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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두천의 깜찍한 어린 요정
나는 나이에 비해 일찍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에 사연이 많다면 많은 가수다.
처음 日刊 스포츠에서 스타 스토리를 연재하자고 제의했을 때도 맨 처음 생각한 건 나의 그 많은 사연 들이었다.
올해 나이 33. 걸음마를 겨우 배우면서 시작한 음악생활은 거의 30년에 가깝다. 그 많은 세월 속에 숨겨진 나의 이야기들을
이런 기회를 통해 남김없이 얘기하겠다.
그러 면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은 나미라는
한 명의 가수에 대해 조금 더 알 것이고 나 역시 지금 까지 살아온 나의 삶들을 정리하고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나의 본명은 김명옥. 1956년
지금은 동두천시지만 그때는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이었던
미군부대가 많았던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나의 아버지는 기지 주변에서 조그만 레코드가게 를 운영하고 있었다.
주로 백판이라고 하는 복사판 레코드를 취급했는데,
미국 원산의 음악 을 원판이나 라이센스판보다 훨씬 싸게 살수 있어서 미군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살림하는 집은 가게근처에 따로 있었는데 아주 가까워
나는 걸음마를 배우던 시절부터 밥만 먹으면 가게에 나가 놀았다.
겨우 귀가 트이고 눈이 트일 때부터 당시 유행하던 팝송들을 듣고 자 란 셈이다.
이제 겨우 걷는 녀석이 가게 앞에 설치된 스피커 앞에서
매일 춤을 추는데 하도 깜찍하게 잘 춰서 근방에서는
'명옥이의 똘똘이춤을 모르면 간첩이다'고 했을 정도였다.
춤뿐만 아니라 나는 귀동냥으로 아무 뜻도 모르는 팝송도 따라 불렀다.
아버지는 그것이 딸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 안 하시고 그저 귀엽게 바라보셨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판을 사러 자주 들르던 미군장교 아저씨가 나를 유심히 봤던 것 같다.
그 아저씨는 어느 날 내가 귀엽다면서 아는 노래들을 해달라고 했다.
아마 내가 6살쯤 되었던 때였다.
나는 그때 한창 입에 익어 있었던 <오! 캐롤> <삐빠빠룰라>등의 폴 앵카 노래를 신나게 불렀고,
그 아저씨는 전부터도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내 노래에 감탄했다.
며칠 뒤 그 아저씨는 다시 가게에 찾아와서 이미 부대 주변
미군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는 명옥이를 8군 무대에 올리자고 제의했다.
당시 집안 형편은 어려웠던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한참을 생각하시고 응낙하셨다.
그 아버지의 결정이 내 길고도 험한 가수생활의 시작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평소에 입던 옷보다는 좀더 고운 옷을 입고 8군의 무대들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서서히 동두천 부근에서 깜찍한 어린 요정이 되어 갔다.
밴드와 함께 노래를 부르 면 어느 미군 아저씨가 일어나 모자를 벗어 모자에다가 팁을 받아줬다.
그것이 노래를 잘 들었다는 미국식의 풍속인 모양이었다.
서서히 나의 이름이 알려지자 극장쇼를 하던
동두천의 여러 극장들에서도 출연교섭이 들 어왔고
멀게는 서울의 극장들에서도 쇼를 하자는 제의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쇼의 대중이 극장쇼였던 때라 새로운
가수에 굶주려 있던 극장들의 이런 제의는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 다.
가장 낮게 줄인 마이크에도 키가 닿지 않아
누군가가 뒤에서 들어줘야 했을 정도로 작았 던
나는 정신없이 바빠졌다. 8군 무대,
극장무대 등 어떤 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무대에 오 를 때도 많아졌다.
그러는 중에 취학연령이 된 나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교입학은 나에겐 거의 형식적이었다.
이미 꼬마스타가 돼 있었던 내가 얌전히 학교에서 공부할 시간은 그렇게 많 지 않았다.
지각, 조퇴가 많아졌고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그리 친하지 못했다.
그 친 구들은 매일 노래부르러 정신없이 나가는 나를 좀 다른 사람으로 보았던 것 같았다.
지금 까지도 어린 시절을 같이 보낸 죽마고우가 별로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동두천의 레코드 가게를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했다.
상도동 에 살면서 친구분들과 조그만 페인트 매매사업을
했지만 아버지가 서울로 이사온 데는 나를 좀더 큰 무대에
세우고 본격적으로 뒷바라지를 하겠다는 의도가 강했다.
그런 아버지의 배 려 덕분에 나는 서울의 큰 극장들에서 마음껏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극장무대에서 지금은 원로가수가 된 많은 선배님들을 만났다.
고인이 되신 고복수 선생님, 황금심 선생님,
금서향 등 나의 부모님들보다도 더 나이가 드신 그분들을 나는 아줌 마,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도 어떤 분들은 만나면 그때
깜찍했던 '명 옥이'의 말씀을 하시기도 한다.
그때 나는 몇 편의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남정임씨 주연의
<엘레지의 여왕>과 남진, 윤복희 선배 주연의 <미니아가씨>였다.
특이한 것은 두 영화가 다 이미자 선배님과 윤복희 선배의
음악인생을 다룬 영화였는데 나는 그분들의 어린 시절의 배역을 맡 아 했다는 것이다.
커다란 카메라를 앞에 둔 낯선 분위기 속에서 떨며 노래부르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재미가 있다.
[2] 그룹'해피돌스'로 보낸 월남에서의 2년
중학교에서도 학교를 빠지는 날이 많은 건 마찬가지였다.
워낙 내가 정신없이 돌아다니 다가 한번은 당시
담임이셨던 김상기 선생님이 나의 어머니를 조용히 학교로 부르셨다.
막 상 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공부를 제대로
못하여 평소부터 선생님을 뵐 면목이 없었던
나와 어머니는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선생님 앞으로 갔다.
선생님은 이제 나의 장래를 생각할 때도
되었으니 공부든 노래든 하나를 확실히 결정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그해 여름 나는 언니들과 '해피돌스'라는
그룹을 조직, 유니버셜 레코드사의 주선 으로 월남으로 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부모님들과 떨어지는 것이
슬프기도 했고 더구나 가는 곳이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전쟁터라는 생각에 무섭기도 했다.
공항에 내렸을 때 제일 먼저 사이공에 대한 인상은 무섭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더위 와는 질적으로 다른 끈적끈적하고
습한 열대 특유의 공기가 트랩을 내리자마자 몸을 감아왔 다.
우리는 사이공의 한 가정집을 얻어서 단체생활을 했다.
단체생활 얘기가 나왔으니 말 이지 월남시절을 포함해서
나는 내 사춘기의 거의 전부를 외국에서 단체생활로 보냈다.
해피돌스의 멤버 중 가장 위는 김승희 언니였다.
지금은 미국에서 결혼해 살고 있는 승 희언니는
색소폰과 리듬기타를 연주했는데 제일 맏언니답게 우리들을 리드하고 어려울 때면 잘 도와주었다.
그리고 퍼스트 기타를 맡았던 새침떼기 김승미 언니,
베이스를 맡았던 걸걸하고 남자같았 던 이종숙 언니.
모두가 같이 고생을 해서 그런지 지금도 만나면 형제 이상의 정을 느끼는 언니들이다.
아무튼 우리는 숙소에 여장을 풀던 날부터 바로 일에 들어갔다.
월남 각지에 있던 미군 부대에 위문을 다니는 일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오늘은 다낭으로, 내일은 캄란만으로 차 위에서 자는
날도 많았고 군인들이 비워준 막사에서 자는 날도 많았 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너무 어렸을 때라 피곤한 줄도 몰랐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기겁을 해대던 대포소리도
날이 갈수록 익숙해지고 어디나 전쟁터라면 으레
그렇듯 지저분한 거리 풍경도 차차 정이 들어갔다.
당시 월남에 있었던 미군들 사이에서는
우리를 부르는 별칭이 많았다. 어린 소녀들로 구 성돼 있었기
때문에 베이비 팀이라고도 불렀고 잭슨 파이브의
<벤>등을 잘 불렀기 때문에 코리안 잭슨 파이브라고도 불렀다.
한번은 공연을 위해 돌아다니던 중에 이주일씨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이주일씨는 국군위 문단 소속이었는데 서울에서 극장쇼를 하던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다.
이주일씨는 대뜸 여기 웬일이냐고 하면서
악수를 청했는데 하도 얼굴에 수염이 많이 나고
열대의 태양에 검게 그을려서 하마터면 나는 못 알아 볼 뻔했다.
지금도 이주일씨를 만나 면 그때 얘기를 하시곤 한다.
그땐 새까맣고 조그마했는데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신세가 됐다며.
그런 월남생활에서 가장 그리운 사람은 부모님들이었다.
틈날 때마다 편지도 쓰고 사진 도 부쳐주면서 매번 우리는 같이 붙잡고 울었다.
다들 말쑥한 교복을 입고 사춘기소녀의 꿈들을 꾸며
학교에 다닐 나이에 전쟁터로 날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월남에서 우리가 베트콩이나 대포소리보다도 더 무서워한 것은
거의 생쥐만한 열대의 도 마뱀들이었다. 열대의
도마뱀들은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았다.
담장 위에 올라가 있기 도 하고 마루 밑, 심지어 어떤 때는
침대에서 잠을 깨면 말똥말똥 눈을 뜨고 머리맡에서 나 를 쳐다보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문단속을 하고 도마뱀들이 들어 올만한 곳을
틀 어막았지만 열대의 집들이 기본적으로
허술하게 지어져서 그런지 허사였다.
우리는 속수무 책으로 도마뱀을 볼 때마다 기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생도 많았던 월남생활도 어느덧 2년이 흘러 귀국할 때가 되었다.
덥고 도대체 정들 곳이라곤 손톱만큼도 없게 느껴졌던 월남이지만,
어느 사이에 알게 모르게 정이 들었 는지 막상 떠나려니까 왠지 섭섭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귀국을 미룰 수는 없었다.
73년 우리 해피돌스 5명의 소녀들은 부산항을 통해 그립던 고향땅으로 돌아왔다.
부모님 들은 그만큼의 세월만큼 늙으신 것 같았고 동생들도 많이 자라 있있다.
귀국하자마자 우리 는 곧바로 서울에서 일을 다시 시작했다.
명동의 실버타운이나 라스베가스 같은 클럽에 나 가서
월남에서 고생하며 갈고 닦은 기량을 과시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인기그룹은 히식스, 트리퍼스
등이었는데 우리 역시 그 중의 한자리를 차지하려고
귀향의 감회에 젖을 겨를도 없이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서서히 국내에 다시 우리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또다시 모국땅을 떠나야 했다.
소속사였던 유니버설 레코드사에서 미국으로 들어가
본고장에서 본격적인 그룹활동을 시작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다시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 져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지만 이왕 음악으로 인생의 승부를 걸자고
작정한 며칠의 숙고 끝에 그 제안에 응했다.
[3] 미국 클럽으로의 진출
그해 가을 우리 해피돌스의 다섯
여자들은 다시 가족들 곁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약 6 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족들과 지내던 시간은 꿈같은 것이었다.
다시 언제 만날지도 알 수 없는 이별. 공항은 우리들 다섯 명과 우리를 전송하는 가족들의 눈물바다가 되었다.
우리가 맨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샌프란시스코였다.
한국과도 전쟁터였던 월남과도 전혀 다른 환경과 사람들.
어린 나의 눈에 미국은 모든 것이 풍부하다는 것이 첫번째로 느껴졌 다.
왠지 그 풍요로움이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슬펐다.
그 풍요로움이 문득문득 고국에 있 는
가족과 월남 전쟁터에 버려진 사람들을 생각나게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또 다른 전쟁터였다.
수천 수만개의 밴드와 수십만의 가수들이
돈과 명성 을 위해 날마다 싸우고 있었다.
그 바닥에 막상 나서보니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격이였 다.
첫번째로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호텔 나이트클럽과 2주 계약을 했다.
본바닥에서 의 첫번째 공연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잔뜩
긴장하고 무대에 올라가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 하고 노래불렀다.
전쟁터를 구석구석 누볐던 우리가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연주한지 꼭 닷세만에 우리는 지배인으로부터 공연 중 단요청을 받은 것이었다.
실력이 형편없어 손님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딴 데 가서 알아보라 는 식이었다.
악기를 챙겨서 낯선 거리로 나선 우리는 기분은 그야말로 죽고싶은 심정이었 다.
큰 맘 먹고 음악의 본고장으로 나왔는데 첫 공연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격이었다.
가수 가 음악으로 거절을 당한다는 것은 어느 가수에게나 참기 힘든 일일 것이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고나서는 마음을 다시 굳게 먹었다.
미국에 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을 키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미국에서의 처음 몇달간 은 그렇게 연습하고 미국의 밴드들은 연구하며 보냈다.
참으로 어렵고 외로운 연습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살아남기 위한 연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외진 호텔에서 한적한 고속로변의 모텔에서 우리는 밤낮없이 기타치고 노래불렀다.
그러다가 옆방 손님들의 항의 로 호텔에서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고생스런 연습으로 우리의 음악이 어느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될 무렵 우리는 다시 공연에 나섰다.
연습 덕분인지 이번에는 그렇게 참담하게 쫓겨나는 일은 없었다.
끝이 없 을 것같이 넓은 미국 대륙을 돌아다니며 노래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넓었다. 어떤 때는 공연을 위해 이틀 낮밤을 꼬박
자동차로 이동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동차는 우리가 기거하는 집과 같이 되었다.
우리가 쓰던 차는 스테이션 웨건이었는데 8인승이었다.
8인승이래야 우리 다섯과 운전기 사 매니저가 타면 꽉 들어차기
때문에 악기와 짐을 운반하기 위해서 소형
트레일러를 뒤에 하나 연결해서 다녔다.
그 스테이션 웨건과 트레일러로 우리는 전미대륙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막막한 텍사스의 사막, 뉴욕의 마천루,
바다처럼 넓은 플로라도의 다리 위도 이 스테이션 웨건으로 지나 다녔다.
워낙 그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까 처음엔 신기했던 경치도
나중엔 신물이 나 차에만 오르면 잠자기에 바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마치 현대판 집시같았다.
우리의 생활은 엄격히 통제됐다.
어디를 가나 쇼핑과 캠핑을 위한 약간의 스케줄을 제외
하고는 외출조차 하기 힘들었다.
여자들로만 구성된 그룹이 험한 미국에서 나쁜 소문 없이
버텨내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매니저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아마 플로리다에 있는 한 클럽에서 공연을 할 때였던 것 같다.
말쑥한 키에 콧수염을 기 른 삼십대의 백인남자가 항상
객석 맨 앞좌석에 와 앉아 바보스러울 정도로 넋이
빠져 우리 의 공연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오는 그 사람의 우직스러움이 우스 워
우리끼리는 그 사람을 '삼돌이'라 불렀다.
키 큰
삼돌씨는 드디어 4일째 되던 날 우리의 숙소로 찾아왔다.
꽃을 한아름 안고 승희언니가 묵고 있는 방을 찾아왔지만
문 앞에 검은 선글라스에 팔짱을 기고 위압적인
자세로 서있는 매니저와 운전기사 아저씨의
위세에 눌려 꽃만 가만히 놓고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는 이제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며 깔깔 댔다.
그런데 삼돌씨는 다음날에도 나타나 좌석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것은
이번에는 그의 눈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다.
역시 그날 공연 후 삼 돌씨는 꽃을 들고 호텔 복도에 나타났다.
내 방쪽으로 오려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매니저 선생님의
위압적인 자세에 눌려 꽃만 슬그머니 놓고 갔다.
그런 식으로 우리 멤버 다섯 명 의 방에 꽃을 하나씩
놓고 어느 날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삼돌씨의 정성과
한 여자가 여의치 않으면 바꾸는 단순함. 그리고
자그마한 동양남자들의 위세에 눌려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하는 소심함은
두고두고 우리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우리는 가끔 고향생각이 나거나 가족들이 그리울
때면 모여서 술을 홀짝거리기도 했다. 술을 마실
줄도 몰랐으나 허전한 마음에 마시는 흉내를 내보는 거였다.
어느 한 명이 나가 서 조그맣고 값싼 양주를 몰래 사오면 과자
부스러기를 들고 그 방으로 모였다. 나뿐이 아 니라
다들 술을 마실 줄 몰라서 양주 한 모금에 금방 취했는데
그러다 가족들 얘기를 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울었다.
다 큰 처녀들이 술에 취해
엉엉 우는 모습은 지금 생 각해도 가관이다.
공연의 스케줄이 밀리면서 수입도 자연히 나아졌다.
언니들은 그 돈으로 옷도 사 입고 먹고 싶은 것도
사먹었지만 나는 악착같이 모아서 집으로 꼭꼭 송금했다.
그런 나를 언니 들은 해피돌스 또순이라고 불렀다.
7년이나 미국생활을 하면서 한국에는 한번도 오지 않았다.
오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아도 도저히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가끔씩 편지나 인편을 통해서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한번은 자동차 고장으로 동사할 뻔한 적도 있었다. 미국을
동부에서 서부로 가로지르는 끝없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차가
고장이 난 것이었다. 기사 아저씨가 아무리 응급처치를
해 도 도대체 차는 움직여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도
없고 기름이 떨어져 히터도 가동되지 않았다.
한겨울
그대로 있다가는 꼼짝없이 얼어죽을 판이었다. 몇 개의
헌옷가지와 종이들 로 불을 피우며 버티다가 지나가던
트럭에 의해 가까운 소읍으로 가서 겨우 몸을 녹일 수
있었지만 그때 추위에 떨던 걸 생각하면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집시처럼 오늘은 이리로 내일은 저리로 흘러다니며 노래를
부르면서도 세월은 흘러 서울 을 떠나올 때 가슴도 없는
아이에 불과했던 나도 점점 성숙한 여자의 모습을 갖춰갔다.
[4] 7년만의 귀향
미국생활이 7년째 되던 해,
우리는 특별휴가를 받아 그리운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약 세 달 정도의 기간동안 서울에 머물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해 좀 더 나 은 모습으로 미국무대에 설 계획이었다.
서울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우리는
집에 돌아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서로의 살을 꼬집 어보기도 했었다.
동생들은 얼마나 자라있을까,
부모님들은 또 얼마나 늙어있을까,
집 앞마 당의 꽃들은 얼마나 흐드러져 피어있을까,
묘한 기대와 두려움으로 좀처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78년 가을 나는 미국생활 7년만에
다시 김포공항의 트랩을 밟을 수 있었다. 출구를 빠져 나오니
공항대합실에는 우리 멤버들을 마중하려고 가족들이 가득 몰려나와 있었다.
그 속 에서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의 얼굴을 찾아내자
나는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러나 7년만에 귀국한
나를 어머니, 아버지는 잘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도 정신없이 딴 데만 보더니 내가
끌어안으며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자
그제서야 울먹거리면서
다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네가
정말 명옥이냐 하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보고 또 보셨다.
서로가 오랜만에 만난 복받치는 감정을 겨우 수습하고
집으로 가는 차에 올랐다. 공항을 떠난 차가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상도동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차안에서 자꾸 이상한 말을 했다.
아무 얘기도 없이 실망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가
무슨 소리냐고 자꾸 물어도 그저 밑도 끝도 없이
실망하지 말라고만 말할 뿐이었고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창 밖을 보며 묵묵무답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니 어머니가 집이라고 한 낯선
방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미 상도동의 옛집은 우리 집이 아니었다. 그 집을 팔고
그 옆 시장골목의 한 비좁고 남루한 월셋방에 전 가족이 모여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욱더 나를 놀라게 한 사실은 남동생의 죽음이었다.
내가 미국에서 노래를 하기 에 여념이 없을 때 남동생은
후두암이라는 몹쓸 병에 신음하다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집
을 팔고 집안형편이 어려워진 이유도 바로
그 남동생을 살리려 백방으로 노력한 비용 때문 이었다.
참으로 하늘이 노래지도록
막막한 일이었다. 집에서는
도대체 무슨 엄청난 일이 벌어지 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철없이 미국이나 주유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남동생이 그렇게 되도록 말 한마디 없었던 부모님들이
야속하기도 했다. 그리운 가족들을 만날 생각에 한껏
부풀어 귀국하자마자 나는 이 뜻하지 않은 사태에
어쩔 줄을 모르고 며칠을 울면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며칠을 울고 난 후 나는 같이 귀국해 있던 해피돌스의
언니들과 매니저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곤 담담하게
나의 사정을 얘기하고 출국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이젠 노래를 하더라도 가족들이
있는 모국에서 하겠으며
돈도 벌어 거의 쓰러져가는 집안을 살려야 한다 고도 말했다.
월남, 미국을 거치며 거의 10년을 같이 활동해온 멤버언니들에게는
미안했지 만 다시 미국에 갈 수는 없었다.
[5] 솔로 데뷔와 <빙글빙글> 대히트
막상 혼자 한국에 남아서 가수활동을 시작하려니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집안 형편은 날 로 어려워져 가는데도
나는 귀국하고 몇 달을 아무런 대책 없이 이궁리 저궁리하며 지냈다. 그러다 일단 다시 가수협회를 찾아갔다.
어릴 때 이미 등록이 돼있던 터라
회원증도 다시 받고 또 그곳을 통해서
어디 밤무대라도 취업을 알선 받을 속셈이었다.
가수협회에 계신 분들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으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신 옛날 어린 시절
나를 데리고 이구석 저구석을 돌아다니던
어머니를 알아봤다. 그 덕에 그리 어렵지
않게 회원증을 재발 급받고 몇 군데
소개를 받을 수도 있었다.
당시 타워호텔 나이트클럽에는 <검은 나비>라는 남성그룹이 출연하고
있었는데 마침 적 당한 싱어를 구하고 있다는 소식에
그들의 오디션에 응했다. 그런데 일은 엉뚱하게 벌어지 고 말았다.
오디션 무대에 올라 나는 다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노래를 불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본 또 다른 사람이 같이 그룹을 하자고 제의해 온 것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시에 한국에서 그룹을 운영하고
있었던 이태리인 프랭크 로마노였다.
노래를 끝내고 내려온 나 에게 그는 나의 노래에 매료됐다고
말하면서 한국가수로서는 독특한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칭찬해주며
그룹을 같이 하자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하는 수없이 나는 당초
<검은 나비> 와 같이 노래하려고 했던 생각을 바꾸어 프랭크
로마노 악단의 싱어가 되어 타워호텔로 나 가게 되었다.
타워호텔을 중심으로 다시 국내에서 활동을 하면서 서서히 나의
노래에 대한 소문이 퍼져 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오래 활동하다
돌아온 가수인데 팝을 독특한 분위기로 소화시키 는 능력이 있다'
'외모의 분위기 또한 이국적이리만치 독특하다' 등등이 소문의
내용들이었 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나미라는
가수를 보러 타워호텔로 몰려들었다.
그 소문을 들은, 블루벨즈의 멤버로 프로덕션을 차린 장세웅
선생님이 앨범을 내자고 하 셨다. 이렇게 해서 나의 국내활동
첫 번째 독집앨범을 출반하게 됐다.
<미운정 고운정>을
타이틀로 <영원한 친구> <징기스칸>등의 곡들을 수록했는데
나한테는 어린 시절에 데뷔한 적이 있지만 오랫동안의 외국
생활 후 새롭게 시작하는 진정한 데뷔인 셈이었다.
초조하게 반응을 기다렸다. 맨 먼저 반응은 트롯스타일의
곡이었던 <미운정 고운정>으 로부터 오기 시작했다.
다음은 프랭크 로마노의 곡이었던 <영원한 친구>가 젊은
층에 급 속히 퍼져나갔다. 79년 나는 첫 앨범 <미운정 고운정>으로
당시 가요순위프로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 는 행운을 맞았다
. <영원한 친구>도 젊은 층에서 많이 불리며 대학생들의
응원가로 쓰일 정도로 애창되었다. 그 덕분에 상도동의
단칸셋방에서 이태원의 좀 넓은 전셋집으로 이사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대중을 상대하는
연예인이라서 그런지 전셋집을 얻어 산다는 것이 무척 불편하게
만들 때가 많았다. 밤무대가 끝나면 팬들이 따라오는 때 도
있었는데 내가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들을
내가 따돌리려고 잠깐 피해 들어간 줄 알고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집이 내가 사는
집인걸 알면 무척 고생하며 노래하고 있다고 혀를 끌끌차며 돌아서곤 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연예인을 바라보는
이런 종류의 태도들을 이해할 수 없다. 연예인도 노래나
연기를 하는 직업을 가졌을 뿐 평범한 사람인데 왜 연예인이
전셋집에 살 거나 버스를 타고 다니면 이상하게 보는가.
아직도 우리 나라의 반수이상 국민들은 전셋집 을 살고 있고,
버스를 타며 출퇴근을 하는데도 말이다. 이런 연예인을 바라보는
태도가 하 루빨리 바뀌어야 소신껏 활동하는
건강한 연예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얘기가 좀 다른 데로 흘렀는데 아무튼 그 후로도 열심히
노래를 불러 조금씩 모은 덕에 몇 년 뒤 나는 집 식구들과
함께 새로 장만한 아파트로 옮길 수 있었다.
귀국할 때만
해도 단칸방에서 살던 식구들이었기에 아파트로 옮겨놓고
나서야 장녀로서의 역할을 처음으로
해 냈다는 생각에 마음을 좀 놓을 수 있었다.
82년 나는 박춘석 선생님의 곡 <마지막 인사>를 담은 앨범을 내놓았다.
'비오면 빗소리에 눈물지어요~'로 시작되는 이 곡으로 나는
첫 앨범에서 다져놓았던 인기의 기반을 유지해 나 갈 수 있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나도 가요계의 스타가수 대열에 끼여들었다.
84년 나는 다시 앨범을 내놓을 준비를 했다. 여러 사람에게
곡을 받아 트로트, 댄스 뮤 직 등 여러 장르의 노래들을 담았다.
이때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노래는 <아리랑 처 녀>라는 노래였다.
아마 지금 이 노래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팬들이 보내는 반응은 전혀 딴판이었다. 중심 곡
<아리랑 처녀>를 홍보하기 위 해 형식적으로
판에 끼워넣은거나 다를 바 없었던 <빙글빙글>이 예상외로
대히트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나에게는 조용한
노래보다는 댄스뮤직 계통의 노래같이 더 어울리는 모양이다.
애착을 가진 조용한 노래가 히트했으면 하고 앨범을 내도 언제나
히트하는 것은 정반대로 댄스뮤직 계통의 노래들이었다.
<빙글빙글>은 정말 엄청난 히트를 했다. 어디를 가나 <빙글빙글>의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대개 대학가에서는 댄스뮤직이
외면받기가 쉬운데 이 노래의 음반은 대학가 에서도 엄청나게 팔렸다.
밤늦게 거리를 지나다보면 거나하게 취한 젊은이들이 좀
묘하게 들렸던 내 발음을 흉내내서 '빙그빙그 도고...'
하며 노래부르는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 노래는 그룹 <사랑과 평화>의 키보드 주자이며 편곡과
작곡에 두루 능했던 김명곤씨 의 작품이었는데 독특한
리듬이어서 처음에는 매우 부르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도 가장 사랑하는 나의 노래는 <슬픈 인연>이다.
다행히 이 노래를 오래 기억 하는 사람이 많아 지금도
라디오 방송으로 리퀘스트가 많이 쌓인다는 얘기여서 흐뭇하다.
<빙글빙글>은 KBS TV의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해, 어떤 가요평자가 그 때는 전국이 '빙글빙글 신드롬'에
걸렸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다섯 번째 1위를 차지하고
방 송국을 나서며 나는 속으로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다'라고
생각하며 어릴 적부터 시작 한 음악생활에 대한 감회에 젖었던 기억이 난다.
<가요톱10>의 5주 연속 1위 후 나는 하시 유키오라는 일본
엔카가수의 초청으로 일본에 갔다.
그 가수와 같이 콘서트도
하고 <빙글빙글>의 음반을 일본에서도 출반했다.
일본에 서도 독특한 목소리의 댄스뮤직가수라며 좋은 반응을 보였다.
[6] 국민가수로서의 왕성한 활동
87년 나는 처음으로 팬클럽을 조직했다.
그 동안 팬들에게서 줄곧 은혜를 받기만
해왔지 베푼 적은 없다는 생각에 나를 아껴주는
팬들을 조직해서 서로 같이 대화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그해 여름에는 팬클럽 회원들과 함께
야유회를 가기도 했다. 같이 노래하고
춤도 추고 많은 얘기도 나누었다.
팬들이 하는 얘기들은 언제나 내가
나아 갈 바를 제시해 주었다. 팬들의
의견을 경청한 후 종합해보면 이내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 수로서 어떻게 해야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86년 나는 주한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선정되었다. 일본이나 중국 등 동양권 에서는
호소력 있는 트로트곡의 주현미씨 등이 인기가 있었으나 서양권의
외국인들은 발랄한 댄스뮤직의 나를 좋아하는 듯 했다.
아마 이점은
오랫동안 외국에서 활동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쪽
사람들의 분위기가 몸에 베인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솔로로 활동한지 거의 7년 만인 그해 다시 나의 그룹을 만들었다.
해피돌스의 언니들과 헤어진 이후로 참으로 오랜만에 내
그룹을 갖는 것이어서 감회가 새로웠다.
그 동안 쭉 솔
로로 활동하면서 느꼈던 반주에 대한 욕구의 불만들을
그룹멤버들 끼리의 일치된 호흡으로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도 믿었다. 또한 색소폰
기타등의 연주솜씨들도
과시하고도 싶었다.
멤버는 리더겸 키보드에 노승준씨, 오르간과
싱어에 김애성씨, 기타의 김재천씨, 드럼 황 긍일씨
등 모두가 15년이상 음악활동을 해왔던 베테랑들이었다
. 이들과의 호흡은 이미 그 룹으로 조직되지는 않았지만
리버사이드의 무대에서 각각 출연하면서 많이 다져진 편이었 다.
그룹과 같이 활동을 하면서 음악의 폭을 넓히려고도 시도해 보았다.
그 첫 시험이 <미움인지 그리움인지>라는 곡이었다.
정풍송 선생님의 작사작곡인 이 곡은 트로트곡으로서는 처음으로 빅히트를 했다.
내 목소리가 원래 팝을 하던 목소리라 그런지
같은 트로트라도 좀 세련되고 다르게 들린 다는 중평과
함께 10만장이상의 음반이 팔려나갔다. 나의 음악영역이
넓혀진다는 생각에 어느 때보다도 은밀한 기쁨이 있었다
.
그러면서 처음으로 패션디너쇼를 기획했다. 오랜 외국생활
덕인지 나의 패션은 이색적이 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왕 그런 얘기를 들은 바에야 더욱더 패션으로 나의 이미지를
강조해야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들었다. 마침 디자이너 앙드레
김 선생님의 제의도 있고 해서 패션쇼와 나의 노래가 만나는
이색신춘디너쇼를 갖기로 했던 것이다.
이 쇼에는 나 외에도 8명의 모델들이 같이 등장했는데, 전체
진행은 나의 자전적인 인생 의 스토리를 의상과 노래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지금 이렇게 나의 이야기를 연재하는
기분 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의 지나온 시절들을 쇼로 보여주는
것이라 화려한 패션쇼였는데도
착 잡한 기분에 사로 잡혔다.
다음해 3월 나는 국내에서 가수생활을 다시 시작한 이래
첫 번째 콘서트를 가졌다. 공교 롭게도 바로 그 전날
바로 밑의 여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어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동생 내외는 신혼여행도 못 가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의 공연을 준비하느라 공연준비로 정신이
없었던 사무실에서 초야를 맞은 꼴이 되었다.
라이브 콘서트는 역시
방송과는 달랐다. 내 목소리
한마디 한마디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 을 금방 느낄 수
있어 두렵기까지 했다. 더욱이 2시간이 넘게 혼자
노래를 부르는 것도 웬 만한 체력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벅찬 일이었다.
1부는 신곡을 발표하는 시간으로 했고, 2부는 그 동안의
히트송을 묶어 불렀다. 월남에서 부터 인연이 깊었던
이주일 선배님이 찬조 출연하여 폭소를
선사해 공연을 더욱 빛내주었 다.
기억에 남는 것은 가느다란 막대로 헤어스타일 장식을 했는데
이주일 선배님이 그걸 보고 웬 안테나를 달고
나왔냐며 놀려대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공연을 끝내고는 바로 리비아 근로자들의 위문공연을 갔었다.
사막 한가운데 가설무대를 마련해놓고 더운 모래바람 속에서
공연을 했는데 그런 속에서도 어떻게나 근로자 분들이
열 광을 하던지 무대에서 노래부르던 가수들도
울먹여 노래를 제대로 하지 못했었다.
그 해는 거의 해외동포 위문공연 전문가수가 된 듯 싶었다
. 리비아를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 꼬박 이틀간
비행기를 타고 다시 브라질로 날아갔다.
해외에 나갈 때면 항상 마음이 착잡해졌다. 어린 시절을
주로 외국무대에서 보낸 처지라 해외에 나가면 항상 마치
그때 공연을 하는 듯 착각에 사로잡혀
그때의 감회가 새로워지곤 한다.
그때와 비교하면 그래도 나는 많이 걸어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LA에 갔을 때 옛날 '해피돌스'를 같이 했던 언니들이 찾아왔었다
. 이미 언니들은 미국에서 다들 결혼해 살고 있어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도 서넛씩 데리고 와서 나 에게 인사시켰다.
어떤 언니는 교포사회에서 슈퍼마켓을 경영하고 있었고,
어떤 언니는 현 지 외국인과
결혼하여 평범한 가정을
꾸미고 있었다. 언니들의 하나같은 얘기는 이렇게
큰 가수로 성장한 내가 대견하다는 것이었다.
혼자서도 음악을 계속해 이렇게 큰 가수가 되고 또 아직도 처녀같은
모습이 지금의 자신들과 비교된다며 웃었다. 거의 9년
세월을 같이 보 낸 언니들이라 만나면 언제나 정답고 지금도
한 달에 한 두 번씩은 꼭 편지를 보내줘 고맙기가 그지없다.
[7] 수많은 방송출연과 CF촬영
그즈음 나는 그 동안 같이 살던
가족들과 떨어져 따로 집을 얻어 나와 살게 되었다.
집에 서는 시집가라고 성화였지만 나는
아직도 내 노래로써 해야할 일이 많음을 느꼈고,
낯선 사 람과 마주 앉아 서로를 재는 중매도 끔찍이 싫었다.
결혼에는 뜻이 없어도 따로 나와
독립해서 살면서 노래에도, 내 생활에도
이제는 나만의 분위기로 채우고 싶었다.
가족들이 사는 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마련한 집이었지만 태어 나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나만의 보금자리였다.
그 보금자리에서 많은 꿈을 꾸고 또 생각할 수 있었다.
삼십대가 훨씬 지난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언젠가는 내가 꾸미게될 행복 한
가정을 아련히 그려보기도 했다.
그해에는 유난히 방송을 많이 탔다.
TV에도 자주 등장했고
라디오에서도 나의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워낙 바쁜 방송스케줄에 쫓기다보니
웃지 못 할 실수도 많았다.
어느 날 TV쇼 생방송 때였다.
나는 커다란 검은
벨트로 멋지고 대담하게 허리를 장식했 다.
그리고 <빙글빙글>과 <보이네>등 일련의 나의
댄스뮤직을 신나게 부르고 있었다. 그 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단단하게 죄어놓았던 벨트가 나의 격렬한 몸 동작에
고리가 풀 린 듯, 풀어져 흘러내리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우선 마이크를 잡지 않은 한 손으 로 막 풀어져 튕겨져
나가려하는 벨트 양끝을 거머쥐었다. 당연히 춤동작이
어색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내색 않고 연이어
노래 세 곡을 끝마치고 무대 뒤로
나왔을 땐 긴장으로
등이 흠뻑 젖어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크리스마스 특집 생방송이었다.
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도록 돼있어 눈부시게 흰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무대도 때가 때인
만큼 온통 촛불로 장식돼 있었다.
나는 천천히 꿈속에 보는
...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부르며 무대 를
사뿐사뿐히 내 딴에는
천사같이 돌았다.
그때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방청석에서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내 눈에 띄는 스태프들의 얼굴도 갑자기 새파랗게 질렸다.
처음엔 도통 왜들 그러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낭패인가. 노래하던 중 밑을
보 니 넓은 치맛자락의 한끝에 촛불이 옮겨
붙은 것이 아닌가. 생방송을 중단하고 내려와 불
부터 꺼야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한 척 했다.
한쪽 손으로는 불붙은 쪽 옷자락을 흔들어
불을 끄려고 애쓰면서 겨우겨우 노래를 다 마쳤다.
노래를 끝내고 보니 치맛자락에 붙은 불은 다 꺼져 있었다.
지금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스태프 분들을 만나면
입으로는 노래를 부르면서 한 손으로는
치맛자락을 흔들던
나를 흉내내며 웃는다.
많은 나의 팬들 중에서도 오랫동안 줄곧 나를
지켜봐줬던 팬은 아영이와 현숙이다. 그들 은
극성 팬이라기보다는 가수로서의 나를 아껴주고
적은 일부터 도와줬던 사람들이다.
아 영이는
지금 고등학생이고 현숙이는 벌써 대학에 다니고 있다.
내가 방송 중에 조그만 실 수라도 하거나 의상이 좀
안 어울린다 싶으면 아영이와 현숙이의 득달같은
전화에 혼나야 한다. 85년부터 그들과 이런 관계가
생겼으니 벌써 6년째 접어드는
어느 누구보다도 나에 게 소중한 사람들이다.
언젠가는 나의 의상들을 모아 자선바자를 했었다.
무대에 서는 가수들은
대개 같은 옷을 자주 입을 수
없어 옷이 많이 쌓이게 마련이다.
그런 옷들을 싼
가격에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고자 하는 행사였다.
많은 사람들이 와주어 그 수익금으로 나는
팬클럽의 어려운 회원들 에게 학비를 조금씩 도와줄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CF에 출연했다. 에바스
화장품 CF였다. CF에서 연기는 처음 해보 는 것이라 영
어색하고 떨렸다. 무대에서 카메라를 대할 때는
태연할 수 있었는데 막상 감 독과 스태프가 지켜보는
데서 노래가 아닌 연기를 하려니 몸이 사정없이 떨려왔다.
그래도 화장품 CF라 이미지는 괜찮은 편이었다.
다만
내가 무슨 탤런트처럼 예쁘지도 않은데
화 장품CF에 캐스팅 됐다는 것이 의아할 뿐이었다.
[8] <인디언 인형처럼> 히트로 붐붐을 만나고
89년 3월 나는 나의 제 6집을 냈다.
이제는 나이도 있고 좀 점잖게
노래 부르려고 조용 한 노래 위주로 취입했다.
<인디언 인형처럼>은 취입은 했지만
홍보에도 별 관심을 보이 지 않았고
될 수 있으면 안 부르려했다.
그래서 방송국 PD선생님들이 요구해도 될 수
있 으면 피하려고 했다.
그런데도 점점 <인디언 인형처럼>의
인기가 올라가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방송에 서 <인디언 인형처럼>을 부른 것은 쟈니윤 쇼에 나가서 처음이었다.
그때도 안 부르려 했 는데 자니윤씨가 자꾸
짖궂게 부르라고 해서 불렀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 방송 이후로 어디든지 가면
<인디언 인형처럼>을 부르기를 사람들은 원했다.
거듭 말하지만 가수가 원
하는 것과 팬들이 가수에게
원하는 것은 언제나 달랐다. 라디오에서도 나의 6집 노래들 중 에서
<인디언 인형처럼>만이 흘러나왔다.
가요순위프로에서도 이 노래는 자꾸 순위를 높 여갔다.
그래서 <빙글빙글>이후로 <인디언 인형처럼>은
나의 최대 히트곡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디언 인형처럼>을 계기로 붐붐과 만나게 됐다.
전부터 TV나 소문으로 독특한 춤을 추고 랩도
독특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나는 나의 이 곡을 좀 색다른 패턴으로
보여주기 위해 붐붐에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에는 내 목소리만 들어있던 앨범도
붐붐과 같이 싱글로 다시 취입했다.
이 싱글의
반응은 더욱 폭발적이었다.
나미도 붐붐을
만나서 같이 살아나는 격이었다. 자넷 잭슨의 앨범과 같이
<인디언 인형처럼>만 5번 반복하면서
그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불러 취입했다.
요즘 어디서든 '붐붐이 <인디언 인형처럼>이라는
곡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만큼이냐' 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단호히 50퍼센트이상이라고 대답한다.
그만큼 나는 붐붐과의 이번 작업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는 외모에도 무척 신경을 썼다.
가수란 언제나 자신의 노래와 맞는 이미지를 줄 수
있는 외모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머리는 마치 인디언 추장처럼
라면같이 잘은 웨이브를
많이 집어넣었고 의상도 검은 색이나 흰색
계통으로 활동적이면서도 내 나이에
어색하지 않은 의상들을 택했다.
미스지 콜랙션의 지춘희씨나 유지승 미용실의 유지승씨는
오랫동안 나를 이런 측면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미용실에서 '나미파마'를
해달라고 주문하는 사람 들이 많다고 들었다.
야간업소에서 노래하는 성격도 많이 바뀌었다.
내 노래가 유난히 댄스뮤직이 많아서인 지
전에는 주로 디스코테크에서 노래를 했었는데
처음으로 점잖은 사람들이 모이는 극장식
당에서 노래를 하게 되었다.
극장식당에서도 어쩌면 내가 요란할 수도
있어 숙고 했는가본데 워낙 <인디언 인형처럼>
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 나의 출연을
결정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출 연은 성공적이라는 평가였다. 손님들은
나의 노래를 무척 즐거워해 노래가 끝나고
나면 심 지어 일어서서
박수를 보내줬다.
이런 점은 나도 무척 기뻤다.
나이가 드신 분들도 이제 나 의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가수가 시간이 지나면서 좀 더 자신과 어울릴
수 있는 팬 층을 넓혀간다는 것은
그만큼 즐거운 일이다.
<인디언 인형처럼>의 인기로 여러 군데에서
CF출연교섭이 들어왔다.
라면머리 때문인 지
라면CF도 있었고, 인디언 스타일의 패션 CF도 있었다.
심지어 속옷CF까지 출연교섭이 있었으나
이미지가 맞지 않은
것 같아 거절했다.
그러다 최근 식품CF의 출연교섭이 있었다.
처음에는 식품의 이미지를 전혀 고려해보지 않았으나
주변 사람들이 CF콘티가 재미있다고
출연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해왔다.
콘티는 <인디언 인형처럼>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었다.
제품은 피자. 신제품이었는데, 나 와 함께 출연하게 되는
팀은 붐붐을 흉내내는 꼬마 붐붐이었다.
나는 꼬마들과
함께 개사 된 <인디언 인형처럼>을 부르다가,
오 마이 베이비라고 노래하는 부분에서
오 나의 피자 후랑크라고 외치게 되어 있었다.
결국 재미있는 콘티
때문에 출연하기로 계약했다.
CF로서는 두 번째 나들이인 셈이었다. 꼬마 붐붐이
하도 귀엽고 예뻐서 몇 번씩 내가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스태프들이 애를 먹 었다.
그래도 무대에서
노래부르는 내 본업을 떠난 외도인지라 촬영과 녹음을
끝내면 파김 치가 됐다. 아마 곧 TV에 나올 내 CF출연
모습에 사람들은 얼마나 재미있어야할지
생각 해보면 좀 두렵기도 하다.
[9] 고마운 분들에게
사람들은 내 성격이 좀 순진한 편이라고들 얘기한다.
오랜 외국생활로 국내의 물정도 잘 모르고
또 워낙에 별로 말이 없는 내 성격에서
그런 얘기들이 나오는가 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순진하다기보다는
순진해 보인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부터의
오랜 얘기들을 안으로만 눌러왔기 때문이다.
아마 이번에 이렇게 나의 얘기를 많이
하는 것도 나에게는 스스로
신기하고 대견한 일이다.
또한 곧 또 한 명의 동생을 시집보낼 예정이다.
거의 같이 자라오면서 어떤 때는 친구로
어떤 때는 팬으로 또 어떤 때는 가장 충실한
나의 매니저로 도와줬던
동생들이 떠나면 좀 섭섭한 것도 사실이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생들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동생들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 듯 결혼을 해도 자주
찾아와 주고 나의 일들을 많이 도와주고 있다. 바로 밑에
동생의 남편 되는 사람은 요즘도 나의 일들을 도와주고 있 다.
가족들과 같이 일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내 노래는 워낙 뛰는 게 많다보니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나면 숨이 차다.
특히 TV녹화에 NG가 많이 나면 같은
노래를 서너번 씩 부르는 경우도 있어서 그런 때는
숨차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을 한다.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알겠지만 노래할 때의
내 운동 량이 좀 많지가 않다. 그래서 요즘은 틈틈이
체력관리에 신경을 쓴다. 외국에서도 댄스뮤 직의 가수들은
체력관리에 많은 신경을 쓴다고 들었다.
겉으로
보면 비쩍 말랐지만, 워낙에 어릴 때부터 노래를
하면서 돌아다녀서 그런지
잔병치례 한번 한 적이 없을
만큼 건강한 몸 이
가수생활에 많은 도움을 준다.
앞으로도 부르고 싶은 노래가
너무 많아 건강한
몸이 무 엇보다도 중요하다.
생각해보면 나에게는 사춘기가 없었다.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사색에 잠기거나 단정 한 교복을 입고
단발머리의 꿈을 꾸던 시절이 나에겐 없었다.
대신 낯선 이국 땅을 동료들 과 함께 떠돌며 노래하던 힘든
시절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지금도 마음을 터
놓고 얘기할 친구가 별로 없다. 가수들 중에서도
워낙에 어울리지 못하는 내 성격 때문인
지 친구가 많지 않은 편이다.
그래도 새로운 트롯의 여왕 주현미씨와 제일 친한 편이다.
주현미씨와는 한국일보에서 주최한 미주교포위문공연
때 같은 방을 쓰면서 친해졌다. 나이도 비슷하고 성격도
비슷해 서 둘은 같은 방을 쓰면서 많은 얘기를 했다.
그래서 지금도 명절이나 누구의 생일이 되면 같이 모여 얘기한다
. 비슷한 연배로 같은 일을 하면서 같이 살아가는
친구가 옆에 있는 건 언제나 행복한 일이다.
또 친구들이 있다면 어릴 때부터
같이 고생한 해피돌스의 언니들이다. 나를 빼고는
다 미국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는데 그 언니들이 가끔
보내주는 편지와 전화는
나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언니들은 편지와 전화로 나의 세세한 것들까지 지도해준다.
한번은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받다보니 로스앤젤레스에서
슈퍼마켓을 운 영하고 있는 해피돌스 언니 중 한 명이었다.
너무 놀라서 나는 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다급하게 물었더니 언니는 지금 막내가 나오는
한국의 쇼프로를 봤는데, 어느 대목 에서 춤과 노래가
잘 맞지 않는 것 같으니
다음부터는 조금 바꿔서
해보라는 거였다. 너무 어처구니도
없고 또 고맙기도
하고 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아직까지도 내 옆에 이런
사람들이 있는 세상이 고마울 뿐이었다.
이제 나의 얘기를 끝낼 때가 된 것 같다. 그 동안 참으로
많은 얘기를 한 것 같다.
신문 사의 마감시간에 쫓겨
어떤 때는 제대로 정리해 보지도 못하고 나간 적도 있었고,
어떤 때 는 신문으로 다시 본 나의 얘기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적도 있었다. 많은 분들이
그 동안의 연재를
보면서 전화와 편지로 격려를
해주셨다. 대부분 지금도 나미는
좋은 가수라면서
더 한 용기와 의욕을 주셨다.
처음에 나의 얘기를
연재한다는 것은 좀 두렵기도 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자신 의 살아온 내력을
속속들이 공개한다는 것은 그리 속편한 일은 아니다.
일단 한번 시작한 얘기는 감추
거나 도중에 중단할 수도 없고...
내 얘기가 日刊스포츠에 연재되면서부터는
그 동안 어디를 가나 이 얘기뿐이었다. 미장 원에 가더라도
'그렇게 고생했었다구'하며
이 글에 대한 얘기를 했고
방송국 경비아저씨들 도 '사진이 예쁘다'며 이 얘기를 했다.
한번은 지방공연을 가는 도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비
행기를 탔었는데, 옆 좌석에 앉아있던 분이 스토리를
읽으면서 혀를 끌끌 차던 기억도 난다.
괜히 가슴이
조마조마하고 낯이 뜨거워져서
그땐 정말 몸둘 바를 몰랐었다.
집에서도 가족들이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꼭
전화를 해서 '내가 그랬었냐'고 농 담을 해왔다
. 가족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내가 살아오면서
관계 맺었던 사람들도 옛날의 일들이 다시
기억난 듯 잊지 않고 전화를 해줬다.
모두가 다 고마운 사람들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왔지만 이 글이 연재되면서
그런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절실히 느꼈다.
많은 사람들의 나에 대한 관심, 내 노래에
대한 사랑 등을 다시 절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고마움들로 나는 앞으로도
좋은 가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즐거움 을 주는 노래들을
부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지금까지
댄스뮤직의 형태로 어느 정도
고정된 부분이 있었던
나의 음악세계도 넓혀갈 계획이다.
끝으로 이 글이 연재되도록 노력해준
사람들에게도 감사한다. 매일 원고를 꼼꼼히
정리 해주느라 노력해주신 日刊스포츠의 기자님들,
이 글 때문에 내 집과
신문사를 바쁘게 왔다 갔다한
내 주변의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하고 바로
그런 고마운 분들의 노력으로 나는
성실 하고 겸손한 좋은 가수가 될 것이다.
가끔 나는 꿈을 꾼다. 어린 시절들 어느 초라한
무대에서 노래하던 내 모습이나 막막한 미 대륙의
끝이 없을 것 같았던 사막들 가운데 서있는 모습,
언젠가 음악이 좋지 않다고 낯 선 타국의 업소에서
쫓겨나던 시절들의 내 모습들에서부터 화려한 조명과
수많은 관중들 속 에서 노래하는 지금의 내 모습까지
세월은 참 많이도 흘렀고,
흐른 만큼 내 모습도 많이 변 했다.
그 흐르는 세월들 속에서 나는 성실하고 좋은
가수가 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고, 또한 집
안에서도 훌륭한 장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실패는
있었고 그런 실패마다 좌절도
했었다. 그리고 그런 좌절들은
언 제나 주위에 계신 분들의 배려로써 극복되었다.
지금 나는 무척 행복하다. 내게는 혼신의 힘을
다하며 노력할 일들이 있고, 사랑하는 가 족과
고마운 팬들이 있다.
그리고 계속 일할 수 있을 만큼 또한 건강하다.
이제 연재를 끝마치며 나의 가수생활을 지켜봐주었던
팬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어제 날짜로 연재를
마치려 했는데 한 번 더 감사를
드려야 될 것 같아서 졸랐다.
괜한 지 면을 나의 얘기로 한번 더 낭비하는 것 같아
면구스럽지만 이런 감사의
기회는 나에게 무척 소중하다.
그 동안 나는 나름대로 옛일들을 열심히 생각하고
얘기했는데 끝나는 마당에 다시 한번 읽어보니까
변변치 못한 글 솜씨에 유난히도 두서가 없었다.
아마 이 글을 쭉 읽은 분들은 그래서 나에 대해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의 모든
얘기를 털어놓은 지 금의 나는
무척 후련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그 동안 이처럼 두서없는 글들을 읽어
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나의 얘기를 맺는 다.
첫댓글 예전에 봤었지만..다시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안드레형님 잘 지내시죠?
못보던 누님 사진들도 보이네요. 보이네~~
잘 읽었습니다.
좋은하루 되십시요!
ㅎㅎ 누님쓰신 글에 드레스입고 노래부를때 촛불에 불붙었을때 지금도 기억나네요 MBC 생방송 응원하고 있는데 불붙어서 끔직했었지요 ^^
이글 읽으니 다시한 번 감회가 새롭네요. 그런 힘든 과정을 겪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탄탄한 실력은 요즈음 만들어진 학예회 수준의 가수들은 감히 꿈도 꿀 수 없는 경지가 아닐런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전 87년도 부터 지금까지 방송국부터 나미님과 함께해
이글에 너무 공감합니다^^
잘읽었읍니다 안드레 오빠 ^^(동생회장님)
맞는글도 있고안맞는글도 있긴해요^^
미국에서의활동은 아주인기좋았어요 ,단 ,쫓겨다닌다는것은 오버기사같구요.^^아마..흑인음악과 의차이로
우리와[해피돌스]메니져.사장님의 곡선정 을 잘못한것뿐,이미모든장르의 음악을 다알고 미국을 갔으니까요^^아주 인기가좋아서 오히려 더해달 라 고 하는데가 많았구요 고생?이란것은 모르고 즐겁게 음악생활을 한기억이었어요^^
그리고 나는.귀국하고 해피돌과의 연락은 끈겼고 .그때당시는 전화 하기도 못하거 제가바빳읍니다
그후80년중반 교포 위문공연에서의[잠시] 다시만나 엄청기뻣어요^^나는 다른장소로 공연을위하여 이동.
그후 해피돌언니들과의 연락 은 또 끈겼구요.언니들이 한국방문으로 만난적있었지요 아마 87년쯤?.그후또연락두절..^^
그러다가 세월이 아주많이 흘 러 2011년도에 아들군대있을떼 핸드폰이 발전으로 카톡이라느것이 생겨
나의 번호찾느라 하셨다 하시더라구요 참 반가웠읍니다 얼마전 4월에 해피돌 멤버엿던 큰언니와 친동생언니 가
한국방문으로 하루시간내어 만나즐거웠읍니다.^^
위에글에 해피돌 멤버들 이 저에게 이래저래라 하신적이단.한번도 없었구요ㅡ그져 나,혼자 곡 분위기 에따라 변신을 해왔어요 . 2013 년도의 보여 의곡 도 해피돌 멤버들도 내가준비 하고있다는것을 몰랐어요^^
제가이야기를안했지요 ;;^^
보여곡이너무좋다고 칭찬을 많이해주시고있어요^^ 언니들이 다 좋은분이셔요^^
나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해라 단한번도 하지못하시는 언니들이셔요^^
언니들이 오해하실까 적었읍니다^^
지금도 가끔씩 카톡 들잘하고 있어요^^
오늘은 날씨가 좀시원하네요~
여러분의 응원 으로
항상감사드립니다.
모두들 건강과 행복하세요 ~
방금 안드레와 통화했다가 누님이 글을 올리셨다길래, 지금 이 글을 봤네요. 매일 카페에 오는데 이글을 못봤네요.ㅠㅠ 누님 잘 지내시죠?^^
오래동안 궁금햇는데
오늘차곡차곡글을읽고나니
모든궁금증이풀리네요
저는리비아사하라사막에서뵙고 이제고국경주에서열심히살고잇습니다
다음기회에 사막에서 찍은사진올려..
...cscs님~네 잘지내고있어요 .3년가까히...문리치료 다니고있어요...
스포츠님 리비아...에서...정말 지난리비아공연 생각잊 지앟고있어요 반가워요
모두들~건강행복하세요 기원합니다.
하... 이렇게 나미님과 대화를 할 수도 있는 거였군요.
혹시 이글 보시면 제 인사도 받아주세요. 멀리 뉴질랜드에서
고국과 나미님을 그리워 하는 팬이랍니다.
나이 오십 넘은 지금도 노래방 가면 "빙글빙글"을 부르며 춤도 춘답니다.
어쩌다 살아온 날을 되돌아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나미님의 노래와
함께 떠오른답니다. 가장 행복했고 동시에 가장 아팠던 순간들이 그때였나 봅니다.
늘 건강하시고, 아프지 마시고, 매일매일 행복하시길....
아,,, 다녀가셨군요. 이렇게 연결되어 있는 느낌... 좋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