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고향은 충청도 공주 땅 두메 산골 30 여호의 농가가 호젓하게 자리한 하늘만
빠꼼히 올려다 보이는 곳이다 '
태어 나 세살 때 아버님이 일제 징병으로 끌려 가시고 23 살 젊은 과부의 외 아들로 비가
와야만 벼 농사를 짓는 천수답 일곱 마지기에 농사를 지으며 어머님은 하나 뿐인 자식 하나만을
믿으시고 좁쌀 농사나 옥수수를 심으며 유년 시절을 그렇게 가난 하게 살아 왔다 '
초등학교에 입학 하던 날은 다른 친구들은 모두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학교에 입학을 하는데
아버지 없는 나로서는 먼 길을 혼자 걸어 입학 식을 하였다 '
그때만 하여도 여자는 학교에 가는 일은 생각지도 못 했고 우리 어머님의 성품이 집 밖을
잘 나드리 하지 않는 그런 성품이었다 '
아버지 없이 큰 나는 우리 동내에서 제일 먼저 어린 나이에 지개를 지고 나무도 하고
풀의 베어 소 먹이를 하며 논에 나가 옥수수 밭을 매는 꼬마 농부로 성장을 하였다 '
물론 친구들과 싸움을 하지도 못 했다 '
만일 싸웠다가는 그 다음 날 그 애 형이 와서 동생과 싸웠다고 매를 맡곤 했다 '
초등 학교 졸업식 하던 날 '
그 날도 나 혼자 졸업식이라고 기분 좋게 학교에 갔다 '
우리 동네에서는 혼자 공주에서 제일 좋은 중학교도 합격을 하였고 오늘 졸업 식 날엔
도지사님 상과 우등 상을 타는 날이니 내 마음 얼마나 기뻤으랴 '
그런데 그 당시 학부모 대표를 사친 회장이라 하였다 '
그 사친회 회장 아들이 이등을 하고 내가 전체에서 일등을 하였다 '
그런데 평생 잊을수 없는 담임 선생님 '' 노 길 섭 '' 선생님 '
물론 사친회장 아들을 도지사 상장과 상품을 주어야 되었을 형편인데도 강직하시고
원칙을 중요시 하시는 선생 님은 나에게 모든 영광을 안겨 주었다 '
성대한 졸업식이 시작 되었고 졸업생 대표로 도지사님의 상과 상품을 받았다 '
반기는 가족도 더구나 꽃 다발도 없는 졸업식을 마치고 혼자 학교 교정을 나와
뽀푸라 가로수 길을 지나는데 5 명의 사친회 회장 아들과 그 친구들이 이리 오라고
나를 불렀다 '
도저히 잊을수 없는 2월 28 일 졸업식 날 '
논으로 끌려 간 나는 그 애들 한테 흠씬 매를 맞고 상장과 졸업장과 상품도 다
발기 발기 찢어 버려졌고 피투성이 된 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
여 학생들이 학교에 달려가 단임 선생님이 달려 오시어 나를 부축 하고 숙직 실로
데리고 가 치료를 하여 주시고 자전거에 테워 우리 집엘 데려다 주셨다 '
'' 석 현아 오늘은 결대 잊지 말고 꼭 그 애들 보다 성공 하여 이 다음 보라는듯
훌륭한 사람이 되어 나타 나거라 ''
'' 나는 너는 할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
쏟아 지는 코 피를 닦아 주시며 두 손 꼭 잡고 하시던 말씀 평생 잊지 않고 살아 왔다 '
내가 대학교 교수가 되어 재일 처음 찾아간 사람이 단임 선생님이신 노 길 섭 선생님
이시었다 ''
두 손을 꼭 잡으시며 흐느끼는 내 어깨를 다독여 주시던 선생님 '
그리고 면사무소에 근무 한다는 그 졸업식 날 그렇게 매질을 하고 상장과 졸업장을
찢었던 그 친구를 찾았다 '
그 친구는 아마 내 근황을 알았던 모양이다 '
면 사무소에 들어 서는 나에게 달려 나와 내 손을 덥썩 잡더니 반갑다 수선을 떤다 '
약간 떨리는 그 친구의 손을 잡고 그 앞의 다방엘 갔다 '
'' 잘 지냈니 '
'' 난 항시 너애개 고마운 마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
기어코 성공을 하여 꼭 너애개 보여 주려 애를 깨물고 공부를 했었거든 '
야 지난 일 이제 잊자 ' 그리고 고맙다 ' 너 때문에 내가 성공을 할수 있었거든 '
두 무릎 꿇고 미안 하다는 친구의 어깨를 일으키어 세우며 우리 가끔 만나자
지금 식당에서 노 길 섭 선생님이 기다리시고 걔시니 같이 가서 식사나 하지 ''
조촐한 점심 식사 상이 나오고 선생님은 내 손과 그 친구의 손을 잡고 그래 잘했다고
몇번이고 말씀 하시며 이 산골 초등 학교 에서 내 제자가 대학교 교수가 되었으니
나도 큰일을 했다시며 허허 웃으셨다 '
노 길 섭 선생님 정말 감사 합니다 '
머슴아가 슬프면 마음껏 울라고 숙직 실에서 말씀 하신 내 앞 길에 영원히 가슴에 남을
하늘 같은 고마우신 선생님 부디 지하에서 편히 잠드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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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답 글 달기에 기분이 좋은 지ㅡ니 님
말 표현이 너무 예뻐 자주 감동을 받습니다 '
늘 변치 않으시고 따스한 마음 내려 주심 감사 합니다 '
귀한 말씀은 가슴에 지니갰습니다
석현님의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제가 잘 알지요.^^ 석현님의 글을 많이 대해서 늘 존경하는 분이랍니다.
지금은 어려운 환경속에서 공부하기가 무척 힘이 든 세상이 되었지요.
석현님의 인생승리로 인해 제 가슴이 뜨거워지며 너무 멋진 분이라는 걸 또 다시 알게 됩니다.
고마운 마음 가슴으로 받습니다 '
지질히도 힘들었던 유년 시절 그 힘든 역경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 생각 합니다 '
봄이 왔습니다 '
마음에 화사한 고운 생각으로 좋은 새 봄 맞이 하시 길 기도 합니다
석현님!! 왜 사람을 울리세요....눈물이 앞을 가려 겨우 읽었네요....어찌보면 선생님 다음으로 어머님이 고맙고 그 친구도 고맙네요....훌륭한 교수님이 되도록 자극을 준 분이니....ㅎㅎㅎ 노 길섭 선생님은 석현님 같은 제자가 나왔으니 얼마나 대견하셨을까요???층분히 행복 하셨을겁니다...지금 지하에서도 흐뭇하실테구요....교단에는 정말 두분같이 진실한 분들이 많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요즘 기온차가 큽니다...늘 감기 조심 하시고 사모님과 행복한 나날 되소서...ㅎㅎㅎ
늘 마음의 어덕으로 힘을 주시는 너무 좋은 님 '
오늘도 다시금 지난 일에 눈시울 붉히는 글을 주셨네요 '
차마 생각 해 보면 마음이 오그라 질듯 힘들었던 어린 시절 '
그러나 모두 그리운 얼굴이고 보고 싶은 모습입니다 '
늘 고맙 다는 말씀 드리며 늘 행복 하세요
힘들게 사셨네요~
그래서 자식에게는 가난을 물려주라고 했는지~
가끔저는 반성합니다~너무나 편하게 살아서 이렇게 나약한가~~???
우리아들말하듯이~우리엄마는 곱게자라서~
전 지독하게 뭘해볼려고 해본기역이 별루 없답니다~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다해주었던게 습관이 되다시피~이제 제가 도와줄 차례 이겠죠~
정말 반갑습니다 '
아마 어린 시절 고생을 모르고 사셨다면 좀 이해가 힘들겠지요 '
다시 돌아 간다면 정말 싫은 그 시절 '
아물지 않은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지요 '
고마우신 마음 감사 합니다
이방인의 저자 까뮈, 까뮈의 어린 시절은 처절했다. 그 당시 초등학교의 담임교사는 까뮈의 총명함과 집념을 높이 보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그를 개인 지도하면서 중ㆍ고ㆍ대학에까지 장학생으로 진학시켰다. 다시 대학에서 제2의 스승을 만난 결과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 그는 수상자 대표연설을 낭독한 후 초등학교 은사께 그 것을 헌정하였다. 인생은 결국 너와 나의 만남에 있다. 만남에는 창조적인 만남과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
석현님의 얘기와 까뮈의 얘기가 같은 맥락같습니다.
제가 좋아 하는 까뮈의 일생을 더듬어 보며 좀 마음이 훈훈 해 집니다 '
늘 박식하신 글로 마음의 위로를 주시는 아주 가까우면서도 먼 님의 모습 '
요반 일요일엔 계족산에 찾아가 먼 발치에서 님의 모습 꼭 보려 합니다
대가족이 기거하는 곳이 테크노밸리입니다. 그쪽을 바라보시면 되겠지요, 계족산, 즐겨 찾는 곳입니다. 50대 후반에 이왕이면 살아있는 신화를 이루고자, 공직생활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운영할 (주)대가족 Largy Family.CO.,LTD 기업운영 트레이닝이 어린 애들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석현님 항상 강건하시고 언제 만나뵐 날이 있을 것입니다. 만남, 어쩌면 환상이 깨지는 경우도 있지만,
석현님의 어린시절~긍정과 부정은 한글자
차이이지만 이루어낸 성과물은 말로 다
표현이 안되겠지요...선생님의 말씀을
긍정의 힘으로 받아들이신 석현님의
강직함에 다시한번 삶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귀한 마음 주심 너무 감사 합니다 '
지금 생각 하면 어찌 그런 세월 살아 왔는지 자신이
무척 대견스럽기도 하지요 '
보내 주신 따뜻한 마음 가슴으로 받습니다 '
꼭 행복 하세요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꿈을 이루신 석현님이 존경스럽습니다.
그시절의 시골풍경 빗바랜 사진처럼 애잔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