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溪 박희용의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8월 19일 토요일]
김경일 지음 『이재유 연구』 제4부
이재유의 경성재건그룹 시기 : 제2기 (3)
제4부를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34년 1월 22일 검거된 이재유는 온갖 고문을 겪다가 4월 13일 밤 마침내 제2차 탈출에 성공하여 동숭동 경성제대 일본인 교수 미야께 집 응접실 마루 아래 지하 토굴에서 정태식과 미야께가 검거된 5월 21일까지 38일 동안 생활하였다. 이후 서울 시내에서 잠복하다가 8월 초순부터 신당정 석산동 유진룡의 집 방 한 칸을 빌려 부부로 위장하여 박진홍과 1935년 1월까지 동거하면서 조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재건그룹 시기의 중심인물은 이관술, 박영출 등이었다. 이재유는 이들과 만나 권영태의 경성콩그룹과 이재유 그룹의 경성트로이카 운동을 비교 검토하면서 장래 운동방침에 대해 상세히 토론하였다. 또한 이재유는 1933년 6월부터 8월까지 약 2달에 걸친 자유노동 시절에 초고를 잡아두었던 <자기비판문>, <통일문제>, <학교 내의 활동기준>, <세말(歲末) 캄파니아 투쟁방침서> 등을 원고로 작성하거나 팸플릿으로 간행하였다.
1934년 12월 상순 지금까지 이재유가 지도하고 있던 ‘조선공산당재건 경성트로이카’ 운동을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재건그룹‘으로 개칭하고 운동목적은 그대로 계승하기로 하였다. 구성원은 이재유, 이관술, 박영출 세 사람이었으며, 이재유가 지도자 겸 출판부 책임을 맡고 이관술이 학생운동을, 그리고 박영출이 노동운동 부문을 각기 지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활동에 의해 박진홍, 유순희, 이종희, 심계월, 김복금, 권오상, 신덕균, 허화정, 이갑문, 공성회, 유해길 등이 획득되었다. 그러나 기간이 짧아 실제 운동은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935년 1월 박영출이 검거되면서 종결된 이 사건의 판결 기록을 보면 총 43명의 검거 인원 중에서 9명이 무혐의로 풀려났고, 이재유와 이관술, 유순희 등 6명은 도주 또는 소재 불명으로 기소 중지되었다. 박영출, 이인행, 김순진, 공원회, 박진홍 등 10명이 예심에 회부되었는데 공성회만 집행유예를 받았고 박영출의 4년을 최고로 하여 1년 6월의 실형을 각기 선고받았다.
이 중에서 제1기의 트로이카 시기에 활동하다가 다시 운동에 참가한 사람은 김복금, 공성회, 이인행, 권오상, 황대용, 이분성, 이석면, 유순희, 이종희, 신해갑 등 10명에 달하였다.」
이재유는 팸플랫 <통일문제>에서 제1기 때보다 진일보하여 ‘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국제선과 결부되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운동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아울러 대중적인 일상투쟁을 통하여 파벌을 청산하고 국제선과 연결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재유가 오르그를 통한 방법이 아니라 트로이카 조직을 통한 방법을 추구한 까닭은 전자의 허점을 봤기 때문이다. 운동자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조직을 계속 만들기 위해서는 트로이카 방법이 유효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제1기에서 이재유가 권영태의 국제선 조직을 고의로 거부한 것처럼 보이는데, 국제선에 대한 완전한 단절이 아니라 트로이카 조직을 통해 자체 역량을 충실하게 한 다음에 국제선과 연결하고자 하는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개인적인 조직 욕구도 있었을 것이다.
1910년대 초에 연해주 지역에 한인사회당이 조직되면서 수입된 공산주의 사상은 소련 중심의 일방적인 조직과 사상이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소련이 제공하는 공산주의 이론을 충실히 받아 적는 학습자였다. 그래서 소련이 주도하는 조직, 즉 국제선만이 유일한 당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국제선과 연결하되 소련 코민테른의 일방적인 지시만 받아서 기록하고 수행하는 아바타가 되지 말고 자기 지역과 공장에 고유성을 살리면서 활동하는 살아있는 인간 사상가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코민테른의 지시를 전달하는 중간 간부인 오르그 중심의 조직보다는 이재유의 트로이카 조직이 필요하다.
이재유에게 공산주의 운동은 노동계급을 이용한 민족해방과 조국독립을 위한 포석이었다. 누구라도 사명감이 강한 인물은 권력욕도 강하다. 이재유라고 권력욕이 없지 않았다. 그 권력욕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공산주의 운동의 순수성과 순결성에 대한 맹종보다 주어진 현실, 식민지 조선의 1930년대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더 깊이 연구해야 했다.
조선의 모든 공산주의자가 추종한 코민테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소련이 중심이다. 모든 국가의 공산주의 운동과 공산당 조직은 소련을 위한 운동이고 당이어야 한다. 소련의 방패가 되어야 한다. 소련공산당이 국제주의를 주창한 이유 중의 하나는, 민족주의를 주창했을 때 생길 소련 자체 내의 부작용 때문이다. 소련이 겉으로는 식민제국주의를 반대했지만 속으로는 소련 역시 식민제국주의였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포루투칼 등 서유럽 국가들이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침략하여 식민지를 넓힐 때 러시아는 동으로 시베리아와 알래스카를 점령하여 영토로 만들었다. 서유럽 국가들은 원주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겪으면서 식민지 개척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러시아가 점령한 시베리아는 아주 소수의 원주민들만 거주할 뿐 황무지와 다름 없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도 수많은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 공산주의 운동에서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는 민족주의를 넣을 수 없다. 그래서 코민테른 강령에서 민족주의는 금기어였다.
공산주의 사상은 18세기 산업혁명 초반부터 잉태되어 19세기 산업혁명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반작용으로 확산하였다. 그 확산의 첫 결과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이다. 이후 20세기 전반기에 많은 공산주의 혁명이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병폐를 스스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질적으로 변화하면서 공산주의보다 이념과 실천 면에서 우위를 보임으로써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이 차츰 낮아지고 있다. 21세기에는 공산주의 대국인 러시아와 중국 모두 정치에서는 공산주의를 적용하지만 경제에서는 자본주의를 채택하여 국가경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경제사상으로서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경쟁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이라는 경제 개념의 진영 논리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진영 논리로 개편되었다. 두 진영 논리에 공통으로 들어있는 말은 ’민주주의‘이다. 그러나 두 진영이 해석하는 민주주의 개념이 다르다. 그러나 시민이든 국민이든 인민이든 각자의 국가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는 것만은 같다. 그러므로 앞으로 펼쳐지는 두 진영의 경쟁은, 자기 국민을 어떻게 중심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될 것이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권리를 귀하게 여기는 국가가, 진영이 인류 문명사의 승자가 될 것이다.
진영 논리의 바탕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이다. 과거에 두 진영에 속하는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 문제만으로 대결하지 않았다. 이념은 표면에 내세우는 명분이었고, 실제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였다. 21세기에도, 아니 인류 역사가 계속되는 한에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질 수가 없다. 인간 자체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적 존재이다. 국가가 이런 인간들의 집단이니 국가 역시 이중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계 모든 국가가 국익 우선주의일 수밖에 없다. 지금 이 시각에도 모든 국가가 저마다의 국익을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지구 위를 쏘다닌다.
그렇다면 인류 평화와 번영을 위한 무슨 뾰족한 대책이나 사상이 있어야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