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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沂市
린위시(臨沂市)는 산동반도 동남쪽에 있으며, 면적은 17184평방Km이고 인구는 1천 만 명이다. 관할 지역은 沂南, 沂水, 臨沭, 郯城, 蒼山, 費縣, 平邑, 蒙陰 등의 9개 縣이다. 기산시의 지형은 야트막한 구릉지대가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이 구릉지대가 유명한 沂蒙山區로서 중국고대문화의 발원지 가운데 유명한 곳이다.
지금부터 약 40만 년 전에 사람들은 이곳에서 제법 발달된 삶을 꾸려갔고, 그들이 남긴 여러 가지의 명승고적이 남아있어서, 沂蒙山을 중심으로 오랜 역사와 찬란한 문화가 형성되었음을 상징하고 있다. 그 후로도 이 지역은 荀子, 郯子, 劉洪, 諸葛亮, 王羲之, 顔眞卿, 劉勰, 左寶貴 와 같은 수많은 명사들을 배출했다. 그들이 남긴 不朽의 업적은 후대에 남아 소중한 정신적 재산이 되고 있다. 이 지역에는 劉少奇, 徐向前, 羅榮桓, 陳毅, 粟裕 등의 공산혁명가들이 전투를 벌였거나 생활을 했던 유적과 자취가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의 험준한 산과 수려한 전원풍경은 순박한 민속과 함께 독특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1. 銀雀山 漢墓竹簡博物館
임기시내의 銀雀山 서남쪽 자락에 있으며, 총면적은 약 1만평방M이며, 건축면적은 2,400평방M이다. 이 박물관은 198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9년에 준공되었으며 그 해에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銀雀山漢墓廳, 竹簡陳列廳, 文物陳列廳 등의 3개 전시실이 있으며 , 중국에서 가장 큰 漢墓竹簡博物館이다.
銀雀山漢墓廳은 박물관 정원의 남쪽에 있다. 전시관 중앙에는 복원된 제1, 2호 漢墓穴이 있고, 부장품을 북제한 후에 원상태인 관 안에 넣어두었다. 이 2좌의 漢墓에서 출토된 북간은 모두 7,500매이다. 그 가운데에는 《孫子兵法》, 《孫臏兵法》, 《六韜》, 《尉繚子》, 《管子》, 《晏子》, 《墨子》, 《相狗經》, 《曹氏陰陽》, 《風角占》, 《實異占》, 《雜占》과 같은 先秦時代의 古籍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곳에 전시된 《孫子兵法》, 《孫臏兵法》은 1,700여년 전에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것으로 오랜 역사적 수수께끼를 풀어 주었다. 제1호 漢墓에서 출토된 죽간은 모두 32매로 《漢武帝元光元年曆譜》 세트로서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되고 완벽한 고대 年譜이다.
竹簡陳列廳은 銀雀山漢墓廳의 북쪽에 있는 2층짜리 고건축형식의 건물이다. 1층으로 들어가서 정면을 보면 孫武의 浮雕상을 병풍으로 만들어 걸어 둔 것이 보이고, 그 양쪽에는 金文, 隸書, 英文, 日文으로 쓴 《孫子兵法》이 있다. 좌우의 벽에는 방대한 《孫子兵法》 죽간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 걸어두었다. 正廳의 동서 양쪽에는 《孫子兵法》과 《孫臏兵法》을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양쪽에 진열된 兵書 竹簡은 옛날 방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 가운데 《孫子兵法》 죽간은 233매이며 상편 13편과 하편 5편으로 구분했다. 하편에는 빠진 글들이 보인다. 《孫臏兵法》 죽간은 222매로 16편이다.
文物陳列廳은 竹簡陳列廳의 2층에 있다. 이곳에는 도자기, 칠기, 비단에 그린 그림 등을 포함하여, 漢墓에서 출토된 100여점의 문물이 전시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金雀山 9호묘에서 출토된 길이 2M 폭 0.42M인 비단에 그린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내용별로 天上, 人間, 地下 등 3부분으로 구분된다. 인간부분에서 묘사된 것은 묘지 주인의 생전 생활모습으로, 湖南省 馬王堆에서 발견된 비단그림 이후에 처음으로 발견된 것이다. 따라서 당연히 양자강 이북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것이다.
2. 王羲之故居
洗硯池街 20호에 있으며, 1990년에 지었다. 대지면적이 약 28무이며 건축면적은 300평방M인 이 건물은 고전적인 원림 형식이다. ‘書聖’이라 부르는 王羲之는 字를 逸少라 했으며, 西晉時代인 AD 303년에 지금의 臨沂市인 琅邪郡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씨를 쓰는 것을 유난히 좋아하여 眞, 草, 隸, 篆書에 모두 뛰어난 솜씨를 드러냈다. 그는 그의 아들 王獻之와 함께 중국서예사에서 ‘二王’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晉의 永嘉 원년인 307년 그는 가족과 함께 지금의 浙江省 紹興市 인 會稽 山陰으로 이사를 갔다. 그 후에 그가 살았던 집은 佛寺가 되었고 그 佛寺는 흥망을 거듭했다. 남송의 高宗 建光 4년인 1130년 지금의 이름인 보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1990년 원래 왕희지의 집터에 王羲之故居를 중건했다. 이 집의 대문과 마주보는 곳에는 洗硯池가 있다. 전설에 따르면 왕희지가 어렸을 때 벼루를 씻었던 곳이라고 한다.
세연지 북쪽에는 지면에서 약 2M 정도의 높이인 曬書臺가 있다. 넓이가 150평방M인 이 土臺는 王家에서 책을 말리던 곳이다. 쇄서대 북쪽에는 고건축을 모방한 건물이 있다. 대지면적 200평방M인 이곳은 현대인이 지은 琅邪書院으로 왕희지의 碑帖과 碑刻을 비롯한 역대 서예가들의 眞迹이 있다. 서쪽에는 길이가 약 100M정도인 회랑이 있다. 이곳에는 역대 서예가들이 직접 남긴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정자와 작은 다리가 죽림 사이사이에 있다. 이곳에는 년간 약 10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1990년 10월에 시급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3. 臨沂市 博物館
沂州路 13호에 있는 지방종합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기 전에 지은 것이다. 《臨沂縣志》에 따르면 1945년에 臨沂縣 민중교육관 부설로 금석문물을 보존하기 위한 건물 2동을 짓고, 그 가운데 한 곳을 박물관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후에 縣의 문화관에서 각종 문물을 관리하도록 하고, 1960년에 원래 있었던 五賢祠에 문물전시관과 碑廊을 만들었다. 1979년에 현재의 터에 문물전시관을 설치했고 그 이듬해 정식으로 박물관을 만들었다.
2층 건물인 이 박물관은 대지면적이 1천평방M이며, 건축면적이 500평방M이다. 소장된 문화재는 모두 1만여건이며, 원시사회, 노예사회, 봉건사회, 역대 화폐, 서화작품, 공산혁명자료 등의 6부문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가운데 국보급이 314건이며, 1급소장품이 27건이다. 돌도끼, 도자기, 제례용 술잔, 청동기 등이 있으며, 그 외에도 5천년 전 龍山文化 시기의 문화재인 옥, 돌, 골각, 도자기와 5천년에서 7천년전인 大汶口文化 시기의 마제석기, 1200만년 전의 소나 말의 치아화석, 6억년전의 삼엽충화석 등도 있다.
4. 蒙山
동몽, 또는 동산이라고도 부르는 이 산은 平邑縣과 蒙陰縣의 경게선에 있으며, 길이는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75Km정도이며 면적은 1,125평방Km이다. 이 산에는 72개의 봉우리와 36개의 동굴이 있다고 한다. 거북을 닮았다고 龜蒙頂이라 부르는 주봉은 平邑縣 관내에 있으며 높이는 해발 1,156M로 산동성에서 2번째 높은 산봉우리이다. 산 주위에는 20만무의 삼림이 우거져 있으며, 희귀한 수종이 많아서 1993년 1월에 성급삼림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천년 동안 蒙山은 문인들과 제왕들이 자주 찾았다. 唐玄宗은 군신들을 이끌고 蒙山에 올라가 천신과 五帝百神에게 제사를 올렸다. 宋神宗은 이 산을 顓臾王에 봉했으며, 宋徽宗은 齊惠王으로 봉했다. 청의 강희제와 건륭제도 여러 차례 몽산에 올라서 詩賦를 지었다. 고대의 명사들도 이 산을 자주 찾은 자취가 있다. 공자가 자주 몽산에 올라갔으므로, 맹자는 “공자가 동산에 올라가 작은 노나라라고 불렀다”고 말했다. 초나라의 老萊子는 이곳에서 은거를 하며 수도를 했고, 전국시대의 縱橫家였던 鬼谷子도 蒙山의 鬼谷洞에 은거했다.
唐代의 대시인 이백과 두보는 天寶 4년인 745년에 함께 이 산을 올랐다. 두보는 그 때 “余亦芝蒙客, 怜君如弟兄. 醉眠秋共被, 携手同日行”이라는 아름다운 시를 지었다. 북송의 소동파도 이 산에 올라갔다가 “不惊渤海桑田變, 來看龜蒙漏澤春”이라는 유명한 시를 지었다.
蒙山에는 명승고적이 많다. 현재 이미 보수공사가 끝난 老壽山, 玉皇閣, 鬼谷子洞과 鬼谷子授禮處가 정식으로 관광객들에게 개방되었다. 옥황각은 청대의 옹정 3년인 1725년 10월에 처음 지었으며, 1992년에 처음처럼 수리를 하면서 벽돌과 나무를 이어서 2층으로 지었다. 위층은 王母娘娘과 칠선녀의 조상을 모셔두었고, 아래층에는 옥황대제와 문무양반신상을 모셔두었다. 老壽山의 산세는 아주 특이하여 사방에 돌로 만든 벽돌을 쌓아 가로막은 곳으로 길이 있다.
산의 남쪽자락 중턱에 老壽星의 머리를 닮은 거대한 돌이 있어서 老壽山이라 부른다. 산위에는 기이한 노양을 한 괴석이 숲을 이루고 있다. 노수성의 머리를 닮은 바위에서 위쪽으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거북을 닮은 龜山石이라는 바위가 있다. 이 두 개의 바위가 아래위에서 호응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신기한 생각이 든다. 귀곡자동은 玉柱峰의 서쪽에 있으며, 풍광이 그윽하고 아름답다. 입구에서 아래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그 북쪽에는 鬼谷子廟가 있다. 鬼谷子授禮處는 노수산에서 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산자락에 있으며 두 개의 동굴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동굴 안에는 鬼谷子 王禪이 제자들에게 병법을 전수하는 군상이 있는데, 그 모습이 각자 특이하고 실물처럼 생생하다.
5. 左寶貴 衣冠塚
平邑縣 地方鎭에서 서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左寶貴(1837~1894)는 回族으로 字를 冠廷이라 했던 청조의 費縣 地方鎭(지금은 平邑縣에 속함) 출신이다.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지만, 성장을 하여 군대에 들어간 후에 용맹을 떨쳐 차츰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千總, 游擊, 總兵, 提督 등을 역임했다.
1894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平壤을 수비하면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온몸에 부상을 입고 장렬이 전사했다. 그의 애국심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그가 생전에 입었던 신발을 수습하여 고향땅에 묻어두고 그 위에 묘를 만들었다. 그것이 左寶貴衣冠塚이다. 사각형으로 된 묘표에는 사방에는 다음과 같은 대련이 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늘 여러 군인들 가운데 가장 용감하게 싸우면서 천하를 평안하게 하고자 했던 사나이였다. 외로운 성을 지키면서 죽기를 각오했던 그는 천고의 대장부였도다!”
6. 平邑漢闕
2좌의 皇聖卿闕과 1좌의 功曹闕이 있다. 원래는 평읍현성에서 서북쪽으로 2리 정도 떨어진 蓮花山에 있었으나, 평읍현진의 米士民선생이 이 3좌를 모두 시내로 옮겨서 지금은 제3소학교 안에 있다. 황성경궐은 東漢의 元和 3년인 AD86년에 지었으며, 공조궐은 東漢의 章和 원년인 AD87년에 지었다. 漢闕은 회청석으로 된 4층짜리 건축물로서 기초를 제하고 높이가 2.1M이며 폭이 0.72M이고 두께는 0.59M이다.
윗부분에는 사람, 수레, 禽獸, 銘記 등을 새겨놓았다. 꼭대기는 四注式 기와지붕을 새겨놓았으며, 아래쪽에는 처마모양을 새겨놓았다. 이러한 형태는 북방 漢闕의 독특한 모양이다. 3좌 모두 그 형체가 웅장하고 묵직하여 특이한 조형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진귀한 중국고대의 예술작품일 뿐만 아니라 漢闕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1977년에 성급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7. 蘭陵古墓
荀子墓로서 전국시대의 古墓이다. 蒼山縣 蘭陵鎭에서 동남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황토를 쌓아서 봉분을 만들었다. 이 묘는 동서로 길이가 10M이며, 남북으로 폭이 8M이다. 동서 양쪽 끝의 높이는 7M이며, 가운데의 높이는 3M이다. 묘 앞에는 2개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청의 道光 21년인 1841년에 세운 것으로 전서체로 ‘補建荀子墓碑’라는 글씨가 있으나 비문과 서명이 분명하지 않다. 다른 하나는 청의 도광 30년인 1904년에 山東巡撫 周馥이 세운 것으로 ‘楚蘭陵令荀卿之墓’라는 글씨가 있다.
荀子(AD313~AD238)는 이름이 況이었던 전국시대 越나라 사람이었다. 그는 공자와 맹자 이후 유학의 대가로서 사상가이다 교육자였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卿이라 불렀다. 그는 제나라로 공부를 하러 왔다가 稷下學宮의 祭酒(學長)이 되었다. AD255년 초의 春信君의 초빙을 받아 초나라의 蘭陵令이 되었다. 나중에 춘신군이 죽은 후에 그도 면직이 되어 蘭陵에 정착하여 살면서 저작에 몰두하다가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이곳은 성급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8. 諸葛亮의 고향
沂南縣 磚埠鄕의 陽都故城에 있다. 자를 孔明, 호를 臥龍선생이라 했던 제갈량은 삼국시대의 정치가이자 군사전문가였던 그는 AD181년에 지금의 기남현 전부향인 양도고성에서 태어났다. 양도고성의 동쪽은 沂河가 흘러가고 있으며, 기하의 서쪽에 있는 절벽에서 돌로 쌓은 견고한 고대의 성벽이 출토되었다. 고성의 북쪽으로 흐르는 동기하의 강가에는 약 1,500M 정도가 되는 고성의 자취가 남아있지만 지금은 분별을 하기가 어렵다.
1992년에 기남현 전부향에 총면적 2,700평방M인 고대건물을 모방한 ‘諸葛亮故里紀念館’을 건설했다. 대전의 정중앙에는 제갈량의 彫像이 있으며, 그 둘레로 제갈량의 찬란한 일생을 14폭의 벽화가 있다. 기념관의 왼쪽에는 비석이 있다. 원내에는 수령이 1천년이 넘는 높이 23M, 나무둘레 3.6M, 나무가 덮은 면적이 360평방M인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또 기남현성 서쪽에 있는 산자락에는 ‘臥龍公園’ 또는 ‘西山諸葛亮公園’이라 부르는 공원이 있다. 이 공원은 2차례로 나누어 건설되었다. 1993년 말에 2곳의 공원 대문을 만들면서 姉妹亭을 짓고 높이 7M인 제갈량의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을 만드는데 들어간 구리만 3.5톤이라고 한다. 소설 《三國志演義》에 나오는 고사를 소재로 그린 14폭의 부조는 총 길이가 50M이며, 한 폭의 넓이가 5.25평방M이다. 그 외에도 화강암에 새긴 4필의 전마와 제갈량의 《前後出師表》를 새긴 2개의 비석이 있다.
9. 沂南漢畵像石墓
속칭 장군총이라 부르는 이 석묘는 沂南縣 界湖鎭 北寨村에서 1954년에 발굴되었다. 이 묘는 지금부터 1700년 전인 동한말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남북으로 길이가 8.7M이며 동서로 폭이 7.55M이다. 전, 중, 후 등의 3개 主室은 모두 하나의 중심선상에 있다. 또 主室에는 동서 양쪽에 측실이 붙어있다. 묘는 280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그 가운데 42개의 석상과 72폭의 畵像이 있고, 총면적은 442.27평방M이다.
화상의 내용은 전쟁, 제사, 출행, 잔치, 무용, 역사고사, 신화인물, 기이한 짐승과 새 등이다. 전교하고 유연한 실선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양한시대의 회화예술 가운데 진귀한 보물이다. 이 그림은 동한말의 경제 및 사회상과 계급적인 모순, 典章制度, 풍속, 건축, 회화, 종교철학과 사상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10. 孟良崓戰鬪遺迹址
孟良崓는 높이가 536M로 蒙陰縣과 沂南縣이 만나는 곳으로 界湖鎭에서 서쪽 24Km 떨어진 大庄鄕에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송의 장군 孟良이 이곳에서 屯兵을 했다고 한다. 1947년 5월 화동야전군사령관 陳毅가 국민당 74사단을 재편하고 이곳에서 사단장 張靈甫를 죽였다. 1954년 국무원은 맹량고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5천여명의 전사자들을 묻은 묘지를 조성했다. 1977년에는 기남현인민정부가 맹량고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孟良崓戰役舊址’라는 기념비를 세웠다. 이 비석에는 陳毅와 胡耀邦을 비롯한 중국공산당과 국가지도자들의 제사가 새겨져있다.
1982년는 묘원의 중앙에 ‘孟良崓戰役烈士紀念館’을 지었다. 이 기념관은 정청, 전시실, 보조건축 등의 3개 부분으로 나누어져있다. 정청에는 毛澤東, 朱德, 劉少奇, 陳毅, 粟裕 등의 題詞와 맹량고전투에서 사용되었던 실물과 역사자료가 있다. 1977년에 이곳은 성급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
첫댓글 묵계님의 산동 소개 계속 잘보고있습니다. 이곳현지에 있으면서도 이렇게 세부적으로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혹시 다음 계획에 일조 에 관한 부분이있으시거던 그것도 좀.... 일조가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라고 현지인 들은 주장을 하는데...세계최고 수령의 나무도 있다고 하며 최근에 한국인들이 많이 진출하고 있습니다
묵계님 같은 학자분들이 이러한 자세한 자료를 주시니 큰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린이는 개방후 소상품 제조시장으로 뜨고있지요.이우와 함께 양대산맥이라 합디다..묵계님 아니면 문화도 없는 도시인줄 알았습니다.감사...
선생님 단아스무 요빈이 하우지우부지엔! 대구울산갔다가새벽에... 정보 늘감사 건강챙기세용^^
묵계님에게 잘 보일려면 요빈이 우유한통이면 됩니다.펑여우님...(귀속말..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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