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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요약]
■김인후(金麟厚)
1510년(중종 5) - 1560년(명종 15)
[문과] 중종(中宗) 35년(1540) 경자(庚子) 별시(別試) 병과(丙科) 3위(06/19)
조선전기 세자시강원설서, 홍문관부수찬, 제술관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로, 전라남도 장성 출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 담재(湛齋). 아버지는 참봉 김령(金齡)이며, 어머니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웠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이황(李滉)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으며, 이듬 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 · 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보필주1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주2의 원한을 개진주3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주9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인종 1)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에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 · 공조정랑 · 홍문관교리 · 성균관직강 등에 제수주4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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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집 제13권 / 묘갈명(墓碣銘)
후릉 참봉 김공 묘갈명 병서(厚陵參奉金公墓碣銘 幷序)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이 도학(道學)과 절의(節義)로 우뚝이 남쪽 지방의 인망이 되시니, 뒤를 이은 먼 후손들이 모두 그 어짊을 본받아 따르고 있다. 휘가 기하(器夏), 자가 용구(用九)인 분은 바로 선생의 4세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한가롭게 놀고 함부로 행동하는 습관이 없었으며, 책을 주면 글자를 분명히 알고 글귀를 분석하여 환하게 통달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이 때문에 글 뜻이 크게 진전되었으며, 마침내 옛 성현의 학문에 몸을 맡겨 침잠(沈潛)하고 반복해서 밤낮으로 공부하였다.
비록 병을 자주 앓았으나 조금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항상 말씀하기를, “병을 치료하는 것도 학문하는 한 가지 일이니, 마음속에 한 가지를 주장하면 온갖 병을 이길 수 있다.”라고 하였다. 기공 정익(奇公挺翼)과 함께 격물(格物)과 미발(未發)의 설(說)을 논할 적에 의견이 서로 맞지 않으면 번번이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에게 찾아가 질정하니, 우암 선생이 공의 말씀을 옳게 여기고 공이 분명하게 알고 있음을 자주 칭찬하였다.
박공 광일(朴公光一)은 학문과 행실이 남쪽 지방에 유명하였는데, 공은 이미 박공과 사귀어 친하였다. 지각설(知覺說)을 논할 적에 박공은 지각을 오로지 지(智)에 귀속시켰는데, 공은 말씀하기를, “지각은 사성(四性)을 포괄하니, 오로지 지(智)에만 귀속시킬 수 없다.” 하여 논란을 주고받았는바, 분명하고 간절한 말씀이 많았다.
공은 매번 후생들을 훈계하여 말씀하기를, “사서(四書)는 성리학의 연수(淵藪)이고 문장의 부고(府庫)이다.”라고 하였다. 자리 곁에 항상 《근사록(近思錄)》과 《심경(心經)》, 《주자서(朱子書)》와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두고 날마다 그 가운데에 빠져 있었으며, 또 역사에 조예가 깊어 고금을 출입하면서 조리 있게 술술 말씀하시곤 하였다.
공의 학문은 방심(放心)을 되찾는 것을 요점으로 삼았으며, 의(義)를 취하고 이(利)를 버리는 구분이 매우 엄격하여 곧바로 자신이 의리를 따라 죽고 돌아보지 않고자 하였다. 마음을 보존하기를 성실하게 하여 밖으로 치달리고 이름을 따르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평소 엄격한 행실을 하지 않았으나 선(善)하지 못한 것을 보면 얼굴빛과 말씀을 조금도 너그럽게 하지 않았다.
밖으로는 느슨하고 둔한 듯하였으나 안으로는 실제로 밝고 통달하여, 남들이 의심하고 현혹하는 것을 한 마디 말씀으로 분석해 판단하였다. 평소 식별하는 능력이 있어서 일을 논할 적에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적었으며, 의학(醫學)ㆍ복서(卜筮)와 감여(堪輿)의 방술을 널리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가정에서의 행실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부모의 상(喪)에 매우 슬퍼하여 몸이 크게 훼손되었으며, 이웃 사람들이 공의 곡(哭)하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형제들과 우애하고 집안사람들을 단속함에 모두 바른 도리를 얻어서 가정안의 다스림이 몹시 엄격하였다.
선조를 받듦에 부지런하였으며 선대의 유적이 매몰되는 것을 애통해하여, 문집을 간행하고 시호를 맞이해 오는 일을 전담하여 잘 수행하였다. 선(善)을 좋아하고 의리를 즐거워하여 세상의 변고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암과 문곡(文谷) 김 문충공(金文忠公)이 남쪽 변방에서 화를 당하자, 공은 많은 선비들을 창도하여 초상을 호위하였으며, 우암의 사당을 세울 적에 그 의논을 주관하고 손수 서원의 규칙을 지었다.
문곡의 여러 아들과 매우 친하였고, 특히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ㆍ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두 분과는 더욱 절친하였다. 공이 별세하자, 삼연은 공을 위하여 가마(加麻)를 하고 통곡하면서 제전(祭奠)을 올렸으며,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와 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 두 분은 모두 제문을 지어 애도하였는데, 공을 몹시 찬양하였다.
나의 선친 충정공『忠正公: 이세백(李世白)』은 공의 명성을 소중하게 여기고 천거하여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게 하였으며, 공이 병들어서 부모의 상을 당하자, 돌아보고 보살피기를 남달리 하셨다. 지금 공의 큰아들 희서(羲瑞) 씨가 가장(家狀)을 갖추어 나에게 한마디 말을 해 줄 것을 부탁하면서 선대의 의리를 가지고 책임 지웠는데, 전후로 모두 지극하고 간절하였다.
아, 나는 진실로 불초하나 또한 일찍이 가정의 가르침을 익숙히 받아서 공을 추앙하고 신복한 지가 오래니,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위와 같이 차례로 쓰는 바이다. 공은 계통이 울산(蔚山)에서 나왔으니, 증조 휘 종호(從虎)는 찰방이고 조고 휘 남중(南重)은 선교랑(宣敎郞)이고 선고 휘 형지(亨祉)는 호조 좌랑에 추증되었다.
선대가 비록 모두 현달하지 못했으나 드높은 풍절(風節)과 뛰어난 행실이 있었다. 좌랑이 제주 양씨(濟州梁氏)에게 장가드니, 진사 몽우(夢禹)의 딸이고 고암공(鼓巖公) 자징(子澂)의 증손이다. 공은 태어난 지 3년에 중부(仲父)인 휘 형우(亨祐)에게 출계(出系)하니, 선비(先妣) 부풍 허씨(扶風許氏)는 사인(士人) 열(說)의 딸이다.
내자(內子) 서산 유씨(瑞山柳氏)는 교관 세익(世翊)의 딸인데, 법도 있는 가문에서 생장하여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공의 덕에 충분히 배합되었다.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작은 아들은 우서(禹瑞)이며, 우서는 국현(國賢)ㆍ집현(集賢)ㆍ양현(亮賢)ㆍ광현(光賢)의 네 아들을 두었고, 한 딸은 어리다. 희서(羲瑞)는 아들이 없고 두 딸만 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숙종(肅宗) 신사년(1701, 숙종 27) 정월 3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3세이다. 순창(淳昌)의 사창(社倉) 진향(辰向)의 산에 장례하였고, 유씨는 별도로 장성(長城) 국성기(國城基)에 장례하였다. 명문(銘文)은 다음과 같다.
충신하고 학문을 좋아함을 / 忠信好學
지금 다시 볼 수 없으니 / 今不復覿
호남 지역이 / 湖南之地
이로부터 적막하게 되었네 / 自此牢落
식견이 통달하고 지킴이 확고하여 / 識通守確
그 절개 흔들리지 않았으니 / 不撓其節
마땅히 국정을 도모하는 낭묘에 두어야 하네 / 合寘廊廟謀謨之間
아 이는 삼연과 포음 두 분의 말씀이니 / 噫此三淵圃陰二公之言
후일 공을 고찰하고자 할진댄 / 後欲考公
어찌 여기에서 살펴보지 않겠는가 / 盍於此而觀諸
<끝>
[註解]
[주01] 하서(河西) 김 선생(金先生) : 김인후(金麟厚, 1510~1560)로 자는 후지(厚之),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하서는 그의 호이다.
고향 장성(長城)에서 학문 도야와 제자 양성에 힘썼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후일 기대승(奇大升)의 주정설(主情說)에 많은 영
향을 미쳤다. 1796년(정조20)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ㆍ《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주02] 격물(格物)과 미발(未發)의 설(說) : ‘격물(格物)’은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으로 지(知)공부에 해당된다. ‘미발의 설’은 《중용
장구(中庸章句)》 제1장에,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이 아직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라고 보이는데, 주자(朱子)는 “희ㆍ노ㆍ애ㆍ락은 정(情)이
니, 이것이 아직 발하지 않았으면 성(性)이다.
중(中)은 성(性)의 덕이고 화(和)는 정(情)의 덕이다.”라고 풀이하였다. 이후로 희ㆍ노ㆍ애ㆍ락은 정(情)으로 마음이 이발(已發)
한 상태를 이르고, 성(性)은 마음이 미발인 상태를 이르게 되었는바, 이에 대한 학설을 말한 것이다. 중(中)은 희ㆍ노ㆍ애ㆍ락의 정
이 발하지 않았을 때에 수렴(收斂) 공부를 잘하여 미발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본성을 잘 보존하는 것으로, 경(敬)공부를 이른다.
[주03] 사성(四性) : 성리학의 주요 개념 중의 하나로, 인간의 본성인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를 이른다. 이러한 본성에서 측은지
심(惻隱之心)ㆍ사양지심(辭讓之心)ㆍ수오지심(羞惡之心)ㆍ시비지심(是非之心)의 네 가지 실마리가 나오는데, 이를 ‘사단(四
端)’이라고 한다.
[주04] 사서(四書)는 …… 부고(府庫)이다 : ‘연수(淵藪)’는 깊은 못〔淵〕과 숲으로, 깊은 못에는 물고기가 모여들고 숲〔藪〕에는 새들이 모
여듦으로 여러 사람이나 물건이 모여드는 곳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데, 여기서는 본산(本山)의 의미로 쓰였다. ‘부고’는 곳간을
이른다.
[주05] 감여(堪輿)의 방술 : 풍수지리설을 이른다. 원래 감여는 하늘과 땅의 뜻인데, 여기서는 지리에 치중하여 말한 것이다.
[주06] 김 문충공(金文忠公) : 김수항(金壽恒, 1629~1689)으로 자는 구지(久之),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문곡(文谷)은 그의 호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고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의 아들이다. 1651년(효종8)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656년 문과 중시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청요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노론을 이끌었으며 1680년(숙종6)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 영의정으로 정국을 주도하다가, 1689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진도(珍島)에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주07] 문곡의 여러 아들 :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의 여섯 아들로,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ㆍ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ㆍ삼연
(三淵) 김창흡(金昌翕)ㆍ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ㆍ포음(圃陰) 김창즙(金昌緝)ㆍ택재(澤齋) 김창립(金昌立)을 이른다.
문곡의 아들들은 모두 문장과 학식이 높아 세상 사람들이 ‘육창(六昌)’이라고 칭송하였다.
[주08] 가마(加麻) : 스승이나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소렴이 끝나면 머리에 삼으로 만든 끈을 쓰는 것을 이른다.
[주09] 고암공(鼓巖公) 자징(子澂) : 양자징(梁子澂, 1523~1594)으로 자는 중명(仲明)이며, 고암은 그의 호이다. 소쇄 처사(瀟灑處士)
양산보(梁山甫)의 아들이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사위이자 문인으로 유학에 깊은 성취를 보였으며, 도의로써 송강(松江)
정철(鄭澈)ㆍ중봉(重峯) 조헌(趙憲)ㆍ우계(牛溪) 성혼(成渾) 등과 교유하였다. <끝>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류재성 김창효(공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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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厚陵參奉金公墓碣銘 幷序
河西金先生以道學節義。窿然爲南土之望。後承遙裔。皆法象其賢。有諱器夏字用九者。卽先生四世孫也。幼無遨放習。及授書。字核句剔。洞釋而後已。由是文義驟進。遂委己於古聖賢學。沉潛反復。夜以繼日。雖善病而不少懈。嘗曰。治疾亦學之一事。主一可以勝百病。與奇公挺翼論格物未發說。意見相牴牾。就質尤菴宋文正公。尤菴是公說。亟稱其明白。朴公光一學行著於南。公旣友之矣。及論知覺說。朴公專屬於智。公曰。知覺包四性。不可專屬。往復講辨。言多明切。每敎後生曰。四書理學之淵藪。文章之府庫。座側常置近思錄心經朱子書性理大全。日涵迤其中。又邃於史。出入古今。纚纚乎其言之也。其學以求放心爲要。義利取舍之分。甚截然。直欲以身殉義而不顧也。存心誠實。絶無騖外徇名意。不爲矯厲行。而見不善。不假色辭。外若重遲。內實明達。人所疑眩。一言剖判。雅有鑑識。論事鮮有差失。醫卜堪輿之術。靡不旁通。內行篤至。居喪哀毁甚。隣里聞哭聲。皆爲出涕。友昆弟飭家人。咸得其道。門內之治。斬斬如也。勤於奉先。痛先故遺跡湮沒。力任刊集迎諡事。以克有成。樂善嗜義。不怵時變。尤菴與文谷金文忠公罹禍南荒。倡多士護其喪。尤菴祠屋之建。掌其議。手刱院規。最與文谷諸胤厚善。而農巖,三淵二公尤所深契。公沒。三淵爲之加麻哭奠。夢窩,圃陰二公俱以文誄。稱道甚盛。我先子忠正公重其名。擧授厚陵參奉。病而喪。顧視加等。今公之胤羲瑞氏具狀請余一言。責以先義。前後至切。噫。宜顯固亡肖。亦嘗慣承家庭之敎。而嚮服公久矣。其何敢辭。遂泣而叙次如右。公系出蔚山。曾祖諱從虎察訪。祖諱南重宣敎郞。考諱亨祉贈戶曹佐郞。雖俱未達。而有風節行誼。佐郞娶濟州梁氏。進士夢禹女。鼓巖公子澂曾孫。公生三歲。出後仲父諱亨祐。妣扶風許氏。士人說女。內子瑞山柳氏。敎官世翊女。生長法家。有懿行。克媲公德。有二男。季禹瑞。禹瑞有四男。國賢,集賢,亮賢,光賢。一女幼。羲瑞無子有二女。並幼。公卒于肅宗辛巳正月三日。享年五十三。葬于淳昌社倉向辰之原。柳氏別葬長城國城基。銘曰。
忠信好學。今不復覿。湖南之地。自此牢落。識通守確。不撓其節。合寘廊廟謀謨之間。噫。此三淵圃陰二公之言。後欲考公。盍於此而觀諸。<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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