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철학 동양철학(4)
이상은, 김경탁 두 노교수님 떠나신 자리에 국립대만대 철학과에서 강의하시던 김충열 교수님이 오셨다. 김교수님은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주렴계, 소강절, 장횡거, 주회암, 육상산, 왕양명 등 송대이학(宋代理學)과 왕선산 등 청대철학(淸代哲學)을 강의하셨다.
첫 강의 스타트 장면이 멋있었다. 칠판에 한시 하나 적어놓고 시작하시는데, 일필휘지 글씨체도 명필이거니와 시 내용도 사람 넋을 빼놓을만 했다. 자신의 아호(雅號)도 소개하셨는데, 춘곡(椿谷), 청광(淸狂), 허주(虛舟)란 호다. 춘곡은 동백꽃 피는 골짜기란 뜻으로 일찍 타계하신 어머님 그리워 만든 것이고, 淸狂은 장모님과 관련있는 호다. 한국 유학사상의 거목인 스승은 젊은 시절 이 세상의 상식과 가치관을 하찮게 보고, 유별난 짓 많았던 모양이다. 왕후 집안의 몇 대 후손이라 하셨다. 장모님은 이런 스승을 볼때마다 ‘미쳤다’고 하셨고, 그러자 스승은 ‘나는 미쳐도 맑게 미쳤습니다’라는 뜻으로 청광(淸狂)이란 호를 쓰신 것이다. ‘맑게 미쳤다’는 표현은 초나라 굴윈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굴원은 탁하고 흐린 세상에 자신의 고결함을 더럽힐 수 없다며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세상을 하직하였다. 허주(虛舟)는 ‘마음을 비우고 흐르는 물결에 빈 배처럼 흘러간다’는 뜻이다.
나는 굴원의 고사가 담긴 청광(淸狂)이란 호가 맘에 들어, 교수님께 그 호를 내게 하사해주실 수 없으시냐고 당돌하게 요청했다. 보통 사람은 맑게 미치던 흐리게 미치던, ‘미칠’ 광(狂)자 들어가면 좋아하지 않는다. 교수님은 광(狂) 자 든 호 좋아하는 자기처럼 파격적인 제자 좋게 본 모양이다. 그 제자는 당시 과에서 유일하게 동양철학 전공하던 학생이다. ‘호는 스승이 제자에게 물려주는 것이 의미있다’시며, 즉석에서 호를 양도해주셨다.
중용(中庸)
중용(中庸)의 저자는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라는 설 있으나, ‘대학(大學)’과 마찬가지로 예기(禮記)에 수록되어 있던 것을 후세에 분리하여 하나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정호, 정이 형제가 논어, 맹자, 대학과 함께 사서(四書)로 구분하여 연토(硏討)하였고, 이것을 참고로 주희(朱熹. 주자)가 '중용장구(中庸章句)'를 만들었다.
중용은 철학적 표현이 많아 4서(四書) 중에서 어렵지만, 한마디로 표현하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평상심으로 도를 지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주희는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중(中)이란 치우치지 않음이요, 용(庸)이란 바뀌지 않는 것’이라 했다. 또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하였다. 道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니, 떠날 수 있다면 道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보이지 않는 바를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고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삼가는 것이다(故 君子愼其獨也) 하였다. ‘중용에서는 성(誠)을 제일 중요시 하며 이는 천지의 법칙으로 하늘의 도인 동시에 사람의 도로서 지극한 정성을 나타낸다’ 하였다.
또 중화(中和)란 개념을 내놓아, ‘희로애락이 발(發)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하였다. 또 ‘中은 천하의 대본이요, 和는 천하의 달도니라’(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하였다. 또 ‘中和에 이르게 되면, 하늘과 땅이 제 자리에 있게 되고, 만물이 자라게 된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하였다.
나는 성격이 좀 별난 데가 있다. 청광(淸狂)이란 호를 물려주신 스승님을 잘 따랐고, 스승님도 자신이 소개한 漢詩를 모두 외우고다니는 복학생에게 관심 많았다.
훗날 일이지만, 나와 같은 63학번 동기 송모는 프린스튼에서 박사 학위 받고 경북대에서 교편 잡았고, 김모는 모교 학위로 조치원 캠퍼스에서 강의했다. 권모는 아테네 국립대학교 철학박사 학위 얻어 모교서 강의했고, 안모는 영국서 학위 받아 성공회 신부 되었다. 복학생인 나와 같이 공부한 3년 후배 김모도 하바드서 박사학위 얻어 모교에서 강의했다.
교수님이 삼양동 자택에 불러 막걸리 대접하며 은근히 장래 일을 묻기도 하셨다. 그런데 나중에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 될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다 된 죽에 코 빠트린 격이다. 학교에만 남았으면, 싸리나무 그늘에 누운 개 팔자 될 놈이 딴데로 눈 돌리고 있었다. 아껴주시던 김경탁 교수님 타계하신 후 나는 학교가 싫었고, 김충열 교수님 호의에 별 관심 없었다. 나는 그후 선(禪) 공부하겠다며 불교신문으로 가버렸고, 교수님은 후에 서양철학 전공이던 김용옥을 타일러 대만대로 보냈다. 그는 거기서 석사 학위 받고, 하바드서 박사 받았다. 지금 생각하면 다 운명이다. 한번 발동 걸린 이상, 전학년 장학금 받은 사람이 같은 대학 박사 학위 뭐가 어려운가. 한번 얻어놓으면 그 타이틀 평생 간다. 지금 날 샌 올빼미 신세 되어 생각하니, 그때 왜 그런 생각 못했을까 싶다.
그런 일도 있고하여 훗날 나는 교수님을 자주 찾아뵈었다. 교수님이 고려대 대학원장 은퇴하신 후 고향인 섬강 상류 간현유원지 근처 계실 때다. 나는 속초 아남프라자 백화점 대표 그만두고, 동우대 여대생들에게 비서학 강의하던 때다. 서울 올 때면 대포항에 가서 꽁치나 고등어 두어 상자 차에 싣고 스승 댁 방문하곤 했다. 강변 2층에 수많은 중국어 장서 소장한 서재 짓고, 시 쓰시며 유유자적 하시던 스승님 매운탕집 모시고 가서 산천 풍수 읊기도 했고, 내가 속초에서 쓴 漢詩 ‘한계령’ 품평을 듣기도 했다. 서도 하던 친구 이모 장군 데려가 인사시키기도 했고, 넓은 뜰에 심으시라고 차나무 구해가기도 했다.
한번은 스승님이 중국 학술대회에 초청받아 갈 때 만든 명함 한 장을 보여주셨다. 명함엔 달랑 대한민국 김충열이란 두 줄만 적혀있었다. 대한민국 국호와 본인 이름만 써놓은 그 뱃장이 새삼 존경스러웠다. 인간 사유의 핵심 철학 통달한 학자보다 천하에 더 높은 사람 어디 있는가.
스승은 기업 경험이 있는 나에게, 원주 모 대학 이사장 초대 받았다며 수락 여부 묻기도 하셨고, 총각 자제분이 운영하던 그곳 ‘고려승마원’ 운영을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셨다.
‘을한이나 용옥이는 연락 자주 옵니까?’
물어보니, 진주고 후배인 을한이는 자주 연락 온다고 한다. 을한이 주선으로 스승님이 잠시 진주 내려가 남명학연구소 기틀 잡아주고, 정식으로 학계에 소개하셨다고 한다. 스승은 일찍이 1960년대 한국철학사에서 처음으로 남명사상을 비중 있게 다룬 남명학의 1세대 학자다.
용옥이는 소식 없다고 했다. 그는 생물학과 편입생으로 서양철학 전공하던 그를 스승님이 타일러 대만 유학 보내셨다. 동양철학의 핵심이 忠과 孝인데, 신문에 이름 좀 나자 왕자병 걸려 연락도 없는 제자 이야기하며 스승님은 좀 쓸쓸한 표정이셨다. 그래 내가 웃으며 ‘그때 선생님이 도올(檮杌)이를 구해주지 않으셔야 했다’며 옛 일 말씀 드렸다.
그 시절 도올이가 나에게 된통 당한 적 있다. 그는 데모 선동자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박대통령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존경한다. 의견이 달라지자, 그는 복학생 선배를 중앙정보부 끄나풀이라고 비난했고, 그때 미식 축구 선수 출신 선배가 그를 가만 두었겠는가. 일방적으로 당하던 도올이를 그때 급히 강의실에 나타나 구해가신 분이 교수님 이다. 원래 도올(檮杌)은, 본인 해설에 의하면, 중국 고대 악수(惡獸)의 하나다. 호랑이 닮은 몸에 멧돼지 같은 큰 송곳니를 가졌다고 한다. 거만하고 완고한 성격으로 매우 난폭하여 마음대로 마구 설쳐대며 싸울 때는 퇴각을 알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싸운다고 한다.
2008년 조선일보에서 ‘동양 철학계 원로 김충열 교수 별세’라는 부음을 보고 찾아간 안암동 고대 병원에서 사모님을 뵈었다. 노부인께 인사 올리니, ‘아! 권박사 친구분이시지요?’ 권창은 교수 이름 들먹이며 알아보신다.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쳐갔다.
철학과 동창회 서울모임에 오시어 제자들과 어울리다가 2차 밤 12시 넘도록 쾌음하시고 삼성동 우리집에서 자고가신 일, 이튿 날 아침 해장 드신 후, ‘아차 오늘이 박사 과정 면접 날인데 큰일 났다!’시던 일, 선생님 자제분 혼사에 내가 kAL 사장 비서이던 진주고 선배 따님 소개한 일, 불초 제자 딸아이 결혼식 때 원주에서 서울까지 오신 일, 내가 황송한 나머지 후배 차를 수배하여 스승을 원주까지 모셔드린 일 등 에피소드를 사모님도 기억하실 것이다.
청광(淸狂) 김충열(金忠烈) 선생님! 흔히 그 분을 周易과 老子의 제1인자로 기억하지만, 제자를 마치 친구인양 바다같이 넓은 아량으로 따뜻하게 품어주신 인품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 드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