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민생 사안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와 쟁점을 다룬 작품”
고전읽기_ 백민정 가톨릭대 교수의 ‘정약용 『목민심서』’
정치저술[經世書](『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의 관계
정약용은 스스로 지은 묘지명에서 자신의 학문인생을 결산하며 이렇게 말했다. “六經과 四書에 대한 연구로 개인수양[修己]을 삼고 一表二書로 천하국가를 위하고자 했으니 本末을 모두 갖췄다.”(「自撰墓誌銘」) 잘 알려진 정법삼서, 즉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는 정약용의 정치저술을 대표하는 주저들이다. 『경세유표』가 중앙관제를 비롯해 이상적인 국가운영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밝힌 것이라면,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당시 조선의 법제를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복잡한 민생 사안을 현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와 쟁점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자찬묘지명」에서 밝힌 一表二書의 전체 성격
전통사회에서 정약용 저술 가운데 유일하게 필사본의 형태로 널리 보급돼 읽혔던 책이 바로 『목민심서』다. 『목민심서』는 외견상으로 보면 지방행정의 지침서, 행정실무 요령서 정도로 보인다. 이런 종류의 책이 왜 정약용의 경세학 저작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牧民의 다른 표현은 治民이다. 다산은 일국의 국왕과 수령이 비록 통치 규모는 다를지라도 지위와 권한이 비슷하다고 보았다. 목민서류는 이렇게 지방 수령들에게 통치와 행정의 중요한 지침이 되도록 마련된 책이다. 다산 스스로 밝혔듯이 삼대 기본강령과 六典 체제 그리고 비상시 진황과 구휼을 위한 대비책까지 마련해서 일사불란하게 지방행정 및 통치를 위한 구체적 지침을 구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히 책의 이름을 ‘心書’라고 이름 붙인 것은 목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나, 자신의 유배자로서의 신분 때문에 목민할 수 없기에 오직 마음으로 쓴 책이라는 뜻의 심서를 붙였다는 것이다.
『목민심서』의 정치적 지향과 방법
조선 지식인들에게 이념적·사상적으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텍스트는 『小學』과 『朱子家禮』라고 할 수 있다. 향촌사회를 주자학적 이념과 질서에 의해 재편성하고 통치하기 시작했던 사족층의 노력이 현실적으로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두 번의 전쟁을 거친 17세기 후반부터라고 볼 수 있다. 전란 후 국가재건 과정을 살펴볼 때 주자학으로 무장한 사족층의 이런 노력은 그 다음 세기인 18세기에 보다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주자가례』가 조선사회 저변으로 널리 확산되고 향례의 일종인 鄕約이 전국적 범위로 퍼져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에서 오히려 조선후기인 “18세기야말로 家禮와 鄕禮 등에 기반한 주자학적 예치시스템이 사회 전방위적으로 구현된 시대”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목민심서』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정약용은 일반 백성이 자기 ‘修身(자기변화)’만 하면 되는 반면, 위정자는 이에 덧붙여 ‘治民(정치)’의 학문을 더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목민이므로,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반이다.” 이런 발언은 결국 위정자의 사회적 역할과 백성의 역할이 다르다는 점, 따라서 그들에 대한 사회적 대우와 禮制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
형법서 『흠흠신서』의 역할
공자는 『논어』 ‘위정’ 편에서 덕과 예, 형벌[法]의 관계를 설명한 적이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 정약용의 관점은 어땠을까. 형벌에 앞서 덕과 예의 의미를 강조했던 점에서는 그도 주자학자들과 대동소이하다. 그렇다면 다산은 孝弟慈의 덕과 차등적인 예치시스템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덕 개념에 대한 섣부른 도덕주의적 관점보다 오히려 단계별 학습과 교육, 인격과 신분에 따른 차등적 대우와 절차를 제시했던 예치시스템에 다산이 좀 더 주목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효제자와 충효열의 덕목을 강조하면서도 정약용이 무분별한 도덕주의의 횡행(효자·열부 유행현상)을 비판했던 것은, 예치시스템의 구현에 장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제는 보편적인 도덕으로서의 덕 개념과 차등적인 예제 사이에서 벌어진 긴장과 갈등 문제이며, 형벌은 이 양자 사이에서 예치의 정당성과 효과를 부각시키는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흠흠신서』에서 다산이 엄격한 법조항의 적용을 강조한 많은 사례들은, 즉 도덕실현에 대한 백성들의 과도한 열망 때문에 상하귀천 및 친소존비에 따라 차등적으로 구성된 禮制를 무시하고 부적절한 방식으로, 과격하고 극단적으로 자신들의 도덕감정을 표출한 행위를 처벌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흠흠신서』에서 강조한 형법은 예치시스템의 차등성을 보완하고 정착시키는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정약용이 엄격한 형법 해석과 형률 적용을 강조한 것은, 도덕의 보편적 확산 위력에 밀려 무너지던 차등적 예치시스템을 정상 가동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親親과 尊尊의 원리
도덕행위를 판단하는 문제에서 인간의 내면적 동기를 얼마나 중시했는지는 유학자로서의 정약용의 정의관념이 잘 드러나는 『흠흠신서』를 통해 그 내막을 살펴볼 수 있다. 행위자의 내면적 동기 그 자체가 아니라 이 행위자가 누구와 관계 맺고 있는지, 다시 말해 살인사건 행위자와 행위 대상과의 친소존비 관계 등에 따라 다른 결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보여준다.
유학자들이 생각한 도덕행위에서의 내면적 동기의 순수성이란 그 자체만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서 차등적으로 평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도덕감정은 그 자체로서 선하다고 평가할 수 없고 반드시 적절한 예식절차를 통해 실현될 때 비로소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다산의 중요한 관점이었다. 이 때 내면적인 도덕감정과 외재적인 도덕행위의 수행방식을 매개하고 판단하는 원리 혹은 기준이 바로 친친과 존존이라는 관계맺음의 원리였다.
따라서 우리가 서구적 관점으로 예상하는 민주적 의사결정모델 같은 특정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면, 이들이 한 가문 내에서 어떻게 상례와 혼례 등의 예식 절차를 심의하고 변경하고 새롭게 적용했는지, 그 구체적인 토의 과정을 심의 모델화해 드러내주는 것이 중요한 연구가 되리라고 본다.
가례서는 기본적으로 한 집안에서 후손들이 조상의 상제례를 치르거나 혹은 자손의 혼례 및 관례를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예식절차와 의절을 모아 놓은 것이다. 다산도 방대한 『喪禮四箋』에 대한 자신의 선집본 작품인 『喪儀節要』를 만들면서 “동시대에 이것을 공개하는 것은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 집 자손들을 훈계하기 위한 것이라면 어찌 사양하겠는가”라고 의중을 드러낸 뒤 마침내 자기 집안의 행례 근거로 삼기 위해 『상의절요』 같은 『사례가식』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다산의 가례서는 기존에 주어진 고례서, 『주자가례』, 『성호예식』 등 이미 텍스트화된 권위적 禮書들을 비판적으로 독해하면서, 다른 한편 자신이 볼 때 예의 정신을 제대로 반영하기 위해 조선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새로운 禮制에 대한 입장을 상호 비평하면서 만들어진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정약용이 만든 가례서의 작성경위를 보면, 도덕감정을 발현해서 드러내는 예제 수립과 변경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운 절차를 동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절차가 비록 명시적으로 모두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친친과 존존이라는 관계맺음의 원리를 통해 이 문제와 씨름했던 유교 지식인들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첫댓글 ~~복잡한 민생 사안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와 쟁점을 다룬 작품~~
정약용 작품들...
앞으로는 이 작품을 읽고서 독후감 제출자만이 정치권 입문을 시켜야 겠네요.
맞죠 ㅎㅎ
牧民....
다른 표현은 治民이다.
정약용 본인은 일반 백성이 자기 ‘修身(자기변화)’만 하면 되는 반면,
위정자는 이에 덧붙여 ‘治民(정치)’의 학문을 더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바로 목민이므로, 군자의 학문은 수신이 반이요,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