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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이름의 유래가 궁금하다. 돌 석(石)자에 남쪽 남(南)자를 쓴 정자의 이름은 산의 본래 이름이고, 지금의 이름은 순 우리말로 순화된 산 이름임을, 정자의 이름을 빌어 그 유래를 전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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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시설이 있는 너른 터가 바로 아래에 있다. 석남정(石南亭) 정자가 위치한 곳 서쪽은 옥천의 명산 장룡산과 서마성산, 삼성산
이 시가지 너머로 조망되며 그 너머 충남 최고봉 서대산이 위용을 자랑하며 솟아있는 풍광이 조망된다는 정상에서 소나무가 그늘이
되어 주니 그저 좋을 것 같은 산정!! 낮은 산길을 돌아 넘으며 내려다 보이는 농촌 옥천의 풍경이 밀려온다.
귀화마을로 내려와
새싹이 돋아나온 보리싹이 봄을 알리고 이어지는 산길 언덕을 파 헤치는 작업은 소리를 내어 더욱 밀어 내고 있는 귀죽마을
분들은 내 발자욱을 돌아 나가라 하고
귀죽마을로 잠깐 내려와 만나게 되는 곳, 또 다시 오르게 되는 귀죽마을 뒷산
돌남산에서 내려와 산줄기를 이어보는 등뒤의 뒤안길은 평화로운 시골풍경의 흔적을 찾아 오름짓을 한다. 시멘트길은 끝이 나고
오붓한 오솔길이 길을 안내하고 저 멀리 마을 어귀 밭에서는 벌써 일손이 바빠지는걸 알 수 있다. 봄이로구나. 풋풋한 땅내음이
가득하고 푸르른 보리밭에서의 풀내음도 나를 부르고 ..
오래된 옛날 비석 앞에서 멈추는 내 발길은 여전히 그 비석의 주인공 흐릿한 음각을 애써 더듬작 거려 보기도 한다.
펑퍼짐한 묘를 지나고 한글로 음각된 부부의 묘도 지나고 이름표없는 묘도 지난다.
묘가 있는[퇴미산 249봉]이다 .
퇴미산에서 직진으로 길의 흔적이 흐릿해서 진행방향이 아닌가 하는 착각도 되지만 남쪽으로 이어지는 방향에 맞추어 가면 쉽게
이해가 된다.
펑퍼짐한 묘 1기에 참나무 한그루가 봉분에 자라고 있고 그 묘를 지나면 길은 또렷한 길 안내를 하기에 쉽게 걸을 수 있었다.
[함박산 250봉]
묘를 지나 수북이 깔린 땅위에 낙엽은 바스락 소리를 내어 걷는다. 겨울 가뭄이 심하여 식수까지 부족한 소리가 뉴스를 타고 들여
오는 요즈음 오늘 같은 산길을 걸으니 비를 기다리는 소원도 해보게 된다.
생각해 보니 올 겨울은 눈이 온 적이 며칠이나 될까 , 그 많던 눈구덕이가 그립다. 쓰러진 나뭇가지가 이곳저곳에 나뒹군다.
장령지맥이라고 쓰인 분홍빛 표지기에 눈이 간다. 신산경에 장령지맥이란 산줄기가 이곳이다. 산길을 돌아 넘으로 구불한 산
길은 여행객의 길을 맞는다.
흰비닐 하우스로 채운 논과 밭은 주름처럼 자꾸 밀려와 농촌 마을에 그리움이 커져만 간다. 농촌 마을은 늘 추억과 마음만은 넉넉
한 대상이 된다. 산새가 지저귄다. 꿩이 후다닥 날개를 펴고 난다.
180.3봉에 올라서니 도덕봉이 우뚝하다. 오르게 될 산봉우리이다.
벌목을 하여 텅빈산이 된 벌거숭이 산에서 둥그스런 산길을 그려보면서 4번국도를 지나 도덕봉까지 조망되는 산길로 이어진다.
길은 묘를 지나고 솔잎이 깔린 길을 걸을 땐 바삭바삭 장단소리다. 일렬횡대의 고장이름 답게 '옥천육' 묘지앞을 지나게 된다.
장룡산과 대성산이 구불구불 저 멀리 하늘금을 굿고 있다.
빈밭을 가로질로 가다보면 그믈망이 앞을 막고 옥천읍 풍경에 앞이 트인다. 영락없이 분지가 발달한 옥천읍이다. 묘를 지나 또
묘를 지난다. 기왓장을 쌓아 놓은 곳을 지나기도 한다.
[4번국도]로 내려선다. 중앙분리대를 넘을 수 없어 궁리하다 분리대 아래를 통과한다. 베낭을 먼저 밀어 넘기고 기어 나와 차가
없는 틈을 타 재빨리 건너왔다.
원각 주유소다. 참새가 그냥 갈 수 있으랴. 불청객 인사하고 커피 한 잔 먹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다 출발~~ 도덕봉으로 오른
다.
전원모델 앞을 지나 수로와 함께 걷게 되는 소로를 걷는다. 마루금을 오른쪽에 두고 눈이 그곳에 가 있는 산에 가다 만난 큰 나무
가지에 새집이 큰둥지를 틀었는가 보다. 인삼밭과 우막을 지난다. 시멘트길 삼거리에서 우막을 왼쪽에 두고 따라온 전봇대를
지나 또 소로를 따라 가게 된다.
소가 나를 바라보는지 모두가 낯선 나에게 시선 집중이다.
묘를 지나고 묘를 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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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철도가 보이는 옥천의 풍경이 조망된다.
벌목지대를 지나
[도덕봉△407.3]봉에 서다. 정상에는 시설물과
도적봉과 도둑들
이원면 건진리 뒷산은 바로 동이면 세산리(細山里) 앞산인데, 이곳에 있는 산을 도적봉이라 한다. 그리고 그 산의 고개를 솔티재(松 )라고 한다. 지금은 솔티재에 경부간 철도터널이 생겨, 고개를 넘어 다니는 게 아니라 터널 속으로 빠져 다니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 험한 고개를 걷거나, 말을 타고 넘었다. 워낙 산길이 험하고 고개가 경사져서 지금은 육로는 폐쇄되고, 멀리 구둔치로 크게 돌아서 경부간 국도가 나 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 산이 깊어 소나무가 무성하여 대낮에도 오히려 햇빛을 가리니, 이 고개를 솔티(松 )라고 함도 당연한 이름이라 하겠다. 이 길은 저 멀리 부산, 동래, 경주 등 영남사람들이 서울, 경기지방으로 내왕하는 큰길이요, 중요한 길이었음은 예나 이제나 같다. 그런데, 이 솔티재를 넘는 옛사람들은 도둑 떼의 행패에 크게 겁을 먹고 있었다. 오죽하면 도적봉이라 이름을 붙였을까? 옛날 이 고개는 한두 사람이 넘을 수는 없었고, 여러 사람이 모이면 포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넘어야 했다. 그런데도, 가끔 도둑들의 습격을 받아 재물을 잃거나, 인명의 살상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많은 병력을 들여 여러번 소탕전을 폈다. 그러나 워낙 산이 험하고, 도둑들의 방비가 치밀해서 뜻대로 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일합방 당시 왜군들이 일대소탕전을 폈지만 큰 효과를 못거둬 할 수 없이 길을 크게 돌아서 현재 국도로 하여 구둔치로 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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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점 보은 323, 판독불명의 삼각점이 있는 도덕봉, 정상 아래에는 도덕터널로 경부고속철도가 지나는 곳, 옥천읍내와 이원의 풍
경이 조망되는 곳, 진행하게 될 장룡산과 매봉의 산줄기를 타고 가는 가겠지,
지난 구간 때 올랐던 동마성산이고 이번 구간 저 멀리 보이는 서마성산이지 않겠나싶다. 경부선이 지나는 솔치굴이다.
[임도]를 지나 이원의 풍경이 조망된다.
잡목이 우거진 나무 사이를 헤집워 산에 오르면 시야가 확 트인다. 큰붕어 한마리가 산을 에워싸고 있는 듯한 푸른빛의 장찬저
수지다.
장찬리는 원래 이남면(利南面)에 속해 있던 마을이다. 1739년 기록에 보면 33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에는 24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이남면(伊南面)에 속해 있다가 1929년 이원면(伊院面)에 소속 되었다. 2007년말현재 15호 31명이 살고 있다. 장찬리라 부르게 된 것은 800여 년 전에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이 처음 들어와 사기그릇을 만들어 팔고 살았는데 이 사람이 아들을 낳아 기르게 되니 그 아들이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줌으로 이름을 도울 찬(贊)자를 써서 찬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마을 이름이 되어 장찬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웃장찬리 골안이와 사기점터에 옛날 도요지가 남아 있어 많은 사기 그릇 파편들을 볼 수 있다. 저수지 서남쪽으로 돌메기산, 무봉산, 골안이, 사기점터가 있고 금산에서 터널로 물을 끌어 드리는 통수골(새목재), 진상품을 운반하던 길인 진상골, 새시골, 동학전쟁 때 부부가 와서 거처하던 피난굴, 베를 짜서 생계를 이어갔다는 베틀굴, 산위에 옛성이 남아있는 시루봉, 작은 절골, 큰절골 등이 남아 있다. 1970년 농업용수 개발사업으로 장찬리 저수지를 건설하게 되어 아래장찬리 주민들은 수몰된 고향을 떠나 여러 곳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과 고향을 지키는 재향민이 힘을 합하여 1994년에 애향비를 세웠다. 1979년 준공된 장찬저수지에는 수상레저타운이 있어 수상스키를 즐기는 레저 활동이 활발하고 겨울에는 깨끗하고 싱싱한 빙어를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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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다보고 또 쳐다봐도 영락없는 붕어다. 크고 작은 산들이 중중첩첩 겹쳐 보이는 산그리메가 마치 수묵화처럼 하늘아래 금을
긋는다.
그래서 장찬저수지가 빛을 발하는지도 모른다.
묘을 지나고 점점 더 가까워 오는 장룡산과 매봉을 보면 앞이요, 도덕봉의 풍경이 점점 멀어져 풍경이 지는 희미한 산이 멀어져
가는 산을 오른다.
[299봉]
[長龍山, 長靈山의 성황단]
평지같은 너른 터를 돌아 오른다. 승용차 두대가 있어 혹 사람이 있는가 싶어 애써 찾아 보았지만 인적이 없다. 장룡산에 오른게
아닐까 하는데. 점쟁이가 아니라서.
햇살이 너른 평지위 산에서 쏟아져 퍼진다.
바위가 길을 막은 곳도 비탈진 곳에 넘어질 것 같은 큰 바위가 산을 지키고 있다. 더러는 혼자. 더러는 무데기씩 모여 있는 곳을
지난다.
바위가 재빛이면 산도 같은 색으로 하나의 색으로 뭉친다.
533봉의 정상이 넓다. 너른 분지의 산정 한가운데 나무 한그루에 달아 놓은 장령지맥의 이름표를 달고 있는 산봉우리에 선다.
마애블과 3층석탑이 있는 용암사와 서마성산으로 가는 산줄기 하나가 내 마음에 달고 서 있었다. 걸으면서 보았던 장룡산보다
서마성산이 먼저 보였기에 그랬는가 보다.
선답자의 녹색표지기가 (275.6봉) 오늘은 유난히 선명하고 언제나 산릉에서 만나게 되는 묘가 오늘도 비켜갈 수 없는 길, 가도 또
있고 또있는 묘의 봉분이 몸살을 앓는구마.
소나무숲을 지난다. 포개진 바위가 고개숙여 나그네를 맞는 것처럼 서 있는 산릉을 걷기도 하면서 봉우리를 오르고 내린다.
겹겹이 에워싼 산을 내려다 보면 여전히 장찬저수지가 큰붕어 그대로이고 산이 어우러진 호젖한 정취 만끽하기에 더없는 곳이다.
장룡산 0.3km의 이정목이 장룡산을 알린다. 장령산 휴양림 등산안내도와 장령산의 표지석이 있는 산정, 장령산이다.
[장령산 정상]
장령산은 옥천군 옥천읍과 군서면 이원면을 잇는 옥천의 명산이다. 장령산은 북쪽으로는 마성산이 지척에 보이며 남쪽으로는 대
성산, 장령산과 마주하여 솟아오른 서대산이 구비구비 넘실댄다.
헬기장을 지나.
[삼각점 394]을 지나
장룡산과 마주한 동쪽의 월이산(伊院里)이 우암의 태몽꿈을 꾸었다는 곳이기에 눈이 간다. 이원면에서 가장 가까운 산이다.
우암 송시열선생의 일화
우암선생은 서기 1607년 이원면 구룡촌(구룡촌 ; 현 龍坊里) 그의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으므로, 이 고장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가 태어난 곳에는 유허비가 있고, 그가 공부하던 곳에는 용문서당(龍門書堂 ; 현 龍門影堂)이 있으며, 이지당(二止堂 ; 일명 覺新書院)도 현재 남아 있다. 우암의 어머니 곽씨(郭氏)께서 우암을 잉태할 때 태몽을 꾸었는데, 월이산(伊院里)을 몽땅 꿀꺽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이처럼 우암선생은 처음 잉태될 태부터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예측케 하였다. 또 선생이 탄생하던 바로 그 시각에는 월이산이 웅장한 소리를 내고, 금강물의 색깔이 잠시 변했다고도 전한다. 일설에는 월이산 초목의 잎이 마르고 금강 물이 홍색으로 변했었다고도 전한다. 우암선생은 그의 탄생지요 외가가 있는 옥천군 이원면에서 본가인 회덕(懷德) 송촌(松村 ; 현 대전시 동구)으로 가서 자라면서 글공부를 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의 스승 김장생(金長生)이 죽자, 그의 아들 김집(金集)이 연산(連山 ; 현 충남 연산면)에 있었으므로, 회덕과 연산을 왕래하면서 면학에 힘썼다고 한다. 책과 점심 도시락을 싸들고 먼거리를 다니면서 공부를 하던 그는 매우, 근면히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실히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는 점심밥은 연산가는 길, 십리못미처에서 반만 먹고, 나머지 반은 다시 싸서 나뭇가지에 걸어 두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먹곤 하였다 한다. 우암선생이 용문서당에서 공부할 때의 이야기다. 어느 늦은 봄, 그는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근처 연못에서 개구리와 맹꽁이가 개골개골, 맹꽁하며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정신을 집중하여 독서하기가 곤란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그는 연못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무리에게 "이놈들 너희들 소란에 공부를 할 수가 없구나, 썩 그치지 못하겠느냐?" 하고 외치니 그 시끄럽던 개구리, 맹꽁이 울음소리가 뚝 그쳐서 조용해지더라고 한다. 그래서 조용한 속에서 열심히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회덕에서 연산으로 다니면서 공부하던 시절 어느 해 동짓날에 집에서 팥죽을 쑤었는데, 그는 그의 스승에게 가져다가 대접하기 위하여 그 팥죽을 회덕에서 싸들고서 연산까지 추운 겨울에 달려갔다. 그가 가지고 간 팥죽이 아직 식지 않고 따뜻하여 스승이 "네가 스승 존경하는 태도가 남다르니 어찌 팥죽이 식겠느냐? 사제지간의 정이 이리 따뜻하니 너는 장차 크게 될 인물인가 보다" 고 칭찬을 했다 한다. 우암선생은 그후 장원급제하여 조선중기의 대유학자로 사조(四朝 ; 네 임금)에 걸쳐서 벼슬하였고, 북벌계획을 세운 인물이며, 노론의 영수로 그 역사적 위치가 대단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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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봉과 대성산으로 이어지는 산능선이 충북 옥천군과 충남 금북면과 금산군의 경계를 그으며 서대산으로 이어진다. 산아래 금산군
과 금북면의 분지를 이룬 상곡천이 흐르는 산과 분지가 펀치볼이다.
장천저수지가 미꾸라지같이 보이기도 하고 가는데까지 가보자 했는데 어느덧 태양은 붉은빛으로 저 산을 넘어 저물고
[566.4 봉]을 지나
[금산고개]에서 하산하기로 한다. 내려가려면 멀 것 같은데 마땅히 더 갈 시간도 용기도 없다. 오늘은 여기서 내려가라고
내마음을 잡고 흐릿한 산길을 돌아 내려간다.
가다 없어지고 그 흔적을 애써 찾아 내려가며 작은 또랑을 넘고 내려선다. 쓰러진 잡목에 갈길을 잡고 멀게만 느껴진다. 등에
스며든 땀냄새를 닦고 산에서만 바라보던 장찬저수지 길을 걸으며 저 건너 보이는 유난히 밝은 장찬리 마을 사람들이 세상 부러울
게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고기 굽는 냄새와 얘기 소리가 들리는 산언덕 팬션에도 저물었기에 불이 켜져 주말에 이런 곳에서 한 번쯤 머물고 싶은 생각에 콕
찍어 놓았다 이 다음에 더 세월이 들면 한 번 와 보리라 .
저수지의 수문을 지나 건진천이 흐르는 도로따라 걸어 이원역으로 왔다 되돌아 가 새마을금고 앞에서 옥천가는 직행버스에 오른다.
옥천에서 21시 42분 기차를 예매하고 1시간을 기다려야 하기에 순대국집에서 저녁을 먹고 기차에 올랐다. 붕어모양의 장찬저수지
가 장룡산에 올라 갈 것 같은 엉뚱한 마음이 떠나질 않고 일년만에 나선 옥천의 산에서 걷던 이미지들이 스쳐간다. 옥천읍사무소에
소개한 장룡산에 올라 해맞이를 한다면 고산준봉(高山峻峰)의 장관에 비추어도 손색없는 장관의 파노라마를 감상 할 수 있을 것이라
고 하는 말도 이해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