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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디치가의 고아소녀 카트린 드 메디시스(1519-1589)는 프랑스의 왕비였지만 프랑스 여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르네상스 시대를 이끈 대표적 가문이자 유럽의 가장 큰 부호였던 메디치가의 딸이었다. 메디치가 중에서 가장 합법적인 상속자로 태어난 그녀였지만, 손 앞에 잡힐듯했던 부귀와 영화는 그녀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가 다 죽는 바람에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딸이라는 이유로 상속권으로부터 멀어져 수녀원에서 자라났다. 그녀는 수녀원에서 자라는 동안 독일의 인질이 되는 수모를 겪는 등 평탄치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삼촌인 교황 클라멘스 7세의 부름을 받는다. 클라멘스 7세의 중매로 그녀는 프랑스의 왕자 앙리와 결혼을 하게 된다. - 프랑스의 천대받는 왕비 이 결혼은 루터의 종교 개혁이후 유럽 각국에 거세게 번지던 신교의 팽창을 막고자 했던 로마 카톨릭 교회와 교황을 배후에 두고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프랑스 왕실의 이해관계가 얽힌 정략결혼이었다. 처음부터 애정 없는 결혼이었지만 14살에 프랑스로 시집 온 카트린에게는 말 못할 수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 앙리는 이미 19살이나 연상인 애인 디안 드 푸아티에를 곁에 두고 카트린을 돌아보지 않았다. 궁중의 모든 사람들은 카트린보다는 디안에게 아첨했으며, 디안 또한 그녀가 누릴 수 있는 권력을 모두 휘두르며 카트린을 모욕했다. 심지어 카트린이 결혼 후 9년 간 아이가 없자 디안이 나서 카트린과 앙리를 이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트린은 총명하고 재기발랄한 여인이었지만 궁중에서 자신의 자리가 극히 협소하다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칩거하였다. 상업적 수완을 통해 거부가 되고, 권모술수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이치를 몸으로 익혔던 메디치 가의 사람답게 기회를 기다리며 스스로를 보호했던 것이다. 이 침잠의 기간은 앙리가 왕위에 올라 앙리 2세가 되고 카트린이 왕비가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왕비 카트린이 차지해야 할 모든 것을 정부 디안이 차지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카트린은 이탈리아 장사꾼의 딸이라는 모욕을 공공연히 받으며 긴 세월을 견뎌야 했다.
- 마침내 권력을 손에 쥐다. 조용히 엎드려 왕비의 자리만 지키던 카트린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다. 남편 앙리 2세가 마상 경기 도중 사망하자 왕위를 이어받은 어린 아들을 섭정하게 된 것. 카트린은 처음으로 손에 쥐는 권력이었다. 첫째 아들 프랑소와 2세의 외척인 기즈 가와 잠시 권력 다툼을 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오랫동안 은거하며 정치술을 몸에 익힌 그녀는 끝내 승리했다. 카트린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도 서슴치 않고 이용했다. 열렬한 구교파이던 기즈 가를 견제하기 위해 그녀는 때로는 신교의 수장인 나바르의 부르봉 가 사람들을 등용했다. 또 때때로 기즈 가와 부르봉 가 사이에 평화를 중재하기도 하고, 필요할 때는 일부러 갈등을 조장하기도 했다. 카트린의 치세에 시작된 프랑스의 신교와 구교도간의 전쟁, ‘위그노 전쟁’의 배후에는 그들의 싸움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과 왕권의 안정을 추구하던 카트린의 계략이 숨어 있었다. - 성 바르톨로메오 밤의 학살 그러나 섭정 왕비는 왕이 자라면 그 권력을 아들에 되돌려 주어야만 한다. 큰아들 프랑소아 2세 사망 후 왕위를 이른 둘째 아들 샤를 9세는 자라면서 어머니 카?걋?그늘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했다. 샤를 9세는 당시 신교도의 수장이던 해군제독 콜리니와 가까이 하면서 카트린을 권력으로부터 배제시켰다. 카트린은 어떻게든 권력을 다시 회복하려 했다. 그녀는 새로운 위협 콜리니를 제거하기 위해 오랫동안 그녀의 위치를 불안하게 하던 구교파 기즈 가와 손을 잡아야 했다. 막내 딸 마그리트와 신교파의 대표자 나바르의 앙리 부르봉과의 정략결혼으로 신ㆍ구교도간의 화해를 꾀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 기즈 가의 사람들과 함께 콜리니의 제거를 모의한다. 앙리 브루봉과 마그리트 공주의 결혼식이 열린 파리에는 많은 신교파 사람들이 결혼 축하객으로 모여들었다. 신교파들이 이 화해의 결혼을 축하하며 안심하는 동안 카트린과 기즈 가는 콜리니를 저격하지만 그에게 중상을 입히는데 그쳤다. 적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자 볼안을 느낀 카트린과 기즈 가는 더 심각한 결정을 내리고 만다. 성 바르톨로메오를 기리는 축일의 밤에 파리에 와있는 신교파의 지도자들을 모두 없애기로 한 것이다. 이 결정은 그러나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낌새를 알아차리고 피신하는 신교파들의 지도자를 쫓다가 신교도라면 무조건 죽이는 사태로 까지 일이 진행된 것이다. 광기에 젖은 대량학살이었다. 학살은 8월24일부터 10월까지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파리에 와있던 결혼 축하객 신교도들은 3,000명 이나 학살되었고, 프랑스 전역으로 따지면 그 수가 수만명에 이르렀다. 종교적으로 아무 쪽도 아니었던 카트린은 오로지 권력유지를 위해 수많은 신교도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던 아들 샤를 9세까지도 독살하고 마는 사태에 이르렀다. - 카트린이 프랑스에 남긴 것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성 바르톨로메오 밤의 학살 사건으로 프랑스 역사상 정치적으로 가장 잔인하고 냉혹한 여인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프랑스의 문화사는 그녀로 인해 풍성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전까지 제대로 된 식문화를 가지지 못했던 프랑스에 부유한 메디치 가의 음식문화를 들여와 발전시킨 사람이 바로 카트린이었다. 이때에야 프랑스에 포크를 쓰는 식사 예법이 생겨났다고 한다. 더불어 향수를 프랑스로 가지고 온 것도 카트린이었다. 카트린은 또 이탈리아 귀족문화이던 발레를 프랑스 궁정에 소개했고, 그 후 발레가 유럽 전역에 퍼졌다. 발레의 유럽문화화는 카트린에 의해 이뤄졌다. 아름다운 궁전 튀틀리궁과 쇠농소궁을 고안한 것도 그녀였다.
자료출처: 주간한국 홈페이지
여왕마고와 중세의 고성이라는 영화를 보고 프랑스 역사에 등장하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어떤인물인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 보고 싶어 한번 찾아 보았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권력을 차지하기위해 노력한 여인의 모습을 볼수 있었던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