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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들끓게 한 팝스타
"팝 음악계에는 두 종류의 가수가 있는데 마이클 잭슨과 그 외의 가수들이다."(1982년 뉴욕타임스)
그의 음악인생은 시작부터 화려했다. 1958년 8월 29일 인디애나주 게리(Gary)의 철강 노동자 조 잭슨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4명의 형들과 함께 그룹 '잭슨 5(파이브)'로 활동하며 히트곡 '아일 비 데어(I'll Be There)' 등을 남겼다.
잭슨은 당시를 "사람들이 주머니에 돈을 너무 많이 넣어줘 바지가 흘러내릴 지경"이었다고 회상했다.
전설적 흑인 음악 프로듀서 퀸시 존스를 만나면서 솔로 마이클 잭슨은 승승장구. 성인이 된 뒤
첫 앨범인 '오프 더 월'(1000여만장), 팝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스릴러'(1억400만장)의 거대한 성공에 이어
'배드'(87년)와 '데인저러스'(91년) 등도 2000만장 이상 팔렸다.
펑크(funk)·소울(soul) 등 기존 흑인 음악적 요소에 팝 발라드, 록, 디스코, 테크노 등 온갖 장르를 뒤섞어
대중의 감성을 두루 사로잡았다. 그는 또 80년대 갓 탄생한 MTV를 적극 활용한 이미지 메이킹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의 노래, 우주에서 유영을 하는 듯한 춤 '문워크',
그리고 흑인 뮤지션들이 즐겨 입었던 반짝이 의상은 80년대 세계 대중문화의 상징이었다.
◆백인이 되고 싶었던 흑인?
마이클 잭슨은 그러나 80년대 후반부터 일부 흑인들의 지탄을 받는다.
"백인을 꿈꾸는 흑인"이라는 요지였다.
실제로 매년 하얘지는 얼굴색, 작아지는 광대뼈, 높아지는 콧대, 얇아지는 입술은 백인의 모양새였다.
그러나 그가 백반증 환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햇빛에 극도로 예민한 그의 피부는 치료 과정에서 색소를 잃어갔다.
늘 긴 소매에 선글라스, 모자, 마스크를 착용했던 이유였다.
초창기 코 성형은 사고 때문이었지만 이후 그는 습관적으로 얼굴에 손을 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경험한 잭슨은 "아버지를 닮아가는 게 싫어 성형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최근에는 "수퍼박테리아에 감염됐다"는 뉴스도 나왔다.
◆아동 성추행 사건 논란과 불운한 결혼생활
잭슨 인생의 가장 큰 그늘은 아동 성추행 논란이었다. 1993년 13세 소년 조단 챈들러를 성희롱했다는 혐의로 피소됐던 것. 당시 2200만달러의 합의금을 내고 사건은 정리됐지만 세상은 그를 '변태'로 규정했다. 2005년에도 그는 병원비가 없어 고생하던 아이를 도와줬지만 아이 엄마로부터 성추행범으로 몰렸다. 그녀가 상습 사기범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잭슨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그는 또다시 논란에 휩싸였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으로 사생활이 원만하지 않았고, 백인인 아이 셋의 출생에 관한 논란도 뜨겁다. 모두 인공수정으로 태어났으며 마이클 잭슨이 생부가 아니라는 주장이 대세다.
◆최고의 기부 천사 연예인
스타가 글로벌 규모의 기부(寄附)·자선(慈善) 붐을 일으킨 건, 그가 거의 처음이었다. 1985년 '위 아 더 월드'의 수익을 아프리카 주민들에게 전달했으며, 1992년에는 '힐 더 월드 재단'을 설립해 전쟁과 기아에 시달리는 전 세계의 어린이를 도왔다.
1993년 당시 마이클 잭슨은 300여만명의 관객을 불러모은 67회 콘서트를 통해 얻은 수익을 모두 재단에 기부했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꿈을 담아 만든 '네버랜드'에도 수시로 어려운 형편의 어린이들을 불러모아 즐거운 시간을 선물했다. 숱한 추문으로 얼룩진 인생이었지만 음악 외에 그의 인생을 지배했던 가치는 박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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