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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홍씨(당성홍)인주도령중랑장공파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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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 문화방 스크랩 봉화물야,오록리장암정(藏庵亭)
홍왕식 추천 0 조회 44 13.11.05 20: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장암정(藏庵亭)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 628
(원소재지 : 영주군 북면 오록리)
건 축 주 :  풍산김씨 문중
건축시기 :  1724년(경종 4)
중건시기 :  1980년
소 유 자 :  김재원(관리자 : 김재원)
문 화 재 : 

경북 문화재자료 제150호, 1985-08-05 지정,

 

원경 src

장암정원경....

봉화읍 소재지에서 915번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10여 km 올라가면 물야면 소재지에 이른다.

소재지에서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학교로 뽑힌 물야초등학교 쪽으로 우회전하여 소나무·느티나무 거목들이 우거진 학교 앞을 막 벗어나면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에서 마을 쪽으로 둔덕에 전에 없던 풍산김씨 오록리 터전을 연 입향조 노봉 김정의 추모비가 떡 버티고 서 있다.

풍산김씨 오록문중에서 이 터전을 연 지 300년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김정이 이 마을에 들어올 때, 마을 터를 둘러보니 나무랄 데가 별로 없는데, 좌청룡 우백호 중 좌청룡격인 마을 왼쪽 꼬리가 조금 짧은 듯해서 이것을 보충하기 위해 제주에서 직접 솔씨를 가져와 심으면서 마을의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 이후에 마을이 계속 번창하였다.

지금 마을 앞 물야중학교 입구에서부터 마을 쪽으로 울창한 소나무 숲이 약 100여 m 가량 울울하게 우거져 있는 곳이 바로 솔씨를 심은 곳이라고 한다.

다만 추모비가 너무 거창하여 풍수지리를 몰라도 마을 터로서는 기막힌 명당이라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갈봉산 너른 자락에 넓게 펼쳐진 오록리를 바라보는 즐거움을 심하게 가리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비는 크다고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원경 src

담장 밖에서 본 정면 오른쪽 전경

설명 표지판

정면 src

정면 난간

정면난간..

오른쪽 측면 난간

오른쪽난간..

오른쪽 측면

오른쪽측면..

담장 밖에서 본 오른쪽 측면

오른쪽 측면 위

담장 밖에서 본 왼쪽 측면

내부 가운데 천장

정면 안쪽 왼쪽

왼쪽 방 내부

뒤에서 본 오른쪽 측면 마루

오른쪽측면마루..

뒷면 왼쪽 아래

왼쪽 측면 앞쪽

만축정 src

만축정..

만축정중수기 src

만축정중수기..

만축정상량문 src

만축정상량문..

장암 src

장암..

누정이야기...

장암 김창조는 유연당 김대현의 3남이다.

김대현은 어려서 우계 성혼에게 배웠다.

 그는 보지 않은 글이 없을 정도로 학문이 깊었으며, 특히 반고(班固)의 한서(漢書)를 애독했다고 한다.

 김대현은 장성해서는 영남으로 돌아와 23세에 안동 풍산의 오릉동 종택을 중수 이건하고, 학문에 전념했으며 36세에는 영주에 유연당(悠然堂)을 짓고 이거했다.

그는 학문이 깊고 인격이 뛰어나 중망을 받아 두 차례에 걸쳐 영주 이산서원장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대현은 향병을 모아 안집사(按執使) 김륵(金?)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는 1602년 50세를 일기로 산음현 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대현이 세상을 떠날 때 남은 옷이 없어 고을의 선비 오장, 권집, 박문영 등이 자신의 옷을 벗어서 소렴을 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청렴을 짐작케 해주는 일화이다.
김대현은 자제의 교육에 각별했다.

 그는 유교 도덕이 중심이 된 가훈을 정하여 자녀를 가르쳤고 자식들의 학문 성취에 대해 세심하게 마음을 기울였다.

 가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은 하늘에 뿌리를 둔 것이니,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예법에 알맞게 하고 모든 일 처리는 빈틈없고 상세하게 하고

어질고 착한 행실을 힘써 실천하라.
바른 마음을 근본으로 삼아 신체를 잘 보전하고 학업에 정진하고 재능에 알맞도록 일자리를 마련하여라.

질투하지 말고 욕심 부리지 말라.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 태도를 기르고 참되고 인자한 마음으로 덕성을 기르고 사람다운 행실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 아홉 가지 생각과 세 가지 경계를 잘 지키도록 하라.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먼 이웃에까지 친애하여라. 정직하고 어질고 학식이 많은 사람을 벗 삼도록 하여라.

남의 은혜를 잊지 말고, 원수나 원한을 맺지 말라.”
김대현의 열성으로 여덟 명의 자제가 모두 현달하였다.

그의 아들 9형제 가운데 한 사람만 16세의 어린나이에 요절하고 8형제 모두 사마시에 합격하고,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인조가 ‘팔련오계지미(八蓮五桂之美)’라 칭찬하고 마을 이름 오무동(五畝洞)을 오미동(五美洞)이라 고치게 하고 마을 앞에 봉황려(鳳凰閭)라 편액한 문을 세우게 했다.
김대현의 8명의 자제는 모두 현달하여

학호파·

망와파·

장암파·

심곡파·

광록파·

학사파·

설송파 등으로 분파되어 각기 번성한 일문을 이루었다.

8형제는 안으로 선조의 가학전통을 계승하고, 밖으로는 퇴계 이황의 학맥을 이은 서애, 학봉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봉화,물야,오록에대한이야기...

풍산 김씨의 마을, 오록리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록리는 물야면 소재지가 있는 마을이다.

 봉화읍을 서쪽으로 가르며 북행하는 915번 국지도는 오록리에 이르러 삼계리의 북쪽인 북지리에 이르고, 봉성 쪽에서 뻗어 오른 918번 국지도와 합해져서 오록리까지 올라간다.

오록리에서 그것은 다시 춘양 쪽으로 동행하는 915번 국지도와 부석 쪽으로 서행하는 931번 국지도로 갈라진다.

 바로 그 두 도로의 분기점에 놓이는 것이 오록리이다.
오록리는 아래쪽으로 해발 492m인 만석산이 있고, 북쪽 멀리에는 소백산이 있다.

소백산을 이루고 있는 산줄기로부터 흘러내린 크고 작은 산들이 북쪽과 동쪽, 서쪽을 멀리에서 둘러싸고 있는 곳이 오록리이다.

 오록리에서 가장 큰 동네는 오록장터이다.

이곳은 1949년 물야면사무소가 자리를 잡음으로써 장마을로 성장을 하였다.
산운은 오록시장 남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평산 신씨가 개척한 마을인데 산의 모습이 구름 가운데 신선이 놀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산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오록 시장 동쪽으로 들어가면 송내동(솔안)이 있다.

 골짜기 입구에 연못과 솔숲이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송내라 하였다는데, 연못은 사라지고 없다.

풍산 김씨, 김해 김씨 등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송내에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면 산 속에 넓게 펼쳐진 골짜기가 있다.

이 마을은 뒤쪽으로 갈봉산을 두고 있으며 원래는 오록마을이었는데, 마을 앞에 큰 창고가 자리 잡으면서 창마(창촌)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풍산김씨 김정이 처음 자리 잡은 마을이며, 노봉정사 · 화수정사·장암정 등이 이 골짜기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불기(분포)고을은 냇가에 자리 잡고 있고, 불기 동쪽으로는 송장개마을이 있다.

봉황산 줄기를 깔고 앉아 있는 이 마을은 냇가에 소나무가 줄지어 서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창마의 북서쪽으로는 거롱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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