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감사하라
2022년 2월 6일 본문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4:18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경우는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고 여기에 ‘너희’라는 등장하는 새로운 사람들 뿐입니다. 이는 감사할 것만 따로 뽑아서 감사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것만 감사하고 될수 있는대로 두루두루 감사하도록 최대한으로 노력하겠다는 것은 결코 이 영역에 속한 인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적 기능을 여전히 발휘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란 일체 인간의 의견이 개입되어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전에 하나님과 인간이 협의해서 될수 있는한 인간들이 지킬 수 있는 방향으로 출제된 명령서가 아닙니다.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에서 제시된 겁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합류될 없고 거절될 존재라는 사실을 율법이나 말씀이 말해줍니다. 이것이 ‘아담 안’의 형편입니다. 마태복음 15:17-20에 보면, “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이처럼 율법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지키는 길목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단지 ‘아담 안’에 있다는 것으로만 벌써 지옥가야 하고 저주받아 마땅함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한 사람이 범죄하여’ 그 범죄의 여파가 모든 인류를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원리는 이미 창세기 2장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일관된 조치입니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여태껏 취소되거나 변경된 적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에 보면, ‘마지막 아담’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기존의 아담 속에 있는 자들은 결코 마지막 아담의 세계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됨의 ‘마지막’을 거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이 아니면서 마지막을 기대하거나 소망하거나 상상하는 것은 다 거짓된 망상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망상을 지속하면서 아담에 속한 모든 이들은 선악을 아는 지식으로 버티고 있는 겁니다. 선과 악이란 상호 대립된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함께 안다는 것은 인간에 의해서 실현된 성질의 내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선악지식에 의하면, 악한 자라도 계속 선을 쌓게 되면 어느새 선의 자리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즉 선과 악 사이에 연속성이 유지된다는 겁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역사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는 이론을 제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즉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는 어떤 이론이 성경 속에 있다고 생각하면 아니됩니다. 도리어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 이론이 성경 속에 있다고 말입니다. 즉 성경을 해석하고 그 해석된 것이 도로 ‘나’에게 되돌아온 그 ‘나’라는 자리가 더는 없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에 속한 자들은 다 죽기 위해 태어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데서 살리기 위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죽어야 할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담 안에 있으면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세계에 함계 살 ‘너희’를 미리 상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이유는, 인간들이 납득이 될 지식이나 정보를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6:27에 보면, 새로운 ‘저희’가 나옵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마셔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자기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죽어라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불연속성 행위에 같이 참여하라는 말씀입니다. 선과 악 사이에 불연속적이라는 말은, 악에서 선으로 넘어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마치 1772년 네델란드 선원이 남태평양에 있는 이스터섬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섬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여기에 대한 니고데모의 반응은 역사적 연속성을 가동하는 식입니다. 어른이 어떻게 도로 어린아이가 되는지를 난감하다는 겁니다.
선악체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라는 불연속성을 취하시는 이유는,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의 완성을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선하심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거대한 저울같은 이 선악과 지식에서 맞은편에 절대악이 등장해야 하는 겁니다. 이 말은 곧 절대악이 등장했다면 이는 곧 그 피해자가 절대의로운 분임을 말해주는 겁니다.
세상에 계속 악해야 하는 이유는, 악이 중량이 계속 증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저울의 균형이 맞습니다. 창세기 15:16에 보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선악나무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만이 절대선으로 절대악을 심판하실 권한이 있는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그렇다면 오늘날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세계에서 함께 하실 백성인지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발견하고 확인됩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달무리처럼 예수님 주변으로 선악체계를 주장하는 자들이 몰려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악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말씀대로, 양심대로 살면된다는 것을 주장하는 선악체계자들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오늘날에서 성도들 주변에 이런 역사적 연속성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자들이 등장하면 그 안에서 성도는 발견됩니다. 성도의 특징은 확보가 아니라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승이면서도 제자들을 섬기는 것처럼 기존의 일반적인 선악체계가 전혀 적용되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은 자로서 주님께서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악의 번성마저 감사할 수 있는 자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2-02-06 21:06
24강-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모든 일에 감사)220206 - 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라 하는 것,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라. 이는……’ 이라고 해놓고 그다음에 세분이 등장하지요. 하나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분이 등장하고요, 또 하나는 ‘너희’에 해당하는 사람이 등장해요, ‘너희’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 해서 ‘하나님’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되고, 그다음에 하나님 뜻과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너희의 뜻과 일치가 되는데 그 일치된 내용이 뭐냐?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는 이게 감사할 것들만 계속해서 우리 주위에 일어난다, 일어난 모든 것은 감사하라고 일어난 일이다, 이 점에 대해서 이 문장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이나 ‘아버지 하나님’이나 그리고 여기 ‘너희’라고 등장하는 새로운 집단, 새로운 무리가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동일합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항상 기뻐하라’ 할 때 ‘항상’도 마찬가지고 그냥 기도가 아니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고 모든 일, ‘범사’에, 모든 일 속에서, 골라서 감사하라, 가 아니라 ‘모든 일은 무조건적으로 이것은 감사할 거리만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일이고 아버지의 뜻이었다. 끝.’ 이런 식으로 문장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듣는 우리 당사자가 이 문장에서 형성시킨 새로운 공간, 새로운 영역에 과연 끼어들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모든 일어난 일에 감사가 안 되면 이 문장이 말하고 있는 새로운 영역에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상태가, 이 문장, 성경 말씀이 전부 다 구약 율법과의 연장이에요.
율법이라는 것은 율법을 제시할 내용에 대해서 네가 사전에 너희들 의견이 끼어들거나 고려한 적이 없다는 것, 율법의 뜻은 그냥 위에서 하달한 겁니다. 부여받은 거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역량이라든지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들을 거기에 집어넣지를 못해요.
“너희들이 이걸 지키든 못 지키든 상관없이 하늘의 뜻은, 위에 계신 분의 뜻은 이것이야. 만약에 너희들이 위의 뜻에 거스르면 너희들에게는 무엇이 주어지느냐? 벌칙이 주어지는데 그것이 저주요 지옥이고 그것이 심판이다.” 이게 구약 이스라엘에 나오는 율법의 정신이에요. 일방적으로 줘놓고 거기서 하나라도 어기면 너는 저주다, 심판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신약에 왔을 때는 구약 율법을 이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보고 지킬 것이 있어서 준 게 아니고 우리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까발리기 위해서 주님께서 주셨다. 우린 태어날 때부터 앵~, 하고 또는 으앙~, 하고 태어날 때부터, 어린애 때부터 모든 것이 율법 앞에서는 지옥 가라고 태어난 것이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 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율법의 정신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금 그걸 듣고 싶은 것이 아니고요, “최선을 다해서 지킬 대로 한번 지켜보겠습니다. 애를 한번 써 볼게요” 그런 유도리, 융통성이 허락되지 않아요. 모든 일은 감사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이것을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세계 속에 들어오지를 못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율법적 기능이지요. 우리가 성경 보면서 무엇을 인간들은 찾고자 하느냐 하면, 나의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책임질 수 있는가, 그 이론을 확보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 본문 요 문장을 통해서 다시 한번 재고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인생을 책임지는 이론이 성경에 있는 게 아니고요, 내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게 성경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은 책임질 필요도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러한 내용이 성경에 있어요.
나한테 도로 돌아올 해석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성경은 너 자신을 그냥 치워버려라, 이 말이지요. 접시에 파스타 다 먹고 난 뒤에 설거지하잖아요. 깨끗하게 설거지 하라는 거예요. 평생 동안 우리가 할 일은 내 인생을 깔끔하게 설거지하라는 겁니다. 식기세척기에 맡기지 말고요, 본인이 인생 살면서 깨끗하게 물에다 그냥 없애버리세요. 도로 내 것을 얻고자 하지 마시고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말씀도, 여기 있는 본문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도 예수님의 말씀인데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그 취지를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마태복음 1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6절에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하는데 자, 깨달음이 뭐냐? 불교식의 깨달음이 아니지요.
예수님식의 깨달음이 뭐냐 하면, 17절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어 버려지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내 안에 확보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냥 지나가는 것이에요. 그러면 말씀을 주신 것은 바로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밖에 나오기 위함인데 18-20절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간단히 이렇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찾아오고 말씀을 준 것은 너 더럽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한 거예요. 왜 더러우냐? 자꾸 말을 하거든요. 행동을 하거든요. 꿈을 꾸잖아요. 자꾸 인간은 그냥 가만있지 않고 속의 것이 바깥으로 튀어나와요. 토사물,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 해서 죄송합니다만 계속 욱, 하고 뭐가 나와요.
나오는 족족 주님의 거룩한 말씀이 딱 출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출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나오는 족족 비교해 보는 겁니다. 나오는 족족 더러워요. “저는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범사에 감사해?” “범사에 감사 안 하고요, 모든 일에 감사 안 하고요, 감사할 것이 가끔 생겨요.” “그러니까 네가 더러운 거야.”
네 생각에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뜻은 모든 일이 감사하는 것인데 너는 뭐라고 구시렁거리고 핑계 대느냐 하면, 감사할 만해서 감사하다고,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됩니까, 하고 갖고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네가 더럽기 때문에 그렇고 더러운 것은요, 하나님의 나라에서 안 받아줘요. 더러운 것은 하나님이 안 받아주는 사람인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너는 그리스도 밖에 있어. 인간아!” 그런 뜻이에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너희’고요, 그리스도밖에 있는 사람은 바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설명해주기 위해서 특별히 사도바울에게, 특별히 사도를 선택해서 굉장히 깊이 있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소개해줬습니다. 그중에서도 간추린 말씀 중 하나가 로마서 5장이에요.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으로 인하여, 한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더럽게 되었다, 죄인이었다.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이걸 풀이하면 한 사람으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는 인간으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 받아주고 결국은 죽어서 지옥 간다. 그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 안 받아주는 인간들의 무리가 뭐냐? ‘모든’ 이에요, 모든. everybody, 전부에요, 전부. 모든 인간, 어느 하나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주는 존재로 이 땅에 태어났다. 교회 와서 싸대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쓸데없는 짓 하고 그러지 마. 안 받아준다니까! 더럽다니까요! 헌금 얼마치 하면 받아줄 게, 그런 것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감사치 아니하면 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에 있는 존재다, 그 말이지요.
바깥에 있는 존재라 하는 것은 단독으로 있다는 말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고 그런 인간 중에 하나의 일부다, 그런 뜻이에요. 저는 그것을 이렇게 봅니다. 액체로 된 동질성, 예를 들면 바다 같은 거지요. 액체로 된 동질성에서 개인은 뭐냐? 그냥 찰싹거리고 파닥거리는 존재, 잠시 이렇게 물결이 파닥거리고 촐싹대잖아요.
우리네 존재가 잠시 있다가 촐싹거리다 사라져 가지고 다시 원래 있던 액체의 동질성에 합류하는 존재, 이게 바로 인간입니다.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은 그런 거예요. 나 여기 있다고 내세워 봐야 다시 세월 지나면 수그러들어요. 유명인사가 되어서 많은 일을 했지만 죽고 난 지 한 5년도 안 되어서 ‘지금 그 사람 이름을 잊었지만……’ 이렇게 돼요. 그 사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왜? 다시 동질성의 액체로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래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이겁니다.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잖아.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고. 너 그걸 왜 무시해?” 하나님이 세워놓은 원칙에서 인간은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선악의 지식을 아는 자들은 이미 그 자체가 죽은 자입니다. 선악의 기능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선악을 따먹지 말라, 했는데 따먹은 자는 죽음이고, 선악의 지식의 완성이 되게 되면 그것은 생명이 되고, 선악과나무 자체에 그런 의도를 품고 있었던 거예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악과 지식을 완성 시킬 날이 오는데 악마는 인간을 앞장세워서 따먹어, 따먹어, 이렇게 해서 따먹어 버리니까 이것은 완성이 안 된 선악체계 속에 인간은 놓여 있는 것, 이게 바로 선악체계 속에 내재되어 있던 저주와 심판의 해당자가 되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이것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정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여기에 대해서 이의 걸거나 반발하거나 거기에 대들고 할 입장이 못됩니다. 모든 인간은 로마서 5장에 한 묶음으로 이게 묶여 있어요. 묶여 있다고요. 그러면 인간이 도중에 이 죄에서, 저주에서 심판에서 벗어날 수는 없겠는가, 그런 생각을 또 은근히 하게 마련이거든요.
내가 아담에 속한 것은 인정하고, 내가 날 때부터 죄인인 것, 욕심 많고 나한테서 나오는 어떤 행동과 태도도 주의 말씀에 비춰봐서는, 말씀에 비춰봐서는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는데 그렇지만 이런 것을 안다는 것을 근거로 해서 내가 도중에, 도중에 내가 인생 죽기 전에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아이디어는 주께서 먼저 준비해놓은 것이 없습니까, 라고 슬쩍 기대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것이 고린도저서 15장 45절에 보면 그것이 없어요.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왜 그러나 하면, 아담은 끝까지 아담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아담이냐 하면, 마지막 아담이에요.
이 마지막 아담이라는 것은, 자크가 죽 내려오다가 중간에 튀어나온 게 마지막이 아니잖아요. 자크가 다 열리려면 마지막까지 자크가 다 내려져서 마지막을 거쳐야, 마지막을 거쳐야 새로움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예수님은 어떤 아담이냐 하면, 마지막 아담이에요, 마지막 아담. 따라서 예수님에 들어온다는 것은 아담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끝장이 났음을 확정 짓고 난 뒤에 그다음에 마지막 아담의 소속이 되는 겁니다.
중간에 예수님 알고, 어떤 분인지 알고,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의 존재는 어떻고, 무슨 일을 하셨다는 그 지식을 나를 살리는 지식으로 내가 확보해서 내 장래와 내 운명이 보장받는 게 아니고 주님께서 십자가 지신 것은 그 십자가 죽음으로서 너의 아담 됨을 끝장내 버리라는 거예요. 너의 아담 됨을.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그런 것이 있거든요. 아까 예배 전에 애 귀엽다고 동영상 보고 좋아할 때 이 본문 생각났어요. 손자가 얼마나 귀여운지요. 귀엽지요.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손자를 주셨는가? 우리가 왜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는지의 이유를 다시 한번 추적해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 보면 38, 39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우리가 이 아담의 요소……, 그리고 이 아담이 나만 아담입니까? 전부가 아담이에요, 전부가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이 아담의 후손들의 속을 우리는 통과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하고 협의하거나 의논해서 “나 이러니까 믿어줘” “예, 알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이렇게 소곤소곤 좋은 관계로 의논하지 않아요. 그냥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러 오셨기 때문에 아담에 속한 어떤 자도 마지막 아담에 가려면 아담에 속한 것이 끝, 거기서 죽어야 돼요. 아담으로서 죽어야 된다는 말이에요, 아담으로서!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준비해놓은 거예요. 예수님에 관한 자기 지식, 자기의 컨셉을 제공하는 게 아니고, 내가 이런 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준비한 것은 십자가예요. 오늘 본문 문장에서 나온 ‘너희’라는 것, ‘범사에 감사하라’에 해당되는, 아버지의 뜻이 되는 거기에 동일하게 동의하는 자는 예수님이고, 하나님이고, 그다음에 동의하는 것이 누구냐? ‘너희’에요, 너희.
그러면 ‘너희’라는 것은 ‘아담 안’에서는 없습니다. ‘죽은 아담’에게는 있어요. 그러나 ‘산 아담’에게는 없어요. 아담 속에 살아있는 한 마지막 아담은 무관합니다. 아무런 연락체제가 안돼요. 연결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마태복음 26장 27절에 보면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그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저희’입니다.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예수님께서 잔을 주시고 “‘너희’라면, 내가 원하는 아담 말고, 아담에서는 죽어 마땅하고 새로운 아담에서 나와 함께할 그런 ‘너희’라면 그런 너희의 조건은 뭐냐? 이 잔을 마시라, 이 잔을 마시라. 예수님의 피를 마셔라.” 그 말입니다. 죽으라, 그 말입니다. 네 속에 있는 그 피를 포기하고, 네 인생 붙들려고 하지 말고, 도대체 어떤 성경 지식이 나를 살리나, 어떤 성경지식이 나에게 유익이 되느냐, 그런 꼼수를 생각하지 말고 그냥 놔버려, 죽어버려라, 그 말이지요. 이게 십자가에요. 내 피를 그냥 마시라 그 말입니다. 일단 죽자. 아담에 속한 것은 일단 죽자.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와서 모든 인간이 죽은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 말미암아 새로운 ‘모든’ ‘판타(πάντα)’라 하는데 헬라어로요, 새로운 모든, 새로운 ‘너희’가 발생 돼요. 기존의 아담 속의 한 동질성으로 있는 너희 말고, 거기는 상상도 못 하고, 그것은 예상도 못 한 거예요
새로운 너희들이, 새로운 너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너희,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마시는 자에 한해서만, 모든 일에 감사 되는 아버지와 아들과 너희들끼리는 모든 일어나는 일이 감사할 일입니다, 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새로운 백성이 출현한다는 뜻입니다. 영화 <범죄와의전쟁>에 보면 최민식이 하는 유명한 대사가 있어요. 최민식이 그 영화에서 깡패거든요. 잡혀 와서는 큰소리를 칩니다.
형사가 “여기 앉아라” 하니까 “뭐~! 나한테 반말해? 너 남천동에 살지. 내 마 너희 서장하고 마 밥 먹고~, 내가 마 너그 서장하고 사우나 가고~ 마 내 이런 사람이야!” 하고 경찰서에 와서 큰 소리 치는 대목이 있는데 그걸 보고 나서 제가 참 울컥했어요. “교회 다니고 난 뒤에 복 받은 것 뭐 있노?” 이렇게 주위에서 비난할 때 “마 내가 예수하고 같이 밥 먹고~! 내가 예수하고 잠자고~! 마 내가 예수하고 같이 평생을 살았고~!” 마, 마, 여기서 ‘마’가 중요해요, “마 나 이정도야!”
왜 그런 소리 못합니까? 새로운 ‘너희’예요. “모든 일에 마 감사하고~! 마……” 이런 것. 여기서 ‘저희’라는 것은 그냥 본인이 희생을 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자기희생이 아무짝도 소용 없습니다. 왜 그러나 하면, 선악체계에 있어서……, 이게 좀 어려운데요.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놨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선악과나무 자체가 이 피조 세계에 속한 나무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의 모형이에요. 이 모형은 신약의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을 시킵니다.
선악의 완성이 뭐냐 하면, 선과 악이 이게 원래 대립이 되는 개념이 같이 붙어 있거든요. 선을 아는 과실이 아닙니다. 악을 아는 과실이 아니고 선과 악을 아는 과실이에요. 이 대립 되는 요소를 둘 다 아는 것은, 이것은 하나님만이 이걸 완성을 시킬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과 악에 대해서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이고, 이걸 심판할 수 있는 권한자는 선악 과를 심어놓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피조물 주제에, 악마도 피조물이잖아요, 악마 주제에, 또는 인간 주제에 그것을 그냥 따먹어라 해서 그걸 따먹어버렸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은 피조물 입장에서의 선악체계니까 어떻게 하느냐? 선악이 이게 불연속적인데요. 선과 악이. 그래야 선과 악의 개념이 뚜렷하게 구분되니까요. 이게 그래서 불연속적인데 이걸 연속적으로 처리하는 겁니다.
인간은 어떻게 하느냐? 악에서 착한 일 하면 선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선악체계는 거대한 저울 같아요. 거대한 저울 같아서 악이라는 것, 절대적인 악은 절대적인 선이 나타나서 절대적인 선과 극히 대립이 되는 식으로 악이 등장할 때까지 이 세상은 망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절대적인 선, 이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지요. 주님이 ‘하나님의 의’니까요. 하나님이 등장한다면 이 악을 어느 레벨까지 올려야 되느냐 하면, 절대적인 악까지 균형을 맞춰줘야 돼요. 그래야 ‘아, 최종적인 선은 주님이고 그리고 최종적인 악은 주님 외 모든 것이 악’이라는 사실이 이게 드러나 줘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선악이 뚜렷하게 대립이 되면서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희생을 해도 이 악을 원래 절대적인 악까지 높일 수가 없어요. 희생을 하든 봉사를 하든 본인이 죄를 지었든 아무리 죄를 지어도 죄의 레벨이 예수님과 견줄만한, 균형 맞출만한 악까지 올라올 수가 없는 겁니다. 창세기 15장 16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타이밍 맞춰서 나와야 되거든요.
그들이 금방 나오지 못하고 4백 년 동안 지내다가 애굽땅에서 나와서 다른 땅으로 가는데 그 다른 땅은 하나님께서 기다리던 땅이지요. 약속의 땅인데 약속의 땅으로 4대만에 나오는 이유가 16절에,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 지금은 아니고 4대를 기다려서 나와야 되는 이유가, 아직 죄의 중량감이 완전히 차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 땅을 차지할 만큼 죄가 무르익지 않았어요. 성숙되지를 않았습니다.
죄가 최종 극한 지점에 이르러 줘야 그 죄에 대해서 심판을 감행하는 분이 절대적 선인 것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 그러니까 한 묶음이니까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들이 해야 될 일은, 악마의 앞잡이로서 해야 될 일은 이게 왜 예수님만이냐, 그 나(예수님)를 드러내기 위해서 악의 레벨을, 계속 그 중량감의 무게를 늘이는 일을 이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이 해 줘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게 되면 그 최종적인 것, 그 목표점에 도달하는 것이 무엇이냐?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이 사도바울에게 알려준 계시에 의하면 빌립보서 2장 10절에서 1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것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성령님 사이에서 치는 게임이었던 거예요. 모든 피조물의 특징은 무릎을 꿇어야 되요. 오직 홀로되시는 그분에게만 무릎을 꿇어야 돼요. 그분만이 선악체계를 완성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누구냐? 이 땅에 얼마나 종교가 많고 얼마나 신이 많아요. 하나님이 한둘이 아닙니다. 일본에도 신이 1억이라는데요. 사람 숫자만큼 신이 있으니까요. 일본의 신이 1억이고 힌두교의 인도에 신이 그것보다 더 많아요. 힌두교 인구가 13억 5천만이기 때문에 신이 더 많겠지요.
힌두교가 원래 신들이 많아요. 그 많은 신들, 또 민족들마다 신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들이 고만고만해요. 찰싹거리고 파닥거려요. 전부 다 신들이 그런데 독보적으로, 독보적으로 모든 것이 무릎을 꿇으려면, 그 신들이 실상은 악마가 인간 아담과 결탁해서 하나님의 허락하에 죄의 중량을 최고 극점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역사 속에서 조성된 신들입니다. 종교라는 게.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때 자기를 낮추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높은 만큼 자기도 같이 높아진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신들은 인간의 파닥거림과 동시에 같이 파닥거리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준다. 이게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도 잘났지만 그 하나님 믿는 나도 덕분에 잘나 봅시다’ 이런 뜻이거든요. 여기에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없어요.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예수님 앞에 무릎 꿇을 필요가 없어요. 무릎 꿇기 위해서 예수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반대로 더이상 세상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서 예수 믿는 거지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아담의 선과 악 중에서 예수 믿는 것이 선행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에는 뭐냐 하면, ‘내가 몇 년 전에는 예수 안 믿었지만 이제는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악한 자리에서 연속적으로, 불연속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연속적으로 믿다 보니까 점점 선한 쪽에, 예수 믿는 쪽에 속했다. 그러면 이제 나의 미래는 보장되었다. 천당가는 게 확보되었다. 신난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이게 바로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선악체계에 갖고 있던 이게 오류에요. 선과 악은요, 연속이 아니고 불연속이에요. 예수님의 존재가 아니라 십자가라니까요, 십자가! 선과 악을 가지고 선과 악 지식에 있어서 악한 쪽에 있다가 선한 쪽에 오게 되면 나는 살 수 있다, 라는 사고방식이 이게 아담의 본성에 속한, 죄에 해당되는 죄의 현상입니다. 자기를 포기할 줄을 몰라요. 자기를 놔둘 줄을 모르고 어떡하든 자기를 건질 생각을 하고 있어요. 끝까지. 아담의 족속이면서도.
나를 살리기 위해서 뭐 예수 믿고, 십자가 알고, 모든 것을 다 끌어당겨요. 나를 살리기 위해서. 그것은 이 ‘너희’ 오늘 문장에서 말하는 ‘너희’에 해당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존의 ‘너희’ 기존의 아담의 무리에 해당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존의 아담에 속한 사람은 아담에 속한 자기만 알 뿐이지 내가 아닌 다른, 예수님 안에 있는 다른 나를 내쪽에서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아갈 수가 없고요.
왜냐하면 이미 아담 쪽에서는 죽은자로 처리했기 때문에 죽은자가 예측하고, 죽은 자가 예상하고, 죽은 자가 기대하고, 죽은 자가 목적으로 하는 것은 주님께서 받아주지를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그런 목적과 의도, 네가 구원 받겠다? 네 속에서 나오는 것은 그래서 다 추접고, 더럽고, 토사물이고, 구역질 나는 것들이에요. 그런 것들이.
그래서 나는 괜찮은 나를 찾을 이유도 없고, 찾을 능력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고, 찾지 말아야 돼요. 그쪽 문제는 주님께 일임해야 되지 내 쪽에서, 어떻게 아담 주제에……, 아담이 끝나야 마지막이라니까요. 끝나지 아니하면 아담은 계속 자기주장을 하게 돼요. 자기 예상을 생각하게 된다고요. 오늘 이거 몇 번째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네. 아담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포기해야 되는데 그렇지 않고 ‘포기하면 뭐해줄 겁니까?’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은 포기한 게 아니고 지금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요. 하나님을 상대로.
이 세상에 주님은 누구밖에 없는가 하면, 빌립보서 2장 10. 11절에 보면, 주님은 오직 예수 이름,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러면 주님한테 일임해야지요. 내가 왜 나 좋아하는 것을 미리 거기에 빽쓰듯이 ‘좀 봐주세요. 저 사람 말고 나 어떻게 천국에 넣어주세요.’ 이러면 그 마지막 아담이라는 그 ‘마지막’ 의미가 날아가 버려요. 마지막.
자기가 뭔데, 마지막 되지도 않았는데 마지막을 미리 알아요? 무슨 그런 망발, 그런 모순이 어디 있어요? 그것은 거짓말이에요. 악에서 선으로 이동할 때 여기 단절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 선에서 악으로 가고자 해도 제자리 뛰기에요. 그냥 콩닥콩닥 제자리 뛰는 것뿐이에요.
선으로 넘어가는 것은, 주님께서 선과 악 사이에 대립 되도록, 십자가로 단절을 시켜놨기 때문에 악에서……, 악한 우리가 아담에 속해서, 아담에 속했다는 이유 때문에 이미 악해요. 이것은 저주받은 거예요, 저주받은 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바깥의 세계로, 주님에게로, 나 이후의 세계로서 있는 나를 상상은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이 초등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훈화를 오래 하게 되면 애들이 하는 짓은 뭐냐? 발 가지고 그 아래 땅을 파요. 자꾸 땅을 판다고요. 땅을 판다고 교장 선생님이 ‘오, 땅 파는구나. 내가 훈화 그만해 줄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교장 선생님이요, 일주일에 애들 몇 번이나 만난다고요? 그 만남은 훈화시간으로 한다고요. 그러면 교장 선생님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거기 2학년 3면 둘, 넷, 여섯, 그래 여덟째 줄! 그래, 너 나와! 너 나와! 너 여기서 땅 파!” 이렇게 벌칙 세우면서 계속 자기 고집대로 우겨 나가잖아요.
인간은 아무리 종교적으로 파봐야 그것은 주께서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오류 같은 것이, 중학교나 고등학교 교사들 하는 행동 보면 잘 나와 있어요. 선생님들이 많이 피곤하거든요. 출근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빨리 퇴근해서 집에 가서 게임 할 생각밖에 없어요. 애들한테 치이는 게 너무 힘들어 가지고. 그동안 부어놓은 그 연금이 아까워서 사표 못 내고 그런 식이거든요.
안 그래도 출근할 때부터 짜증 나 있는데 애들 시끄러우면요, 뒷문 확 열고 “조용히 안 하나?” 괜히 자기 기분 나쁜 것 거기다 푼다고요. “조용히 해!” 그러면 애들 조용하다고요. 조용하고 난 뒤에 아무 생각 없이 앞문을 슥, 열고 “아~! 이반은 되게 조용하네” 방금 지가 뒷문 열고 조용히 하라고 소리쳐놓고는 앞에 있는 반인 줄 알고요. 아니 그런 착각 많이 해요. 저도 했거든요. “이 반은 왜 조용하지?” “샘! 같은 반이에요, 같은 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아담 안에서 만들어진 종교일 뿐이에요, 종교.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고. 내가 나를 담보해서 나를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마지막 아담이 무슨 일 하셨는지는 관계없고 내가 누구든 이용하면 나한테 이용하면 그만이라는 그 의식, 그것을 가지고 뭐냐? ‘동질성’이라 합니다, 동질성.
인간은요, 인간끼리는 서로 같은 동질성을 유지하는 거예요. 누구도 튀지 못하게 만들어요. 저는 그 자리에 안 가봤습니다만 아카데미 시상식 할 때 갖다 온 사람이 이야기하기를, 아카데미 시상식 할 때 카메라가 죽 비추고 있는데 시상식이 서너 시간 오래 걸리니까 그동안에 자리를 비우게 되잖아요. 화장실이라도 갈 때 그냥 가면 안 돼요.
손을 들고 표시를 하면 그래서 자리를 비우게 되면 그 자리에 여자 같으면 드레스 입은 여자, 남자 같으면 또 예복 입은 남자 대역, 그것도 배우들이에요, 그런 배우들이 사람 빠진 자리에 대신 들어가 앉아서 카메라로 찍을 때 빈자리가 없도록 한답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뭔가 빠지는 자리가 없고 모두가 동일하게 똑같고, 모든 인간은 한결같이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인간들끼리 단합해서 그게 하나의 권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 거예요. 특히 국가에서 그런 것을 하지요. “예수 믿으니까 나는 백신 안 맞습니다” 이러면 구청에서 봐주고 그런 것 없잖아요. 어떤 인간이라고 특별히 대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인간이고 살아도 인간이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그런 식이라 그 말이지요.
그런 쪽에 이미 우리는 길들여져 있어요. 불연속성이라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하는 것, 아담에 속하면서 어떻게 마지막 아담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백성이 어떻게 세워지는가? 그것은 발견되어지는 겁니다. 없는 데서 발견되어져요. 남태평에 가면 이스터섬이 있는데 1722년에 네델란드의 어떤 선원이 그 섬을 발견했어요. 그 섬은 주변 3천 7백 킬로 이내에 아무것도 없어요. 외딴섬이에요.
그 섬은 마치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느껴집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섬은 1722년 이전에는 없는 존재입니다. 이 인간의 모든 모둠 안에, 1722년 그 안의 모든 인간들 속에는 없는 섬이에요.
그런 섬이 최초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발견한 그 날이 네덜란드의 부활절이라서 이름을 부활절, Easter, 이스터섬이라고 지었어요. 그 이스터섬이 유명한 것은, 거기에 ‘모아이’라는 석상이 있어요. 거대석상이 있었는데 상체는 땅 위로 내놓고 하체는 땅 밑으로 묻힌 채로 석상이 천 개가 있었고 지금 4백 개가 남아 있다는 거예요.
그 석상을 왜 그렇게 만들었는가?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이거예요. 거대한 석상을 그렇게 땅에 심어놔야, 그것도 아주 단단한 석상을 심어놔야 이 섬이 물에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한 겁니다. 가라앉지 않는다고. 어쨌든 1888년에 칠레에 합병이 되어서 지금 칠레의 통치하에 있는데 그 섬은 발견된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 마지막 예수님에 의해서 ‘범사에 감사하라’의 그 영역, 아버지와 아들과 새로운 백성의 영역에 과연 내가 일원이 될 수 있다, 없다, 를 내가 어떻게 파악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변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모든 것이 일률적으로, 동질성으로 악밖에 없어요. 악밖에 없는데 예수님은 메시아로 와서 발견되는 존재예요. 이스터섬처럼.
예수님이 왔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 특이하다, 이렇게 했지 메시아라고 이렇게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메시아라고 했지만 그것은 엉터리 관점에서 메시아고요, 아무도 메시아인 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는 말씀과 행동을 통해서 주변에 뭐가 꼬이기 시작합니다. 뭔가가 포위를 해요. 마치 달무리처럼.
달이 있으면 주위에 띠가 있잖아요. 희미한 띠처럼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중간에 띠가 형성됩니다. 띠가 형성되는데 그 띠를 형성하는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선과 악 사이에 연속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띠를 띠는 거예요. 선악체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띠를 형성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키면 우리는 구원될 수 있다는 사람들이 예수님 주위에 들끓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때부터 특이한 존재가 되는 거예요. 누구 도움으로? 마귀의 도움으로. 불신자의 도움으로. 불신자의 도움으로 그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특이성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하늘나라 갔을 때 부활의 나라에 합류할 수 있는 그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으로 이야기했지만, 그 특징이 뭐냐?
예수님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경험을 겪는 방식을 반복시켜서 자기 백성들을 하나둘씩 발견되게 하는 겁니다. 이스터섬처럼 나타나게 해요. 성도가 뭐냐? 성도는 성도라고 우기는 게 성도가 아니고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 선악체계에 의해서 포위당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11장 25, 26절까지 보게 되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게 불연속성을 의미하거든요. 왜냐하면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 때문에. 어린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는 이것은 불연속적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을 누구한테 이야기했느냐?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사람에게 하는 이야기에요.니고데모에게 이야기할 때 ‘네가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 볼 수 없다’ 이 말은, 그게 불연속성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 니고데모는 이미 어린애가 아니고 어른이 되어 있잖아요. 어른이 된 이상 예수님의 어떤 말씀을 지키려고 한다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연속성을 계속 이어나갈 뿐인데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역사라고 해요, 역사. 역사를 계속, 히스토리, 시간을 계속해서 진행시킬 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그런 말씀 하니까 니고데모가 하는 말이, “내가 어떻게 역사를 뒤집어서 도로 내가 어린애가 될 수 있습니까?” 내가 역사를 살아가던 연속적인 방식으로 주님의 말씀에 합치하려고 이걸 거꾸로 돌려야 된다는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거예요. 니고데모가.
내가 어릴 때부터 하루하루 세월이 지나서 어른이 되었잖아요. 그러면 주께서 말씀하신 어린아이같이 되려면 그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왜? 연속적으로 내 역사는 하루하루 쌓여서 연속성, 그 연속성밖에 없기 때문에 도로 돌아가는 식으로 그걸 바꾸는 연속성을 개입시켜서 어린아이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니고데모는 그렇게 이해를 한 겁니다.
현장에 우리가 있다면 그것 말고 다른 아이디어를 끄집어낼 수 있습니까? 그러니 그 아이디어 자체가 문제가 된 거예요. 왜냐하면 기어이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아담에 속했는데 망하라고, 저주받으라고, 지옥 가라고 만든 그 아담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어떻게 천국 가는 나로 전환할 수 있습니까, 그 노력과 그 생각 계속하고 있으니까 주의 말씀에 합치될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라 하는 게 뭐냐 하면, 우리가 죽을 수 없는 나를, 스스로 제거할 수 없는 그것을, 우리를 주께서 제거해주시는 게 십자가의 능력이에요. 내 피를 마셔라, 그 말이지요. 내 죽음을 네 안에 끌어들여야 된다는 겁니다. 내 죽음을! 그러면 나도 죽었지만 너도 죽었다는 거예요. 죽은 자, 마지막이니까 다 죽고 없는 데서만 비로소 생명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모든 육지가 있지만 어떤 육지 가운데서 새로운 섬이 하나 등장했다, 가 아니라 모든 육지는 있더라도 그것은 이미 죽어버린 육지에요. 오직 부활의 섬은 이스터 섬밖에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부활의 섬처럼, 부활의 열매처럼 오늘날 성도가 더 이상 죽지 않는, 죽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된 거예요.
왜? 이미 죽었기 때문에. 참, 이거 제 말이 아니라 사도바울 편지에 다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하시는 이야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사도바울을 통해서 이렇게 풀이를 해주신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너는 지금 너 자신을 주님의 불연속성의 입장에서 새롭게 너를 발견하라는 겁니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본인이 본인한테 놀라는 거예요.
이게 바로 범사에 감사하는 거예요. 이 일은 내가 꾸미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일은 어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일을 내가 꾸미지 않고 그저 얻어 발생 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예수님만이 죽을 자와 살 자를 결정하는 그 예수님의 주되심만을 증거하기 위해서 계속 일을 만드니까 everything, 갑자기 영어가 막 나옵니다, 모든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만든 일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나에게 나올 것은 감사밖에, 감사 외에는 딴 게 없지요. 놀라는 겁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이렇게 설명해 놨어요. 거기 ‘너희’가 나오는데 어떻게 너희가 생산되는지 28, 29절에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여기 우레가 울린 거예요. 천둥이 친 거예요. 천둥이, 우레가 울었다. 계속해서 보면 29, 30절에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여기에 ‘너희’ 새로운 ‘너희’가 등장해요. ‘너희’ 그러니까 너희들이 역사 속에서 경험하고 기억 속에서 너희가 알고 있다는 그것과의 연속적이 아니라 불연속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는 상태로 역사 속에 주님의 일이 십자가 일이 집어 들어갔다는 그 징후로서 그 당시에 뭐가? 천둥소리가, 우레소리가 나 버린 거예요.
인간이 알고 있는 연속성 있잖아요. 모든 게 연속적이라는 것, 그 연속성을 절단시키는 겁니다. 뭐가? 십자가가요.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너도 이미 죽은 채로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먼저 성령이 오셔서 개입을 해버리면 우리는 이미 무엇을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나의 죽음을 거치고 이제는 새 생명, 부활에 속한, 부활의 백성에 속한 현재의 나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가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게 되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한복음 14장에 유명한 말씀 있습니다.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보세요. ‘나’ 예수님 나오지요. 아버지 하나님 있지요. 그다음에 ‘너희’ 나오잖아요. 이게 언제냐 하면,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바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의 죽음을 나에게 미리 고지, 알려주는 겁니다. “너 죽었어, 인간아! 너 죽은 거야! 내가 분명히 이야기했지?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 나의 원칙을 너한테 적용시켜서 너는 이미 죽은 자야. 태어날 때부터 이미 너는 죽었었어. 선악 지식 때문에”
그 뒤에 나오는 21절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나오는데 이 계명이 뭐냐 하면,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나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참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세상이라는 것이요, 계속 유지해야 돼요. 있어 줘야 돼요.
왜? 달무리거든요. 예수님 메시아 됨을 위해서는 선악체계, ‘인간은 말씀을 지킬 수 있고 말씀대로 살면 구원받는다는 것, 인간은 비록 죄가 많더라도 서서히 서서히 착하게 살면 죄의 영역에서 선의 영역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 왜? 우리는 선과 악을 다 아니까’라고 고집하는 자들에 포위되어 있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것은 천둥소리 아니에요. 우레소리 아닙니다. 그딴 것 필요 없어요. 내가 나의 양심과 나의 착함을 마음껏 동원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은! 왜? 선악을 아니까. 악은 나쁜 것이고 악하면 지옥 가고 선하면, 착하면 천국 간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다 알고 있으니까요. 이 선악체계를 알고 있으니까요.
이것이 아담에 속한 현상이거든요. ‘천국 가고 지옥 가는 것, 다 내가 할 도리다. 내가 바르게 살면 천국 가고 내가 잘못 하면 지옥 간다.’ 전부 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토대로 해서 자기로부터 연속성을 끄집어내는 방식, 그 방식에 꾸준합니다, 인간은. 그거 외에는 다른 생각을 못 해요. 내가 죄지었다, 하면 선을 행해서 상쇄할 생각을 해요. 상쇄. 들어가기 빼기, 계산할 생각부터 한다고요.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에는 “걱정하지 마. 세상 사람들이 너를 포위할 거야.”동일성을 주장하고 연속성을 주장하는 그 주장들, 쉽게 해서 윤리 도덕이지요, 그 주장하는 자들, 그 불신자들이 너를 포위할 거다, 그 말이지요. “너는 왜 우리하고 생각이 달라? 너 어느 별에서 왔어?” 이런 식으로요. 조롱 삼아 “네가 뭔데 다르게 살려고 해?”라고 할 때 악한 불신자들, 비난자들이 우~ 모일 때요.
스데반 집사가 그랬거든요. 짱돌 들고 올 때 감사하라, 그 말이지요. ‘주여, 비로소 제가 주님과 같은, 오늘 본문처럼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군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군요.’ 오늘 본문 다시 한번 보세요. 거기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이죠. ‘그리스도 예수 안’
더러운 것은 안 받아줍니다.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불신자들이 “너 생각하는 것은 왜 우리가 납득이 안되고 이해도 못 하는 생각을 하는 거야, 응?” 하면서 가만히 있는데 왕따 시켜서 서서히 포위하는 거예요. “너 학교 마치고 나중에 건물 뒤에서 좀 보자” 이런 식으로요.
자꾸 둘러싸는 거예요. 남편이 둘러싸고, 자식들이 둘러싸고, 일가친척이 둘러싸고, 해가지고 자꾸 구박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당했던 그 당함을 똑같이 겪게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새 계명이에요. 세상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진리를 확보해야 된다는 거예요. 확보의 반대가 뭐냐? 섬김이에요. ‘섬김’의 반대가 ‘확보’에요.
주께서 불신자들로 하여금 나를 욕하게 만들었는데 굳이 내가 뭔가 지식과 진리를 확보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없어요. “너 뭔데 우리랑 다른 거야?” 이렇게 나온다 그 말이지요. 새 계명이 뭐냐? 예수님은 섬겼습니다. 여러분 잘 알다시피 예수님이 수건 두르고 베드로의 발을 씻어줬지요. 베드로가 화들짝 놀랐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선악체계에서 악한 나가 천국에, 선한 쪽으로 갈 때 나타나는 방법이 이겁니다, 라고 베드로가 그런 조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섬겨도 우리가 주님 스승을 섬겨야지 왜 스승이 우리를, 제자를 섬깁니까?”
주님이 “이게 바로 섬김이야, 이게! 이게 바로 섬김이야. 이게 바로 불연속이야” 상상도 못 한 일, 주께 일어난 십자가 사건이 반복해서 일어나거든 그것이 바로 주께서 고아와 같이 너희를 버려두지 않는다는, 주와 함께 먹고 주와 함께 마시고 있는 천국의 백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