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 우리나라 경제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부와 집권여당이 다른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국민들의 불안심리를 가중시키고 있는 것 같구요. 盧武鉉(노무현)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와 관련해 「성장」이냐, 「분배」냐에 대해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저는 「분배」보다는 「성장」 위주의 정책에 비중을 두는 것이 現 경제상황에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田允喆(전윤철·65) 감사원장은 『2005년 감사원의 운영목표를 민생경제 회생에 두겠다』고 했다.
田원장은 40년 가까이 공직에 몸담아 오면서 대부분을 경제분야에서 일했다. 그는 18년 동안 예산분야 업무를 담당했고, 공정거래위원장을 세 차례나 지냈다.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예산通」, 「공정거래 정책의 살아 있는 역사」란 수식어가 붙는다. 金大中(김대중) 정부 때에는 기획예산처 장관, 청와대 비서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공정거래위원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기자는 지난 12월1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감사원장실에서 취임 1년을 맞은 田允喆 원장과 자리를 함께했다.
『어떤 질문이라도 좋으니, 편안하게 얘기합시다』
田원장은 기자와 악수를 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田원장은 자신감에 차 있었고, 안경 너머의 그의 눈은 빛났다. 탁자 위에는 일반 담배에 비해 홀쭉한 「에쎄」 담배 한 갑이 놓여 있었다. 마른 체격인 田원장에게 잘 어울리는 담배라는 생각이 들었다.
田允喆 감사원장은 자신이 감사원장이 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2003년 5월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직에서 물러나 제주大 석좌교수로 근무하고 있던 중, 갑자기 盧武鉉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원장 지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盧武鉉 대통령은 당초 尹聖植(윤성식) 고려大 교수를 감사원장 후보로 지명했으나, 국회에서 임명동의안이 부결되자 다음 카드로 田원장을 선택했다.
경제부처들을 꿰고 있는 감사원장
─역대 감사원장들과 田원장이 다른 점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근무한 경제기획원(現 재정경제부), 기획예산처는 종합행정을 다루는 곳입니다. 건교부라든가 교육부처럼 업무가 고유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는 곳이 아니죠. 그렇기 때문에 정부 각 부처의 업무를 대충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이 아마 역대 감사원장들과 제가 다른 점일 겁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시스템」 감사를 강조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시스템 감사란 구체적으로 어떤 겁니까.
『오늘의 행정은 기능별로 업무를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분리를 할 수도 없구요. 교육인적자원부가 담당하고 있는 人材양성 문제를 예로 들어보죠. 人材 양성은 이제 경제발전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 작업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우리 국력을 12위권까지 끌어올린 것은 지하자원이나 자연자원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각 부처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재경부만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교육부는 인력양성을 통해 지원해 주어야 하고, 노동부는 근로 인력이 어떻게 동참할 것이냐 고민하며 힘을 합해야 합니다.
감사원이 과거처럼 어떤 단편적인 결과만 놓고 잘됐다 잘못됐다는 판단을 해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특정 사안에 대해 관련부처의 업무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게 시스템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田允喆 원장은 최근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기업과 개인에 대한 평가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감사토록 지시했다. 그 결과, 신용불량자 350만 명 중에서 4000명이 주민등록번호를 바꿔서 1조2000억원을 대출받았고, 2300명의 신용불량자가 대출받은 상태에서 해외로 이민을 간 사실을 파악해 냈다.
『도대체 금융관련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 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집니까. 저는 다시 행정자치부와 외교통상부, 금융감독원, 전국은행연합회 등에 대한 정밀감사 지시를 했습니다. 부처 간에 정보공유가 전혀 안 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정보 공유 체제만 갖추어져 있었어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게 현재 우리 정부를 움직이는 시스템의 현실이에요』
─감사원장 취임 당시 성역 없는 감사의지를 밝혔습니다. 원장께서 생각하는 성역이란 어떤 부분이고, 그 성역 없는 감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합니다.
『권력기관이라는 것은 대개 청와대나 국가정보원, 국방부를 두고 하는 말이죠. 이 기관들을 두고 성역 없는 감사를 해야 한다는 말이 있어서 나도 의지를 천명했지만 한계는 있습니다. 가령 국정원의 경우 고도의 국가기밀을 다루는 곳이기 때문에 국가안전보장에 관련된 것은 감사할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런 것 외에 회계 감사는 다 합니다.
청와대와 관련해서는 대통령에 대한 문제가 되겠지요. 대통령의 지위는 헌법상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원수로서의 지위고, 또 하나는 행정권 수장으로서의 지위입니다. 외교·국방·국제조약 등 국가원수로서 행한 행위는 통치권상의 문제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감사는 외국에서도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죠. 행정권의 수장으로서 행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감사 대상입니다. 회계 부분이나 위원회 운영에 대해서는 지난 11월 말부터 이미 감사를 진행 중입니다』
─감사원이 청와대 재무감사를 시작한 배경이나 계기가 있습니까.
『국회에서도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위원회 회계 체계가 불투명하고 예산 운영이 방만했다는 것이 계기가 되었지요』
『감사원의 국회 이관은 반대』
─정부 각 부처에 대한 성역 없는 감사를 위해 대통령 직속기구로 돼 있는 감사원을 국회 소속으로 이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저는 반대해요. 왜냐하면 감사원은 헌법에 회계감사와 직무감찰을 위해 대통령 직속으로 두게 돼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 중립성과 직무상 독립성은 보장되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감사원이 국회에 소속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회의 국정 감시활동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감사원이 국회에 소속될 경우 감사원은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정당이 국가 이익을 위해 존재하고 정치발전에 기여한 바도 크긴 하지만 당리당략을 추구하는 데 치중해 왔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여러 정당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에서 감사원이 국회로 들어가면 각 당의 당리당략에 의해 좌충우돌하게 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감사원의 중립성이나 독립성은 지켜지기 힘들 것이고 효율성도 떨어질 겁니다』
─질문을 경제문제로 돌려보죠. 盧武鉉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의 고위 관리들은 『現 경제상황이 어렵지 않은데도, 일부 언론들이 자꾸만 좋지 않은 쪽으로 여론을 몰고 간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원장께서는 現 경제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감사원장에게 경제문제를 물으면 어떻게 합니까. 제가 답변하기가 곤란하네요』
─감사원장으로서의 생각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은 아닙니다. 경제전문가의 입장에서 現 경제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입니다.
『巨視的(거시적)으로 보면 상황이 안 좋은 것은 분명합니다. 소비 및 투자 부문이 좋지 않은데다, 수출까지 둔화되고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개방형 경제체제이기 때문에 결국 세계 경제의 동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美國 경제도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고, 中國도 과열 경제를 냉각시키기 위한 조절 작업에 들어가 있는 상황입니다. 對中國 수출 물량이 전체 수출의 18∼20%인 우리로서는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경기 활성화 위한 代案 없어 답답』
─경기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안이 있을 수 있는지요.
『과거 같으면 內需(내수)시장을 진작시키기 위해 부동산 시장을 좀 자극하거나 카드 사용을 활성화시키는 시스템이 가능했었죠. 지금은 아닙니다. 부동산 시장을 섣불리 건드릴 수 없는 입장이고, 카드 사용을 활성화하는 것도 신용불량자 수가 350만 명이 넘는 상황에서는 힘듭니다.
경제문제의 해법은 어떻게 하면 소비를 늘리고 투자를 활성화하느냐는 것인데, 현재로서는 뭐든 어렵습니다. 경제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업들의 경영 심리를 하루 빨리 안착시켜야 해요. 그 방법 중 하나가 규제완화입니다. 규제완화를 통해 안심하고 투자할 수 있도록 정부는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해야 합니다. 기업들이 앞날에 대한 예측이 가능해야만 안심하고 투자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정부가 노력해야 할 부분이죠』
─국내 실업문제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걱정입니다. 제조업의 경우 개발연대에는 경제가 1% 성장하면 10만∼20만 명의 신규 고용 창출이 가능했어요. 지금은 IT산업이 발전되면서 전통 산업과 IT산업을 접목하다 보니까 경제성장률이 1%라도 오히려 신규 고용은 줄어듭니다.
제조업 분야의 이같은 문제를 서비스업이 메워 주어야 합니다. 서비스업이 차지하는 GNP 비중이 50∼60%에 달하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2004년 말까지 DDA(Doha Development Agenda: 2001년 11월 체결된 새로운 다자간 무역협상) 협상이 완료된다는 것입니다. DDA협상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농산물 시장의 추가 개방과 서비스업 개방입니다.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 문제는 FTA(자유무역협정) 1차 타결 이후 어느 정도 기조를 잡고 있기 때문에 앞이 좀 보이는데, 서비스업은 정말 막막합니다.
우리나라 서비스업은 개발연대에 庶子(서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제조업에 비해 푸대접을 받아 그로 인해 경쟁력이 약해요. 의료 서비스업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국내 재벌 기업의 총수들 대부분이 美國에 가서 진료를 받잖아요』
그의 걱정이 길어졌다.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있을 때의 수치인데, 호주 시드니에 우리나라 유학생이 3만 명이나 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들이 1년에 쓰는 비용을 1인당 최소 2만 달러라고 한다면, 연간 6억 달러에 달합니다. 이 아이들이 시드니에 유학 가서 하는 건 영어공부뿐입니다. 英國·필리핀·캐나다에도 가 있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이들의 數(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교육 서비스가 엉망이라는 얘기인데, 이 상황에서 완전히 시장을 개방했을 때 어떻게 외국 교육기관들과 경쟁할 거냐 이 말이에요. 참 답답한 일입니다.
제조업의 시대는 갔고, 이제는 서비스업을 통해 고용을 창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서비스업에 대한 韓國 청소년들의 의식은 또 어떻습니까. 서비스업은 직장으로 생각을 안 해요. 지금 우리 산업 방향은 서비스업 쪽으로 가고 있는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서는 고용적인 취업으로 생각을 안 한단 말입니다. 서비스업이 2005년 하반기에 개방되면 2006년부터는 경쟁력으로 무장한 외국 업체들이 속속 밀고 들어올 텐데 국내 서비스업은 이렇게 前근대성을 면치 못하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이 과제를 하루 빨리 풀어야 합니다. 교육·의료·관광 서비스 분야에서 우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들여다봐야 해요. 이 문제들을 정말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분배보다 성장에 경제정책 기조 둬야』
─盧武鉉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와 관련해, 분배냐 성장이냐를 놓고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田원장께서는 어느 쪽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청와대에서는 「성장과 분배의 善循環(선순환) 구조를 가지고 가자」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성장을 통해서 내실 있는 분배를 하자는 것이지요. 분배냐 성장이냐 一刀兩斷(일도양단)식으로 盧武鉉 정부의 경제정책 기조를 파악하는 것은 언론에서 주장하는 것이라고 봐요.
개인적으로는,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에서는 분배보다는 성장 쪽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장우선원칙」을 가지고 경제문제를 풀어 나가야 합니다. 분배라는 것은 결국 사회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정책은 지금 상황에서 국가와 국민들이 감내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게 숙명입니다』
─경제전문가들 중 일부는 국내 경제가 위기에 처한 이유에 대해 金大中 정부 시절 무리하게 추진한 카드정책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田원장께서는 공정거래위원장으로 근무하면서, 경제정책에 깊이 관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무리한 카드정책이 현재의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 중 하나입니다.
1997년 말에 IMF(외환위기) 사태가 터져 1998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10%였습니다. 1999년에 와서야 9%의 성장률을 이뤄 IMF 사태를 극복했지요. 당시 IMF 사태를 맞으면서 內需시장은 완전히 가라앉았어요. 30大 재벌기업 중 16개가 무너졌고, 금융기관도 2000여 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금 모으기 운동」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金大中 정부 시절 가라앉은 內需시장을 회복시키기 위해 카드사용을 권장한 건 사실입니다. 직접적으로 권장한 게 아니라 카드를 사용하면 세금을 감면해 주고 경품을 주는 식으로 카드 사용 여건을 만들어 주었던 것이지요. 부동산 시장도 부추겼고, 카드 사용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 주었습니다.
이를 두고 現 경제상황과 연계해, 金大中 정부 시절 경제정책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는 경제전문가들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內需시장을 진작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었어야 하느냐는 게 문제로 대두됩니다. 三星경제연구소의 분석에 의하면, 그와 같은 경제정책을 동원하지 않고,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 경제는 매년 마이너스 20% 성장했을 거라고 합니다. 金大中 정부가 그런 상황으로 이끌었으면 언론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黨과 경제부처가 한목소리 내야
─경제 전문가로서 우리 경제를 되살릴 解法(해법)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제가 앞에서 정부정책의 일관성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어떠한 경제정책을 결정하기 전까지는 黨이 됐든, 청와대가 됐든, 경제부처가 됐든 간에 토론을 많이 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같은 과정을 거쳐 확정된 정책을 추진하는 방식입니다. 黨政 간 협의에 따라 어떤 경제정책이 결정되면, 黨과 경제부처는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목소리를 내면 안 됩니다. 군소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금은 특정 경제정책에 대해 黨政이 합의를 한 뒤에도 자꾸 다른 소리가 나오니까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겁니다. 군소리가 안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 같은 문제나 상황을 놓고 오늘은 이렇게 발표하고, 내일은 저렇게 발표하면 국민들이 어떻게 믿고 따르겠습니까. 黨政협의를 통해 완전히 결정하고 난 다음에는 그것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며 밀고 나가야 합니다』
감사원장실 벽시계의 바늘이 오전 11시40분을 막 지나고 있었다. 조용히 앉아 있던 文泰坤 비서실장이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이제 정말 원장님께서 외부로 나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더 이상 지체되면 정말 곤란합니다.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기자는 文실장의 애원 섞인 목소리를 듣자 미안한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인터뷰를 중단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田원장 얼굴을 쳐다봤다. 田원장은 기자와 비서실장을 번갈아가며 쳐다보고는 『그래, 하는 김에 마저하지 뭐』라고 했다. 감사원장이 기자의 손을 들어준 순간이었다.
─38년 동안의 공직생활 중 어떤 일이 가장 기억에 남았는지요.
『기억에 남는 일이 몇 가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얘기하자면, 자칫 특정집단의 좋지 않은 점이 드러날 우려가 있습니다. 자랑 삼아 말을 하고 싶지만, 참지요』
田允喆 감사원장은 공직생활 중에 어려웠던 일에 대해서는 몇 가지를 얘기했다.
田원장은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보통 5년 걸리는 서기관 승진을 8년이 지나서야 했던 일과 국장 승진 인사에서 이유 없이 두 번씩이나 밀렸을 때에는 정말 가슴 아팠다』고 했다. 田원장은 1급 승진 때도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위기를 넘긴 일과, 경제기획원 기획관리실장으로 근무한 1994년 당시 조달청장으로 내정됐다는 통보를 받고 취임사까지 준비를 했으나 번복됐을 때에는 너무 괴로워 공직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고 했다.
田원장은 『한번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부터 해양수산부 차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다음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번복되는 등 공직생활을 하면서 인사상 불이익을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원칙」을 지키는 게 공직생활의 비결』
─田원장께서는 金泳三·金大中 정부에서 장·차관급 기관장을 지냈고, 盧武鉉 정부에서도 감사원장에 임명되었으니 官運(관운)이 좋은 것 아닙니까.
『다른 사람들은 제가 정부 기관장을 일곱 차례나 지냈다는 사실만으로 官運이 좋다고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난 공직생활을 되돌아볼 때, 고비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기자가 田원장에게 『공직생활을 해오면서 그 많은 고비를 어떻게 넘겼느냐』고 물었다. 田원장은 『첫째도 원칙이고, 둘째도 원칙』이라면서 유달리 「원칙」을 강조했다.
『모든 일이나 행동을 원칙대로 하는 것이 가장 속이 편해요. 저는 과장·국장을 하면서 장·차관들한테까지 대든 일이 있었습니다만, 그렇게 살아온 것이 기관장을 7차례나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고교시절 떠올리면 아픈 기억뿐』
─어릴 때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가 6남매였는데, 지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늘 아프셨다는 것 외에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어요. 공부는 좀 했습니다. 중학교(목포 유달中) 3년 내내 수석을 했고, 목포高를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어요. 당시 목포高는 매년 40명씩 서울大에 합격할만큼 지방 명문이었어요. 중학교 수석 졸업에 고교도 수석으로 합격하니까, 목포高 교장이 어머니를 찾아와 「3년간 학비를 면제해 주고, 용돈까지 줄 테니 서울로 보내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저는 촌놈이라 서울로 올라오고 싶었어요. 서울高와 경기高의 입학원서를 써 서울로 올라왔지요. 원서를 어디에 넣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먼 친척이 서울高를 권해서 그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입니다』
서울高에 입학한 田允喆은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배달 등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저의 학창시절은 무미건조했어요. 흔히 국민학교·중학교는 천진난만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고, 대학 때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착하다 보니까 정신없이 지나간다고 하죠. 그에 비해 고교생활은 꿈과 낭만이 있고 野性(야성)과 理性(이성)이 공존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크게 지배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저는 고교시절을 떠올리면, 아픈 기억만 있지 「행복했다」거나 「화려했다」는 기억은 없어요. 대학 축제에 단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습니다. 糊口之策(호구지책)을 위해 시간만 나면 과외를 해야 했지요』
기자는 『「핏대」라는 별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조선일보에서 먼저 그 같은 별명을 붙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아닙니까? 그 뒤 일부 언론에서는 「핏대」를 한자어로 바꿔 「血竹(혈죽)」이라고 표현하기도 했구요. 기자들에게 아무리 쓰지 말라고 해도 자꾸 쓰니까 이제는 자포자기 상태에 있습니다.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지, 저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제 별명을 언급하지 않으면 서운할 때도 있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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