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갈라디아서 제 20 강 '자유로운 만남'
본문: 갈 5:1-12
1-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2-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Point: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자유로이 만난다.
Introduction: 본문을 통해 바울은 무엇이 율법주의이고 무엇이 복음인지를 설명합니다. 율법주의가 무엇입니까? 율법주의는 하나의 말씀의 원리에 대해 오직 하나의 적용만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복음에는 지혜가 역사하여 말씀의 원리에 대한 다양한 적용이 일어납니다. 복음에는 역사하는 자유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정권이 거의 무너진 것 같습니다. 테러와의 전쟁도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것이 탈레반통치하의 여성들에 관한 기사입니다. 한 신문은 이렇게 헤드라인을 달았습니다. '그녀들에겐 숨쉬는 자유밖에 없다.
탈레반은 극단적인 이슬람원리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국민들에게 강요했습니다. 이들의 여성에 대한 통치는 정말 가혹합니다. 모든 교육과 취업의 기회가 박탈되었습니다. 8세 이상 여아에 대한 교육 금지. 여자대학 폐쇄. 직장에서의 여성 추방. 그래서 교사로 공무원으로 의사로 일하던 수없이 많은 여성들이 직장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의료혜택을 거의 받지 못했습니다. 남자의사들에게 절대로 몸을 드러내지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대충 보고 약만 주는 식이었습니다. 수술은 생각도 못합니다. 그래서 1000명당 165명의 영아가 사망했습니다. 또 외출은 거의 금지입니다. 사실상 집안에 감금한 것과 같습니다.
복장의 경우를 보세요. 여성의 복장에 대해 한 원칙만 제시됩니다. '부브카 뒤집어 써' 그래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부브카라는 천으로 가립니다. 제대로 얼굴을 안 가리면 경찰에게 맞기까지 합니다. 철저히 한 원리에 한 가지만 적용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입니다.
반면에 복음의 자유를 보십시오. 복음에는 다양한 적용이 가능합니다. 머리모양의 경우 긴머리든 파마든 웨이브를 넣든 숏카트를 하건, 색깔을 넣든 상관이 없습니다. 김희선머리든 최진실머리든 단정하게 하면 됩니다. 레게 파마도 괜찮다고 봅니다. 그 머리는 아프리카에선 제일 단정한 머리에 속합니다. 이런 자유가 복음에서는 가능합니다.
영화의 경우를 봅시다. 탈레반은 모든 극장을 폐쇄했습니다. 그것을 이슬람신앙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원흉으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며칠 전 카불이라는 아프칸의 도시가 함락되었을 때 다시 문을 연 극장으로 수많은 사람이 몰렸습니다. 극장 앞이 거의 난장판으로 변한 사진이 각 언론매체마다 실렸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다 볼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합니다. 허용하되 분별력을 가지라고 합니다. 보면 냉동닭이 되어야할 것들이 있습니다. 종려시가 나오는 영화나 여인천하의 아류인 여인천국, 이런 영화근처에만 가도 나의 시신경이 마비가 되는 그런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또 영화를 보되 '우와 짱 재밌다.' 여기서 머물러선 안됩니다. insight를 가져야합니다. 영화 속의 다양한 삶을 보고 말씀의 원리와 연결시킬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복음에는 다양한 적용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보통 킹카에는 쭉쭉빵빵이 어울린다는 도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율법주의입니다. 킹카도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사랑의 방식이 가능합니다. 여러분과 제가 자주 보는 '뉴 논스톱' 보세요. 킹카와 네모와도 어울립니다. 네모가 몸빼입고 김밥을 팔러다녀도 그 네모가 이뻐보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자유입니까? 얼마나 귀한 사랑의 방식입니까?
우리는 최씨하면 고집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것도 일종의 율법주의입니다. 물론 최씨가 약간 고집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자유는 이것을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야, 너 결단력있다. 너 참 단호한 면이 있구나. 너 굉장히 집중력이 있구나.' 이게 자유인의 표현법이 아닐까요?
어려운 수능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우리 사회가 중시하는 학력에 대해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학력 이꼬르 출세 혹은 성공. 이것도 일종의 율법주의입니다. 한 가지 원칙에 대해 하나의 적용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즘 언론에는 계속 전문대가 뜨고 있다는 기사가 실리고 있습니다. 올 평균취업율이 81%이고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현장중심의 실무교육이 사회문제화된 청년실업에 대안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 특정 분야를 제외하면 전공이 그대로 직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드물다는 기사들도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시기에 자유인의 자세는 무엇입니까? 다양한 적용을 하는 지혜로운 사람의 삶의 방식은 무엇입니까? Life-long learning mechanism! 평생 학습자가 되는 것입니다. 평생학습의 중요성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학교육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 시기에 평생자기 훈련하는 틀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외국어를 평생 익히고 평생 배우며 독서하는 습관을 익히는 것이 자유인의 자세입니다. 그래야 기회에 강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을 아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율법주의와 복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핵심자리에는 할례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할례가 무엇이냐? 할례가 구원에 어떤 역할을 하나? 할례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인가? 이것을 설명합니다.
바울은 율법주의자들, 소위 갈라디아에 있는 거짓선생들이 할례를 왜곡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할례를 왜곡시켜 복음의 사람들에게 종의 멍에를 다시 씌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비자유로 이들을 인도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교인들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줍니다. '그들의 꾀임으로 다시 할례를 받는다면 그리스도께서 무슨 의미가 있는 거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4절 말씀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7절에서 말합니다. '너희들은 복음의 길을 잘 달려왔다. 그런데 그 진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설득을 조심하라. 마치 누룩이 반죽에서 퍼져가는 것처럼 너희들을 오염시킨다. 조심하라'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뭡니까? 당시의 거짓선생들에게 할례는 구원의 전제조건이었던 것입니다. 할례는 단순한 외과수술이 아니라 신학적 상징이었습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것이 있어야 율법에 복종한 것이 됩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서 선해지고 그래서 그는 구원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할례는 구원의 필수조건입니다. 확실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너무 확실하지 않습니까? 이래서 율법주의입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십자가는 11절 말씀대로 '거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을 원어로 보면 '스캔들'입니다. 십자가가 율법주의자들에게는 가장 문제시되는 스캔들입니다. 왜입니까? 십자가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하셨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다 지셨고 죽음도 부활을 통해 이기셨습니다. 사람의 최대난제인 죄와 사망에 대해 예수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그 분이 다 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니 할례나 율법의 모든 행위가 무력화됩니다. 자기 자랑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세요. 바울은 말합니다. '할례를 자랑으로 삼을 것이면 껍질만 자르지 말고 차라리 다 잘라라.' 12절의 '베어 버리고'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랑할거면, 그것으로 구원의 표식을 삼을거면 통째로 자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확실하지 않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입니다. Only by faith!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릅니다. 구원의 주도권이 나에게 있지 않습니다. 구원은 모두 하나님의 것이며 그 분에게서 나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복음 안에서 할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절대로 구원의 전제조건이 아닙니다. 구원의 조건이 되면 결국 그 사람은 3절 말씀대로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율법의 요구에 대해 행위를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할례가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있음으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요즘도 성적인 유혹들이 도처에 산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장난질을 하게 하는 것들이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그래서 젊음의 가슴에 불을 댕깁니다. 정욕이 불같이 일어나 죄로 달려가게 만듭니다. 성경시대에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죄는 예나 지금이나 강력한 능력입니다. 바로 이때 할례된 자신을 생리적으로 확인하며 깨닫는 게 있습니다. 하루에 몇 번씩 가는 화장실에서 확인하는 게 있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백성인데 이러면 안되지. 야, 너 정신차려. 넌 하나님의 소유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널 구해주신 것을 잊었니?'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자의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례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생각하는 장치인 것입니다.
또 여호수아 5장을 보세요. 여리고성 바로 앞의 길갈이라는 곳에서 할례를 받습니다. 적을 앞에 두고서 할례를 받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 그 분이 나의 힘이요 능력이시며 방패이시다. 그 분없이는 나는 망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온전한 신뢰를 하라고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결코 할례가 있어야 하나님의 사람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세요. 하나님 백성으로서 자신을 깨닫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적용으로 나타납니다. 이래서 복음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누리는 축복의 장치입니다. 만약 그것이 왜곡되면 얼마든지 무효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제 복음을 설명합니다. 복음은 무엇인가? 복음은 4절에 나오는 대로 '의롭게 됨, justification'의 문제입니다. 또 5절에 나오는 대로 '의, righteousness'의 문제입니다. 의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하나님 앞에 서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나님과 회복된 관계인가, 사람이 하나님을 자유로이 만날 수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죄인이고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서면 사람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진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반복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시어서 사랑의 행동을 하셨습니다.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극단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독생자를 사람이 되게 하셨고 사람과 똑같은 처지에 속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고 죄의 모든 저주를 그 아들에게 쏟아 부으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이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자유로운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필요하면 언제나 시시 때때로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그 분을 구하면 됩니다. 언제나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에 주어진 의로움, righteousness의 의미입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자유롭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됩니다. 그런데 이 찢어진 휘장은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만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한 번만 아니고 계속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능력 받고 응답 받고 사랑과 권능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자유로이 만나고 교제할 수 있다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 복음의 특징, 즉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만남의 특징 두 가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Point 1: 자유로운 만남
첫째 특징은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만남에는 도우시는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5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을 도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향해 가는 여정에 도우시는 이가 있습니다. 의의 길가는 데 도우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구십니까? through the Spirit 믿음의 여정에 도우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성령께서 도우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시때때로 그 영광의 자리로 담대히 나아갑니다. 담대히 그 분을 예배하며 그 분의 임재를 기다립니다.
여러분, 예배가 뭡니까? 이 시간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 분께 기도하는 것은 왜 입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운데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교제와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듯이 아브라함은 늘 예배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참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을 바치는 모리아산의 예배를 통해 예배를 새롭게 알게 됩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예배의 의미를 새롭게 알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합니까? 왜 또 급박한 순간에 수양을 마련하십니까? 예배의 의미를 알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를 이 예배에서 만날 때 나 아들 독생자를 만나듯 너를 만난다. 내 사랑하는 아들을 대하듯 너를 대한다. 그와 교제하듯 너와 교제하기를 원한다. 그 내 마음을 네가 아느냐' 그런 뜻입니다.
성령께서 이 예배에서 우리를 도우시되 어떻게 도우십니까?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단 그 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를 안다. 나는 너를 너무도 잘 안다. 너의 상처와 너의 좌절과 너의 고통을 안다. 내가 내 아들의 십자가를 알 듯 너의 모든 것을 안다. 그러나 기억하라. 나는 사망에 갇힌 내 아들을 다시 살렸다. 그 부활의 능력으로 너를 새롭게 하리라. 회복시키리라.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시고 대하십니다. 이것이 예배의 의미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이 예배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 만남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또 성령께서 어떻게 도우십니까? 성령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심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을 기억하도록 성령께서 도우십니다.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22장에 나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주님께서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그 마지막까지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하늘보좌에서도 기도하십니다. 이 놀라운 말씀을 깊이 깨달은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신다.'
우리의 믿음 생활을 우리 힘으로 합니까? 우리가 잘나서 합니까? 착각하셔서는 안됩니다. 우리 믿음은 주님의 기도 때문에 유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덕에 살아갑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 주님을 성령은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렇게 연약한 우리의 믿음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담대히 그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니다. 자비의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도우셔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주님을 보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주님을 보게 하십니다. 그 주님의 은혜로 우리는 살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만남에 있는 두 번째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그 만남에는 사랑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만남에는 참 사랑이 솟아납니다. 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랑의 크기가 그 믿음의 크기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신뢰하는 사람은 그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아는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은 참된 사랑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고 그 사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음의 역사는 곧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faith expressing itself through love! 믿음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 사랑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로마가 기독교국가가 된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봅니다. 첫째는 엘리트들의 개종입니다. 성경에도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 나오고 고넬료의 얘기도 나옵니다. 그들은 로마의 엘리트들입니다. 로마의 장교는 로마의 엘리트들입니다. 그들 가운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둘째는 순결, purity입니다. 당시 로마의 유력가문들이 다들 순결한 기독교인 신부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이 로마의 유력한 가문으로 시집가 그 집을 변화시켰습니다. 순결이 능력입니다. 또 여자가 변화면 세상이 변합니다. 셋째는 종들의 믿음입니다. 당시 종은 개나 돼지입니다. 동물과 동격입니다. 말하는 동물일 뿐입니다. 그런 그들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주인이 부엌 한 켠에서 중얼거리고 있는 종을 보았습니다. '야, 똑똑한종노무스. 너 뭐하니?' '예, 주인님의 건강과 안전과 또 가족들과 이 집안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야, 이노무새이? 감격스럽구만. 네가 믿는 것이 뭐야?'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렇게 집안이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결국 제국이 변한 것입니다. 중보하는 종! 자신을 개처럼 여기는 주인을 사랑하는 종! 이 사랑이 로마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믿음은 그 본질에서 사랑을 드러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은 반드시 그 사랑을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뭐가 율법의 정신이며 뭐가 율법의 완성인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안네 리사 피트슨이란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9월 11일 무역센타테러로 오빠와 애인을 동시에 잃은 사람입니다. 두 사람다 촉망받는 미래의 경제두뇌로 이 빌딩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같이 잿더미에 깔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안네라는 여자는 너무 큰 허망함과 좌절감에 빠져버렸습니다. 요즘도 그들의 꿈을 꾼답니다. 부러움을 받던 사랑이 너무도 큰 상처를 남기고 간 것입니다.
저는 그 여인과의 인터뷰를 보면서 한 편으로 측은함과 불쌍한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또 하나 든 생각은 인간의 사랑이란 정말 순식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정말 순식간입니다. 인생 안에 있는 많은 것도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 버립니다. 그것이 인생의 본래 모습입니다.
테러희생자 추모식에서 많은 미국인들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습니다. 그 모습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결국 남는 것은 은혜구나. 결국 하나님의 것들만 남는구나. 마침내 남는 것은 그 분의 사랑과 그 분의 은총밖에 없구나. 그것을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믿음이구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결국 무엇이 남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남습니다. 믿음으로 체험한 그 분의 사랑만 남습니다. 또 그 분의 사랑으로 사랑한 사랑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영원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 청년 여러분, 최근 이산가족상봉이 두 차례나 연기되면서 만나기로 한 당사자들이 깊은 실망에 빠져있습니다. 무슨 정치적 계산들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가족을 만날 것으로 기대했던 당사자들로선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만남에도 이런 장애들이 있습니다. 만나고 싶다고 다 만나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리의 장벽, 이념의 장벽들이 사람사이를 가로막아 만남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사이에도 장벽이 있었습니다. 거대한 죄악의 장벽이 있었습니다. 심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먼저 나서셨습니다. 나서셔서 다리를 놓으셨습니다. 아들의 몸을 찢으시며 회복의 길을 여셨습니다. 자유로운 만남의 길을 여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으로 그 하나님을 만납니다. '아버지'하고 만나러 갑니다. '주여'하며 만나러 갑니다. 시도 때도 없이 만나러 갑니다. 언제나 그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면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의롭다하셨는데, 여러분과의 만남의 길을 여셨는데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그 분을 만나십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그리스도를 대하듯 여러분께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을 아시고 그 사랑을 쏟아내는 능력의 믿음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아버지여, 저희들에게 아버지의 의를 허락하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그 의로 이제 아버지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음을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으로 도우셔서 아버지를 더욱 알게 하시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