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성(姓)의 연원(淵源)
성은 혈족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으로 이것이 언제부터 발생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미 인류사회가 시작되는 원시시대부터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원시사회는 혈연을 기초로 하여 모여 사는 집단체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처음에 모(母)만 확실히 알 수 있고 부(父)는 알 수 없는 것 이었다. 그러므로 처음에 모계 혈연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이른바 모계사회가 나타났다가 뒤에 부계사회로 전환되었거니와, 모계(母系)사회건 부계(夫系)사회건 원시사회는 조상이 같은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고 모여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시사회를 씨족사회라고 하는 것이다. 씨족사회는 씨족 전원이 힘을 합하여 수렵·어로·농경에 종사하고 외구의 침입도 공동으로 방어 하였다. 그리고 씨족사회는 그 집단을 통솔하기 위하여 씨족원 중에 가장 경험이 많고 덕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씨족장으로 삼고, 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씨족회의를 열어서 결정하였는데, 이 씨족회의는 자못 민주적이어서 씨족원은 누구나 다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하고 씨족 전원의 찬성으로 결정하였다. 씨족사회도 시대가 흐르고 인구가 증가하고 대(代)가 멀어짐에 따라 자연히 같은 씨족중에도 혈통이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여 살게 되어 여러개의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씨족집단이 나타나게 되자 자연히 가까이 있는 씨족들끼리 서로 합하여 더 큰 사회를 조직하고, 생산물을 교환하고 외적을 방어하였는데, 이러한 사회를 우리는 부족사회라 한다. 부족사회에서는 씨족장들이 모여서 부족장을 선출하고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으며, 부족국가는 다시 부족연맹체를 조직하고 부족연맹의 왕을 선출하여 국가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오늘날사회학·역사학의 상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같이 인류사회는 혈연에서 출발하고 혈연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씨족에 대한 관념이 매우 강하였다. 자기 조상을 숭배하고 동족끼리 서로 사랑하고 씨족의 명예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리고 각 씨족은 다른 씨족과 구별하기 위하여 각기 명칭이 있었을것이며, 그 명칭은 문자를 사용한 뒤에 성으로 표현하였다. 동양에 있어서 처음으로 성을 사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자를 발명한 중국이었으며, 처음에는 그들이 거주하는 지명이 산명, 강명으로 성을 삼았다.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 있었으므로 성을 강씨(姜氏)라 하고, 황제의 어머니가 신수(신水)에살았으므로 성을 신씨(신氏)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의 어머니가 요허(姚虛)에 있었으므로 성을 요씨(姚氏)라 한 것은 이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2.우리나라 성의 유래
우리나라의 성은 모두 한자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사용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없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등 우리나라 옛 사헌에 의하면, 고구려는 시조 주몽이 건국하여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기 때문에 고씨(高氏)라 하고, 주몽은 그 신하 재사(再思)에서 극씨(克氏), 무골(武骨)에게 중실씨(仲室氏), 연거(연居)에게 소실씨(小室氏)의 성을 사성하였다 한다. 백제는 시조 온조(溫祚)가 부여 계통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부여씨(扶餘氏)라 하였다 하며, 신라는 박(朴)·석(昔)·김(金) 3성의 전설이 있고, 제 3대 유리왕 때에 6부(6촌)에 사성하여 량부(알천양산촌)에 이씨, 소작부:돌산고허촌)에 최씨-崔氏(유사에는 정씨-鄭氏), 점량부(무산대수촌)에 손씨, 본피부(취산진지촌)에 정씨(유사에는 최씨), 한지부(금산가리촌)에 배씨, 지북부(명활산고랑촌)에 설씨의 성을 주었다고 하며, 김관가랑의 시조 수로왕도 황금 알에서 탄생하였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이와 같이 삼국은 고대 부족국가 시대부터 성을 쓴 것처럼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모두 중국문화를 수입한 뒤에 지어낸 것이다. 신라 진흥왕 시대(540~576)에 건립한 경남 창령, 서울 북한산, 함흥 황초령, 단천 마설령에 남아 있는 진흥왕의 네 순수비(巡狩碑)와 진지왕 3년(578)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의 무수오작비(戊戍塢作碑)와 진평왕 시대(579~632)에 건립된 경주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등에 나타나 있는 인명을 보면 성(姓)을 쓴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각 비문에서 한 두가지 예(例)를 들면 다음과 같다. 창령비(昌寧碑)::진흥왕 22년, 561년 건립:: 마운령비(磨雲嶺碑)::진흥왕 29년 건립:: 훼(喙)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훼(沙喙) 거사부지(居社夫智) 이간(伊干) 사훼(沙喙) 심표부지(心表夫智) 급척간(及尺干) 사훼부(沙喙部) 령력지(령力智) 간( 干) 촌주(村主)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 본부(本部) 가량지(加良知) 소사(小舍) 이상 표시한 것처럼 성(姓)은 없고 우리말로 된 이름 뒤에 그 사람의 본(本)이라 할 수 있는 소속부명 또는 촌명을 썼는데, 훼부(喙部)는 량부(梁部) 즉, 알천영산촌(閼川楊山村)이요, 사훼부(沙喙部)는 급량부(及梁部) 즉, 돌산고허촌 (突山高墟村)이요, 본 부(本 部)는 본피부(本彼部) 즉, 취산지지촌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 밑에 붙어 있는 지(智)· 지(知)는 존칭이오, 일척간(一尺干)·이간(伊干)· 간( 干)·대아간(大阿干)·내말(奈末)·대사(大舍)·소사(小舍)는 경위(京位) 즉 중앙관위요, 간( 干)·일벌(一伐)은 외위(外位) 즉 지방인에게 주는 관위다. 만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한 바와 같이 유리왕 때에 6부에 사성한 것이 사실이라면 훼부(喙部)는 이씨(李氏), 사 부(沙 部)는 최씨(崔氏), 본피부(本 部)는 정씨(鄭氏)의 성을 써야 할 것인데, 성을 쓰지 않고 소속 부명과 이름만 쓴 것을 보면 6부의 사성(賜姓)은 진평왕 이후의 일일 것이며, 또 우리는 성보다 본을 먼저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한서(漢書)≫ 이하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나 있는 삼국시대의 국왕과 기타 인명을 보면, 고구려는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주몽왕(朱蒙王)이 보이고,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에 추(騶)와 관(官)-태조왕· 성( 成)-차대왕(次大王)·백고(伯固)-신대왕(新大王)및 대가 승(大加 升)이 보이고, ≪삼국지≫ 고구려전·공손도전(公孫度傳)에도 추(騶)·관(官)· 성( 成)·백고(伯固)와 함께 이이모(伊夷模)-고국천왕(故國川王)·위관(位官)-산상왕(山上王)과 기타 대가(大加)·우거(優居)와 주부(主簿) 연인(然人)등이 보이고, ≪진서(晉書)≫ 모용 전(慕容傳)에 소(고국원왕(故國原王))·安(광개토왕-光開土王) 이 보이는데, 모두 성을 쓰지 않고 이름만 기록 되었으며, 남북조 시대의 ≪상서(床書≫에 이르러 장수왕(長壽王)을 고련(高璉)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고구려 왕실의 성을 고(高)씨로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익(高翼)·마루(馬婁)·손수(孫漱)·구(仇)·동등(董騰)등 장수왕이 보낸 사신도 모두 성을 썼다. 그리고 백제는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여영(餘暎)-전지왕(典支王)·여비(餘毗)-반유왕(畔有王)·여경(餘慶-개로왕(蓋鹵王)·여융(餘隆)-무령왕(武寧王)·여명(餘明)-성왕(聖王)·여창(餘昌)-위덕왕(威德王) 등과 같이 백제 왕실의 성을 여(餘)씨로 표시하였다가(진서(晉書)·상서(床書)·남제서(南齊書)·량서(梁書) ·진서(陳書)·위서(魏書)·주서(周書)·남사(南史)·북사(北史)) 29대 무왕(武王)-부여장(扶餘璋) 부터 부여(扶餘)씨로기록하였다(수서(隋書)·당서(唐書)),그리고 신라는 23대 법흥(法興)왕에 해당하는 임금을 ≪량서(梁書)≫에 모명진(募名秦)으로 기록하였는데, ≪남사(南史)≫와 ≪통전(通典)≫에는 이것을 성모(姓募) 명진(名秦)-모진(募秦)으로 기록하여 신라 왕실의 성을 모(募)씨로 표시하고 ≪북제서(北齊書)≫에 진흥(眞興)왕을 김진흥(金眞興)으로 기록하여 처음으로 김(金)씨가 보인다. 이상 중국 정사(正史)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419~491)부터,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346~376)부터, 신라는 진흥왕시대(540~576)부터 성을 쓴 듯하다. 백제는 마한(馬韓) 50여개국 중의 한 나라로서 오랫동안 부족국가 생활을하다가 4세기 초에 마한(馬韓) 여러나라를 통일하고 근초고왕 27년(372)에 처음으로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어중국과 교류하고, 신라도 진한(辰韓) 12국 중의 한 나라로서 오랫 동안 부족국가 생활을 하다가 4세기 후반 내물(奈勿)왕 시대(356~402)에 려(麗)·제(濟) 양국과 접촉 하였으나 국력이 미약하였다. 6세기 중엽 진흥왕 시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지금의 경상도 지방을 통일함과 동시에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고 진흥왕 25년(564)에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처음으로 직접 중국과 교류 하였으므로 신라는 진흥왕 시대, 백제는 근초고왕 시대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 고 할 수 있으나, 고구려는 장수왕 시대부터 성을 쓰기 시작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3국 중에 지일 먼저 일어나고, B.C 107년에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인 현도군(玄도郡)이 고구려지방에 설치되어 건국 이전부터 중국인과 접촉하였으며, 전한(前漢) 말기 왕망(王莽)시대(9~25)부터 중국과 교통하여 전한(前漢)·후한(後漢)·위(魏)·진(晉)의 문화를 수입하고,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전해 오고 또 대학을 설치하여 장수왕 이전의 그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장수왕, 이후의 기록이기는 하나≪위서(魏書)≫(북조-北朝) 고구려전에 주몽의 전설을 자세히 기록하고 성을 고(高)씨라 하였으며,≪삼국사기≫에도 대무신왕(大武神王) 때의 좌보(左輔) 을두지(乙豆支), 좌보(左輔) 송옥구(松屋句), 태조왕 때의 좌우보(左右輔) 직도루(稷度婁)·고복장(高福章),신대왕(新大王)때의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 산상왕 때의 국상 을파진(乙巴秦), 동천왕 때의 국상 고우루(高優婁)·명림어수(明臨於漱), 봉상왕(烽上王)때의 북부소형(北部小兄) 고노자(高奴子)등 장수왕 이전에 성을 쓴 사람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면, 고구려는 장수왕 이전에 이미 성을 쓴 듯 하나, 어느 때부터 성을 쓰기 시작하였는지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나라가 중국식 한자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수입한 이후의 일로서, 고구려는 그 사용 연대를 확실히 규정할 수 없으나, 대개 장수왕 시대부터 중국에 보내는 국서(국國書)에 고(高)씨의 성을 썼으며,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여(餘)씨라 하였다가 무왕 때부터 부여씨(扶餘氏)라 하였으며, 신라는 진흥왕 시대부터 김성(金姓)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국민 전체가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먼저 왕실에서 사용하고 다음에 귀족 관료층에서 사용하였는데,≪삼국사기≫와 ≪당서(唐書)≫ 이전의 중국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三國)의 성을 보면 왕실의 성을 쓴 사람이 가장 많이 나타나 있다. 고구려는 고씨(高氏), 백제는 여씨(餘氏), 신라는 김씨(金氏)의 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고, 그 밖에 고구려는 을(乙)·예(禮)·송(松)·우(于)·주(周)·마(馬)·손(孫)·동(董)·예(芮)·연(淵)·명림(明臨)· 지(乙支)등 10여종, 백제는 사(沙)·연(燕)·해(解)·진(眞)·국(國)·목(木)·묘(苗)의 8족과 왕(王)·장(張)·사마(司馬)·수미(首彌)·흑치(黑齒) 등 10여종, 신라는 박(朴)·석(昔)·김(金) 3성과 6부의 이(李) ·최(崔)·정(鄭)·손(孫)·배(裵)·설(薛)의 6성 및 장(張)·요(姚) 등 10여종에 불과하다. 신라의 경우, 앞에 든 진흥왕순수비에 성을 쓴 사람이 하나도 없고, 또 ≪삼국사기≫에도 성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아니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보면 귀족·관료들도 다 성을 쓴 것은 아니었다. 주로 중국에 왕래한 사람, 예를 들면 김인문(金仁問), 김정종(金貞宗), 박우(朴祐), 김지량(金志良),김의충(金義忠), 등과 같이 사신이 되어 당(唐)나라에 갔다 온 사람, 최치원(崔致遠)·최리정(崔利貞)·박계업(朴季業)·김숙정(金叔貞)등과 같이 당나라에 유학한 사람, 장보고(張保皐)와 같이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청해진 대사가 되어 동야의 제해권(制解權)을 잡고 당나라와 일본에 무역을 한 사람들이 성을 사용하였으며, 일반 민중은 신라 말기까지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신라 말기 후삼국의 대동란을 당하여 평민으로서 각지에서 일어난 상주(尙州)의 원종(元宗)·애노(哀奴), 죽주(竹州)-죽산(竹山)의 기명(箕蓂), 북원(原州)의 량길(梁吉)-良吉,태봉왕 궁예(弓裔)의 부장인 홍언(弘彦) 명귀(明貴), 후백제왕 견명(甄蓂)의 부장인 관흔(官昕)·상귀(相貴)·상달(尙達)·웅환(熊奐), 고려 태조 의 부장인 홍술(弘述)·백옥(白玉)·삼웅산(三熊山)·복사귀(卜沙貴)등은 모두 성을 쓰지 아니하였다. 이 중에 고려 태조의 부장인 홍술(弘述)·백옥(白玉)·삼웅산(三熊山)·복사귀(卜沙貴)는 고려 태조를 추대한 개국공신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의 초명으로서 각각 부계홍씨(缶溪洪氏) 경주배씨(慶州裵氏)·평산신씨(平山申氏)·목천복씨(목川卜氏)등의 시조가 되는데, 그들이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으로 개명한 것은 고려 건국 후 그들이 귀하게 된 뒤의 일이며, 아마 태조로부터 사성되었을 것이다. 고려 태조는 사성한 예가 많이 있다. 지금의 강릉지방을 관장하고 있던 명주장군(溟州將軍) 순식(順式)이 귀순하자 태조는 왕(王)씨의 성을 주고, 발해태자(渤海太子) 대광현(大光顯)이 귀순하자 또한 왕(王)씨의 성을 주고, 신라인 김신(金辛)이 태조를 보필하여 권능이 많은 까닭에 권씨(權氏)의 성을 주어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또 ≪동국흥지승람(東國興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개국한 뒤 목천(木川) 사람들이 자주 반란을 이으키므로 태조는 이를 미워하여 우(午)·마(馬)·상(象)·돈(豚)· 장(獐)과 같은 짐승 의 뜻을 가진 자로 성(姓)을 주었는데, 뒤에 우(午)는 우(于), 상(象)은 상(尙),돈(豚)은 돈(頓),장(獐)은 장(張)으로 고쳤다는 설이 있다.
3.우리나라 성씨(姓氏)의 특성
우리나라의 성씨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나, 성명(姓名)의 구성과 개념에 특이하고 고유한 점이 많은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명을 살펴보면 성과 본관은 가문(家門)을, 명(名)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행렬(行列)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字)로 구성되어 있어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계대(系代)까지 나타나,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성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국인의 성은 남계(男系)의 혈족을 표시하는 칭호로서, 말하자면 한국의 성은 가족 전체를 대표하는 공칭(共稱)이 아니라 원래의 가계(家系) 그 자체를 본위로 한 칭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된 가정이 변동이 되더라도 즉, 어떤 사람이 혼인을 하여 갑가(甲家)에서 을가(乙家)에 입적을 하는 경우에도 성은 변하지 않는다. 호주가 이(李)성인데도 처는 김(金)성 이고, 며느리는 박(朴)성이라는 식이다. 중국 역시 한(漢)나라 때에는 그와 같은 방법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은 출가한 여자라 할지라도 부족(父族)과 부족(夫族)의, 두 가족에 속하지 않는다는 관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성을 다만 가정을 표징한 것으로, 가령 부모의 성이 김(金)이라면 자식의 성도 김(金),새로 온 며느리도 김(金)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안다. ㅡ 끝 ㅡ
:: 광산김씨(光山金氏) ::
▣ 유래
시조 : 김흥광(金興光):시조 김흥광(金興光)은 신라 신무왕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장차 국난이 있을것을 미리 알고 현재의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살았다. 그리하여 그 후손들이 본관을 광산으로 하게 되었고 후손들 가운데 평장사가 계속 8명이 배출되자 사람들이 그곳을 평장동이라 불렀다.
▣ 인물
10세손 김체의 아들 김위(金位)와 김주영(金珠永) 형제 대에서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져 김광세(金光世)와 김광존(金光存)의 양대산맥으로 이어진다. 김광세는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되고 그의 아들 김경량(金鏡亮)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손자 김수(金須)는 삼별초의 난 때 순절하였으며, 김주정(金周鼎)은 고려 충렬왕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김수의 손자인 김광재(金光載 : 문정공 김태현의 셋째 아들)는 공민왕 때 난정이 시작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가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상(居喪)하니 왕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에 영창방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는 정표(旌表)를 세우게 했다. 세종 때에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지낸 김예몽(金禮蒙)의 아들 김성원(金性源)은 세조 때 동국여지승람(東國與之勝覽)을 편찬했고, 손자 김구(金絿)는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의 혁신정치에 동조한 소장파로 김정(金淨), 김식(金湜), 한충(韓忠) 등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으며 뛰어난 필법과 명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집필했고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의 마을 이름을 붙여 인수체(仁壽體)란 필체가 생겨났다. 당적보(黨籍譜)에 의하면 김구(金絿)는 중국 사람들이 자기의 글씨를 귀중히 안다는 말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않아 세상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중종 때의 우의정(右議政) 김극성(金克成)은 30여 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경륜과 계책이 비상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날렸다. 김광존의 인맥을 살펴보면 그의 현손 김진이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김진의 증손 김약채(金若采)에서부터 조선 시대의 명맥이 이어졌다. 고려말에 문과에 급제한 김약채는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를 지냈고, 그의 동생 김약항(金若恒)은 공민왕 때 대사성(大司成)으로 사신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표문(表文)이 공손치 못하다고 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양자강변에 유배되었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뒤에 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가족에게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늙은 여종이 부인이라고 핑계하고 남경까지 가서 시체를 찾아왔다. "용재총화"에 보면 김약항의 아들 김처(金處)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죽었으므로 충격을 받아 미친병이 들어 소리내어 울고 밤에는 싯귀(詩句)를 길게 읊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비틀거리고 다녔으며, 김허(金虛)는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 벽에다가 효경(孝經)의 상친장(喪親章)을 써서 붙이고 날마다 바라보며 읽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이도록 울기를 3년동안 조금도 쉬지 않았으니 그 비참하게 우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김약채의 증손자 김국광(金國光)은 성종 때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좌리일등공신(佐理一等功臣)으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찍이 황희(黃喜)가 그를 한번 보고 큰 인물로 인정하여 자기 손녀(孫女 : 소윤 황보 신의 딸)로서 아내로 삼아 주었고 "작게 성취할 사람은 아니다"하고 그를 대할 때 반드시 갓을 썼다고 한다. 세조가 상정국(詳定局)을 열어 당시의 학문이 뛰어난 신하를 뽑아 조종의 옛 제도를 참작하고 시대의 사정에 맞게 가려내어 "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할 때 그도 뽑히어 뛰어난 업적을 남겨 세조가 "국광같은 사람은 참으로 문과 무 를 겸비한 재사이다" 하고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친필을 써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느 날은 편전에 있으면서 손수 자기 밥을 떠 먹여 주었다고 한다. 김국광의 동생 김겸광(金謙光)은 성종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 하는 데 공을 세워 좌리삼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김국광의 아들 김극뉴는 대사간(大司諫)을, 김극복(金克福)은 찬성(贊成)을 역임하였다.김겸광의 아들 김극핍은 연산군 때 바른 말을 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고산현(高山縣)으로 유배되었고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을 받아 일생을 귀양지에서 생활했었다. 김극뉴의 손자 김개(金鎧)는 명종 때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증손 김계휘(金繼輝)는 선조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여 국사가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했다. 김계휘의 동생 김은휘(金殷輝)가 일찍이 초야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광해군이 세자로서 동궁에 거처하게 되자 세자빈의 아버지인 류자신(柳自新)이 궁중의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은휘(金殷輝)는 그의 무례함을 논책하면서 왕봉(王鳳 : 한나라 성제의 외삼촌으로 정권을 잡아서 무례한 행동으로 임금의 거처인 궁정을 빌린 일이 있었다)의 고사에 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피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익필(宋翼弼)이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론의 증오를 받아 멸문의 궁지에 몰리자 10년 동안이나 먹여 살려 선조의 잘못으로 누를 입는 현량(賢良)들을 그늘에서 구원하였다.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조선 예학(禮學)의 종주(宗主)로 가문에 명문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게 한 장본인이다. 1548년(명종 3년) 대사헌(大司憲) 김계휘(金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에 8문장가로 이름난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에게 성리학을 전수받아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천성이 겸손하며 어질고 후하여 자연히 도(道)에 가깝고 학문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종자(種子)와 주자(朱子)를 법으로 삼아 세상살이의 화려함을 싫어하였으며 당시의 예(禮)에 관한 질문은 모두 그에게로 왔다. 인조반정 때 맨 먼저 장령(掌令)에 임명하면서 안거(安車 : 늙고 병든 사람이 편안하게 탈 수 있는 수레)와 임금의 친서를 보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병든 몸으로 여러 훈신들에게 글을 보내기를 "시종(始終) 삼가하여 임금의 덕을 잘 보도하며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사로이 가까운 내시, 궁녀 등을 경계하며 염치를 존중하고 검약을 몸소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의 글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 초조해 했다고 한다.벼슬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에서 생을 마치며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언을 남겼으니,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 모습이 아니니 쓰지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대에 이르더라도 의(誼)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그가 남긴 "경서변의(經書辯疑)" 8권, "의례문해(疑禮問解)" 8권,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 1권, "가례집람(家禮集覽)" 3권, "상례비요(喪禮備要)" 1권 등 총21권의 저서는 한국의 예전(禮典)으로 평가된다.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金集)에게 이어지고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김집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보다 특이하여 충신효제(忠信孝悌)로서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았으며, 이치를 탐구하고 경(敬)를 주장하는 것으로 도학의 터전을 삼았다. 1646년(인조 24년) 산적 류탁(柳濯)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에게 류탁이 말하기를 "김승지(金丞旨 : 김집)의 집을 지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흉악한 무리들도 어진 사람을 두려워 하고 피할 줄은 안다"하였다. 그는 아버지 김장생을 40여 년간 모셨는데 그 부자의 법도를 지켜 아들이 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몸이 앓는 일이 있어도 단정히 앉아서 대답한 것이라든지, 각상(各床)과 각방(各房)에서 밥을 먹을 때 아버지의 젓가락 놓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미리 밥상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이조참판(吏曹參判) 김반(金槃: 김집의 동생)의 아들 김익희(金益熙)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화의를 반대했고 왕을 호위하여 남한산성에 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싸웠으며, 그의 동생 김익겸(金益兼)은 병자호란 때 어머니 서씨(徐氏)를 데리고 강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남문에 올라가 자폭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숙종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주역인 김익훈(金益勳 : 김반의 아들로 김익겸의 동생)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정권을 다시 잡자 강계로 유배되었다.현종 때의 예조참판(禮曹參判) 김익경(金益炅)은 죽은 인선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服喪) 문제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양성(陽城)으로 귀양갔다. 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김만기(金萬基)와 효자 김만중(金萬重)은 김익겸의 아들로서 형제가 나란히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명신이다. 특히 김만중은 유복자로 태어남을 평생의 한으로 삼고 홀어머니 윤씨(尹氏)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밤낮으로 어머니와 얘기하며 동물 흉내와 어린이 흉내까지 내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남해의 유배지에서 쓴 한글소설 "구운몽(九雲夢)"은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란 내용으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그밖의 인물로는 중종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혼인하여 광천위(光川慰)에 봉해진 김인경(金仁慶)과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안동지방의 학문융성 창도자로 알려진 김언기(金彦璣)가 유명했고, 전적(典籍) 김세우(金世愚)의 아들 김규는 명종 때 문과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의 명장 김덕령(金德齡)은 충절로 가문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이다. 그는 1567년(명종 22년) 광주 석지촌에서 김붕섭(金鵬燮)의 아들로 태어나 성리학의 대가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귀(李貴)의 천거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고 의병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수차에 걸친 전쟁에 공을 세웠다. 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용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찍이 이귀(李貴)가 그를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과 같고 용맹은 관우보다 낫다"고 하였다. 1596년(선조 29년)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 : 당시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했다. 그가 임전했을 때는 항상 철퇴 두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근이나 되어 팔도에서 그를 신장(神將)이라 불렀고, 왜군들도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다고 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왜장 기요마사(加藤淸正)는 그 명성을 듣고 몰래 화가를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으로 훌륭한 장군이다"하고 항상 계엄하였고, 뒤에 김덕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 양호(兩湖)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한다.임진왜란 때의 김만수(金萬壽), 김천수(金千壽), 김백수(金百壽), 김구수(金九壽) 4형제는 의병을 일으켜 유극량(劉克良)의 군대와 장단에서 합세하여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김광운(金光運)과 김두남(金斗南)은 진주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였고, 선조 때 대북의 지도자였던 김질간(金質幹 : 이조 참판을 역임)은 "동몽훈설(童蒙訓說)"을 저술한 김진우(金震羽), 호남 8문장의 한 사람인 김공선(金公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그외 선조 때 포도시(葡萄詩)로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김영남(金潁南)과 숙종 때 예서에 능했고 "옥산유고(玉山遺稿)"를 남겼던 김우형(金宇亨 : 공조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감)이 뛰어났으며, 김진(金搢)은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내고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두문불출하고 학문에만 진력했다.영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한 김양택(金陽澤)은 부제학(副提學)과 대사성(大司成), 우의정을 거쳐 1776년(영조 52년) 영의정에 올랐으며, 김상복(金相福)은 영의정을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한말에 와서는 금위대장(禁衛大將) 김기석(金箕錫)과 학문과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던 김지수(金志洙) 등이 가문의 맥을 이었고, 김재풍은 친러시아파 세력에 쥐어 허덕이는 국권을 회복하는데 앞장서서 한말 풍운에서 고절(古節)있는 대인(大人)으로 추앙받았다. 김익현(金翼鉉)의 아들인 김영덕(金永悳)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한말에 죽음으로써 한일합방을 반대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김영숙(金永肅)과 함께 명문 광산김씨를 더욱 빛냈다.
▣ 과거급제자(조선시대)
김상정(金相定, 1722 壬寅生) : 문과(文科) 영조47년(1771) 정시2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재전(金在田, 1785 乙巳生) : 문과(文科) 순조30년(1830)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공현(金公鉉, 1794 甲寅生) : 문과(文科) 순조31년(1831) 식년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양현(金亮鉉, 1838 戊戌生) : 문과(文科) 고종23년(1886) 정시 갑과(甲科) 장원급제 김수석(金壽錫, 1672 壬子生) : 문과(文科) 영조1년(1725) 정시2 병과(丙科) 김수집(金壽鏶, 1685 乙丑生) : 문과(文科) 영조3년(1727) 증광시 을과(乙科) 김두상(金斗象, 1744 甲子生) : 문과(文科) 영조49년(1773) 정시 병과(丙科) 김태현(金台鉉, 1784 甲辰生) : 문과(文科) 철종5년(1854) 별시 을과(乙科) 김경현(金璟鉉, 1869 己巳生) : 문과(文科) 고종28년(1891) 별시2 병과(丙科) 김화중(金和中, 1721 辛丑生) : 문과(文科) 영조30년(1754) 증광시 병과(丙科)등 모두 38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문과 67명, 무과 7명, 사마시 275명, 역과15명, 의과4명, 음양과1명, 율과 1명, 주학19명)
▣ 본관 연혁
본관소재지 : 광주광역시광산(光山)은 전라남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무진주(武珍州)이다. 신라시대에 이르러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하고 군현을 정비하면서 무진주를 광주(光州)로 개편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995년(성종 14) 관제개혁 때 해양도(海陽道) 소속이 되었다가 1259년(고종 46) 기주(冀州: 일명 冀陽州)라 고쳤으며, 충선왕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어 공민왕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1430년(세종 12)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성종 때에는 광산현으로 강등되었고, 연산군 때 주(州)로 환원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10년 광주면이 되었고, 1935년 광주읍(光州邑)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1988년 송정시와 함께 광주직할시에 편입되었고, 199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개편되었다
▣ 인구수 : 통계청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광산김씨는1985년에는 총 174,912가구 750,702명,2000년에는 총 258,936가구 837,008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