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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河南)지방의 이동(移動)과 변천
○ 하남(河南). 하 북(河北)!
위의 두 단어는 대륙(大陸)사에서 수없이 등장(登場)하며, 조선(朝鮮)사에서도 간혹 등장(登場)하는데, 수도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漢江)”건너에 “강남(江南)”이 아닌 “하남(河南)”이 있다. 본인으로써는 왜 그곳이 “하남(河南)”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理由)를 짐작할 수 없다.
● 역사서 원전(原典)을 보면,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하 북(河北) 지민(之民) 》이라 하였다.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하 북(河北)의 백성(百姓)이라 하였으니, 하(河)의 북쪽 땅에서 나왔다(시원 한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하 북(河北)이니, 하남(河南)이니 하는 곳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단 『반도(半島) 땅에서는 “하 북(河北)지방이니 하남(河南)지방이니 하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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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漢江)에 대한 백과사전을 보면 :
한강(漢江)은 강원도 태백시의 <검 룡 소>에서 발원하여 <황해>로 흘러가는 강이다. 고어(古語)로는 아리 물【또는 아리 수, 아리가람】이라고도 부르며, 발원지부터 <동 대천>과의 합류지점까지의 구간은 <조양 강>, <동 대천>과의 합류지점부터 <평창강>과의 합류지점까지의 구간은 <동강>, <평창강>과의 합류지점부터 양 수리까지 구간은 <남한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삼국시대 초기에는 <한강>을 한반도를 띠처럼 둘렀다는 뜻으로 <대수>라 불렀다. 그리고 고구려는 <한강>을 <아리 수>, 백제는 <욱 리 하>라 했고, 동진과 교역하기 시작한 후에는 <한수>라 불렀다. 신라는 <한강>의 상류를 <이하>, 하류를 <왕 봉 하>라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때 <한강>을 <한산 하>, <북독>이라고 했다. 고려시대에는 <한강> 유역 대부분을 양광도가, 그리고 북한강 유역은 교주도가 관활했고, 지방 3경 중 하나인 남경과 12목 중 광주 목, 충주 목, 청주목이 있었다. 당시 <한강>은 물줄기가 맑게 뻗어 내린다하여 <열수>라 했고, 모래가 많아 <사평도>, <사리진>이라고도 불렀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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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백과사전에서 언급한 한강(漢江)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읽어보니 헷갈리는 부분이 아주 많다. 예전에 설명한 글 중에서 이런 것이 있다.
동국이상국전집 제6권 / 사평 진 (沙 平 津)에서 자면서
<노는계집 몸치장하니 거의 기생인 듯 / 遊 女 冶 容 多 效 妓 / 사는 백성들 머리 깎으니 반은 중이구나 / 居 民 祝 髮 半 爲 僧 / 강이 들레니 비로소 조수 소린 줄 알겠고 / 江 喧 始 識 潮 聲 漲 / 땅이 더우니(땅이 열이 있으니) 장기를 어찌 견디랴 / 地 熱 那 堪 瘴 氣 蒸>
이 시(詩)에서 말하는 사평 진(沙 平 津)은 위 백과사전에서 말하는 <사평도> 또는 <사리진>을 말하는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사평 진>은 바로 현재의 한남대교(漢南大橋) 남단(南端)을 고려(高麗) 때에 <사평 진>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이 “장기(瘴氣) 또는 장독(瘴毒)”에 관한 것이다. <탐라(耽羅) 곧 제주도(濟州道) 역시 장독(瘴毒)을 머금은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기(瘴氣) 또는 장독(瘴毒)>은 습하고 더운 지방에서 생기는 독기이며, 풍토병(風土病)이다. 우리나라 즉 한반도에는 이런 풍토병은 없으며, 대륙(大陸)의 장강(長江) 이남(以南)지역의 덥고, 습도가 많은 지역에서 생긴 풍토병(風土病)이라고 한다.
반도(半島)에서의 설명대로라면, 대륙(大陸)의 장강(長江) 이남(以南)지역의 “풍토병(風土病)”이 반도 땅 “한강(漢江)”이남(以南)지방으로 옮겨져 “풍토병(風土病)”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과연 한강(漢江) 이남(以南)에 “장기(瘴氣) 또는 장독(瘴毒)”이란 풍토병(風土病)이 존재(存在)했었을까?
<한강(漢江)>을 건넜더니 갑자기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어 “땅에서 열이 올라와 덮고, 물이 많아 습도가 높아, 이곳에 오는 객(客 : 주로 한양에서 오는 손님)들이 <장기(장독)>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이곳은 “하남(河南)지방”이 아니라 “강남(江南)지방”의 더운 지방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도 반도(半島)와는 전혀 관계없는 대륙의 “장강(長江)이남(以南)”지방을 말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한강(漢江)”은 장강(長江)을 말하거나 또는 장강(長江)으로 흘러드는 한강(漢江)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南 史 卷79. 列 傳 第 69. 夷 貊. 下. 西 域 諸 國>편을 보면 “하남(河南)”지방에 대한 설명이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하남(河南)”지방과 “하북(河北)”지방에 대하여,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가 부여(夫餘)에서 출발한다.>는 옛 역사서 원전(原典) 내용에 따르면, “부여【夫餘 :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북쪽지방에 있었다.】”는 바로 이곳 “하북(河北)”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반도(半島)사학과는 만리(萬里)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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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는 송(宋)·제(齊)·양(梁)·진(陳)이고, 《북사》는 위(魏)·제(齊)·주(周)·수(隋)인데, 이 연수(李 延 壽)의《남사》80권과《북사》80권이 있다. 이연수의 아버지 태사(태사 백약(李百藥))는 『송·제·양·진·수는 천하가 서로 막혀 남조에서는 북방을 가리켜 색 로(索 鹵)라 하고, 북조에서는 남방을 가리켜 도이(島夷)라 하며, 그 역사에 있어서도 본국 역사는 자세하나 타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간략하며, 헐뜯거나 칭찬하는 말이 왕왕 잘못 전해진 것이 있다.』하여 개정해서 한 책을 만들려 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연수가 뒤에 《진서(晉書)》와《수서》를 편수하게 되자 구사(舊史)를 다 연구하고 다시 사마천의《사기》체재에 따라 8대를 통틀어 서술했는데, 북조는 위(魏)로부터 수(隋)에 이르기까지 2백 42년간을, 남조는 송(宋)으로부터 진(陳)에 이르기까지 1백 70년간의 두 역사서를 만들어 번거로운 것은 깎아버리고 빠진 것은 보충하니 본사(本 史)보다 훨씬 잘 되었다. 이연수의《남북사》는 자못 역사서의 체재를 갖추었다. 그러므로《당서(唐書)》의 이연수전에서도 “쓸데없는 말을 삭제하여 본서보다 훨씬 낫다.”하였다. 그러나 요이(妖異)나 상서(祥瑞)나 조짐(兆朕)을 서술하기 좋아하여 매우 번거로워 체재를 잃은 점이 있다. 모씨【毛 氏 모 기령(毛 奇 齡)을 말한다.】의《십 칠 사목(十 七 史 目)》에 『북제서【北 齊 書) 50권, 58권이라고도 한다.】 는 이 백약(李百藥)의 찬인데 본기 8권, 열전 42권이고, 북사1백 권은 이 연수(李 延壽)의 찬인데, 본기 12권, 열전 88권이며, 남사 88권은 이연수의 찬인데 본기 10권, 열전 70권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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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 南 王 者 , 其 先 出 自 鮮 卑 慕 容 氏 。 初 , 慕 容 弈 洛 干 有 二 子 , 庶 長 曰 吐 谷 渾 , 嫡 曰 廆 洛 干 。 卒 , 廆 嗣 位 ,吐 谷 渾 避 之 , 西 徙 上 隴 , 度 枹 罕 , 出 涼 州 西 南 , 至 赤 水 而 居 之 。 地 在 河 南 , 故 以 為 號 。 事 詳 北 史 。 其 界 東 至 疊 川 , 西 鄰 于 闐 , 北 接 高 昌 , 東 北 通 秦 嶺 , 方 千 餘 里 , 蓋 古 之 流 沙 地 焉 。: 하남왕은 그 선대는 선비(鮮卑) 모용(慕容)씨이다. 처음 “모용 혁 락 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長子)는 첩의 아들로서 “토 곡 혼”이며, 본처의 아들은 “외 낙 간”이다. “모용 혁 락 간”이 죽고, “외”가 대를 잇자, 토 곡 혼은 피하여, 서쪽의 롱(隴)상으로 옮겨가, 포한(枹罕)을 넘어 량주(凉州)서남을 나와 적수(赤水)에 이르러 살았다. 땅이 하남(河南)에 있는데, 옛 부터 그렇게 불렀다. 상세한 것은 북사(北史)에 있다. 그 경계는 동쪽으로 “첩 천(疊川)”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우전(于闐)”과 이웃하고, 북쪽은 “고창(高昌)”과 접(接)하며, 동북(東北)으론 진령(秦嶺)과 통하는데, 사방 천리(千里)이며, 옛 유사(流沙)의 땅이다.》
► 위 기록을 보면, 하남 왕 (河南 王)이란 “하남(河南)”의 땅을 차지하고 있던 선비족 “모용(慕容)씨”를 말하는 것인데, 바로 “토 곡 혼(吐谷渾)”을 말한다.
► 우리가 관심을 갖고 봐야 하는 이유는 선비(鮮卑)족인 “토 곡 혼(吐谷渾)”이 살던 곳이 바로 “하남(河南)”지방이라고 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하남(河南)”지방의 이동(移動)을 보면 ;
➊ 위에서 말한 현 신강(新疆)성 고창(高昌) 남쪽지방의 “하남(河南)”지방
➋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등에서 말하는 “청해(靑海)성과 감숙(甘肅)지방”을 흐르는 황하의 남쪽지방을 “하남(河南)” 이라 하였고,
➌ “영하(寧夏)성과 섬서(陝西)성” 북변의 내몽고(內蒙古)를 흐르는 황하(黃河) 남쪽지방을 “하남(河南)”이라 하였으며,
❹ 대륙의 현 하남(河南)성 지방을 “하남(河南)”이라 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남(河南)”지방은 계속 동쪽으로 이동(移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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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토 곡 혼(吐谷渾)”의 땅은,
(1) 북(北)쪽으로 ; 신강(新疆)성 고창(高昌)과 접(接)하여 있고,
(2) 동(東)쪽으로 ; 첩 천(疊 川)에 이르며,
(3) 서(西)쪽으로 ; 우전(于闐)과 이웃하고,
(4) 동북(東北)쪽은 ; 진령(秦 嶺)과 통한다.
《이 땅은 “하남(河南)”지방이며, 사방 천리(千里)이고, 예전의 “유사(流砂)”의 땅이다. 》라고 했을 때, 북(北)쪽에는 고창(高昌)과 연이어져 있다고 설명하는데, 이곳의 어떤 하(河)의 남쪽지방인가? 하는 것이다.
고창(高昌)의 남쪽지방은 ;
1) 정남(正南)은 누란(樓蘭). 선선(鄯善)과 포창해(염 택)가 있으며,
2) 동남(東南)지방은 옥문(玉門)관이 있고,
3) 서남(西南)지방은 타클라마칸사막이대이다.
이곳에는 “탑 리 목 하(타림 하)와 공작 하”등이 동서(東西)에 걸쳐있다. 왜 이곳을 하남지방이라고 했을까? 옛 하(河)가 곤륜(崑崙)의 동북(東北)에서 나와 땅 밑으로 흘러 <대적석산>에서 다시 나와 흐르기 때문에 이 하(河)의 남쪽이라서 “하남(河南)”지방이라 했다는 것으로 유추(類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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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하남(河南)”지방의 존재(存在)가 중요한 것은 “조선(朝鮮)”의 역사를 찾는데, 빠질 수 없는 지명(地名)이며, 이는 <고구려(高句驪)와 백제(百濟)는 하 북(河北)의 백성이다>라는 글귀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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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남사(南史) 서역제국에서
1) 宕 昌 國 , 在 河 南 國 之 東 、 益 州 之 西 北 隴 西 之 地 ,西 羌 種 也. 탕 창 국(宕 昌 國)은 하남(河南)국의 동쪽에 있으며, 익주(益州)의 서북 롱서의 땅이다. 서 강(西羌)의 종족이다.
2) 高 昌 國, 初 闞 氏 為 主, 其 後 為 河 西 王 沮 渠 茂 虔 弟 無 諱 襲 破 之. 其 王 闞 爽 奔 于 蠕 (蠕). (중략). 其 國 蓋 車 師 之 故 地, 南 接 河 南 , 東 近 敦 煌 , 西 次 龜 茲 , 北 鄰 敕 勒 。 置 四 十 六 鎮 , (중략). 國 人 言 語 與 華 略 同 。 有 五 經 、 歷 代 史 、 諸 子 集 。 面 貌 類 高 麗 , 辮 髮 垂 之 於 背 。 昏 姻 有 六 禮 。(중략). : 고창(高昌)국은, 처음 감(闞)씨가 주인이었으나, 그 후에 하서(河西)왕 “저거무건”의 동생 “무 휘”가 습격 파하였다. 그 왕 “감 상(闞 爽)”이 연연(蠕蠕 : 윤윤 : 유연)으로 달아났다. 그 나라는 모두 거사(車師)의 옛 땅이며, 남쪽은 하남(河南)과 접하였으며, 동쪽은 돈 황(燉煌)과 가깝고, 서쪽은 다음 구자(龜 茲)이며, 북쪽은 칙 륵 (勅 勒 : 철륵(鐵勒)과 이웃하며, 46개의 진을 두었다. (중략). 나라 사람들의 언어(言語)는 화(華 : 중국)와 대략 같다. 오경(五經)이 있고, 역대의 문서가 있으며, 여러 논문(論文)이나 시가(詩歌)ㆍ문장(文章) 따위 작품(作品)을 모은 서책(書冊)이 있다.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은 고려(高麗) 일족이며, 머리는 땋아 뒤로 늘어뜨린다. 혼인(婚姻)은 육례가 있다.(중략).
<남사의 고창(高昌)국에 대한 중요한 대목 곧 “面 貌 類 高 麗” 등은 통전(通典) 기록과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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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래서 대륙의 역사서는 현 중국의 역사서가 될 수 없으며, 옛 중국(中國)이란 “조선(朝鮮)의 황제(皇帝)가 살던 땅 곧 신주(神州). 기내(畿內). 경조(京兆). 경사(京師). 서울”을 말하는 것이다.
2011년 05월 07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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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혹 하남의 변천에 도움이 될까 해서 출처를 올려봅니다
24사사:중화서국(북사-권65-2306`왕덕열전)에 보면 河,渭지방 사이에 羌族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는 대목이 나오기에 이 부분은 현재 우리가 알기로는 장안 근처로 알고 있는데 중국이라는 곳의 중심인데 이곳까지 강족의 활동무대 내지 생활 범위가 될까 의구심이 가기에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