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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21세기에 다시 읽는 이순신-마지막회
임진왜란의 사건과 사람들 | |
이순신은 임진 다음해에 군량 확보와 피난민 구제책으로 군사와 난민이 함께 농사지어 나누는 둔전제를 건의해서 실시했고 전쟁말기인 무술(1598)년 고하도 고금도 시절에는 극심한 군량난 해결과 간첩선 봉쇄의 일거양득 묘책으로 해로 통행첩제도를 실시하였
이순신 관할 수역을 운항하기 위해서는 이 해로 통행첩을 발급받어야 했는데 큰 배는일년에 쌀 석섬, 중간배는 두섬, 작은배는 한섬이었다. 피난민들은 기꺼이 이에 응했는데 이유는 이순신 수영근처에 머물수 있다는 것이 곧 생존을 보장받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또 바닷물을 불로 쫄여서 소금을 만들고 생선을 잡고 미역을 따서 주민들의 곡식과 바꾸어 군량화했으니 서로 좋은 상생의 대책이 실로 감탄스럽다. 나라를 건진 우정 어린시절 세살맏이 동네 친구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역천한 사람은 당시 좌의정 유성룡인데 이순신에게 유성룡은 친구이자 정신적인 지주로서 이순신이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나가는데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우정과 상호 신뢰가 결국은 나라를 구했으니 이보다 더 큰 우정은 없을 것이다. 행주대첩의 명장 권율도 유성룡이 천거했으니 그는 사람을 가려보는 천재이며 전쟁을 다스린 명신이다. 이순신의 의금부 구속 때는 당색으로 인한 입장의 어려움으로 구명운동에 나서지못했고 전쟁직전 당론을 거스르지 못해 통신부사 김성일의 전쟁 부재론을 편든 옥의 티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순신과 원균 두사람의 수평적 직접 비교 자체가 두루미와 참새가 같은 새라는 이유만으로 억지로 대비하려는 것과 같은 무리이다.종전후 선조임금이 이순신과 원균을 똑같은선무일등공신으로 책봉한 근거로 원균을 재평가해야 한다는이론을 들고 나오는 이들이 있으나 이는 선조대왕의 혼조일뿐 옳지 못하다. 그 근거는 유성룡의 징비록에 '원균이 전함 100척을 자침하고 군사 만명을 해산했다.'는 기술과 체찰사 이원익의 '흉악한자'라는 표현과 한산 도진중 과거시험의 참시관이던 삼가현감 고상안의 회고에 '원수사는 거칠고 사납고 무모한데다 인심마저 잃고 있엇다.'는 기록과 난중일기에 원균이 군공을 위장하기 위해 죽은 우리 어부의 목을 잘라모으고 있었다는 개탄이 있어 그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 임진왜란의 죠커 배설 통제사로 승진한 원균의 후임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배설은 원균과 함께 칠천량해전에 참전 하였으나 원균의 무모한 지휘에 실망, 위기를 느끼고 판옥선 12척을 이끌고 도망쳐 왜군의 상륙이 임박한 한산통제영을 불태우고 서쪽으로 도주, 후일 회령포에서 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 막하로 들어왔으나 명량대전 직전에 다시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그 절대절명의 명량해전 13척 판옥선 중 12척이 바로 배설이 끌고 도망쳐온 배들이며, 이순신이 타고 그처럼 처절하게 싸운 좌선(대장선)이 바로 배설의 판옥선이었으니 배설의 칠천량도주는 바로 명량대승첩의 결정적 기여가된 것이다. 뒤에 배설은 고향 선산땅에서 권율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끌려가 목잘려 죽었지만 결과적으로 배설은 죄인인가 공신인가 역사의 아이러니는 헤아릴 길이 없다. 이순신에게 혼줄난 왜장들 와키자카(협판안치)는 합포, 전진포, 사천, 한산도,당항포 등 적어도 다섯 차례나 이순신에게 박살나고 한산해전에서는 화살까지 맞아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김해로 들어갔으니 그는 이순신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했을 것같다. 명량해전의 선봉장으로 참여했다가 이순신에게 토막쳐 죽은 구루지마(내도총통)는 해적출신 장수로 그동안 조선연안을 괴롭히던 왜구 두목이 드디어 우리의 영웅에게 잡혀죽었으니 인과응보가 바로 이런 것인가 싶다.노량해전의 시마즈(도진의홍)는 살마 군단이라하여 잔인하기로 이름이 높았는데 조명 연합군의 집중화살 공격이 얼마나 심했던지 부하들이 인간방패로 대신 화살을 맞아 죽어주는 바람에 겨우 목숨을 보전 줄행랑을 쳤다. 전쟁의 참상 계속되는 전란은 극도의 식량난을 촉발하여 사람이 사람을잡아먹는 극한 상황을 낳았다.(난중일기 갑오 1594년 2월9일). 정유재란 때 도요토미(풍신수길)는 전라도 진격을 신속히하지 않는데 대한 단속으로 조선사람의 목을 베는 대신 병사 1인당 코 한되씩을 소금에 절여 보내라는 명령을내렸다. 그 결과 왜군들은 이목표 달성을 위해 조선사람을 산채로 코만 베는 경우가 생겨 전후 거리에 코 없는 사람의 왕래를 볼수 있었다 한다. 일본에는 코를 주고 받은 영수증이 수없이 보존되어 오고 있는데 총합계로 조선사람 코 185,738개, 명나라 사람 코 29,014개, 합계214,752개라는 기록이 있다. 일본의 '귀무덤'은 '코무덤'의 와전이다. 숨가쁜 역사의 한일 대경주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가 조선침략의 날카로운 창을 갈고있는 동안 하늘은 조선에 이순신이라는 기막힌 방패를 내려주셨다. 이순신이 임란발발 1년 전인 1591년 2월 13일천신만고 끝에 전라좌수사에 올라 군기를 보강하고 판옥선을 건조하며 신형 전함 거북선을 일본의 조선침략 하루전인 4월 12일에 완성했으니 실로 아슬아슬한 대경주를 펼친 셈이다. 또 정유재란 때 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이 군사와 군량을 모으며 구례를 8월 4일에 지나갔는데 남원을공격하러 서진하던 고니시 왜군부대는 8월 5일에 구례에 들어왔으니 하루차로 엇갈려 하늘은 역시 이순신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지금까지 간략하나마 인간 이순신의 행적과 사상을 되살펴 보았습니다. 인간 이순신, 그는 오직 공의가 지상의 선이요, 그러므로 나는 이 공의를 목숨 걸고 지킨다는 한없이 단순한 생각으로 물흐르듯 흔들림 없이 짧고 지순한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그 긴박했던 명량해전에서 내린 그의 군령필사즉생(必死卽生)은 바로 그 자신의 일생의 좌우명이었던 셈입니다. 그 자신의 군령처럼 죽음으로서 공의를 지켜 영원한 민족의 참스승, 충무공 이순신으로 되살아나셔서 오늘의 우리를 간곡하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집필 후기 망설임 끝에 시작했던 [21세기에 다시 읽는 이순신]에 뜻밖의 성원과 격려를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몇몇분들께서 이순신을 바로 알기 위해서 세미나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니 70명 회원의 상록회가 '이순신특강'을 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더욱 보람을 느낍니다. 이 연재를 통해 귀중한 지면을 흔쾌히 할애하며 '이순신바로 알리기'에 앞장서신 중앙일보에 경의와 감사를 올립니다. 자료에 충실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원체 방대한 자료를 짧은 기간에 취합하다보니 어디엔가 오류가 있지않을까 걱정되지만 독자여러분의 충고를 겸손히 받아들여 다음 기회에 더 좋은 글을 써보고자 다짐합니다. 주요 참고문헌 이충무공의 난중일기-이순신 지음, 이석호역, 집문당 이순신의 일기-박혜일외 3인, 서울 대학교출판부 충무공 이순신-조성도 지음, 연경문화사 임진장초-이순신 지음, 조성도역, 연경문화사 이순신 평전-김종대 지음, 지평 이순신의 짧은 생애 빛나는 삶-장학근,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조선왕조실록-박영규역, 들녘 거북선-김재근 지음, 학민사 다시쓰는 임진왜란사-조중화 지음, 장우사 소설 임진왜란 7부작-김성한 지음, 행림사 소설 격류-김경진, 안병도, 중앙 M&B 소설 칼의 노래-김훈, 생각의 나무 | |
입력시간 :2004. 05. 20 15: 13 |
첫댓글 아주 잘 읽었어. 참고가 될까하여 한가지.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에서 편낸 "삶에서 신화까지 충무공 이순신"이 있거든. 카폐에 올려준 이호영의 뜻과 수고에 고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