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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유럽속의 아시아 섬마을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누비다.
글/사진:이종원
유럽속에 아시아인, 마자르족
도나우 강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인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이 떠오른다. 지형적 경계선이 터키라면 정신적인 경계선은 헝가리가 아닐까 싶다.
유럽의 한가운데 자리한 헝가리는 7개 나라와 몸을 맞대고 있는데 게르만, 라틴, 슬라브족들 사이에 외딴 섬처럼 아시아 인종을 이루며 살아오고 있다. 우랄산맥 동쪽 유목민족이 넘어간 '마자르인', 정신적 혈연적 기반으로 유럽한 가운데에서 섬처럼 독특한 문화를 일궈내고 있다. 아마도 수많은 외침에도 동화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마자르정신'에 있지 않을까 싶다. 마자르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거의 하늘을 찌르게 되는데 '마자르인', '마자르 음식', 헝가리 항공사 이름이 '마자르'인 것을 보면 그들의 국가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게 해준다.
그래서일까 헝가리인의 외모는 완연한 서양인으로 바뀌었지만 육감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시조가 주몽처럼 알에서 태어났고, 아이들 엉덩이에 몽고반점이 있으며 이름앞에 성을 쓰고 존대말도 쓴다. '빨리 빨리' 문화가 있고, 매운 음식인 고추를 즐기며, '궁상각치우' 음악까지 있으니 한국인의 정서와 묘하게도 닮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말 타고 가는데 2년이 걸린다는데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우리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니 마냥 신기하다.
우랄산맥을 넘어서 헝가리인들은 우랄산맥 동쪽에서 넘어왔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우즈베크스탄 등이 아니면 몽골과 우리나라까지도 선조일 가능성이 높다. 고려때 헝가리의 조상들이 개성 벽란도에 들어와 비단과 인삼을 샀는지도 모른다.
'Hungary'의 이름에서 보듯 헝가리인의 뿌리가 한때 유럽을 공포로 몰아 넣은 Hun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헝가리인들은 마자르족이지만 10세기 이전의 기록은 다 지워졌기 때문에 그 뿌리야 말로 수수께끼다. 아무래도 훈족의 후예가 아닌가 싶은데 이는 우리 역사책에도 등장하는 흉노족을 말한다. 한무제에 쫒겨 서쪽을 달아났다고 하는데 로마의 멸망을 재촉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긴 부다페스트 시내 곳곳의 청동상들이 거의 말을 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초원을 누비며 세상을 호령했던 북방 유목민임이 틀림없다.
비운의 역사, 헝가리 거대한 산맥을 넘어 유럽 땅으로 와 처음에는 부족국가를 이루다가 이스트반 1세(재위 997~1038) 때 헝가리의 첫 왕으로 즉위하고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임으로써 급속히 유럽화가 진행된다. 그러나 1241년 무시무시한 몽고군이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침략하는 바람에헝가리는 쑥대밭이 되고 만다. 다행히 몽고의 대칸이 죽을 때마다 주둔군들이 썰물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국가 위기를 넘기곤 했다.
그러고보니 몽고라는 나라는 동쪽으로 한반도, 서쪽으로 헝가리까지 세력을 넓혔으니 인류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차지한 나라였다. 서양인을 벌벌 떨게 한 몽고족이 요즈음 한족 트럭에 깔려도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역사란 참 묘하다. 유럽대륙까지 호령한 기백은 사라지고 은둔국가로 바뀐 것이다.
어쨌든 몽고가 물러나자 헝가리는 문화의 번영을 구가한다. 200여년간 건축, 음악 등 르네상스의 행복을 누리다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이 궤멸당하면서 다시 중동의 강자인 오스만 투르크의 말발굽 아래 놓이게 된다. 150년 간 나라 잃은 설움속에 식민지의 삶을 이어나갔고 오로지 마자르 정신으로 버티었다. 그러나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는 투르크군은 오스트리아 빈 앞에서 오이겐공에 의해섬멸당하고만다. 다시 헝가리 쪽으로 후퇴해 밀고 밀리는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전쟁의 고통은 고스란히 헝가리인의 몫이었다. 결국 헝가리 서북부는 오스트리아가, 동남부는 투르크에 분할되는 상황의 놓이게 되는데 분단이 진행중인 우리로서는 동병상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투르크군은 헝가리 땅에서 물러갔지만 그 자리를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한다. 그들은 유화정책이 아닌 공포정치로 헝가리를 통치했다. 주인만 바뀌었지 지긋지긋한 머슴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헝가리인의 마음속에는 늘 독립혼이 일렁이고있었다. 1848년 오스트리아의 힘이 약해지자 헝가리인들은 독립전쟁을 일으키는데 그 위세에 놀란 합스부르크왕가는 꾀를 낸다. 오스트리아는 황제의 칭호를 받고 헝가리인에게 자치권을 주고 간섭하지 않겠다며 유혹한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래없는 'K & K왕국(오스트리아 헝가리왕국)'이다. 그러나 명목상 합병이니 오스트리아의 뜻을 저버릴 수 없는 노릇이다. 제1차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헝가리느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서 서서 싸우다 퍠전국이 되었고 아니러니하게도 전쟁덕에 그토록 원했던 독립을 얻게 된다. 태평양 전쟁으로 패망한 일본 때문에 광복을 얻은 우리네와 흡사한 장면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충돌을 일삼는데 히틀러의 나치 정부 등 극우세력이 득세하자 결국 제 2차세계대전에서 헝가리는 독일과 이태리 편에 서서 또 한번 패전의 맛을 본다. 이쯤되니 헝가리만큼 줄을 잘못 서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전쟁에 개입할수록 수많은 문화유산은 파괴되고 전후 재건의 고통은 모두 국민들 몫이다. 나치가 물러나자 1944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이땅에 깃발을 꽂는다. 또다시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고만다.
좌절과 고통. 마지막 심지마져 꺼질 것만 같은 헝가리였지만 1956년 10월 23일 공산위성국에서는 최초로 반공 반소 시민봉기가 일어난다.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에도 소개되었듯 지구인의 시선은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2주간 봉기로 수만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20만명이 고국을 등지고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결국 마자르인의 궤도에 들어왔다. 1989년 동구권에 개혁의 바람이 일자 헝가리는 그토록 기다렸던 공산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자유세계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헝가리는 유럽의 서쪽을 차지하고 있어 전쟁의 방패막이역할을 해야만 했다. 강대국의 균형이 깨지면 영락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야만 했던 비운의 국가다. 반도국가이기에 시련과 분단의 겪었던 우리네 역사와 흡사한 점이 있다. 2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부다페스트는 70%가 파괴되었고 사회주의속에서 정신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오늘날 유럽의 아시아민족으로 그 정체성을 유지해온 것만으로 대견한 나라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겔레르트 언덕에 올랐다. 잿빛 분위기에 도나우강이 처연하게 흘러가는 모습이 아름답기 보다는 안스럽다. 산전수전 다 겪어 만신창이가 된 내 피붙이를 만나는 기분이랄까
슬로바키아에서 부다페스트를 향해 남쪽으로 향한다. 역시 체코나 폴란드보다 집들이 낡은 것을 보니 경제 수준은 떨어져 보인다.
부다페스트라는 이정표를 보았을 때 웬지 묘한 기분에 휩싸인다. 아무래도 떨어지는 빗방울이 더 센티멘탈하게 해준다.
밀레니엄 기념탑이 있는 영웅광장
헝가리의 첫시작은 영웅광장이다. 마자르가 없어지지 않고 열강틈 속에서 오늘날까지 버틴 것은 이들 영웅들의 힘이 컸다.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 만든 밀레미엄 기념탑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1896년에 조성한 광장으로 중앙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35m 탑위에 서 있는데 오른손에는 헝가리 왕관을, 왼손에는 로마교황의 십자가를 들고 있다.
기둥 아래는 마자르 7족장의 기마상이 탑을 수호하고 있는데 가운데 족장이 수장인 아르파트다. 어느날 가브리엘 대천사가 로마왕의 꿈에 나타나 이슈트반 1세에게 왕위를 내리도록 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그 아래 무명용사기념비가 자리잡고 있고 기념비를 기준으로 부채꼴로 역대 국왕과 독립을 이끈 장군 등 헝가리를 빛낸 인물 14명을 모시고 있다.
연대순으로 인물이 놓여 있어 가장 왼쪽은 건국의 아버지 이슈트반 왕이 차지한다. 아래 부조는 왕관을 받는 모습이다.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방문하면 영웅광장에 헌화를 하게 되는데 김영삼, 김대중대통령도 왔다고 한다.
우리도 왔으니 헝가리에서 기념촬영 한번 해야지
오른쪽은 현대미술관. 신전같은 분위기로
가운데 황금 벽화가
이스트반 왕이 아닐까 싶다.
건물 벽면의 조각
천사같기도 하고....고추도 보인다.
북한의 우방,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전기 버스는 평양의 것을 닮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한때 헝가리 대사를 지냈으며, 전세계를 놀라게 한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북한 여권을 가지고 김승일과 함께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와서 헝가리 북한 대사관이 제공한 승용차로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는 도중 북한 여권을 반납하고 마유미 명의로 된 일본 위조 여권을 받았다고 한다.
버스가 좀 낡아 보인다.
안드라시 거리 파리에 상젤리제 거리가 있다면 부다페스트에는 안드라시 거리가 있다. 영웅광장에서 엘리자베트 다리까지 2.3km, 1872년 당시 외무장장이었던 안드라시 백작에 의해 건설되었다. 그는 파리를 다녀와서 영감을 얻어 길가의 작은 집을 헐어내고 5층찌리 저택을 지어 거리를 만들었는데 오늘날 대로를 형성하고 있다. 극장과 찻집, 펍등이 모여 있으며 헝가리가 낳은 세게적인 작곡가 리스트와 코다이의 기념관도 보인다.
유럽대륙 최초의 전차. 1호선 지하철 유럽대륙 최초의 지하철. 헝가리 건국 1천년을 기념해 만들었는데 지하철 1호선은 영국에 이어 두 번째란다. 헝가리 사람들은 유럽대륙 최초라는 것을 애써 강조한다.
반가운 LG간판
시나고그. 유럽최대의 유대교 예배당으로 양파모양의 탑은 높이 43m. 리스트도 종종 이곳을 찾아 연주했다고 한다.
부다페스트 트램은 노란색으로 2번 노선은 국회의사당 앞을 지나 도나우 강을 따라 달리기 때문에 경치가 수려하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문화유산. 겔레르트언덕
안드라시 대로를 지나 엘리자베스 다리를 건너면 겔레르트 전망대가 나온다. 부다페스트 관광1번지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도나우강을 멋지게 볼 수 있는 포인트다. 강을 중심으로 좌측 언덕이 왕궁이 있는 곳이 부다지역이고, 오른쪽 평지가 페스트지역이다. 부다는 고대 로마의 군사기지로 시작되어 왕궁에는 발굴터가 있으며 페스트는 13세기 이후에 도시를 이루기 시작해서 중세이후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1849년 세체니 다리가 연결되면서 두 도시는 하나가 되었다.
이곳에서는 도나우강 8개의 다리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체니다리를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전망포인트다.
헝가리의 슬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세체니다리 영화 '글루미 썬데이'에서 독일 사업가 한스가 일로나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뒤 글루미썬데이라는 곡을 듣고 다리에서 자살을 시도한다. 그때 식당 주인 자보가 그를 구해내는데 이것이 비극의 씨앗이 된다.
영화 속에서 우울한 음악이 나올 때마다 이 다리가 등장하는데 영화 때문일까 최근까지도 이 다리에서 자살하는 헝가리인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보트가 늘 대기하고 있다고 하는데 헝가리와 한국이 자살 1,2위 국을 다툰다는데 안 좋은 것까지 닮으니 안타깝다.
이 다리의 설계는 헝가리로 귀화한 영국 건축가인 아담클라크가 했으며 부다쪽 원형 광장은 그의 이름을 기념해 클라크 아담 광장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 뒷편 왕궁 터널도 그의 작품이다. 다리는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1949년 11월에 다시 개통되었다.
겔레르트는 순교한 카톨릭 성인의 이름에서 따왔다. 도나우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전망대에 서면 부다페스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며 도나우강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어 '도나우의 진주'라고 불린다.
왼쪽에 왕궁이 보이고 서쪽이 부다, 동쪽이 페스트 지역.부다페스트는 세계에서 6번째로 아름다운 도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나우강 건너 메리어트 호텔과 그 뒤쪽으로 성이슈트반 대성당
확대해보면
엘리자베스 다리 건너 중부유럽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부다페스트. 200만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정면 건물 뒷편이 부다페스트 최대의 번화가인 바치거리
더 북쪽으로 가면 세체니 다리와 국회의사당 그 뒷편머르키트다리와 우리네 여의도와 흡사한 머리키트섬. 우리의 호텔은 그 섬 숲속에 자리한다.
왼쪽으로 부다왕궁과 그 뒷편 첨탑이 마차시성당
흔적 남기기. 접니다.
치타델라 요새
겔레르트 언덕 정상이 있는 요새로 합스부르크왕가가 헝가리를 감시하기 위해 세웠다. 2차세계대전때는 독일이 주둔하여 부다페스트 시내를 향해 포격했던 장소다. 그때 왕궁과 세체니 다리 등 구시가지 대부분이 폐허가 되고 만다. 당시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고 자신을 향해 포격을 가했던 대포를 전시해 놓아 역사의 교훈을 삼고자 했다.
셩벽에 총알 구멍은 당시 격전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다.
종려나무를 들고 있는 탑. 나중에 이 독일군 요새를 소련이 빼앗게 되는데 종려나무잎을 높이 들고 있는 여신상은 독일로부터 도시를 해방시킨 소련군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조형물이다. 여신은 모스크바를 바라보고 있다.
서양에서는 용은 악마로 비유하는데 몽고족을 의미하지 않을까싶다.
자유의 횃불
부타페스트 시티투어
어부의 요새와 부다왕궁 하얀 대리석 건물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제법 넒은 계단을 오르는 재미가 그만. 부다왕궁은 14세기에 만들어졌는데 중부유럽 르네상스의 중심이었으나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으로 피해를 당했고, 다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재건되었으나 19세기 대화재로 소실, 다시 개축되었다가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1950년에 다시 복구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어부의 요새 측면
계단에서 만난 장군상
어부의 요새 광장에는 헝가리 건국의 아버지 이슈트반의 기마상이 서 있다.
왕의 상징인 사자상이 모퉁이에 있다.
이슈트반 기마상과 마차시 성당
화려한 조각이 그만이다.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본 마차시 성당. 그 옆에 건물은 힐튼 호텔이라는데 간판이 보이지 않아 성당의 부속건물인 줄 알았다. 주변에는 뽕나무가 많았다.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의 요새. 고깔모양의 뾰족한 탑 7개가 도나우강을 바라보고 있다. 이는 헝가리 7개 부족을 상징하고 있다. 외적의 침입을 받을 때 시민군은 왕궁의 지켰고 도나우강가에 살던 어부들은 강 건너 기습하는 적들을 지켰는데 그들이 축조했다고 해서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요새에서 바라본 페스트 지역
국회의사당
국회의사당을 가장 멋지게 볼 수 있는 전망포인트인 어부의 요새. 첨탑이 1년을 상징하는365개란다.
내가 묵은 호텔이 있는 있는 머르키트섬
카톨릭과 이슬람의 분위기가 혼재한 마차시 성당
헝가리 건물의 특징이 바로 알록달록한 지붕인데 도자기를 한조각 한조각 구워 붙였다고 한다. 현빈같이 꼼꼼한 장인이 있었나보다. 색깔이 매우 화려하고 독특한데 헝가리 유명한 도자기 회사인 헤렌드가 도자 지붕을 올렸다고 한다. 몇 년에 한번씩 지붕을 교체하는데 내려진 지붕은 판매한다고 한다.
마차시 왕의 명으로 지은 성당으로 왕가의 문장과 머리카락이 보관되었으며 성당명이 되었다. 대관식과 두 번의 결혼식을 거행했다고한다. 측면은 고딕식으로 꾸며졌다.
(참고:부다페스트에는 푸른색 도자기 타일지붕도 있다)
1541년 터키에 점령당하자 교회는 회교사원으로 바뀌어 150년동안 사용되었는데 이때 중앙제단이 모두 파괴되었고 이슬람 고유의 아라베스크 무늬로 바뀌게 된다. 투르크가 물러나자 다시 바뀌면서 바로크 스타일로 개축되었다. 엄숙한 분위기에다 시대의 아픔까지 묻어 있어 마구 어루만져 주고 싶은 성당이다. 5세기에 지은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도 회교사원으로 사용된 것과 마찬가지
더구나 2차 세게대전때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복구하는데 20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슬람과 카톨릭이 분위기가 혼재한다.
내부 전경. 프란츠 오제프와 그의 황후 엘리자베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고 리스트가 대관미사곡을 지휘했다고한다.
이슬람 아라베스크 무늬
독서대. 미사때 저 위에서 성경을 봉독하면 멋질거야.
성모마리아상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이곳에도 역시 장미창
바닥 타일은 화려한 꽃무늬
벨러 3세 부부의 석관
헝가리 황제의 왕관 모조품. 십자가가 살짝 기울어진 것이 특징
중앙제단
황금으로 치장한 중앙제단
삼위일체상은 페스트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고한다.
왕궁극장.폭격으로 인해 2층은 사라졌다고 한다. 전쟁에 상흔이 남아있다.
왕궁극장. 베토벤이 이곳에서 머물면서 월광소나타,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했던 곳.
대통령집무실
헝가리 문장. 비뚤어진 왕관
왼쪽에 '툴루'라는 독수리 모양의 새조각이 있는데 얼굴은 용,몸은 독수리 발톱은 치타로 칼을 잡고 있다. 헝가리의 시조 아라파트를 낳았다고 한다.
세체니 다리에서 부다성으로 올라가는 후니쿨라 레일
고풍스런 부위기로 톱니바퀴가 보인다.
이곳에서도 세체니 다리가 잘보인다. 길이 375m,돌아치와 철자일에 의해 지탱. 이 다리를 만든 사람은 빈틈없이 아름답게 만들었따고 왕에게 보고했는데 만약 다리에 잘못된 곳이 하나라도 있으면 자기가 도나우 강물이 뛰어 들어 죽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고 하는데 딱하나 잘못된 곳이 있었다. 바로 다리입구의 사자상에 혀가 없다는 것이다. 그소리를 들은 건축가는 자살을 했다고 한다.
세체니 백작이 배로 강을 건너서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해야 되는데 날씨가 아주 나빠서 8일동안 강을 건널 수 없었기에 다리를 만들어서 오늘날 다리 이름이 되었는데 당시 현수교 중에서 가장 크다. 초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용료를 냈다고한다. KAL기 폭파범인 김현희가 공작원 훈련 생활동안 부다페스트에 왔었는데 이 사자다리를 건넜다고 자서전에 얘기한다.
부다왕궁 13세기 몽고침입 이후에 첫수도인 에스테르곰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오게 되어 부다지역 언덕에 최초의 왕궁을 지은 것이 부다왕궁이다. 잉어를 들고 있는 소녀상
1930년대 부다왕궁
터키에서 해방시켜준 오이겐 동상,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200년간 터키의 지배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동상. 아래 터키와의 전투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빈의 벨베데레 궁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52cm에 곰보에다 못생겨 평생 싱글이었다고 한다.
끌려가는 터키인의 모습. 발가락까지 생생하게 묘사했다. 자신들을 공포로 몰아세운 터키인들을 지금도 싫어한다고한다.
옷을 벗긴채 끌려가는 터키여인
복숭아를 들고 있는 헝가리 여인,터키여인과 대비가 된다.
왕궁에서 바라본 겔레르트 언덕. 이곳에서 유람선을 탈 수 있다.
세체니 다리
부다왕궁 측면
마자르족의 사냥모습, 왕궁의 분수
뒤쪽 정원에도 오이겐 기마상이 있다.
로마시대 터
세게에서 두 번째로 큰 국회의사당
헝가리 국회의사당 세게에서 두 번째로 크다. 건국 1천년을 기념해 세운 성당으로 외벽엔 헝가리 역대 통치자 88명의 동상이 서있으며 1년 365일을 상징하는 365개의 첨탑이 있다. 총 691개의 집무실이 있으며 카펫의 길이를 모두 합치면 무려 3456m나 된다.
헝가리 국기가 유난히 돋보인다.
19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지배에 맞서 헝가리 독립투쟁을 주도했던 코슈츠스동상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의 배경이 되었던 곳인 코슈트광장. 1956년 소련군의 철수와 헝가리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총탄에 쓰러져간 곳으로 헝가리 민주주의의 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기념비. 1989년 헝가리가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유국가로 태어난 역사의 현장도 바로 이곳이다.
건너편 네프라치 박물관. 역시 아름다운 건물
천장 돔이 화려한 성이슈트반 대성당
기독교를 헝가리에 전파한 초대와 이스트반을 기리기 위한 성당으로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50년에 걸쳐 완공되었다. 탑의 높이는 96m로, 건국의 해인 896년에서 96을 의미한다. 도나우강변의 모든 건물은 시야을 위해 이 성당보다 더 높게 지을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스위스에서온 관광객. 모놀의 점프샷을 전수해줬다. 동방문화전파의 일환으로
박공에 새겨진 성인상. 희브리어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한복음 14:6)'
황금예수상
입구 문. 성인의 얼굴
8천명을 수용하는 거대한 규모로 기둥이 비대칭인데다 육중한데 이는 기둥이 지탱하는 아치가 너무 많기 때문이란다.
하늘을 상징하는 돔. 전체적인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돔은 천체구조를 하고 있다.
성이스트반 왕관. 십자가 비뚤어진 것이 특징. 십자가를 매달고 있는 나사 구명이 비스듬히 뚫려 있기 때문이라는데 원본은 국회의사당에 전시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후 헝가리 의장병이 이 왕관을 소련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군에게 맡겼고 미국 포트녹스에 보관했다가 1978년 항가리에 돌려주었다고 한다.
이슈트반왕의 모자이크
금빛찬란한 내부장식. 대리석과 황금으로 장식
특이하게도 주제단 한 가운데 모신 분은 예수가 아니라 이슈트반왕이다.
(사진:퍼음) 가장 유명한 것은 이슈트반왕의 오른손 미라로 미사가 진행되어 그걸 볼 수 없었다.
돔 내부
꼭대기에 예수가 그려져 있다.
아치와 돔
성이슈트반. 이중십자가는 정치와 종교 2가지를 의미하며 강력한 통치를 상징한다.
돔과 박공
저녁은 칼덴베르크에서
직접 발효한 헝가리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어찌나 맛나던지
구야시. 쇠고기를 넣은 파프리카 스프로 고추를 넣어서 그런지 얼큰한 육개장 맛으로 우리 입에 딱 맞는다. 헝가리에서는 메인 이전에 스프로 먹는다.
집시들의 음악공연.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는 청량제다.
흥겨운 저녁식사를 마치고
도나우강 야경 유람선 밤에 보는 부다페스트는 마약같은 매력. 황금빛 도시는 황홀 그 자체
국회의사당
부다왕궁
세체니다리. 밤을 밝힌 전구의 모습이 체인(사슬)처럼 보인다고 해서 '체인다리'라는 별칭을 얻고 이다. 개선문 2개가 강위에 서 있다고 보면 된다.
세체니다리 전경. 멀리 마치시 교회가 보인다.
부다왕궁 야경.가장 왼쪽에 툴루라는 독수리 모양의 새가 보인다. 헝가리 시조가 서 해의 알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박혁거세 탄생설화와 흡사하다. 동쪽을 향하고 있다.
세체니 다리를 지나며
마찻 교회와 어부의 요시 사이에 있는 건물이 힐튼호텔
왕궁 옆 후나쿨라 조명이 보인다.
세체니 다리 전경
세체니 다리를 지나며
뒤에 왕궁터널이 보인다. 오스트리아로 가는 길이다.
Danubius Thermal hotel Margitsziget호텔. 장기체류 온천 호텔로 풀장과 사우나장을 갖추고 있다.
객실 내부. 4성급으로 시설이 좋다.
머르기트 섬 새벽 산책
새벽 머르기트 섬산책코스.부다페스트의 허파답게 숲이 우거지고 조용한 산책길이 이어진다. 섬의 길이는 2.5km, 폭 500m
몽고의 내습이 두려워 13세기 헝가리 왕 벨라 4세의 딸인 마르기트를 신에게 바치고자 섬에 수도원을 세웠다. 그녀는 이곳에서 일생동안 헝가리를 위해 기도를 바쳤다고 한다. 그후 몽고군이 오지 않았는데 바로 그녀의 기도 덕이 아닐까
수령도 오래되어 5명이 손을 잡을 정도
걷기만 해도 머리가 맑아지는 곳
어찌나 나무가 크던지
머로니에 꽃이 가득
피리부는 소녀
도심속 천국이 따로 없다.
꽃을 밝기 미안할 정도
숲산책로
성당
우리가 묵은 Margitsziget 호텔
머르기트 시게트는 130년의 역사를 가지 요양온천으로 사람들이 호텔 내에서 가운을 입고 활보한다. 나도 해봤지
헝가리 온천
호텔은 온천수영장을 가지고 있다. 남녀 혼탕이며 반드시 수영복을 입고 들어가야 한다. 헝가리 전역에는 1천개의 온천이 잇으며 부다페스트에는 100여개로 헝가리 사람은 일주일에 한두번 온천을 하면서 피부의 탄력을 가꾼다. 관절치료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다. 영화에서 보면 온천에서 체스도 하던데 아침이어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온천을 해서그런지 배가 고파
유리창 닦기
반가운 삼성
공산시대의 잔재. 아파트 여러 채가 붙어 있다.
투보그 그린. 고속도로 휴게소가 맘에 드는 것이 맥주를 판다는 것. 투보그는 헝가리 맥주인줄 알고 샀는데 덴마크 맥주네. 파프리카 양념을 한 감자스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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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아름답지요 몇 년전 남편과 작은 딸과 다녀왔는데 또 가고 싶네요 대장님 행복한 순간들 떠오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 많은 외침에도 살아남아 자유를 찾은 헝가리인들의 정신력에 찬사를 보내고 싶어집니다.
웅장하고 장엄한 유적들이 밤에는 더 환상적이네요. 머르키트섬의 숲 산책로가 마음에 쏘옥 들어옵니다. 대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간만에 출석하여 좋은 공부 햇네여,,,오랜만에 뵙는 대장님두 반갑구여,,특히 가운입은 사진,,ㅋㅋ
일욜에 하는 특별행사가 있기를 매일 기도한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감사. ^^
헝가리...초등학교때 합주부에서 활동했는데..그때 배운곡이 '헝가리무곡'이었는데~~~우리랑 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아시아인의 피가 흐르는 웬지 정감이 가네요. 늘 대장님의 놀라운 ???말쏨씨에(아니 풍부한 지식^^*) 감탄합니다.
정말 멋져요. 제가 가 본곳을 다시 보니 기억이 새롭고 어부의 요생 측면을 못본것 같은데 인상깊었어요. 또 세체니다리는 멀리서만 봤는데 가까이 개선문이 멋지고 야경도 정말 환상적이에요.
대장님의 사진이 훌륭해서일까요? 무엇보다 호텔이 있는 섬의 산책로와 나무들은 보기만해도 산소가 뿜어져나오는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사진이 더 아름다운 거 같아요. 가보고픔에 충동이 이는 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