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충대농생과87동지회
 
 
 
카페 게시글
기본 자료실 스크랩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6 ~ 9
우담바라 추천 0 조회 7 15.05.09 16: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산일보]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6> 무왕 대무예의 당나라 공격
'믿음 저버린 대국 응징하라' 웅대한 기개로 독립국 천명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 견제
요동반도 발해 영역 증명
해상과 육상으로 전면 공격
2007/02/10 020면 16:33:09  

 

발해는 719년 대조영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왕위를 이어 받아 제2대 무왕이 되었다. 대조영이 자식을 얼마나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기록상으로 무왕이 된 대무예와 당나라 책봉에 대한 답방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대문예(大門藝)만이 확실하다. 이들의 어머니가 누구이며 어느 집안 출신인가 하는 점도 모른다.

  관련기사
 
제2대 무왕과 그 동생 대문예는 당나라 공격 문제를 놓고 뜻을 같이 하지 못하고 형제의 의를 끊게 된다. 이 비극은 사극 작가들의 '흥미'를 끄는 대목일 수 있다. 단순히 권력의 생리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조영의 뒤를 이은 무왕(武王)은 그의 시호(諡號)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 업적을 많이 쌓은 왕이다. 그는 대조영의 외교 방향을 이어 받아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 연호도 사용하는 등 독립국의 면모를 내외에 천명하였다. 이러한 발해의 독자적 행동에 대해서 '신당서'는 '사사로이' 시호를 고왕(高王)이라 하였고 '사사로이'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평하고 있다.

당에 대한 무왕의 감정이 극히 나빴던 것은 아버지 대조영과 건국의 고통을 같이 했던 과정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는 이미 영주에서 태어나 아버지와 함께 당나라의 집요한 방해를 무릅쓰고 건국 길에 올랐다. 무왕은 737년에 죽었으며 발해 건국을 위해 영주에서 탈출한 지 40년이 지난 정도였다. 무왕이 60세에 사망했다면 20세 정도에 이미 그는 아버지 대조영과 할아버지 걸걸중상의 활동을 목격하였을 것이다.

발해와 당이 전쟁을 하게 된 계기는 당이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 했던 사건에서 비롯한다. 그 내용은 '구당서'와 '신당서'에 자세하다. "개원 14년(726)에 흑수말갈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므로,현종(玄宗)이 그 땅을 흑수주(黑水州)로 삼아 장사(長史)라는 관리를 두고 통치케 하자" 무왕은 크게 격노하였다. "(무왕은)흑수가 우리 국경을 거쳐서 처음부터 당나라와 서로 통하였고,지난날 돌궐에게 토둔(吐屯)의 직책을 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는데,이제 뜻밖에 바로 당에게 벼슬을 청하였으니 이것은 반드시 당과 공모를 하여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고 하면서 친아우 대문예 및 그의 장인 임아(任雅)를 시켜 군대를 이끌고 가서 흑수를 치게 하였다.

그러나 전에 일찌기 볼모로 당나라 서울에 갔다 온 대문예는 다음과 같이 당나라 공격을 반대하였다. "흑수가 당의 벼슬을 청하였다 하여 그를 바로 치고자 한다면 이것은 당을 저버리는 것이다. 당은 사람의 많음과 군사의 강함이 우리의 1만 배나 되는데,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다면 다만 스스로 멸망을 부를 뿐이다. 지난날 고구려의 전성기에 강병 30여만으로 당과 맞서 복종하지 않다가,당병이 한번 덮치매 땅을 쓴 듯이 다 멸망하였다. 오늘날 발해의 인구가 고구려의 몇 분의 일도 못되는데,그런데도 당을 저버리려 하니,이 일은 결단코 옳지 못하다."고 대문예는 만류하였다. 그러나 무왕은 듣지 않았다.

▲ 발해 군대가 당을 공격하기 위해 거쳐갔을 중국 지린성(吉林省) 집안시의 압록강변으로 건너편이 북한이다.


대문예는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렀을 적에 또 글을 올려 강하게 간했다. 그러자 무왕은 노하여 사촌 형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문예를 대신하게 하고 문예는 불러다 죽이려 하였다. 이에 문예가 그의 무리를 버리고 당나라로 도망하자 당 현종은 오히려 그를 좌효위장군으로 삼아 양국간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무왕은 사신을 보내어 문예의 죄상을 피력하며 죽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몰래 문예를 안서로 보내고 무왕에게는 영남으로 유배하였다고 거짓으로 알렸다. 하지만 내부 제보자를 통해 이 사실을 안 무왕은 당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대국은 남에게 신의를 보여야 하거늘 어찌 거짓을 일삼는단 말인가. 이제 들으니 문예가 영남으로 떠나지 않았다 한다. 청컨대 죽여주기 바란다."고 거듭 요구했다. 이로 말미암아 당은 누설자를 색출하여 좌천시키고 문예를 잠시 영남으로 보내고 무왕을 달랬다.

그러나 무왕은 결국 당나라를 응징하기 위해 732년에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등주(登州,현 山東省 蓬萊)를 공격하면서 양국은 전쟁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유주(幽州)에 파견해 군사를 징발하여 발해군을 치게 하였다. 또 당나라에 묶고 있던 신라 김사란(金思蘭)에게도 신라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신라는 "마침 산이 험하고 날씨가 추운데다 눈이 한길이나 내려서 병사들이 태반이나 얼어 죽어 전공(戰功)을 거두지 못한 채 돌아 왔다."고 전한다.

전쟁의 결과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무왕이 전쟁으로 원한을 풀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몰래 동도(東都)에 사신을 보내 자객을 사서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문예를 찔러 죽이려 했다. 하지만 실패하고 자객들은 모두 잡혀 죽었다고 한다. 무왕이 당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에 대한 깊은 원한과 주변의 돌궐과 거란도 당과 대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발해 무왕의 당나라에 대한 응징 의지가 결정적이었다.

발해의 당 공격은 해상과 육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해상 루트로는 압록강 하구에서 출발해 등주를 공격했고,육로로는 영주로 가는 길을 통해 거란과 가까운 마도산(馬都山)으로 내달아 당을 공격했다. 발해의 당 공격은 무왕 시기에 이미 요동반도가 발해 영역이지 않고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발해 역사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 의미가 크다.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7> 발해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육정산 고분군
정혜공주 묘비 독립국가 정체성 확인 대발견
1949년 고분 발견 50~60년대 발굴 80년대 국내 알려져
장례·무덤 양식 등 고구려 계승…황상 칭호 자주성 증명
2007/02/24 020면 16:23:15   프린터 출력

사진 설명:
3시간 반 정도 차를 달려 둔화에 도착하였다. 시내에 있는 발해의 '강동 24개 돌유지'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었다. 아침은 연변대학 초대소에서 녹두죽과 찐빵으로 하였다. 다양한 곡식죽은 중국에 갈 적마다 맛있게 먹는 음식 중의 하나다. 그런데 점심은 입에 맞는 것을 찾기가 힘들었다. 둔화는 조선족자치주이면서도 조선족이 많지 않은 곳이어서 '장국'(된장국)을 먹을 수 있는 식당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는 물만두 등 비교적 우리의 식성에 맞는 요리로 점심을 떼울 수밖에 없었다.

둔화에는 모두 다섯 차례 정도 가보았지만 육정산고분군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두 차례뿐이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방문 때는 육정산에 올라가서 정혜공주묘 발굴터와 다른 무덤군을 살펴볼 수 있었다. 유적지는 잡풀이 무성했으나 발굴 후 유적 뒤처리를 말끔히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유적을 살펴볼 수 있게 해 다행이었다. 그 뒤에는 고분군 울타리 밖에서 안내간판만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안내간판조차 아예 보지 못하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2003년 여름 모 통신회사에서 후원한 중고생들의 답사 인솔 때에는 아예 지나가지도 못하고 입구에 현대식으로 지어진 정각사(正覺寺)만 볼 수 있었다.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비공식적이나마 육정산고분군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방문이 늘고 모 방송국에서 이곳의 관리실태를 한국 입장에서 비판한 후,접근이 까다로워졌다. 최근 중국당국이 발해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위해 전반적인 발굴을 하면서부터 더욱 경계가 심해졌다. 지난해 여름에는 둔화 호텔에서 자고 아침 일찍이 다른 샛길로 빙 돌아 고분군 경계와 안내간판이 있는 곳까지만 들렀다가 오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발해 귀족들의 무덤이 발견된 것은 1949년이었다. 중국 건국 후 학교운영비를 마련할 방도를 궁리하던,둔화의 어느 중학교 교장 선생이 옛 무덤이 많은 이곳에서 보물을 꺼내야겠다고 '도굴'을 하던 중 보물은 나오지 않고 글자가 새겨진 돌 등이 나왔는데,이를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죽(竹)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어 발굴 소식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내막이 겨우 알려졌을 정도였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발해유적 가운데 몇 군데의 도성급 유적들을 발굴한 적이 있었다. 동기야 어떻든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나마 그때 발굴한 것이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육정산 '고분군의 구역'(墓區)은 두 구역으로 나뉘어진다. 제1구역에선 왕실귀족들의 무덤이 30여 기,제2구역에선 중·하급관리와 일반인들의 무덤이 50여 기가 발견되었는데,대부분 발굴되었다. 최초의 발굴은 연변박물관 주관으로 이루어졌다. 1953~1957년 지린성문물관리위원회와 지린성박물관이,1959년 8월에는 지린성박물관에서 그리고 1964년에는 북한과 공동발굴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 발굴에 대한 소식이 한국과 일본 등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80년 이후였다. 1956년 진유푸(金毓)와 옌완장(閻萬章)의 정혜공주묘에 대한 글과 1965년 북한의 '력사과학'에서 소개한 자료가 1980년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번역·소개되었다. 중국도 80년대부터 발해사 연구가 크게 일어나면서 정혜공주묘비 등에 대하여 왕청리(王承禮) 등이 다시 본격적으로 언급하기 시작하였는데 50~60년대 발굴의 중요성이 컸음을 반증하는 사례였다.

제1구역에는 묘비가 나와 확인된 정혜공주묘가 있다. 그로부터 동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제2대 무왕 대무예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는 '진릉(珍陵)'도 발굴되었다. 유물로는 돌사자와 벽화조각,꽃무늬벽돌과 질그릇 손잡이 등이 나왔다. 무엇보다 정혜공주 묘비의 발굴은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발해사에 있어서 대발견이었다. 이는 1980년 지린성 화롱현(和龍縣)에서 발견된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와 함께 발해사 연구에 있어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21행 725자의 정혜공주묘 비문은 높이 90cm,너비 49cm,두께 29cm로 현재 창춘(長春) 지린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용은 그녀가 문왕의 둘째 딸로 출가하였고 남편이 그녀보다 먼저 죽었으며 보력(寶曆) 4년(777) 4월 14일 40세로 죽었다는 사실과 정혜공주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보력 7년 11월에 진릉 서원(西原)에 배장(陪葬)되었다는 것 등을 포함하고 있다. 3년상을 치른 셈인데 이는 고구려나 백제와 같은 장례 풍속으로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이 확인된 셈이다. 또한 발해왕을 황상(皇上)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도 알게 되어 발해의 자주성을 확인케 한 증거가 되었다.

무덤양식도 고구려식 돌방무덤(석실봉토묘)이며 무덤 앞에 벽돌이 깔려 있는 무덤 길이 있고,여기서 널길을 통하여 무덤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4면이 돌방이며 천정은 고구려식의 고임천정(말각천정)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이 비문은 그 아버지 문왕이 '대흥(大興)'에서 불교적 색깔이 있는 '보력(寶曆)'으로 연호를 고쳤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즉위시가 아닌 때에 개원(改元)했다는 것은 정치의 개혁 및 유신과 관련이 있는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문왕이 전제군주로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적혀 있어 문왕이 불교이념을 중심으로 국가통합을 의도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 북쪽에서 바라본 육정산 전경. 여섯 봉우리가 있어 육정산(六頂山)으로 불리며 맨 오른쪽에 603m의 주봉이 보이고 그 뒤편 남쪽에 정혜공주묘 등이 자리하고 있다.

▲ 정혜공주묘지석.

▲ 제1무덤구역 2호분의 정혜공주묘. 뒤쪽 조금 솟아난 부분이 남아 있는 봉분이다.

▲ 육정산 고분군 입구. 안내비문이 뒤로 기울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한족(漢族) 석공의 실수로 한 획이 빠져 '륙정산 옛 무덤떼'가 아닌 '륙정산 엿 무덤떼'가 되어 있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1993년 촬영)

▲ 지금은 입구에 '륙정산 옛 뭇묘지'로 고쳐져 있다(2006년 촬영).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8> 북한의 발해사 연구
고고학 강점 기반 독립국 역사 복원 의지
5경 중 남경,현재 신포시 오매리절터 등 1차 자료 많아
60년대부터 본격 연구 발해 정체성 논리적 토대 구축
2007/03/03 020면 17:03:58   프린터 출력

사진 설명:
2002년부터 공개화된 중국의 역사 침탈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이 알려지면서 자주 받던 질문 증의 하나는 북한은 과연 고구려나 발해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한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북한은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대로 설명을 해 보이지만 그런 나를 신기롭게 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떻게 북한 자료를 보아 왔느냐 하는 것도 그렇게 보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필자가 북한의 연구 성과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 및 중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부터였다. 1980년 초반 필자는 주로 일본 국회도서관에 복사 신청을 하여 자료를 접할 수 있었다. 문헌사의 '력사과학'과 고고학 중심의 '조선고고연구'라는 잡지가 보려는 자료의 핵심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북한 논문을 처음으로 보았을 때는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논문에 있는 김일성 교시문이 생소하고 거슬렸지만 중국 논문을 보다가 우리와 같은 시각에서 쓰여진 강렬한 글을 보니 귀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차에 1992년 중국에서 열리는 '발해사 국제학술회의'는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되었다. 공산권 여행 '허가'를 받아 혼자서 텐진으로 입국하여 베이징을 거쳐 연변으로 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여기에서 북한의 발해사 학자들을 세 분이나 만날 수 있었다. 주최 측에서 북한 학자들을 초청하고서 남한에는 이러한 사정을 통보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한 해 전 비슷한 학술회의를 할 적에는 한국 학자들만이 참석하였기에 남북 발해사 학자가 역사상 최초로 만난 사건이 된 것이었다.

지금은 모두 다 고인이 되었지만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전영률 소장을 비롯해서 역사연구소 발해사연구실장인 장국종 박사,김일성대학 교수인 현명호 박사가 참석하였다. 북한 학자들은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에 대한 발표를 하였고,필자는 '신라와 발해의 교섭과 대립'이라는 글을 통해 한국사에서의 '남북국시대'를 역설하였다. 헤이룽장성을 비롯한 중국 내의 많은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이 참석하여 진행된 이 학술회의는 긴장된 상태 그대로였다. 당나라 지방정권으로서의 발해라는 중국학자들의 견해와는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까지의 발해사에 대한 연구는 북이 남보다 앞섰다. 이는 발해사뿐만이 아니라 고구려사에 대해서도 큰 차가 없었지만 남한은 발해사 연구 인력이 거의 전무했고 1980년에야 비로소 한국사 전공자로서 발해사 연구를 시작한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필자와 서울대 송기호 교수 정도였다.

그러나 북한은 지역 자체가 고구려와 발해사 영역으로 1차 자료를 안고 있는 곳이다. 또한 1963년부터 2년간 중국의 발해사 유적을 중국과 공동발굴하는 경험을 가지고 있어 주영헌,장상렬,김종혁 등과 같은 훌륭한 고고학자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에서는 박시형이 1962년 '발해사를 위하여'라는 지표가 될 만한 무게있는 글을 발표하여 판단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 있었기 때문에 문헌과 고고학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발해사가 발전하였다. 역사연구소에 발해사연구실이 있는 것만으로도 북한은 제도적인 면에서 남한보다 나았다.

북한 발해사 연구의 강점은 고고학이다. 아울러 정사류의 기록에 없는 내용이 많은 '협계태씨족보' 등을 적극적으로 원용해서 발해사를 복원하려는 것도 주목된다. 발해건국 1천300주년을 기념해서 내놓은 7권의 '발해사'와 '발해사문답집' 등은 훌륭했다. 이 연구서는 사료 인용에 있어서 무리한 부분이 있지만 발해사를 복원하려는 북한의 의지를 읽을 수 있는 업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필자는 1992년 발표가 끝난 후 중국 학술회의의 관례대로 답사 안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으나 발해유적 답사는 공식적으로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묵인할 테니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이나마도 이때에는 헤이룽장성까지 발해유적을 비교적 많이 돌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감동적이었다. 북한 학자들에게는 내가 쓴 박사논문 등을 전달하고 헤어졌다.

1992년부터는 중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발해유적도 답사하는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북한 땅은 2004년 2월에야 밟을 수 있었다. 첫 방문은 운 좋게도 인천공항발 평양 순안공항 직항 고려항공이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 준비위원으로서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남북공동 학술토론회 및 자료전시회' 참석을 위해서였다. 출국면세점도 국내 여행으로 간주되어 이용할 수 없었다.

'동북공정' 분위기가 한층이었고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이 진행중에 있던 터라 내심으로는 고구려나 발해유적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북한은 '일제의 약탈문화재'를 주제로 내세웠다. 이른바 '납치문제' 등에서 북한은 중국보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무엇인가 얻어내려는 분위기였다. 중국과의 관계는 한국이 알아서 해주고,일본은 우리가 맡는다는 분위기로 읽혀졌다.

그렇다고 북한이 중국의 '역사침탈'을 방관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었다. 북한은 발해의 5경 중의 하나인 남경이 있던 곳이고 함남 신포시의 오매리절터 등 많은 발해유적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등에 대해서는 이미 논리적 기반을 구축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국이 발해사연구를 8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진행하기 시작한 것은 북한으로부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이다.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있는 동안 북한은 오히려 고구려·발해사 연구에 진력하여 많은 성과를 남기고 있었다.

▲함경남도 신포시의 발해유적 오매리절터 전경. 이곳에서는 구들이 있는 건물터와 발해의 전형적 기와들이 쏟아져 나왔다('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 오매리절터 북쪽1호 건물터 구들 유구.

어떤 이는 북한의 역사학이 교조적이고 국수적이기에 무시하거나 얕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발해 이래 요·금·고려·조선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공간적으로 그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는 곳은 바로 북한이고 60년대 쌓은 학문적 우월성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토론회가 끝난 후 북측은 남측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와 강서큰무덤 등을 우리들에게 공개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찍지 말라는 비디오 카메라를 몰래 찍다가 필름을 압수당하기까지 하였다.

2004년 7월 1일 드디어 고구려 고분벽화가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남한의 민관이 적극 후원한 덕택이었다. 이를 기념하여 9월에는 금강산에서 '고구려고분군 세계문화유산 등재기념 남북공동전시회·학술토론회'가 열려 고구려와 발해사 학자들을 대거 만나게 되었다. 작년에 작고하신 전 발해사연구실 채태형 실장도 만났는데 발해사의 중요성을 열변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북한에서마저 고구려 중심의 연구에 섭섭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관련기사

 

사진 설명:지난해 고인이 된 북한 발해사연구실장 채태형(왼쪽)과 함께한 필자(2004년 금강산 학술토론회에서).
북한의 발해사 연구는 두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독립국가인 황제국이라는 점을 밝히려는 것이었고,둘째는 조선사(한국사)의 정통성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에서 찾아,신라사 중심적인 남한 학계와 차별성을 두려는 것이다.

첫째의 문제는 남북한이 서로 공통점을 갖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특히 남북의 사상적 분단상황에서도 '민족적' 공감대를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이는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던 '홀한주도독부'로 간주하고 중국사의 일부로 보고 있는 것에 공동으로 대항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북한이 남쪽의 통설인 '통일신라'를 부정하면서 '후기신라'로 규정하고 발해를 앞세우는 것은 현실적 장벽을 실감하게 하는 부분이다. 역사연구소 전영률 전소장은 1985년에 "(신라를 통일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상 발해를 조선력사에서 떼내려는 것이며 '신라중심설'과 '신라정통설'을 내세움으로써 남조선 괴뢰들의 매국배족적인 '북진통일론'에 그 어떤 력사적 근거를 제공하려는 어용행위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고 통렬히 비판한 사실들이 이러한 점을 잘 반영한다.

 

 

[잃어버린 발해사를 찾아] <9> 발해의 자존과 슬픔이 있는 곳-정효공주묘
묘비에 '자주' 새기고,벽화에 '문화' 남기다
36세 요절 문왕의 넷째 딸 불교식 장례 고구려식 무덤
역법·풍습 등 시대상 확인 중경 위치 서고성설 뒷받침
'고구려 양식' '당나라 풍' 한국과 중국 유물해석 이견
2007/03/10 020면 16:14:40   프린터 출력

사진 설명:무사(武士),시위(侍衛),내시(內侍),악사 등 12명의 인물 벽화가 있는 정효공주묘 무덤 안칸 동벽도('조선유적유물도감'에서)
"그녀는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부르는 것 같았고,경대(鏡臺)에서 한 쌍의 방울새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 아름다운 여인은 대조영의 손자이자 발해 제3대 문왕의 넷째 딸 정효(貞孝)공주로서 이 내용은 그녀의 묘비 중의 일부이다.

정효는 죽은 후에 붙여지는 이름인 시호로서 그녀는 757년 즉 문왕 대흥(大興) 21년에 태어나 대흥 56년 3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버지인 문왕은 발해에서 가장 장수한 '황상(皇上)'이었다.

정효공주묘는 지금의 중국 길림성 화룡현(和龍縣) 용수향(龍水鄕) 용해촌(龍海村) 용두산(龍頭山)에 위치한 유적으로 1980년 10월에 발견되었다(이곳은 발해 5경 중 중경에 해당되는 곳이다). 문화혁명 때 소꼴을 먹이던 학생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 무덤은 연변박물관에 의해 긴급 발굴되었는데,이 무덤에서 묘비가 발견되어 그 주인공이 둔화(敦化) 육정산(六頂山)에 있는 문왕의 둘째딸인 정혜공주의 동생 즉 문왕의 넷째 딸임이 밝혀졌다. 높이 106㎝,너비 58㎝,두께 26㎝의 해서체로 음각된 이 비문은 18행으로 모두 728자가 선명하여,정혜공주묘비에서 판독하지 못하였던 부분을 이를 통해서 대부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무덤 바로 위에는 벽돌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불교식 장례를 치렀던 것으로 추측하며 탑 아래 지하에는 무덤칸이 있다. 무덤길을 따라 내려간 곳에 만들어진 무덤칸은 벽돌과 돌로 쌓았으며 천장은 길다란 돌을 계단식으로 쌓았는데 이것은 공간을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고구려식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칸의 벽면에는 벽화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는데,이를 통해 발해인들의 생활상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하였다.

무덤길과 동,서,북쪽 벽에 그려진 12명의 인물은 무사(武士),시위(侍衛),내시(內侍),악사 등이다. 사후(死後) 세계에서도 공주를 모신다고 상상한 이들의 그림들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무사들이 집을 지키며 몸종들이 시중을 들고 악사들이 노래를 연주하여 즐겁게 하며 시종들이 일산(日傘)을 받쳐 햇볕을 가려 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당시의 미녀상인 통통한 얼굴을 한 여인들이 시종을 들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 무덤과 벽화를 가지고 한중 학자들 간의 주장이 갈려 있다. 중국은 벽돌을 쓰는 무덤 양식이나 통통한 얼굴의 회화양식은 모두가 전형적인 당나라풍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에 비해,한국 특히 북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것의 고구려적 요인을 강조하는 것이 다르다. 즉 벽돌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무덤 양식은 고구려의 것을 이어받고 있으며 회화에서 유행을 따르기도 하지만 벽화를 그리는 풍속은 역시 고구려적이라고 주장한다.

유물들은 도굴되어 거의 없어졌지만 무덤 형태는 완벽했고,벽화 역시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었기에 자료로 활용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도자기 인형 2점,정효공주와 그 남편의 것으로 보이는 뼈,도금한 청동장식물 조각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 정효공주묘 개념도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정효공주묘지병서(貞孝公主墓誌幷序)'라는 묘지석은 발해사의 실체를 좀더 선명하게 하였다. 당과의 교류를 통해 불교가 크게 부흥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문왕의 존호(尊號)를 통해서 그 내용이 집약되어 있다.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서 대흥과 보력은 발해에서 사용하던 고유 연호이고,효감,금륜,성법은 불교용어이다. 특히 금륜은 불교의 전륜성왕 설화에서 나온 것으로 그 스스로 무력이 아닌 불법으로 이 세상을 통치할 이상적인 왕으로 자처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발해왕은 '황상(皇上)'을 자칭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들은 발해가 자주적이었다는 것으로 발해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는 중국의 주장과 전적으로 배치된다.

아울러 이 묘는 여러 폭의 벽화가 그려져 있어서 이로 인하여 미술사적으로나 복식사 및 문화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아 중국의 '국가급문물보호단위'의 반열에 놓이게 되었다. 특히 '당서' 등이 당나라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었다면 정효공주묘비는 전적으로 발해시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자주성과 문화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증거물이라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즉 이를 통해 알게 된 것은 문왕대의 정치상황,공주의 시호(諡號)와 생몰년대,발해 당시의 문자사용 예와 문학적 소양,서체와 장례법,당시의 역법(曆法)과 귀족들의 생활,풍습 등 다양한 부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에 발해사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효공주묘의 발견은 발해의 중경이 이곳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입증케 하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묘가 발견되기 이전에 발해 5경 중의 두 번째 수도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제기되어 있었다. 소밀성(蘇密城)이 있는 길림성 화전(樺甸)설과 육정산이 있는 둔화(敦化)설,그리고 화룡현의 서고성(西古城)설이 있었는데,결국 이 비문의 발견으로 서고성이 중경으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정혜와 정효공주의 묘비는 이들이 모두 출가하여 정혜공주는 아들 하나를,정효공주는 딸 하나를 두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고 남편마저도 먼저 사망하는 비운을 맞고 있던 문왕의 심정도 잘 나타내고 있다. 두 공주 모두 절개를 지키다 수절하다가 정혜공주는 40세인 777년에,정효공주는 36세인 792년에 사망하였으니 부왕의 슬픈 마음이 곧 화려한 공주들의 무덤이 있게 된 이유였다는 것이다.

"황상(皇上)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은 관청에 명하여 완비토록 하였다. 상여꾼의 목메어 우는 소리 발길 따라 머뭇거리고 수레 끄는 말의 슬피우는 소리 들판 따라 오르내리는 구나. 한나라 악읍(鄂邑) 공주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 넘고 당나라 평양(平陽) 공주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관련기사

 

사진 설명:외부인의 접근이 완전 차단되어 보호되고 있는 정효공주묘 보호각(1993년 모습).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 수리되어 있다.
정효공주묘는 최근 발해유적 중에서 가장 접근이 어려운 곳으로 정평이 나 있다.

90년대부터 벽화와 고분을 보존한다는 명분 아래 큰 보호각을 지어 놓았었다.

92년 한중수교 초창기에 답사했을 당시는 돌을 놓고 창문 사이로 내부 사진도 찍고 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창문도 없는 큰 현대식 보호각을 지어 놓고 어떤 사람도 접근을 못하게 하고 있다.

개천을 건너 올라가는 길목에는 경비 가옥과 사나운개가 지키고 있어 접근이 어렵다.

멀리 마을 초등학교에서 언덕 위의 보호각만 쳐다 보다 돌아서는 것이 다반사다.

공주묘 주변에는 여러 기의 석관묘 등이 널려 있는데 이를 발굴하여 무엇이 나왔다는 둥 소문만 무성하지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또한 용두산 고분군 주변에 '석국(石國)' 무덤구역도 있다.

이곳도 의미있는 곳이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구체적 자료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정효공주묘도 발굴은 연변박물관에서 하였지만 비문의 해독 등은 성(省) 박물관이 주도했다는 후문도 있어 중국의 학문이 국가 주도로 통제되며,일차적 해석이나 유물의 공개도 일단 중국적 시각에서 걸러지고 난 이후에 공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없지 않다.

그나마 어떤 것이라도 빠지지 않고 공개되기만 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없어지거나 고의적으로 누락하는 것들이 없나 의구심을 떨칠 수 없는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걱정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고구려와 발해사를 보아 온 중국당국(학계)의 기본적인 태도나 시각에 대한 걱정과 우려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