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완, ‘나는 누구인가’에 관한 영화적 물음 099010 허인지
타이완에 영화가 처음 보급된 것은 일제시대 때였으며 타이완 총독부는 일본어 보급을 위해 영화관에서 일본영화만 상영하게 했으며, 중국영화의 경우 타이완어 변사(辯士)를 두었다.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을 접수한 1945년부터는 국민당이 촬영소를 새로 설립하거나, 대륙의 영화 회사와 촬영소 등이 타이완으로 이전해왔고 이들이 제작한 국책영화들은 ‘궈위보급’을 위해 베이징어로 제작되었다. 60~70년대 타이완 영화는 무협영화와 애정영화가 풍미하는 한편, ‘반공대륙(反攻大陸, 다시 대륙을 수복하기 위하여 공격하자는 뜻)’을 기치로 하는 정책영화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1950년대 이래 국책영화의 제작을 담당해온 중앙영화사의 신예 감독들이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내면서 ‘본토의식’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80년대의 뉴웨이브 영화는 70년대 타이완 문단의 ‘향토문화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뉴웨이브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아들의 큰 장난감〉은 향토소설 계열의 대표적 작가 황춘밍(黃春明)의 소설 세 편을 영화화한 것이다. 향토소설을 영화화한 것이 뉴웨이브의 한 축을 형성했다면, 다른 한 축을 형성한 것은〈시간 이야기〉,〈샤오피 이야기〉, 〈우린 모두 이렇게 자랐다〉와 같은 자전적 성장 영화들이다. 60년대 이후 타이완은 고도의 경제 성장과 더불어 정치적·사회적으로도 변화가 많았으며, 자전적 성장영화들은 자연스레 타이완의 지난 모습을 회상하며 서서히 본토성을 확보해가기 시작한다.
1. 타이완, 식민지의 역사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타이완에는 5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유적이 있으며, 현재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원주민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5000년 전부터라고 한다. 타이완이 세계사에 등장한 것은 대륙에서 한족(漢族)이 이민해오고, 유럽 상인들에 의해 발견된 17세기경부터다. 타이완을 통치했던 외부 세력들을 열거해보면, 네덜란드(1624~1662)→명나라의 후예 정성공(鄭成功:1662~1683)→청(1683~1895)→일본(1895~1945)→국민당(1945~)순이다. 300여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다섯 개의 서로 다른 집단이 타이완을 통치한 것이다. 국민당 정부는 비록 타이완으로 옮겨와 있었지만 자신들이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여겼고, 중국 대륙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면서 ‘반공대륙’이라는 구호를 선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타이완이 직면한 정체성 문제가 나타났다. ‘타이완’은 어떻게 명명되어야 옳은가? 국민당의 적통을 이어간다는 의미에서 국호로서의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인가? 붉은 이념에 물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자유 중국(Free China)’인가? 포르투갈어로 ‘아름다운 섬’이라 는 ‘포르모사(Formosa)’인가? 올림픽 경기에서 부르는 것처럼 ‘차이니즈 타이페이(Chinese Taipei)’인가? 팽창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중국인들의 말처럼 ‘중국(People's Republic China)의 성(province) 가운데 하나’인가? 진정한 타이완 사람(Taiwanese)은 누구인가? 원주민인가, 본성인인가, 외성인인가? 바로 이런 문제의식이 점차 타이완 문학예술의 주체성을 형성해간다.
2. 본토의식과 성장영화
문학예술계에서 뉴웨이브 영화와 함께 타이완 본토의식의 문제를 강하게 제기한 것은 ‘향토문학’이었다. 50년대 타이완 문단은 ‘반공문학’과 ‘향수문학’이 주류를 이루었고, 60년대에는 타이완의 현실과 유리된 서구를 모방한 모더니즘 문학이 문단을 점유한다. 70년대에 와서는 타이완이 현실과 유리된 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타이완 현실에 입각한 리얼리즘 문학이 대두된다. 시단에서는 모더니즘 경향을 비판한 현대시 논쟁을 전초전으로 하여, 향토문학 논쟁(1977~1978)에서는 문학의 범위를 뛰어넘어 광범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타이완 현실을 비판적으로 묘사한 향토문학운동은 전체적으로 타이완 민주화운동의 큰 물결과 보조를 맞추어 발전해갔다. 〈아들이 큰 장난감〉은 시골의 작은 읍에서 극장 간판을 몸에 건 채 걸어 다니며 영화를 선전하는 샌드위치맨의 고달픈 인생을 그리고 있다. 샌드위치맨은 얼굴에 광대 분장을 하고 고깔모자를 쓰고서, 영화를 선전하며 발이 아프도록 돌아다니지만, 소득이 너무도 보잘것없다. 그는 이 별 볼일 없는 일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지만, 그의 아들은 분장을 하지 않은 그의 맨 얼굴을 보고선 그만 울고 만다. 어릴 때부터 광대 분장을 한 아빠의 얼굴에 익숙해진 아이는 맨 얼굴이 몹시 낯설었던 것이다. 샌드위치맨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분장을 하고 광고판을 어깨에 멘다. 〈아들이 큰 장난감〉이 흥행과 평론계 반응에서 모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향토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붐을 이루었다.
3. 노스탤지어의 형상화
〈동년왕사〉는 허우샤오셴의 자전적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의 주인공 아샤오(阿孝)의 집에서는 부친이 가정의 중심인데 그는 항상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하고 있다. 모친은 전통적인 중국 여성으로, 가족들 식사 준비로 항상 바쁘다. 조모는 아샤오가 커서 높은 사람이 될 거라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아샤오를 매우 귀여워한다. 조모는 아샤오를 데리고 고향 메이 현(梅縣)으로 가는 길을 찾아 나서지만, 헤매기만 하다가 끝내 실패하고 만다. 그 뒤로도 조모는 몇 번이고 고향 가는 길을 찾아 나서지만, 끝내 타이완 해협 너머 고향으로 가는 길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정전이 되었다가 다시 불이 들어왔는데, 그 사이에 아샤오의 아버지가 의자에 앉은 채로 죽어 있다. 부친이 죽은 후에 아샤오는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패거리를 지어 다니며 싸움을 하고 말썽을 부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어머니도 암에 걸린다. 타이베이의 큰 병원에 가보기도 하지만 끝내 수술을 거부하고 별세한다. 본래 군인이 되려했던 아샤오는 짝사랑하던 여학생의 “대학에 가면 보자”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대학시험을 보기로 한다. 조모는 별세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발견된다. 이미 부패한 조모의 유체는 일본식 다다미에 혈흔을 남긴다. 〈동년왕사〉는 외성인 가족의 타이완 이주 과정, 즉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잘 표현된 영화다. 주인공 아샤오의 부친은 대륙의 광둥 성 메이 현 출신이다. 그 동창은 타이완 타이중시의 시장이었는데, 그의 초청으로 아샤오의 부친은 타이완으로 가며, 1년 후엔 일가족이 모두 옮겨간다. 부친은 이주해 와서도 교육 공무원이 되는데, 이주지의 기후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습기가 많은 기후 탓에 부친은 천식을 앓고, 그 때문에 이사를 다니기도 한다. 엄격한 부친에 비해 조모는 매우 인자하다. 조모는 몇 번이고 고향 가는 길을 찾아 나선다. 조모는 분명히 이렇게 저렇게 가다 보면 메이 현으로 가는 다리가 나온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그건 조모의 착각이다. 실제로 대륙과 타이완 사이에 있는 타이완 해협에는 다리가 없다. 조모의 착각은 외성인의 향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동년왕사〉에는 사람이 죽는 장면이 세 번 나온다. 부친은 가정의 정신적·물리적 지주였기에 정전이 된 상황에서 부친이 죽은 것은 가족들에게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모친, 조모 순서대로 가족들의 충격은 점차 완화된다. 죽음이란 결코 끝이 아니며, 가족의 범주 안에서 또 다른 탄생이나 성장과 연결되어 있다. 대륙 이주민들은 타이완에 정착해서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4. 탄광촌과 산간 기차에 드리워진 성장의 그늘
60년대는 타이완이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룬 시기였고,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도 일을 찾아 대도시로 가지만, 타이베이에서 그들의 삶은 몹시도 고단하다. 풍요롭고 안정적인 생활은 대도시의 중심부를 차지한 고용주들의 몫이었고, 주변부에 있던 그들은 늘 궁핍과 냉대 속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바람에 이는 먼지〉에서는 도시와 시골의 극명한 대비를 볼 수 있다. 영화 속 탄광촌에는 산이나 숲처럼 자연적 요소가 많은 데 비해, 타이베이에는 건축 공사장과 시멘트 건물, 공장이 눈에 띈다. 그리고 기차는 도시와 시골이라는 두 이질적인 공간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영화에는 아윈이 시골에서 고구마를 가지고 상경했다가 타이베이 역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 고구마 자루를 거의 뺏길 뻔하다가 마침 아위안이 나타나 그걸 도로 빼앗는 장면이 나온다. 승강이를 하던 아위안이 레일과 침목 위로 흩어져 구르는 고구마를 허겁지겁 주워 담는다. 이렇듯 영화에서는 순박한 시골의 감수성과 타이베이의 각박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이 여러 각도에서 비교된다. 아윈이 군대에 간 후에도 잘 유지되던 두 사람의 관계가 갑작스레 깨져버리는 대목에서 관객은 인생의 부조리함을 느낀다. 거대한 산업사회에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지 못하는 두 사람은 영화의 영어 제목인 ‘〈바람 속의 먼지(Dust in the Wind)〉’처럼 왜소하고 무력한 존재인가.
5.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영화 〈비정성시(非情城市)〉는 허우샤오셴 감독의 성공작이다. 〈비정성시〉는 1947년, 타이완 공권력이 자행한 대규모 민중학살 사건인 이른바 ‘2·28사건’을 영화의 소재로 채택했다는 면에서 강한 인상을 준 작품이다. 그런 강렬한 인상이 형성된 데는 영화가 개봉된 1989년이라는 시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1989년은 중국 대륙에서 6·4톈안먼 사건이 있었던 해이고, 시엔엔(CNN)을 비롯한 서방 언론을 통해 세계 각국에 방영된, 인민해방군의 유혈 탄압을 담은 충격적인 영상이 이 영화와 겹쳐지면서 묘한 이미지 상승작용을 하기도 했다.
6. 예술적 진실과 역사적 진실
〈비정성시〉에는 2·28사건이 나오지만, 2·28을 중심으로 서사가 진행되지는 않는다. 영화는 역시 타이완 내 지배 세력이 일본에서 국민당으로 바뀌어가던 1945~1949년의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 공권력과 인민의 대립을 한 가족사를 중심으로 풀어가고 있다. 허우셔오셴은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서 일제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타이완인들의 아이덴티티 탐색 과정을 영화에 담아왔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 담긴 강렬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은 타이완의 민주화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만은 야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나라이다. 약 13억의 인구가 있는 중국은 대부분의 스포츠에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보여줬듯이 중국은 스포츠의 강대국가이다. 그에 비하면 대만은 작고 인구도 적은 나라이다. 하지만 대만이 중국에게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스포츠가 야구라고 한다. 그래서 대만인들은 야구에 열광하며 야구로 중국을 이길 수 있다는 것에 만족감과 뿌듯함을 느꼈으며 스포츠에서나마 중국을 이겨 세계인들이 대만을 중화타이베이라고 치부하는 것을 대만이라는 나라로 각인하길 바라고 있다. 야구를 이김으로써 중국에 굴복하고 싶지 않은 마음가짐을 표현했다. 이런 대만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 스포츠 기구들에 대한 정치적 압력과 중화인민공화국을 (모든 경우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유일한 국가로 보려는 국제적 인정 추세로 인해, 대만대표팀은 명칭을 "중화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에서 "중화 타이베이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바꾸어 일종의 타협적 명칭을 가져야 했다. 이렇듯 대만은 그나마 작은 반항이라도 해보려던 시도가 대륙이라는 벽 앞에 무너졌다. 언젠가는 중국이 세계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된다면 대만인들은 중국을 자신의 나라로 인정할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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