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 승
김광영
집도 오랜 기간 사람이 들지 않으면 외로움을 탄다. 거뭇하게 삭아가는 서까래엔 왕거미가 휘휘 줄을 쳤고, 기둥뿌리엔 개미들이 집을 지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깜깜한 토굴 안은 더더욱 괴괴했다. 유영遺影이라도 걸려있나 들여다봤더니 유리창에 얼비치는 내 그림자마저 끌어당길 듯 음습함만 가득해서 얼른 발걸음을 물리치고 나와 버렸다. 지난 가을 모과를 주우려고 올라갔을 때의 <금모대> 풍경이다.
그렇게 몇 년을 비워둔 토굴에 노스님 한 분이 드셨다. 젊은 날 이 절에서 도인스님을 경호하리만큼 강단있던 분이라는데, 그때의 근육은 간 곳 없고 삭정이 같은 노구를 이끌고 돌아오셨다. 늙어서 좋은 건 호박과 고승뿐이라지만 걸망 하나 달랑 메고 나타나신 품새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안방에 걸어둔 수묵화 속의 등 굽은 노승이 늘 그립더니 저런 모습이었을까? 환상을 해본다. 그간 골 깊은 산중 절에서 수행을 하시다가 해조음을 듣기위해 돌아오신 노스님께 연민의 정이 인다. 흔히들 노년을 무르익은 황금빛깔에 비유하지만 막판에 돌아오신 노승은 잿빛으로만 비쳐 진다. 혈육의 정을 끊고 산중으로 들어온 스님들은 늙고 쇠락해져도 속가엔 내려가지 못한다. 그래서 이 절 저 절 돌다가 갈 곳 없어 찾아온 빈승인가 짐작을 해봤다.
눈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가보다. 짐작이지만 큰 실수할 뻔 했다. 이튿날 아침, 조공을 마치고 스님이 짐을 푼 토굴로 인사차 올라갔더니 인기척이 고팠던 뜰이 노승의 불경소리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오뉴월에 엿가락같이 늘어지는 염불소리지만 가냘프게 울어대는 휘파람새와 구슬픈 산비둘기소리, 그리고 뭇 새들의 조급한 재잘거림에 배합되어 여유롭기 그지없다. 마치 관중도 지휘자도 없는 산중에 자유자재로 열리는 혼성 음악회를 방불케 한다.
“스님, 저희들 인사드리러 왔어요. 방으로 드시지요.” 했더니 낡은 옷깃을 여미며 “마 여기서 편하게 봐유.” 하신다. 법랍을 보나 세수를 보나 일 배를 받아도 어색하지 않겠건만 느릿한 충청도 말씨로 기어코 사양을 하신다. 공양주와 시자를 거느리고 제후처럼 사는 스님에 비하면 소탈함이 넘쳐 겸손의 극치인가 여겨진다. 뜰 가운데 서서 인사를 드리자 우리보다 더 깊이 허리를 굽혀 굽은 등을 보이신다. 무언의 가르침 인지, 뻣뻣한 내 자세에 일침을 가하는 건지, 황당하고 미안스럽다. 하지만 무안함은 순간이고 보기 드문 스님의 귀한 법문에 울컥 욕심이 솟는다. 평생을 수좌스님으로 지냈던 분이라 더더욱 기대가 큰데 웬걸, 승복주머니에서 한 움큼 지폐를 꺼내시는 게 아닌가. 용체를 드려야할 우리가 용돈 받을 처지인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 나 돈 많어, 천만 원이나 있어. 스님이 주는 돈은 복전이여, 주지스님과 총무스님도 줬응께 받어. 괜찮어.”
머뭇머뭇 셋이서 받은 돈이 제법 많은 액수라 온 몸에 땀이 맺힌다.
“난 은사를 잘 만나서 바로 배웠어. 돈은 아껴 쓰고, 만약에 돈이 생기면 나눠서 가지고, 부처님 법대로 살다가 때가 되면 가볍게 훨훨 가라고 하셨어.”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가 이처럼 가벼울까. 담박한 교훈이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을 다 쥘 듯 옴켜진 주먹안의 욕심을 죄다 버리고 은사스님의 말씀대로 사시는가 보다. 깡마른 스님의 체구를 이제야 알겠다. 작게 먹는 소식에, 오후불식에, 더더구나 50년간 육식이라곤 하지 않았다니 뼈 장작처럼 마를 수밖에 없을듯하다. 그런 스님을 맞이해서인지 마당가운데 우뚝 선 소사나무도 바람결에 잎을 트느라 쉴 새 없이 흔들어댄다.
불자들은 맑은 스님 한 분을 만나 뵙는 게 간절한 바람이다. 숨은 도인이 오셨다는 걸 어찌 알았는지 친견이 하고 싶어 애를 태운다. 애시당초에 보살들을 올려 보내지 말라고 못을 박은 스님에게 허락을 받아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대중공양 들어온 과일을 가지고 올라갔을 때도 이미 대나무 두 개로 바리게이트는 쳐져 있었다. 새벽에 분홍 보자기로 산 찬합을 들고 와서 점심공양까지 챙겨 가시면 하루 종일 스님의 얼굴은 뵐 수가 없다. 선방스님들이 죽비를 치고 정진하시는 동안, 노스님은 토굴에 홀로 앉아 화두에만 몰입하신다. 그런 스님께 친견은 마장이란 생각이 들어 여러 번 거절 했는데, 원주실에서 물러나지 않는 신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토굴로 올라갔다. “보살, 나 말이야 이 절에서 오래 살고 싶으니 도와줘야 혀. 신도들이 날 자꾸 찾으면 난 또다시 다른 절로 떠나야 혀. 무슨 말인지 알것지. ”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사람 만나는 게 진정 싫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객승과 주승 간에 지켜야 할 뭔가가 있다는 걸 감지했다.
신도들이 법당에 그득히 앉는 초하룻날도 그랬다. 주지스님께서 법문 하시라고 법상 위에 모셨더니 산부처처럼 침묵만 지키다가 내려오셨다는 걸 들어서 안다. <말 없는 법문> 때문에 신도들의 궁금증은 더더욱 술렁댔지만 객승의 겸손이라 짐작했다. 주승이 훌륭케 보이려면 배경인물은 흐릿하고 작게 비쳐야만 된다는 걸 수행하신 고승이 모를 리가 없다.
스님이 유일하게 승과 속을 넘나드는 건 일간지 신문이다. 거기서도 속세의 진풍경이 펼쳐지는 첫 면에서 시간을 많이 할애하신다. 논쟁이 빼꼭한 그 바닥은 보면 볼수록 속세와 멀어지고 싶은 지면일터이다. 그래서인지 면벽을 하고 내공을 다지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 지론을 펼칠 때면 청춘을 다 사윈 승가의 길이 촌치도 후회 없어 보인다. 굽은 등 너머로 佛자가 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