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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어울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어울림
백두대간 개관
우리 땅의 물줄기 가른 산줄기, 족보기술식으로 정리한 전통 지리개념
글 :이우형 고지도 연구가
우리나라의 옛 지도들은 산줄기 지도라 할 수 있다. 살펴보면 연결되지 않는 산줄기는 없다. 함경북도의 두만강 끝에서 목포의 유달산까지도, 평안북도 신의주 앞산에서 부산의 금정산을 지나 바다 끝의 다대포 몰운대까지도 줄줄히 이어져 있다. 그저 모든 산줄기를 연결해 놓고 보자는 식의 지도인 것 같다.
그런가 하면 산줄기라고는 없을 듯한 평야지대에도 뚜렷한 산줄기를 그려 놓았다. 예를 들면 백두산에서 이어져온 산줄기가 속리산에서 서쪽으로 가지쳐 수원의 광교산으로 이어지고, 다시 김포평야를 남북으로 가르며 강화를 마주보는 문수산성까지 연결되었다.
이 산줄기를 찾아 1:25,000 지형도를 가지고 답사해 보면, 수원 북쪽 광교산(582m)에서 안양 의왕 군포를 북으로 두고 해발 100여 m의 낮은 고개에서 안산의 수리산(475m)으로 건너뛰고, 다시 북쪽으로 광명시와 인천을 가르는 낮은 구릉으로 이어지다가 경인고속국고를 가로질러 철마산으로 가서는 계양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부터의 산줄기는 지형도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산줄기이다. 100m도 채 되지 않는 해안선의 낮은 구릉을 용하게 연결시켜 북으로 가현산 학운산 수안산 오봉산으로 이어져 것고개에서 문수산(376m)으로 연결되어 있다.
비단 김포평야의 산줄기만이 아니다. 이와 같은 산줄기는 전라도의 평야지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산줄기 표현의 옛지도는 공공도서관에만도 수백 점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 1557년경에 제작되어 전도류(全圖類)로서 가장 오래된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사편찬위원회 소장·국보 제284호)를 비롯하여 그 이후에 제작된 정상기(鄭尙驥)유형의 동국지도(東國地圖)인 「조선팔도도」(朝鮮八道圖), 또는 군현도(郡縣圖)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같은 맥락을 이루어 똑같은 산줄기를 한결같이 그려 놓았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도 이와 같은 지형 표현의 전통기법을 계승하여 「청구도」(靑邱圖)와 「동여도」(東與圖), 그리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제작하였다. 「대동여지도」는 보다 정확하고 상세한 산줄기 물줄기 지도로서 거대한 지형지세도(축척 1:216,000·남~북 660cm)로 정립시킨 것이다.
그러면 이 산줄기들은 지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닌 산줄기인다. 또 산줄기라 할 수 없는 산맥들은 왜 지도상에 그려 놓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의 옛지도는 지형의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나라 땅의 미약한 하나의 능선일 망정 그 줄기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연결되어 어디로 이어졌는지 뚜렷하고 명쾌하게 일러 주고 있다. 아울러 산줄기와 어루른 물줄기도 그 시작부터 지나치는 고을과 고을을 일러 주고, 어디고 흘러 가는가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지도는 옛것이나 지금의 것이나 다양한 선과 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같다. 이 선들은 특별히 선택된 선으로서 그 의미 부여가 당연하고 명확한 것들이다. 상식의 범주에 있는 것으로 사실에 입각한 것이며, 이용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 의식을 담은 것이어서 생활 편의에 이용도가 가장 높은 것이며 정보적 차원의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옛지도에 그려진 산줄기는 백두대간을 위시하여 아무리 미약한 김포평야의 산줄기라 하더라도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 편의와 직결된 의미있는 선이라는 것이다. 자연히 지도는 그 땅에 대한 그 땅 사람들의 공통의식을 그대로 담고 있어야 지도로서의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우리 옛지도에 나타난 산맥을 글로 정리한 것이 1800년경 찬표된 산경표(山經表)다. 산경표는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이 동국지도류의 산줄기 흐름을 토대로 <문헌비고>의 ‘산수고’(山水考)를 집필한 내용을 가지고 누군가가 찬표한 것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대표적인 본(本)은 세 가지가 있다. 규장각의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 ‘산경표’,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의 <여지편람>(輿地便覽)중의 ‘산경표’, 영인본으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崔南善)가 1913년 간행한 <산경표> 등이 있으나 모두가 같은 내용이다.
그 내용은 전국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대간),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하고, 여기에서 다시 가지쳐 뻗은 기맥(岐脈)을 기록했다. 모든 산맥의 연결은 자연지명인 산이름, 고개이름 등으로 하고, 족보기술식으로 하였다.
그 산맥 이름과 순서는 ①백두대간(白頭大幹) ②장백정간(長白正幹) ③낙남정맥(洛南正脈) ④청북정맥(淸北正脈) ⑤청남정맥(淸南正脈) ⑥해서정맥(海西正脈) ⑦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⑧한북정맥(漢北正脈) ⑨낙동정맥(洛東正脈) ⑩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⑪한남정맥(漢南正脈) ⑫금북정맥(錦北正脈) ⑬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⑭금남정맥(錦南正脈) ⑮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서 모두가 15개다.
여기에 나타난 백두대간이라는 산맥 이름은 신라말 도선(道詵)의 <옥룡기>(玉龍記)를 비롯하여 이익(李瀷·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그리고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등에서 자주 보였던 산맥 이름으로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내린 우리 땅의 중심산맥이라는 것이다.
모든 산맥은 중심산맥인 백두대간에서 다시 가지치고 있는데, 북쪽과 남쪽의 연결 산맥인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을 그 순서에서 우선하고 나머지는 북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정하고 있다.
이들 산맥 이름의 특징은 산이름으로 된 것이 2개(白頭, 長白), 그 지방이름으로 된 것이 2개(海西, 湖南), 강이름과 관계된 것이 11개로서 전체적으로 산맥이름을 강이름에서 따와 그 강의 방위로 위치를 표시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산맥의 순서를 정하고 이름을 강이름과 관계한 까닭은 모든 정맥은 관계한 강의 경계능선인 분수령으로 정의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그 강의 위치, 유역의 넓이, 모양, 그리고 그 세력을 쉽게 읽어 국토의 전체적 경영과 활용에 있어 정보적 입장에 있게 한 것이다.
특히 산맥의 이름을 강이름과 연관하여 부여한 것은 산이 곧 물과 관계된 자연의 섭리로서, 그 강을 이룬 물의 산지(産地)라는 지극한 상식을 포함하였다. 미루어 산맥의 원리 인식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랜세월 그 땅과 함께 하며 살아오며 얻어진 축척된 지리인식이며 이에 동화된 생활상식이었다.
이로서 조선시대의 산맥 즉 산경(山經)을 정리하면,
1) 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으로서 이 땅의 중심 산맥이 되며, 모든 물줄기를 크게 동서로 양분한다.
2) 정맥은 대간에서 가지쳐 나온 이차적인 산줄기로서 큰 강의 유역능선, 즉 원수분(原水分)능선이다. 따라서 정맥은 산줄기의 높이, 규모, 또는 명산, 진산 등과 관계하지 않고 아무리 낮고 미약한 산줄기라 하더라도 정맥의 산맥이기 때문에 그 끝까지 표현한 것이다. 즉 김포평야의 낮은 구릉이 바로 한강 유역을 가름하는 한남정맥의 줄기이므로 다른 산줄기에 우선하여 뚜렷이 표시된 것이다.
정맥들로 형성된 강은 우리나라 10대 강의 압록강(鴨綠江), 두만강(豆滿江), 청천강(淸川江), 대동강(大同江), 예성강(禮成江), 임진강(臨津江), 한강(漢江), 금강(錦江), 섬진강(蟾津江), 낙동강(洛東江) 등이다.
3) 기맥은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대간·정간과 정맥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산맥으로서 내(川)을 이룬 능선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산맥개념은 현대의 산맥개념과는 달리 ①모든 산맥은 큰 강과 내(川), 그리고 골의 분수령으로서 그 하나하나의 경계선인 분수령이다. ②산줄기의 시작과 끝남의 지점이 명확하다. 따라서 정맥의 시작은 특정한 산이고, 그 끝남은 대체로 강 하구의 해안선까지 연결되어 있다. ③물줄기를 경계한 산맥이므로 지도상에서 전국토의 지형지세를 보다 쉽게 읽고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수계 중심으로 발달된 도시형성과 그 생활권역을 그 유역과 함께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골짜기까지의 수계 파악도 용이하게 하여 생활과 직결되게 하였으며, 가장 중요했던 내륙 산골까지의 조운(漕運)영역도 쉽게 파악토록 하였다.
이와 같은 산맥개념은 인간주의(人間主義)를 기본으로 한 자연지리(自然地理)를 바탕에 둔 것으로 그 땅과 더불어 살아온 그 땅 사람들의 지리관인 지리심성(地理心性·Geomentality)에 기본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배워온 산맥의 이름들은 장백, 마천령, 함령,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언진, 멸악, 마식령, 태백, 추가령(구조곡), 광주, 차령, 소백, 노령산맥 등이다.
이 산맥들은 1903년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郎)가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 기초를 두고 일본인 지리학자 야스 쇼에이(失洋昌永)가 재집필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들 산맥은 일반 상식의 산맥과는 달리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形), 이것들의 삼차원적 배치의 층층을 기본선으로 한 것으로 땅속의 맥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광주산맥이 금강산 북쪽 언저리에서 시작되어 북한강 상류를 서쪽으로 건너 북한산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 관악산 광교산으로 이어지고, 차령산맥은 설악산과 오대산 근처에서 시작되어 남한강을 건너 금강 하류를 끼고 돌아 대천 뒤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예는 다른 산맥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이나 내를 건너 뛰고, 능선과 능선을 넘나들고 있으나 산맥이라는 개념 자체가 땅 위의 어떤 선상(線上)을 기준하지 않고 땅속의 구조선을 기준하고 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
100년 전의 한 학설이 아직도 우리라는 ‘채’에 한번도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우리 땅 산줄기와 아무 관계도 없이, 우리 생활과 아무 관계도 없이, 그리고 자연지리의 활용에도 아무 관계없이, 그저 학교에서만 그러려니 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애석한 일이다.
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모든 나라에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이 그 땅의 산을 바라보는 산관(山觀)은 각기 다르다. 그 땅의 산들은 생활의 대상이 될 수도, 신앙의 대상이 될 수도, 정복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뒷산이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활화산이라면 공포의 대상이 된다. 우리의 ‘뫼’ 즉 ‘산’은 이웃나라 일본의 ‘야마(山)’와 먼 나라들의 ‘마운틴(mountain)’과 그 개념이 다르다.
우리에게 산은 옛부터 낳는(始와 開) 산이었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구지봉에서 나오고, 신라 육촌의 촌주들이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왔으며, 단군이 내려온 신단수도 산이었다. 모든 어머니들의 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식의 점지를 산에서 얻어왔다. 우리 모두는 결국 산에 빌어 낳은 자식들의 후예들인 셈이다. 곧 우리의 산은 모두를 잉태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여는(開) 곳이다.
우리의 산은 삶과 정신(生과 精)의 산이다. 의식주 모두를 산에 묶어 두고 살아온 우리였다. 세 칸짜리 집을 지어도 들 한 가운데가 아닌 한 뼘 산에 의지하듯 등대고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안식을 느끼는 우리네였다. 어릴 때 처음 그린 그림이 산이었듯, 이 땅의 멋이라는 것과 가락이라는 것 모두가 산과 더불어 되지 아니한 것은 이 땅에 없다. 산과 물이 어우른 곳에 독특한 문화를 잉태하게 하였다.
지식을 쌓으러, 도를 닦으러도 산으로 가고, 머리 아픈 사람들도 산으로만 간다. 해서 상상과 여유를 얻어 온다. 우리의 교육은 산의 정기부터 받아야 된다는 생각이 있다. 대부분의 중고등학교 교가의 가사가 그 지방 유명산의 정기부터 받아 놓고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우리의 산은 쉬는(死와 輪) 곳이다. 요즘 산에 갔다 왔다고 하면 등산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에 있는 얕은 산의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고도 “산에 갔다 왔다”고 했다. 산은 부모님의 집이다. 영원한 쉼터이자 안식의 처소이다.
우리의 산은 저만치 홀로 있는 산이 아니었다. 늘 사람과 같이 더불어 살고 살아오고 있다. 눈을 뜨면 산이 보여야 안심하고 안식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우리는 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귀결이다.
천·지·인(天·地·人)의 삼재(三才)가 우주의 근본이라는 속에서, 들(野)은 땅(地)이 아닌 산의 일부분이라는 것이 우리 고래의 인식이다.
산은 정상을 뜻하지 않는다. 남산의 철책 속만이 남산이라는 생각은 현대가 낳은 지극히 짧은 소견이다. 청계천을 건너면 남산골로 접어 들었던 산이 산을 의지한다는 사람들로부터 그 소임을 박탈당한 것이다. 우리가 저 산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저 산이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 옛산의 개념, 즉 산경 원리에서 이르는 우리 산의 개념은 그 산자락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 모두를 두고 어느 곳이든지 그 산의 이름으로 불렀다. 결코 정복과 개인 소유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의 생(生)과 활(活), 그리고 정신과 문화에 직결된 다만 이 땅의 것으로 인식된 것이다. 산줄기의 연결, 즉 백두대간과 그에서 뻗은 모든 정간은 물뿌리(水分岐)로서 모든 생명체의 시작인 물(重水)의 산지라는 인식이었다.
하나의 대간과 하나의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 여기에서 가지친 기맥으로 이땅을 가름한 산경원리(山脈)는 세분화되어 발달한 지역의 문화지리적 권역을 자연스레 분계하고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현재 우리는 크게 북부·중부·남부지방으로 나누고, 영남·호남·영동지방 등으로도 나누어 이야기한다. 다시 나누어 안동, 단양, 남원 등 지방으로도 이야기하며, 해안에서는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 지방으로도 구분하고 있다. 이들 지방들의 경계를 편의상 행정 경계를 기준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산맥도에서는 북부지방은 해서정맥의 이북지역,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은 백두대간의 태백산 속리산 지역과 한남금북정백, 그리고 금북정맥으로 이어지는 선에서 그 경계가 선명하며 오히려 자연·인문·식생·기후 등 자연지리적인 측면에서 예사스럽다.
해안지방에서도 내륙 어디까지를 경계로 할 것이냐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이 산맥개념의 산줄기로 볼 때 그 답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며, 여타 지방의 경계도 확연히 가늠된다.
도시(聚落) 발달로 인한 영향 권역도 쉽게 파악되며, 식생활과 주거양식의 구분 분포도 이들 산맥 선과 일치하고 있다. 북부·중부·남부의 음식문화가 다른데 ‘황세기젓 문화권’·‘새우젓 문화권’·‘멸치젓문화권’으로 대별되어 재미스러우며, 다시 세분화되는 음식권도 이 산맥도로서 쉽게 읽어진다. 주거의 양식에 있어서도 남해안의 한옥에는 대청마루에 반듯이 덧문이 있는데, 낙남정맥의 북쪽에서는 이와 같은 구조의 집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 말의 방언을 도별로 대별하지만 같은 도내에서도 크게 다른 말씨가 있다. 경상도 말은 강원도 속초지방에서 전라도 여수지방까지 분포되며, 같은 전라남도이지만 호남정맥을 기준하여 서쪽의 광주 말과 동쪽 산간의 섬진강 유역인 곡성 구례 말은 전혀 다르다. 특히 경기도의 수원 말과 이웃한 용인 이천의 말이 다른데, 그 사이에는 한남정맥이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일일이 지적의 여지가 없다. 산줄기의 가름으로 세분된 언어권은 곧 세분화되는 문화권과 직결된 선이 된다.
요즘은 비닐하우스로 강제 재배가 이루어지지만 농업의 절기와 식생의 분포, 꽃들의 개화일(온도의 차)도 정맥들의 선과 관계되고, 옛 보부상의 상권과 오일장의 권역도 이들 산맥의 가름과 관계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상예보는 행정단위 구역 중심에서 점차 지형특성, 재해특성, 생활권 등을 고려한 53개 국지예보구역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이 예보구역이 옛 지도에 나타난 백두대간과 14개의 정맥, 그리고 가지친 기맥들의 산줄기의 선과 일치하고 있다.
우리 땅 그 산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모태라는 옛 선인들의 인식, 모든 산줄기는 물줄기 중심으로 가름한다는 산맥 원리이다. 그 크고 작은 산과 길고 짧은 산줄기는 우리를 낳고, 살게 하고, 쉬게하는 곳으로서 그 원초적 알맹이인 물(重水)의 산지라는 내재한 정의이다.
창조와 발전, 그리고 개혁은 문화의 원형을 정확히 파악하는 바탕에서 비롯되어야 무리가 없다. 미래를 창조하는 기본은 과거의 인식이 뿌리되어야 순리로서 지속성을 갖는 것이다.
산을 아끼고 그 산을 사랑하는 우리다.
모두가 우리 선조들이 정립한 산과 산맥의 원형을 되찾아 새롭게 인식한 바탕에서 우리 땅에 대한 내일을 기약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