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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대림절 첫째 주일인 오늘의 본문은 성탄절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오늘 본문은 묵시적이고 종말론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있는데 (21장 5절부터 등장하는 주제) 성탄의 감상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의 대림절 본문은 곧 탄생하실 메시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와의 연관 속에서 다뤄진다. 또한 오늘 본문은 장차 태어날 성탄절의 아기를 이스라엘의 대망의 역사와 연관시킨다.
‘인자’(27,36절)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오랫동안 주석가들은 ‘인자’를 주로 성자의 인성을 표현하는 칭호로 여겨왔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인자’의 주된 의미는 그 반대이다. 인자는 가장 높은 기독론적인 칭호이다. 주석가들은 또한 ‘인자’가 신약성서에서 고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곧 오실 아기를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 누가복음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양 (죽임을 당했지만 이제 왕좌에 앉아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적은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진)의 이미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설교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구원사의 ‘신학적 지형도’를 자세히 살펴보고 예배 참석자로 하여금 과거의 약속들, 대림주일, 성탄절, 종말을 상호 연관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오늘 본문을 근거로 종말에 일어날 일에 관한 시간표를 억지로 짜 만드는 시도는 무리다. 누가나 다른 복음서들이 구약성서의 풍성한 묵시론적 자료들을 활용하였지만 일어날 사건들의 순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성육한 아기의 탄생의 선언과 동시에 일련의 변혁적인 사건들이 (이 변혁적 측면은 오직 충격적인 묵시론적인 이미지의 도움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본문이 갖고 있는 묵시론적인 충격이 전달된 후에야 교인들은 누가의 희망에 찬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다. 누가는 다른 복음서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다가올 위협적 미래를 생생하게 묘사하며, 인자의 오심을 약속으로 표현한다. 더 나가, 누가는 이 단락을 격려와 훈계로 마무리한다. 누가는 그 날에 “하늘과 땅은 없어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심판이 올 것이 확실하지만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다.” (28절)
대림절 1째 주 본문이 묵시론적인 형식과 내용으로 종말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핵심은 이 세상을 포기하는 운명론이나 패배주의, 도피주의가 아니고 ‘희망의 신학’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테르툴리아누스(160-230)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낙원에서 상실되었던 생명과 영원한 구원, 영속적인 기쁨이, 이 세상이 사라짐과 함께 돌아오고 있다. 벌써 천상의 일들이 지상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작은 것에서 큰 것이, 사라지는 것에서부터 영원한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과 걱정이 설 자리는 없다.” 몰트만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나는 희망의 신학을 통하여 기독교인적 희망을 더 이상 저 세상에만 관심을 돌리는 인민의 아편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신적 능력으로 제시하려고 했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활짝 열린 종말론적인 지평을 보게 도와주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대림절 2째 주(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와 3째 주(윤리적이고 종말론적 측면)의 주제를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주석적 관점
▶ 대림절 첫째주일에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에 대해 읽는 것이 이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초림을 기다리는 교회로서 그의 재림을 묵상하는 도 적절하기 때문이다. 21장 전반부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의 다가올 파멸의 징조를 묘사했다. 그런데 이제는 자연의 혼란과 인간의 위기를 동반한 묵시적 드라마의 언어로 바뀐다.
예수가 여기에서 종말에 대해 언급하는가? 아니면 예루살렘의 파괴에 관해 말하고 있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톰 라이트(Tom Wright)는 그의 주석에서 후자를 선호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26절에서 부터 종말과 예수의 재림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의 완 성에 대해 말한다고 보고 있다.1 이 주석가들은 이미지들이 약속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면에서는 후자의 해석에도 동의한다. 따라서 이 본문은 두 가지 차원의 해석이 가능한데, 주후 70년의 사건과 함께 위협적인 마지막 때에 관해 적용될 수 있다.
▶ 자연은 인자의 오심을 격렬하게 표시하고 있다(25-28). 바다가 흔들리고 하늘에 불길한 징조들이 가득하여 사람들은 무섭고 혼란스럽다. 전기 예언자들도 하나님의 심판의 도래를 비슷한 말로 묘사했는데(사13:6-11;겔32:7-8;욜2:30-31), 자연은 혼란 속으로 들어가고, 정치적 군사적 지배는 멸망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후자는 예루살렘의 멸망 뿐 아니라 1세기 로마제국의 정치적 혼란에서 명백해 진다. 그런데 자연의 이미지는 쓰나미나 지진의 막강한 힘과 예측할 수 없음, 그리고 그러한 파괴에 직면한 인간들의 무력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들은 가장 심한 정치적 재난보다 더 큰 재난을 예고하고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 두 가지 주석적 난제가 있다: 27절의 인자의 정체성과 28절의 “구원”의 정의. 인자에 관해서는 단7:13과 병행구가 이 본문을 다니엘의 비전에 비추어 해석해야 함을 제시한다. 단7:13-14에서는 단일 인물로 묘사하는데 비해, 7:18,22,27절의 꿈의 해석에서는 인자가 “가장 높으신 분의 성도들”로서 집단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는 ‘인자’라는 말을 자신을 가리키는데 줄곧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누가의 예수는 성도들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왕국과 함께 성도들의 통치를 도래하게 할 진정한 의인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구원’이란 용어에 관해서는 누가는 바울과 같이 죄의 용서와 형벌에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세상과 부패로부터의 해방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에 종말이 와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에게 적대적인 세상에서 구원을 가져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믿고 굳건하게 살아가야 한다.
▶ 다음 부분에서(29-31) 예수는 그의 청중들이 표지의 의미를 분별할 수 있도록 자연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무화과나무가 겨울이 되면 잎이 떨어졌다가 여름이 되면 잎이 돋아난다. 예수가 말한 표지는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역사 속에서 예수의 재림에 대해 정확한 날
짜를 말한 사람은 다 잘못되었다. 그러기에 믿는 자들은 전쟁이나 자연재해가 빈번하면 예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동시에 예수의 재림이 도둑같이 온다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살아갈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는 이러한 표지들이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반드시 도래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깨어 있어햐 하고 격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가지고 신중하게 살아가야 한다.
▶ 32-33절은 짧은 격언인데, 첫 번째는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예수의 말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의 말의 영원무궁함에 관해서이다. 예수가 말한 이 ‘세대’의 의미에 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다양하지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세대’의 의미는 누가복음에 계속 말하고 오늘 본문의 관찰에서도 볼 수 있는 바 “예수와 그의 말씀에 대항했던 사람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주장은 표지가 처음으로 보여지고 종말이 계시되는 세대로서 더 이상 몇 십 년이나 한 세기까지로 확대되지 않는 그러한 세대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 용어는 여전히 모호하기는 하다. 그런데 33절에서 예수는 그의 말을 권위있고 지속되는 성경말씀과 동일시한다. 비록 연기되고 혼란스러워도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말씀하신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확신은 마지막 부분과 연결되는데, 왜냐하면 버티고 머리를 드는 자신감은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에 대한 믿음에서 온다.
▶ 마지막 부분은 바울의 서신에서의 실천 부분과 비슷한데, 이미 제시된 신학적 기반 위에서 명령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청중들이 심판의 날에 놀라지 않도록 스스로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예수의 제자라고 호의적인 심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모든 사람에게 심판이 닥칠 것이지만 믿음으로 복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앞에 선다는 것은 ‘영원한 삶’을 말한다. 이러한 순종의 삶은 “행함의 의”가 구원을 얻는 것처럼 독립적으로 이루지지 않는다. 도리어 36절에서 보여주는 대로 유혹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인내하는 힘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기도함으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1세기의 우리의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우리들이나 회중들에게도 적절한 오늘 본문의 요점이다: 깨어 조심하라, 기도하며 겸손하라, 하나님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고 가져올 수 있는 세상의 제도로부터 구원을 기다리라.
목회적 관점
왜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종말과 대재앙에 대한 묵시문학적인 비유를 말하는 것일까? 이것은 “성탄절기”의 시작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대림절이 교회력을 그리스도 탄생에 대해 명상하고 회개하며 준비하고 기억하는 일로 시작하기 위한 행복한 사회화의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해도, 오늘 말씀의 불쾌한 그림들을 목회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또, 종말과 시작의 혼란은 성서가 증언하는 독특한 것이다. 그네를 탈 때, 그네가 정점에 있는 것이 진자운동의 끝인지 다음 번의 시작인지, 아니면 다만 멈춰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시대착오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즉석에서 잉태한다. 그것이 상상하는 성경과 생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육적인 방법으로 작용한다. 이 날에 대한 예레미야의 말씀(33:14-16)을 보면 이런 생각은 더 커지게 된다. 재통일되고 번영하는 민족이라는 예언자의 비전을 선포하는 예레미야의 말씀은 대림절에 더 잘 어울린다. 정치적인 음모와 변화하는 운명의 시대에, 예레미야는 편의주의를 충고하는 사람들에게 저항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신실하실 것을 약속하셨고,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이 없다. 물질적으로 패배한 시기에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하나님의 백성의 심장에 새겨져 있다. 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공동체의 방향을 재설정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외로워하고 두려워하는 그들의 심장에 새로운 언약이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 다윗에 대한 기억은 어느 날 다윗의 자손이 왕좌를 복원하면서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신실하셔서 만물을 통해 마음들을 운반하시고 단련시키신다.
그래서 교회는 대림절 첫 번째 주일에 누가복음을 읽는다. 어쩌면 다윗의 자손인 예수의 기원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다. 예레미야의 믿음이 들리는 곳에서 교회는 그것을 쉽게 완성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를 죽이기 위한 계획이 전개되기 직전까지 갈 수 있다. 우리는 예수가 첫 번째 오셨을 때가 아니라 시대의 종말에 두 번째 오실 것을 기대하면서 하신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우리는 단지 준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깨어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공휴일처럼 치장한 도시의 인도, 바쁜 보도”는 없다. 우리는 예수가 더 많은 불길한 징표와 전조를 말해준 것을 듣는다: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서 괴로워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까지도 “흔들릴” 것이며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길한 생각”으로 쇠약해진다. 그때에 사람들은 인자가 큰 권능과 영광을 띠고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것이 끝의 시작과 시작의 끝을 표시할 것이다.
누가는 깊은 성찰을 통해 기독교의 제자직이란 말하자면 중간에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다-예수를 인식하고 예수를 기다리며, 파란만장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심지어 거칠기까지 한 세상의 한 복판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 그의 앞에 서기를 기다리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항상 알지는 못하는 예수를 알아가는 것. “무화과나무를 보라. 여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무화과나무를 보고 시대를 읽어라. 깨어 있으라. 너희의 마음을 진리로부터 산란해지게 하는 것들 때문에 짓눌리지 말아라.” 예수는 두 번째 예레미야가 되어 가르쳤다. “세상은 무서운 곳이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그러니 새벽이 되기 직전, 기이하고 보충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한 밤중에, 그 모든 것들의 한복판에서 기다리라.”
그리고 이것을 가지고 교회가 새해를 시작할 때, 단지 달력으로서가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서, 관계에서, 회중들에서,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가치가 있는 약속에 대한 열망에서, 새롭게 시작하도록 요청받는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신실하고 적극적으로 기다리는 삶을 살라는 초대를 받게 된다. 그들은 마지막 때에 그들을 붙잡아주실 분의 이름을 다시 듣기 때문이다. 진보와 운명 양쪽 모두의 전조들은 시간을 다르게 줄 것이다. 그들은 미래가 오직 우리 손목의 시계가 오른쪽으로 움직여야 오는 것이고, 과거는 교만한 생각이나 상처 난 감정을 위한 소모품보다 나을 게 없다고 말한다-그러나 시간에 관한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작은 이야기보다 더 큰 시간 이야기이고, 낙관주의나 비관주의가 이해할 수 없는 약속으로 가득 찬 의미를 우리 삶에 주는 시간 이야기이다. 이것이 파란만장한 종말론 그렇게 부르고 싶다면-이다. 그 속에서 우리 인생을 살고, 모든 피조물이 현실과 약속의 리듬 안에서 살고 있다.
현실은 이렇다: 어떤 일이 어떤 순간에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어떻게든 모든 일이 모든 순간에 일어날 것이다. 현재를 붙잡아 놓을 수는 없다. 변화는 예언이나 통제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젊잖게 종교에 도전해서 신앙이란 신을 일종의 건강보험 협상으로 바꾸는 기회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행복에 참여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사이에 규정할 수 없는 연결이 있지만, 이런 연결은 정밀한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압도적이 되는, 작동하는 현실이 또 있다. 망가지고 악한 현실 혹은 우연과 은혜의 현실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은 우리를 위한, 사랑할 가치가 있고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건이다. 그것은 선물이다. 누구나 감사만으로 그것을 받을 수 있고, 그것 배후에 있는 약속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실함으로 채우도록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는 향수병도 없고 그림의 떡을 꿈꾸지도 않는다. 억압이나 실패에 대항해서 사표 낼 일도 없고, 권력이나 미덕을 과대평가하지도 않는다. 진정한 희망, 진실한 지식, 진실한 사랑은 예수 안에 있다.
믿음은 약속이라는 미덕에 의하여 현실 속에서 사는 것이다. 목회적인 말로 하는 거짓말이 많이 있다.
설교적 관점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이다. 할로윈 이후 바로 쇼핑 몰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고 캐롤을 틀어왔다. 엄마, 아빠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해 몇 개월간 준비를 해왔다. 이제 이런 사람들이 대림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에 온다. 이들은 아마도 오늘 이 복음서 본문으로 인해 실망하고 당황할는지 모른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한 예수의 이 연설은 두려운 이미지들, 혼란스러운 비유들, 그리고 충격적인 권면으로 가득 차있다.
-대림절 기간은 쇼핑 몰과는 매우 다른 준비를 요구한다. 그리고 바로 대림절 첫 날 복음서는 예배자들이 교회 밖에서 만나는 크리스마스 분위기와는 매우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오늘의 대림절 본문으로 1889년 그의 유명한 그림 “별이 빛나는 밤에” ( The Starry Night) 을 그렸다. 그림은 반 고흐를 유명하게 만든 대담한 색깔과 후기 인상파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 목회자의 아들이었고 일정기간 그 자신 또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전도자였으므로 누가복음 21장의 일부인 이 본문과 친숙하였다. 그 그림은 예수가 묘사한 것과 같은 묵시적인 하늘을 그리고 있다. 거기에는 깊고 어두운 푸르고 검은 바탕 위에 굵은 노란색과 흰색으로 소용돌이치는 구름들이 있다. 또 굵고 밝은 노랑색 달과 매우 빛나는 별들이 있어서 한 비평가는 “불타는 노란색의 로켓들”(rockets of burning yellow) 이라고 표현하였다. 배경으로는 작은 마을이 있고 이 그림의 가장 특징적인 교회 첨탑이 있다. 이 유명한 그림은 각각 다른 반응을 이끌어낸다.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서 두려운 하늘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굵고 아름다운 것들을 또 누군가는 언뜻 하나님의 임재를 본다.
-반 고흐의 위대한 그림처럼 누가의 묵시적인 묘사도 다른 반응들을 이끌어 낸다. 본문이 청중들로 하여금 잘 발견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대림절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보여주는 보물들이 있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원래의 청중들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위를 바라보고 주목하며 준비라고(look up, pay attention, and be ready) 깨우쳐주고 있다. 대림절(Advent)은 “오는 것” (coming) 혹은 “도착” (arrival)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가의 이 묵시적 본문은 대림절이란 두 가지 “오는 것”을 위한 준비를 포함한다고 예배자들에게 말해줄 기회를 준다: 성탄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아기 예수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는 하나님 그리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여기서 두 번째 기다림은 올지 안 올지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오시냐의 문제이며 예수께서는 우리들이 준비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깨어있어서 끊임없이 준비하고 우리의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 사랑하는 하나님에게 두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설교자들과 예배자들은 그 두려운 분위기를 강조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격려와 위로의 특성만을 강조한다. 21세기로 넘어가는 수십년동안 가장 많이 팔린 공상시리즈 작품인 “뒤에 남은 자들” (Left Behind)은 온 세상의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이 시리즈 작품은 종말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며 선과 악이 싸우는 세상 속에서의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다룬다. 이 책들은 뒤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절망감을 주었고 설교강단에서도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누가의 종말을 묘사하는 그림은 이런 두려운 해석을 반대한다. 몇 가지 두려움을 주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누가의 이 대림절 본문은 두려움이나 저주가 아닌 희망과 기대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곧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28절) 오신다. 두려운 모습들 가운데 예수께서는 우리들을 불러서 “일어나 머리를 들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가까이 있기때문”이다. 우리는 누가공동체처럼 사회의 주변부에서 곧 질병과 가뭄과 절망으로 가득 찬 세상에 살고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또한 이 묵시적인 서술에서 깨어지지 않을 희망을 발견한다. 기근, 가뭄, 전쟁, 질병 또 전염병이 여전히 세상에 있고 욕심, 중독, 정신질환, 잘못된 우선 순위등으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깨어있어서 이런 세상을 뚫고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를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그스도의 요청은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이 대림절에 우리를 향한 적절한 부름인 것이다. 깨어지고 상처입은 우리의 자아와 세상은 오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있고 우리는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이 대림절에 시간을 들여야 한다.
-대림절의 기쁜 소식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것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오심이 무너져 내린 우리의 삶, 공동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속에서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무화과 나무 잎이 늦은 겨울에 여름이 다시 온다는 희망을 제공하듯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하신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준다. “일어서서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구원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28절) “ 늘 깨어 있어라."(3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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