스의 어렴풋이 나는 기억으로는 말이다.그러나 그녀는 아는지모르는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데이미스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아마도 안내해 줄테
니 같이 가자는 뜻인 듯 했다.
그녀를 시종이라 치부해 버린 데이미스는 그녀를 따라 나섰다. 뒤에서 따
라가며 보니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그녀는 시종이라하기에는 복장과
머리가 너무 고풍이었다. 품행 역시 예사롭지 않은 듯 했다. 허나, 데이
미스는 별 신경쓰지 않은채 쫄래쫄래 그녈 따라갔다.
'직책이 높은 시종인가?어린나이에..'
똑똑-.
역시나 품행이 품행인만큼 그녀는 문을 두드려봄을 잊지 않았다.
"..저예요."
시종이라기엔 이상한 말투였지만 데이미스는 못 들은듯 여전히 옷의 품
새를 확인하고 있었다.
"들어와라."
"예."
끼익-.
지난 번 연회가 있은 후 잠깐 보고는 처음보는 모습이지만 그는 변한 것
이 없는채로 여유롭게 앉아있었다. 데이미스는 그에게 특별한 일이 없었
고 그 역시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미스가 레인의 말을 들어
보니 항상 자신이 먼저 찾아가 뵈었다고 한다. 그래도 좋으신 분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었다.성격이 꽤나 무뚝뚝한 모양이었다.
데이미스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동안 같이 온 그녀는 그의 앞에
가서 인사를 올리고 앉았다. 이상한 점은 또다시 발견되었다. 시종이란
직책이 왕궁의 내정일에 이렇게 간섭을 하니다..?
허나 데이미스는 또다시 눈치채지 못한 듯 얼른 가서 그녀의 옆에 앉았
다.
"데이미스"
"예, 예?"
"라클레나"
"예."
그가 둘을 번갈아보며 불렀다. 들은 고 하니 그녀의 이름이 라클레나인
모양이었다.
"너희도 알아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불렀다. 나의부인.즉, 너희 어머님
께서 가출을 하셨단다."
그는 그 말을 남기며 종이 한 장을 건네 보여주었다.그 쪽지엔 이렇게
써 있었다.
내가 당신의 부인이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제 몸은 강제로
잡을 수 있겠지만 내 마음까지 훔쳐내진 못할꺼예요. 그렇게 알아요.
날 다시 찾고 싶다면 라클레나와 데이미스를 보내세요.안 그러면
절대로 안 들아가요!만일 그들이 날 찾아내면 내가 당신의 부인이 되도
록 할께요.
데이미스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강제결혼을 했단 것까지는 알고 있었
지만 가출까지..머리가 난잡해졌다. 그 때 데이미스의 옆에 있던 라클레
나는 전혀 황당한 표정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분노에 쌓인듯한 표정이었
다. 데이미스로서는 라클레나가 그런 감정을 갖고 있는 이유는 알 수 없
었지만 라클레나는 새 왕비의 딸이었던 것이다. 즉, 데이미스이 부친의
양 딸이라고 정리할 수 있었다.
"갈께요.데이미스와 저, 둘이서만!"
뭔가를 결심한 듯 라클레나는 벌떡 일어나서는 그렇게 말해버리고는 데
이미스의 손목을 잡고는 집무실을 나왔다.
영 어이가 없던 데이미스는 그렇게 라클레나의 손에 끌려 갔다.
라클레나가 데이미스를 끌고 간 곳은 그녀의 방이었다.
그곳은 역시 여자 방 답게 깔끔하고 화려했다. 라클레나는 데이미스의 손
을 놓은 채 침대위에 걸터앉아 한 곳을 주시하며 분노를 삭히고 있었다.
데이미스는 뭔가가 말을 붙이려 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마냥 기다
리고만 있었다.
"미안해요"
생각지도 않던 사과를 받은 데이미스는 뭔가 머쓱한 표정을 보이며 그녀
의 옆에 앉았다. 라클레나는 그제서야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혔는지 입
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