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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금남정맥
금남정맥으로 틀다
아마, 이삿짐 정리보다 몇배 더 힘든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 때(2004년 4월) 기준으로 만 35년간 이사란 걸 해본 적 없이
한 곳에만 붙박이로 살고 있으니 정확히 체감되지는 않지만.
("이사 경험 없음"은 그 후로도 5년을 더 해 40년을 넘겼다)
다만, 요령껏 꾸린 짐을 역순으로 정리하는 이삿짐과 달리 아무
렇게나 던져진 세간의 수습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도 잦은 도둑에 면역이 생긴 우리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오죽했으면 도둑에게 하소하는 글을 써붙이게 됐을까.
이즈음 도둑의 주 타깃(target)은 현금과 귀금속, 보석류라는데
이 양상군자(梁上君子)들은 아마추어(amateur)였던가.
집꼴이며 헌 책들과 낡은 옷 등을 보고도 감을 잡지 못하고 장과
서랍들은 물론 서가의 책까지 몽땅 쏟아 놓는 등 시간과 공력을
이리 낭비했으니 말이다.
이런 난리를 벌이고도 그들의 수익은 고작 손목시계 2개였다.
한 외국계 회사와 모 일간신문사의 기념 시계다.
내겐 값나가는 물건이거니와 기념품이라 서랍에 넣어두었을 뿐
인데 애당초 주인을 잘못 찾아온 것들인가 보다.
하나는 대간 소백산 저수령의 홍민기(백두대간 18회 글 참조)가
좀 더 자라면 그에게 주고, 또 하나는 주인이 나타나겠지 했는데.
도둑 뒤치다꺼리(짐 정리)에만 꼬박 1주일이 소요됐다.
정말로, 꼭 필요한 것이면 뭘 가져가도 이토록 난장판만 만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내가 고맙다는 마음일 것 같았다.
기진맥진한 몸과 마음에는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먼 낙남정맥을 중지하고 인근 부여 부소산에서 시작되는
금남정맥으로 틀었다.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한 날로 부터 만 3년이 되는 그 날, 그 무렵,
9정맥 종주까지 마치는 대단원의 막을 내릴 수 있겠다는 확신이
더욱 선명해짐으로서 일정의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낙남정맥의 분기점 영신봉이 최후의 골인점이 되려면 남은 낙남
구간이 맨 뒤로 남아야 하니까.
공교롭게도, 그 날이 내 70(古稀) 하루 전이므로 주위에서 간간이
꺼내는 소위 고희 행사도 지리산으로 흡수해 버리는 효과까지도
고려한 것이다.
공명 정대한 역사의 심판
2004년 5월 1일 06시 30분발 공주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운행 회수가 뜨음한 부여 직행보다는 약간 번거로워도 우회 환승
함으로서 시간의 경제효과를 택한 것.
이것도 인터넷 검색 덕이다.
계절의 여왕 5월의 첫날, 메이 데이(May day)가 마침 주말이라
백마강가 구드레공원에서는 연휴를 이용한 각종 행사가 펼쳐질
태세였다.
백두대간 영취산에서 분기한 금남호남정맥은 진안 주화산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분화한다.
금남정맥은 부소산을 마지막으로 남겨 놓고 백마강에 뛰어들어
명(命)을 다하고 만다.
나는 이 금남정맥을 역순(逆順)하여 영취산에 도달하려고 지금
구드레나루에 서있는 것이다.
공주의 고마나루(固麻:熊津)와 함께 금강의 대표적인 나루다.
'구들돌'이 있는 동네에서 유래되었다는데 부여군은 군의 공동
브랜드로 유사발음인 '굿뜨레'를 만들었단다.
영어 GOOD TREE, 프랑스어로는 GOUTTRES 등으로.
기름진 땅과 천혜의 깨끗한 자연환경인 좋은 뜰의 상징이라고.
"인물은 가까이, 배경은 멀리"
촬영에 일가견이 있는 듯 위치 선정까지 해주며 사진찍어주기를
자원한 주차관리인의 구수한 재담중 한 마디다.
구교리(舊校: 공원 입구)의 터줏대감이라는 조강하 영감은 자기
보다 겨우 두 살 위일 뿐인 내게 깍듯했다.
09시 30분, 그의 환송을 뒤로 하고 나의 금남정맥길이 열렸다.
낙화암에 올라 잠시 타임 머신을 타봤다.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의 수도였으며 백제문화의 화원이었다.
당연히, 그 역사적 유물인 유적들의 밀집지역이다.
그러나 패망의 상흔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내가 올라와 앉아 있는 낙화암도 그 중 하나다.
이 패망은 외세와 결탁하여 동족을 굴복시킨 불행한 역사물이다.
세월이란 무심하기 짝이 없는가.
삼천의 궁녀가 저 아래 푸른 물에 몸을 던졌다는 당시를 그려본
들 백마강 놀잇배만 한가로울 뿐 실감날 리 있는가.
나당연합 침략군에게 유린당하느니 절개를 지키겠다며 투신한
곳에 백화정(百花亭)을 세우면 궁녀들의 넋이 위로되나?
신록의 숲에 가린 고란사는 고색의 지붕만 살짝 보여줄 뿐이고
안내방송 막간에 흘러나오는 백마강 노랫가락만 청승맞았다.
태초에 뻗어내린 정맥이 저들의 흥망성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것 같으나 자기를 밟고 지나가는 후손들에게
역사의식을 경각시키고 있는 건 아닐까.
"삼국 통일의 위업" 운운하나 외세를 빌어 강토를 유린한 신라를
비판하는 소리가 세월이 흐를 수록 더욱 커가고 있으니까.
이것이 공명 정대한 역사의 심판이다.
특징 없고 지루한 정맥길
착잡한 마음 털어버리고 늙은山나그네의 본령을 찾아 나섰다.
정맥속으로 빨려들어가듯 부소산 정상 사자루 앞에 섰는가 하면
반월루, 영일루, 군창지(軍倉址), 삼충사(三忠祠) 등 사적 제 5호
부소산성을 좌충우돌하듯 누볐다.
비록 해발 106m에 불과하나 부여의 진산답게 부소산은 신록의
휴일을 즐기는 사람으로 인산(人山)을 이루었다.
정맥을 다시 찾았고, 곧 시가지를 지나 올라선 무로정(無老亭)
팔각정자에서 잠시 쉬며 갈길을 살폈다.
여기에 머물면 늙는 일이 없을까.
한데, 100m대의 야산에 불과하나 정맥 잇기가 더 어려웠다.
손쉬운 개발 탓이다.
산, 특히 정맥들을 통해 터득한 체험치의 결론이다.
통수대(統帥臺) 2층 누각이 서있는 금성산에 당도했다.
121m에 불과하지만 부소산과 더불어 군사 요충지였나 보다.
거칠 것 없는 시야도 일품이다.
4번국도를 건넌 후 특징 없는 정맥길이 지루하게 계속되었다.
사적 제 34호인 청마산성터(靑馬)도 터를 확인할 수 있는 정도일
뿐 특별한 관심을 끌지 못했다
백제의 산성중 규모가 가장 큰 성으로 백제 말기에 수도 사비를
방어하기 위한 외곽시설로 축조했다는 순수한 포곡형이며 토석
혼축 산성이라는데.
간벌을 하는 건지, 산판중인지 대대적인 벌목을 단행하고 있어
헤쳐가기가 거북한 지역을 겨우 벗어났다.
어느 새 부여에서 공주땅으로 넘어들었다.
탄천면 가척리다.
끊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라는 이유로, 또 무리인 줄 알면서도
걸음은 잽싸게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그럼, 진고개까지는 강행해야 하는 것.
기진맥진은 했으나 진고개에서 공주시내 찜질방으로 갔다.
중장1구의 옹기촌 할머니
공주의 찜질방 건강랜드에서 땀을 많이 뺀 탓인가.
이른 아침부터 갈증이 심했다.
새벽같이 도착한 진고개 외로운 객줏집에서 해장 맥주 한 병을
마시는데 중년 여주인이 늙은이의 강술 걱정이다.
밉잖게 토실토실한 그녀의 맘씨가 고와서 사진 한 컷 찍었다.
늦딸을 얻은 친정 아버지가 복스런 달덩이 같으라고 부월(富月)
이라 이름지어 주었단다.
나를 보며 친정 아버지를 생각했는가.
내 무거운 짐 걱정도 아울러 하던 여인은 실패작일 망정 사진을
우송했건만 무심하게도 묵묵 부답이다.
그녀의 환송을 받으며 진고개를 떠날 때만 해도 말짱했는데 어디
꽁꽁 숨어 있던 비인가.
25번고속국도(천안 ~ 논산) 이인휴게소까지 가서 콜라 1캔 마실
때까지도 청명 염천이었는데 갑자기 비라니.
더구나 일과성 소나기가 아니라 장기 태세였다.
어차피 비를 사랑하기로 했는데, 내 사랑 비와 또 다시 동행하게
됐으니 차라리 다행이라 여기며 걸었다.
그렇다 해도 시야를 꽉 막는 일만은 삼가해 줄 수 없을까.
제대로 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이 널티고개에 내려섰다.
(널티고개 역시 널치의 변음과 겹말일 것이다)
이틀만에 처음으로 300m 대에 올랐으니 곧 계룡산 오름이 계속
될 텥데 암릉 통과 때만이라도 맑아 주기 염원하며 마쳤다.
비옷을 입었음에도 후줄근해진 몰골로 다시 찾은 찜질방은 이미
구면이라선지 어제보다 더 반겼다.
축 늘어진, 비맞은 늙은 장닭더러 멋있다니 아부?
어쨌든 옷, 몸, 배낭 등 온통 흠뻑 젖어서 마루에 물이 줄줄 떨어
지는데도 개의치 않고 마음 편하도록 배려해 주어 고마웠다.
밤새 잦아드나 싶던 빗줄기가 새벽부터 다시 세차졌다.
금방 젖고 말 옷 갈아입을 일 없어 차라리 잘 됐나.
새벽같이 23번국도상의 널티에 도착하여 호기를 부려보았다.
그러나 이 호기는 3시간여 만에 사라지고 말았다.
중장리~구룡말 619번 지방도에 내려서서 전진을 포기했으니까.
야속하게도 눈마저 제대로 뜨지 못하게 하는 빗줄기에 백기들고
중장리로 탈출했다.
중장1구 옹기촌.
도요가가 아니라 음식점 이름이다.
꽃시절에는 꽤 예뻤을 법한 할머니가 막둥이랑 같이 하는 삼거리
코너의 식당 겸 찻집이다.
비쏟아지는 아침의 시골 식당에 손님이 있겠는가.
아직 나 하나뿐이라 한 가족처럼 셋이 식탁 앞에 앉았다.
비에 젖은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든 따끈한 찌게가 푸짐했다.
마치, 누님이 늙은 동생 챙겨주듯 권하는 식탁이 퍽 정겨웠다.
시골 할머니치곤 다방면에 걸쳐 놀랍도록 유식하다.
도시로 나간 자녀들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늦둥이 아들과
이 음식점을 꾸리며 사는 나이든 신여성이다.
아들이 짝을 맞는 걸 보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라 했다.
나는 현갑수(아들 이름)가 하루 속히 좋은 배필을 맞아 이 노모로
하여금 품에 손자를 안게 되기를 빌며 귀가 길에 올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