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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왕제의 정복 전쟁이 시작된 지 반년이 흘렀다. 아직 한번도 돌아가지 않았던 탓에 은왕제가 황궁을 비우고 타지에 머물고 있는 시간도 역시 반년이었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쉬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더 쏟아지려는지 굵은 눈송이가 바람에 실려 군막을 세워둔 들판의 사방을 휘돌았다. 보초른 서는 군사들은 눈바람 속에서 사뭇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가장 중앙에 위치한 군막은 작전상황실이자 은왕제의 처소였다. 촛불로 밝힌 군막 안, 펼쳐진 지도에 물끄러미 시선만 두고 있던 언은 품에서 만지작거리던 주머니를 꺼내들었다. 이것은 떠나오기 전 미소루가 가지고 있던 것을 받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리 버리지 못할 것을 알고 처분을 맡겼던 언이었다. 허나 아직 펼쳐보지 못하였다. 황궁을 떠나오며 받아왔던 이것을, 전장을 치루는 내내 가슴에만 품고만 있을 뿐 펼쳐 확인해 보지 못했다. 개리가 그리 된후 1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언은 여전히 개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장소에 불문하고 문득문득 개리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져 무엇도 할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곤 하였다. 무뎌질 법도 한데, 날이 갈수록 후회와 아픔은 깊어만 갔다.
“네 있는 곳은....................배꽃이 하늘 가득 뒤덮는 곳이면 좋겠구나.”
이 곳에 눈이 내리고 있는 것처럼, 개리가 있는 곳에서는 백색의 고운 배꽃이 천지를 뒤덮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면 그아이 얼마나 좋아할까.
“리야.”
언은 주머니에 얼굴을 묻으며 나직이 그리움을 토내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더한 그리움이었다. 기억할 것이 자꾸만 작아져서 언은 괴로웠다. 괴롭다는 단어가 이렇게나 아플때야 사용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을 배워가는 중이었다. 한동안 주머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언은 천천히 주머니의 입구를 열어 그 안에 고이 말려 있는 머리카락을 끄집어내었다. 손에 닿는 그 느낌이 지나칠 정도로 고와서, 눈을 감았다 뜨면 그 아이 당장이라도 여기 앉아 있을것만 같았다. 만약 이 자리에 개리가 있다면 톡하니 쏘아 댈 말을 뱉어내겠지. 이리 가지고 있으면서 어찌 태워버렸다 거짓말하였냐고 화를 내겠지. 그러면.....
“들킬까봐 그리하였다. 내 마음 모조리 들키고 나면, 너한테 이리저리 휘둘릴 게 뻔하니, 부러 그랬다.”
그래도 개리는 쉬이 마음을 풀지 않고 턱을 빠짝 치켜들고 언을 노려볼 것이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동안 머리카락을 붙들고 눈을 감고 있던 언의 입 주위 근육이 경직시켰다.
“.....보고 싶구나.”
눈을 떠도 개리를 볼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헌데도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향기에 눈을 뜨며, 언은 개리의 모습을 찾아 안타깝게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임을 확인한 언은 쓰게 웃었다. 한참을 그리 앉아 있던 언은 주머니에서 아직 읽어 보지 않았던 서찰을 조심스럽게 꺼내었다. 무어라 썼을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황후 자리 주지 않으면, 이따위 것 다 필요없다며 패악을 떨어 놓았을 것이다.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흔적이기에, 언은 그것이라도 소중하여 펼치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폐하. 이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것은, 이리 잘라도 폐하를 향하는 제 마음만은 절대로 잘라지지 않는다는 굳은 맹세입니다. 팔찌를 되돌려 드리는 것은, 훗날 궁으로 돌아간 제 손목을 잡고 폐하께서 직접 채워 달라 하는 제 바람입니다. 목숨을 내어 놓고 청하옵니다. 폐하를 연모하는 제 마음을 걸고 청하옵니다. 폐하의 옆자리를 제게 내어 주십시오. 목숨을 내어놓고 청하옵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던 언의 눈동자는 그 속도를 빨리해 단숨에 마지막까지 읽어내렸다. 언의 손이, 언의 눈동자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떨렸다. 언은 깊숙이 밀려오는 후회에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패악이 아니었다. 몇 번을 읽어도 마찬가지였다. 어쩌지 못할 고백이었다.
“...........그랬더냐.”
급격히 일그러진 언의 얼굴은 고통에 휩싸여 있었다.
“네 목숨을 내어놓은 청을...............나는...............”
“태워버려라.”
“그 아이에게 전하거라. 받은 것은 다시 보기 싫어 불에 태워 버렸다고. 그것이 내 뜻이라고. 또한 배치해 둔 호위 무사들 역시 즉시 철수시키거라.”
“그 아이는 호위 무사를 통해 내 시선이 그 곳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아는 것이다. 호수에 뛰어들고, 그따위 저잣거리 대회에 나간 것 역시 내 화를 돋우어 결국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계략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으니,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 하겠지만 나는 더는 틈을 내 주고 싶지 않다.
개리를 천운산으로 보낸 것은 결국 자신이었다. 궁에서 내쫓은 것으로도 모자라, 그 생마저 꺾어 놓고 말았다. 다시는 펴지지 않도록 온전히 잘라 놓고 말았다.
“나는 단 한번도...........네 고백에 제대로 귀 기울인 적이 없었구나
언의 입술로 허망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자신은 끝까지 개리를 밀어내기만 하였는데, 한 번도 개리의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하였는데, 이 아이는 이다지도 올곧게 마음을 다 보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갈 수 있었느냐. 이리 못나 빠진 나를 두고..............네 가슴의 한은 어찌 안고 갔단 말이냐.................리야..................”
밀려오는 후회와 모질었던 자신의 행동을 떠올리며 언은 두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 아이 변치 않은 마음만 믿고 얼마나 자만하였던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여 놓고, 그 아이 눈물을 얼마나 외면하였던가. 언제나 모든게 뜻대로 될 것이라 생각하였고, 또 그렇게 자신의 뜻에 따라 개리를 휘둘러 왔었다. 한번만 져 달라고 청하는 개리의 앞에서도 끝까지 제 뜻만 고집하였었다. 그 결과가 이렇게 참혹한 모습으로 나타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모질게 자신의 뜻만 자신의 계획만 내세웠었다.
“리야...나는 이제.............자신이 없다.................”
그리 한스럽고 아프게 갔던 개리의 마음을 지금에 와 되돌려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괴로운 삶을 버텨내야할지, 아니 버티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지 언은 자신할 수가 없었다. 그만 하고 있었다. 눈 뜨고 세상을 보는것도, 스스로에게 황제의 위엄을 지키라 말하는 것도, 또 개리를 생각하며 아파하는 것도. 언은 괴롭기만 한 그 모든 것을 이제는 멈추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